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두리/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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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차두리의 국가대표 경력을 서술하는 문서이다.


2. 요약[편집]


파일:external/www.starseoultv.com/310232_73584_1832.jpg

박지성, 이영표와 함께 역대 한국 선수 중 가장 화려한 국가대표 커리어를 가진 선수.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4위[1]에 올랐던 2002년과 16강(15위)에 올랐던 2010년, 준우승을 차지한 2015년 아시안컵에 모두 출전한 선수는 차두리가 유일하다. 특히 2010년 월드컵과 2015년 아시안컵에선 핵심 멤버였다. 이는 아버지 차범근도 못 해낸 업적이다.[2]

월드컵 2회(2002, 2010) 출전과 센추리 클럽 가입, 한국 최초 월드컵 원정 승리란 타이틀이 있는[3] 박지성, 이영표가 아니라면 차두리의 커리어에 견줄 사람이 없다. 좀 더 빨리 수비수로 전향하거나 처음부터 수비수였다면 월드컵 최초 원정 승리를 거둔 독일 월드컵에도 참가하고 센추리 클럽에도 가입할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


3. 히딩크호 (2001.1~2002.6)[편집]


아버지 차범근의 모교인 고려대학교 재학 중이던 2001년 국가대표팀과 고려대와의 연습 경기에 출전한 차두리를 지켜본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어 히딩크호에 첫 승선했다. 그 후, 월드컵 대표팀의 소집 명단에 꾸준히 들기 시작하면서 11월 8일 세네갈과의 친선 경기에 출전하면서 A매치에 데뷔했고, 2002년 4월 코스타리카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첫 골을 넣었다.


3.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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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선발되었으나 주전으로 사용되지 않고 서브 멤버로 일부 경기에 출전했다. 32강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 전에는 89분에 교체 투입되어 잠깐 경기장을 밟았고, 이후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교체 투입되었다. 설기현이 동점골을 넣은 직후에 공을 받아 정석과도 같은 오버헤드킥을 찼는데...들어가지 않았다.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워낙 근거리에서 수비수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강하게 제대로 오버헤드킥이 들어갔지만, 이게 부폰 정면으로 갔다. 코스가 좋았으면 손도 못쓰고 들어갔을 찬스였다. 여담이지만 저 때 차범근 감독은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 때 들어가서 영웅 대접을 받아 연습을 소홀히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인데, 그래도 골로 연결되지 못한 건 아쉬웠다고.

4강전 독일전에서 부상당한 안정환과 설기현 대신 이천수와 함께 선발로 출전했다. 우수한 체력을 바탕으로 활발히 뛰어줬으나 발락의 골로 0대1 패배하고 만다.

3, 4위전인 터키전에서는 교체로 출전하여 송종국의 마지막 만회골에 기여했다. 송종국이 찬 중거리 슛이 차두리의 엉덩이에 맞고 스치며 굴절된 상태로 들어가 골이 된 것. 굴절되지 않았다면 골키퍼가 선방을 할 수도 있었기에 사실 차두리가 일부러 세리머니 했으면 차두리의 골로도 인정될 수 있었다고...어쨌든 송종국의 골로 인정. 팀은 2대3 패배.

여담으로 이을용이 월드컵 당시 멤버들의 성격을 얘기할 때 체격이 좋아서 몸싸움을 한 번 하다가 부상당하면 최소 1주일 이상의 전치를 받아야 해서 차두리를 피해 다녔다고 한다. 월드컵 개막 진전에 이영표가 차두리와의 충돌로 부상을 입어 1, 2차전을 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한 20m 왕복달리기 훈련을 했을 때도 151회로 제일 많이 뛰었다고 한다.[4]

독일 태생답게 독일어를 현지인 이상으로 능숙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히딩크 감독과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며, 히딩크의 여자친구인 엘리자베스와도 친남매처럼 지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감독과 선수들 사이에서 통역도 해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차두리의 당시 소속팀은 고려대학교였다. 즉, 아마추어 신분으로 월드컵에 나선 것이다. 당시 대표팀 선수 중에는 이천수도 프로 데뷔를 못했지만, 차두리와는 달리 이미 울산 현대와 2월에 계약했기 때문에 엄연히 프로 선수로서 출전했던 사례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차두리는 한국 축구 역사상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된 마지막 아마추어 선수가 되었다.


