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긍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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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肯鍾
1897년 7월 23일 ~ 1951년 1월 24일 (향년 53세)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친일반민족행위자, 정치인. 본관은 전주(全州)[1], 호는 심강(心崗). 창씨명은 미야무라 카오루(宮村薰).


2. 생애[편집]


1897년 7월 23일 충청남도 전의군 군내면 읍내리(現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읍내리)에서 아버지 이범성(李範星)[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경성 수하동공립보통학교(現 서울청계초등학교), 1914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現 경기고등학교) 본과, 1917년 경성전수학교(現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를 각각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2년간 메이지대학 법과에서 공부한 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5년간 경제학을 연구하여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7년 5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했으며, 메이지대학 재학 중이던 1920년 6월 2.8 독립 선언으로 와해된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재건을 위해 후신 격인 학우회혁신동맹회(學友會革新同盟會)를 조직하여 변론부장에 선임되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재학 시절에는 흥사단에 가입해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은행에서 행원으로 근무하면서 1925년 9월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단체였던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 창립에 참여했고[3], 같은 해 10월 YMCA에서 주최한 제1회 학술강연회에 참여하여「經濟思想(경제사상)의 歷史的 變遷(역사적 변천)」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학생들에게 과학사상을 보급하고자 하는 등 1930년대 이전까지는 민족주의자로서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1927년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장 촉탁을 역임했고, 1928년부터 1930년까지 경성부립도서관 촉탁 및 사서로 근무했다. 1929년부터는 1930년까지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원 촉탁을 겸임하였으며, 1931년부터 1933년까지 경성법학전문학교 촉탁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34년부터는 화신백화점에서 중역을 맡았다.#

1934년 4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관변 조선어연구회'[4]의 신임 간사에 선임되었고, 이듬해인 1932년 4월에는 대표간사에 임명되었다. 또한 이전에 조선물산장려회의 주요 후원자였던 그는 1930년대 중반 유력 실업가들의 사교단체인 조선실업구락부(朝鮮實業俱樂部)[5]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국내의 흥사단이 와해되자 본격적으로 변절하여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국민정신총동원경성연맹의 상담역을 맡았다. 1939년 4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확대 개편 조직인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의 평의원을, 1941년에는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발기인으로도 활동하였다.

8.15 광복 이후 금융조합연합회 회장, 협동생명주식회사 회장, 상공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임기 중이던 1951년 1월 24일 사망하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출판 부문에 선정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연기군[6]

[[무소속|
무소속
]]

9,202표 (26.51%)
당선 (1위)
초선[7]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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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평대군파 18세손 종(鍾) 항렬. 아버지 이범생(李範生)은 17세손 범(範) 항렬.[2] 이명 이범생(李範生).[3] 백남훈·백남운·백관수·안재홍·김준연·최원순(崔元淳)·한위건(韓偉健)·최두선·조병옥·홍명희·유억겸·이순탁(李順鐸)·김기전 등이 이 단체 창립에 참여하였다.[4]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된 조선어학회와는 다른 단체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조선어학회는 1931년 조선어연구회에서 조선어학회로 개칭했다.[5] 표면상의 설립 취지 자체는 친일은 아니었지만, 회장이 이완용의 외조카 한상룡(韓相龍)이었던 것을 비롯, 윤치호·최남선·김연수·박흥식·박승직 등 친일파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실제 설립 취지 또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의 소위 문화정치를 기반으로 한 친일세력 육성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6] 제3선거구[7] 1951. 1. 24.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