서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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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이천 서씨
출생
1921년[1] 7월 22일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면 남부리 300번지
(現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
사망
1989년 2월 2일 (향년 67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서울 강남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88호
학력
동경고등공업학교 (중퇴)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2
상훈
대통령표창 수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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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1921년 7월 22일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면 남부리(現 양산시 남부동) 300번지에서 태어났다.

동경고등공업학교 재학 중이던 1942년 1월에 김정태 등과 함께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에 항거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심한 뒤 동지 4명을 포섭했다. 그 뒤 요코하마시에서 강제징용되어 일본으로 온 조선인 노무자들을 대상으로 동지 포섭에 힘을 기울였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일본군 군수물자 생산시설을 파괴할 계획을 세운 뒤 노무자로 가장하고 요코하마시 항구 일대의 노무자 재활 합숙소 등지에서 투숙하면서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1943년 12월에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을 받은 뒤 1944년 12월 9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요코하마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해 귀국했다.

귀국 후 동래중학교 교사로 잠시 재직했다. 1949년 국민보도연맹이 창설되자 양산군 지도위원에 선임되었고, 1950년 1월 초에 청년방위대가 창설되자 양산군 편대장에 취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양산군 선거구에 출마해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무소속 정진근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52년 원외 자유당입당했고, 제2대 국회에서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을 겸임했다. 1953년 4월 14일 대한청년단 중앙상임집행위원으로서 남송학 등 31명과 함께 대한청년단 정비강화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시 류지원 단장 및 그 일파를 공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53년 6월 14일 자유당 경상남도당부가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54년 1월 29일 대한민족청년단(족청) 계열이라는 이유로 자유당 중앙당부로부터 연병호·여운홍·우문·김인선·박제환·김정두·태완선·이석기·윤재근 등과 함께 제명되었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실업계에 투신해 한일기업 사장을 역임했다. 1966년 서울특별시 노동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했다.

1989년 2월 2일 오후 5시 50분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서울 강남병원[2]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1989년 2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사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양산군[3])

[[무소속|
무소속
]]

5,340표 (24.72%)
당선 (1위)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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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7년 간행된 역대국회의원총람(歷代國會議員總覽)에는 1920년생으로 등재돼 있다.[2] 2004년 11월 서울특별시 서울의료원 강남분원으로 개편되었다.[3] 제14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