4. 코엘류호 (2003.1~2004.7)[편집]


코엘류호 출범 이후에도 차두리는 대표팀으로 꾸준히 들어갔다.


5. 본프레레호[편집]


2004년 여름 본프레레 감독이 부임하면서 피지컬과 스피드가 좋은 차두리는 더욱 중용되기 시작했다. 2004 아시안컵을 앞두고 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친선 경기에서 골을 기록했고, 아시안컵 본선에서는 쿠웨이트와의 조별리그에서 쐐기골을 넣어 4-0 대승을 기록했다. 다만, 베트남과의 독일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퇴장을 당해 숫적 열세 속에 2-1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5]

이후 2004년 12월 19일 부산에서 열린 독일과의 친선 경기에서 3-1 승리 때 MOM급 활약을 했다. 특유의 피지컬과 스피드로 독일 측면을 문자 그대로 박살내 버렸는데 독일 현지 캐스터가 '독일 2부 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1부 리그 출신 독일 선수들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저 선수가 어째서 2부에서 뛰는 거죠?'라고 했다고 한다. 특히 이 경기에서 차두리 발업질럿이라고 불리는 폭풍 질주를 했다. 수비 시 튕겨 나온 공을 받아서 우리 편 진영에서 상대 엔드라인까지 쭉 공을 몰고 달려가는데 속도가 느려지지 않는다!! 결국 마지막에 크로스는 못 올렸지만..[6][7] 그리고 이 경기에서 독일이 PK를 얻어 발락이 차는데 서로 독일어로 얘기하는 걸 들은 차두리가 PK를 찰 방향을 가리켰는데, 이운재가 막았다.[8]

파일:external/www.wikitree.co.kr/img_20150209164120_b55b4269.gif

전설의 3단 부스터 두리유 AMG에서 튜닝을 거친 Hyundai vs Mercedes-Benz

참고로 당시 차두리의 등번호 11번은 아버지 차범근의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아들이 아버지의 등번호를 이어받은 케이스로, 2023년 현재까지 차범근-차두리 부자가 유일하다.

6. 아드보카트호[편집]


2005년 9월 아드보카트 감독 부임 이후 11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의 친선 경기 출전을 제외하면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며 차출 횟수조차 줄어들더니 2006년 독일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탈락했다. 월드컵 본선에서는 차범근과 같이 MBC에서 해설을 맡았다.

참고로 당시 23인 국가대표팀 최종 명단에는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5명의 예비명단에 포함되었고, 일부 팬들은 당시 마찬가지로 23인 명단에 포함되지 못하고 예비명단으로 내려간 김병지와 함께 비운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 이에 당시 감독이었던 딕 아드보카트는 당시 차두리가 공격수와 수비수 사이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애매한 상황이었던지라 선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7. 베어벡호[편집]


핌 베어벡 감독 시기에는 가나와의 친선 경기를 제외하면 대표팀에 단 한 번도 소집되지 못했다. 당시 클럽에서의 주전 경쟁에서 밀린 탓도 있고, 윙포워드에서 풀백으로 전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포지션 경쟁력이 떨어졌다고 봐야할 듯.


8. 허정무호(2009.10~2010.6)[편집]


그 뒤로도 계속 대표팀과는 연이 없다가 남아공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지은 뒤인 2009년 가을부터 허정무 감독에게 다시금 기회를 부여받았다. 2009년 10월 세네갈과의 친선 경기에서 3년 만에 대표팀에 복귀하였고, 국내파와 해외파 통틀어 대표팀에서 가장 강력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유럽, 아프리카의 파워형 공격수들과 맞서야 하는 만큼 기존의 주전 라이트백인 오범석과의 주전 경쟁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옵션으로 주목받았다. 차두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오범석과 최효진과의 경쟁에서 앞서나가며 남아공 월드컵 최종 명단에 승선하였다. 오른쪽 풀백에는 오범석이 같이 뽑혔다.

특히 2010년 5월 25일 일본의 남아공 월드컵 출정식 겸 펼쳐진 한일전에서 일본 선수 3명을 피지컬로 모조리 튕겨 내버린 두리블[9]은 폭풍간지.# 본격 차두라리스크!


8.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편집]


1 이운재 · 2 오범석 · 3 김형일 · 4 조용형 · 5 김남일 · 6 김보경 · 7 박지성

C
· 8 김정우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이승렬 · 12 이영표 · 13 김재성 · 14 이정수 · 15 김동진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정성룡 · 19 염기훈 · 20 이동국 · 21 김영광 · 22 차두리 · 23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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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허정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정해성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태하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현태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등번호 22번을 받았다. 차두리 스스로 22번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자신이 이름(두리 = 둘 2)과 연관되며 프로포즈한 날짜, 결혼기념일, 부친 차범근의 생일이 22일이어서 라고 한다.콩드립이 하고 싶어진다. 콩콩![10][1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본선 B조 1차전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미친듯한 활동량과 막강한 피지컬로 공수 양면에서 두루 활약하며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리스의 주포인 장신 공격수 요르기오스 사마라스는 차두리에 막혀 경기장에서 완벽하게 지워졌다. 덧붙여 차두리가 볼을 잡고 쇄도하기 시작하자 당시 캐스터가 "폭풍질주가 시작됐습니다!"라는 멘트를 날려서 폭풍질주라는 새로운 별명이 추가되었다.폭풍질주!! 22번이 간다!!

파일:attachment/차두리/001.jpg

파일:attachment/차두리/002.png

본격 전쟁

그리스의 공격수 사마라스가 예수를 닮아서 위와 같은 짤도 나왔다. 여기서 차두리는 빡빡이라서 스님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론 개신교 신자이다. 예수로 묘사된 사마라스는 정교회 신자. 그러면 동서 대분열인가? 여담이지만 이 대회 이후 차두리와 사마라스는 같은 팀 동료가 되었다.

2차전 아르헨티나 전에서 오범석이 대신 나와 출전하지 못했다. 기술 축구인 남미를 상대하기엔 테크닉이 모자라서였다고 하는데, 아르헨티나전을 치른 장소가 고산지대라서[12] 그랬는지 한국 팀이 힘에서 밀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던지라 그의 강력한 플레이가 아쉽다는 주장도 있다. 허정무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리스전에서 이기긴 했지만 차두리의 플레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오범석을 출전시켰다고 밝혔는데,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3차전 나이지리아 전에서는 선발 출장했으나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구멍이 되었다. 첫 실점 당시 나이지리아의 우체를 놓치며 실점의 원인이 되었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수비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여 만약 16강 진출에 실패했다면 오범석에 버금가게 욕을 먹었을지도 몰랐지만 야쿠부의 도움과 김남일의 문답무용 슬라이딩 태클 덕분에 묻혔다. 애초에 16강을 진출했기에 나이지리아 전 부진한 선수들은 대체로 언급이 되지 않았고..

다행히 16강전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른쪽에서 활발한 오버래핑을 통해 공격 찬스를 계속 만들어주는 모습을 보였으나, 수비적인 면에선 계속해서 돌파를 허용하였다.


9. 조광래호 (2010.7~2011.12)[편집]


남아공 월드컵 이후 대표팀의 확고한 주전 풀백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조광래 감독 시절 내내 주전으로 활약했다.


9.1.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편집]


1 정성룡 · 2 최효진 · 3 황재원 · 4 조용형 · 5 곽태휘 · 6 이용래 · 7 박지성

C
· 8 윤빛가람
9 유병수 · 10 지동원 · 11 손흥민 · 12 이영표 · 13 구자철 · 14 이정수 · 15 홍정호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김보경 · 19 염기훈 · 20 김신욱 · 21 김용대 · 22 차두리 · 23 김진현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1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 font-size: 0.8em"
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광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태하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서정원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현태 · 파일:브라질 국기.svg 알렉산드레 가마


2011년 AFC 아시안컵 바레인과의 경기에서는 그야말로 차이콘이었다. 수비도 수비지만 오버래핑을 통한 공격 가담에, 그동안 셀틱 경기 안 보던 팬들에게는 '차두리 크로스가 언제 저렇게 좋아졌음?'이라는 평가까지 들을 정도로 멋진 활약을 펼쳤다. 결국 후반 51분 강력한 슛을 날려 골키퍼가 막아낸 골을 구자철이 집어넣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달리는 귀여운 세리모니를 선보였다. 배성재 캐스터는 차범근에게 언제 저렇게 개조했냐는 드립을 날렸지만 차범근의 대답은 없었다. 세리머니 단축키 누르고 계셨던 듯 그러나 그 이후 경기에서 자주 발 빠른 선수나 패싱 게임을 하는 팀의 선수들에게 자주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앞의 공로가 무색하게 엄청나게 까였다. 기본적으로 공격수 출신이라 수비 위치 선정이 썩 좋지 않았고, 빠르게 연계로 풀어오는 공격을 상대로 특히 어려워했다.


10. 최강희호[편집]


최강희 감독 시절에는 초반 최효진이 중용되고, 후반기에는 확고한 주전 없이 오범석, 김창수 등이 맡으면서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13]


11. 홍명보호[편집]


2014년 2월 19일, 홍명보 감독은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발표한 3월 5일 그리스와의 평가전 소집 명단에 차두리를 포함시켰다. 이는 약 2년 3개월만의 국가대표 선발이다. 축구팬들은 차두리가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전의 활약을 재현할지 관심을 받고 있으나, 고질적인 수비불안에 대한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부상으로 인해 결국 하차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의 마지막 히든카드로 유력해 보였으나 월드컵을 앞둔 최종 명단에서 홍명보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최종 명단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14][15] 이후 SBS의 월드컵 해설위원으로 발탁되어 브라질에 가게 되었다. 주로 아버지와 같이 해설하지만, 간혹 혼자 해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선수들 소개할 때 너무 긴장해서 독일어를 내뱉는데... 알제리전의 참패 이후 후배인 손흥민이 대성통곡하며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눈물을 쏟아내어 축구팬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선배들이 더 잘해서 발탁되어 후배들을 이끌어줬어야 되는데 후배들이 무거운 짐을 지게 한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12. 슈틸리케호(2014.8~2015.3)[편집]


2014년 8월 26일 이동국과 함께 대표팀에 재승선했다. 베네수엘라전, 우루과이전 모두 특유의 피지컬로 활약하며 자신을 기용하지 않은 홍명보 감독의 선택이 실수였음을 증명했다. 11월 14일 요르단전에서는 정확한 크로스로 한교원의 헤딩골에 기여하여 팀의 유일한 어시스트이자, 개인적으로는 슈틸리케호 승선 후 첫 공격 포인트를 챙기는데 성공했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접어들면서 2015년 아시안컵을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것을 내비쳤다.


12.1. 2015 AFC 아시안컵 호주[편집]


1 정성룡 · 2 김창수 · 3 김진수 · 4 김주영 · 5 곽태휘 · 6 박주호 · 7 손흥민 · 8 김민우
9 조영철 · 10 남태희 · 11 이근호 · 12 한교원 · 13 구자철 · 14 한국영 · 15 이명주 · 16 기성용

C

17 이청용 · 18 이정협 · 19 김영권 · 20 장현수 · 21 김승규 · 22 차두리 · 23 김진현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1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f; font-size: 0.8em"
감독 파일:독일 국기.svg 울리 슈틸리케
코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건하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신태용·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카를로스 아르무아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봉수


2015 AFC 아시안컵 호주 쿠웨이트전에서 남태희에게 크로스를 올려 어시스트를 기록하였고, 기성용과 함께 조별 리그 베스트11에 들어갔다. 전 경기를 풀타임으로 뛴 기성용과 달리 차두리는 쿠웨이트 전에서만 선발로 뛰었는데도 들어갔다.

8강 우즈베키스탄전에서는 다시 벤치에 있었으나 김창수와 교체되어 투입 후, 상대방의 측면을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8.gif

배성재 : "저런 선수가 왜 월드컵 때 해설을 하고 있었을까요?"

박문성 : "아, 그러게요. 허허허..."

그리고 연장 후반 14분 무렵 약 70m를 폭주하여 손흥민에게 추가골 버스를 태워줬다. 공 와쪄염 뿌우 골이 들어가자 배성재 캐스터가 그 분을 디스(?)했고 박문성 해설도 깨알같이 맞장구(?)를 쳤다 홍명보호박주호곽태휘는 벤치에 처박고 차두리는 해설이나 시켰으니 분명 수비가 쩌는 팀이었을 듯 더불어 이영표 해설은 이골의 지분 중 99%를 차두리에게 줘야 한다고 극찬했다. 사실 누가 봐도 차두리의 0.99골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긴 하다.

4강 이라크전에는 선발로 출전해 초반은 좀 안 좋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좋은 육탄방어와 몸싸움으로 결정적인 수비를 해내고 사이드를 위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팀은 2:0으로 승리하면서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가 아시안컵 결승이라는 큰 영광을 얻게 되었다. 과연 그 마지막 경기에서 대한민국의 55년 만의 우승이라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화려하게 국가대표에서 은퇴할 것인가. 경기를 중계하던 이영표 해설도 차두리의 마지막 경기가 멋지게 장식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예전 차두리가 자신이 2011년에 대표팀 은퇴할 때 포옹해주며 고마웠다고 격려해준 사실을 밝히며 이제는 차두리에게 자신이 정말 고마웠다고, 수고했다고, 마지막 결승전에서 차두리 다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쏟아낸 아시안컵 결승인 호주전에서 120분의 혈투 끝에 1-2로 석패하며 준우승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울고 있는 손흥민을 슈틸리케 감독과 함께 괜찮다고 달래주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호주의 시상식을 지켜보는 차두리의 눈에도 눈물은 고여 있었다...비록 우승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축하받을 수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승보다 더한 감동을 받았다. 경기 직후 네이버에는 실시간 검색어 1위로 '차두리 고마워'가 내내 올라있었다. 여러모로 결승 경기가 감동을 안겨다 주었지만, 차두리의 은퇴는 마지막 2002년 세대의 종언을 고하는 것이었고[16], 당시의 투혼을 2015년에 불어넣은 차두리의 모습은 아름다운 축구선수 그 자체였다. 대회 준우승.


13. 국가대표 은퇴[편집]


파일:차두리.jpg

아시안컵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결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은퇴할 것인가 논의하던 중,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선수는 마지막 경기를 뛰고 승리하면서 은퇴해야 한다는 배려로 2015년 3월 31일 열린 차두리의 마지막 A매치인 뉴질랜드전에 선발 출장하여 전반 40분 정도만 뛰고 교체되어 나가면서 차두리는 태극마크를 반납하게 되었다. 주장으로 선발 출전하였는데, 이 경기는 차두리가 주장으로 출전한 통산 4번째 A매치가 되었다.[17] 하프타임때 헌정 영상 상영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감사패 수여식, 붉은 악마 팬들과의 사진 촬영, 그의 영원한 보스이자 아버지 차범근과의 눈물겨운 포옹을 하는 이벤트가 팬들의 마음을 적셨다.
은퇴식 1부, 은퇴식 2부
마지막 경기 풀영상

파일:external/www.ekn.kr/art_1427845148.jpg

마지막 경기 후, 인터뷰에서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 실망을 준 팀이 똑같은 선수들이 이번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말을 하며 브라질 월드컵의 아쉬움과 아시안컵의 좋은 결과를 언급했다. 은퇴 다음날엔 먼저 은퇴한 박지성과 점심식사를 하였고 저녁엔 손석희JTBC 뉴스룸에 초대 되어 은퇴 인터뷰를 하였다.

아무튼 그의 은퇴로 대표팀 라이트백은 다시 고민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무엇보다 피지컬은 타고나야 하는데[18] 이 정도 피지컬을 가진 선수가 몇 년안에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번 대회에서 차두리와 함께 라이트백으로 나선 김창수는 어느덧 30줄로 다음 월드컵까지 폼을 유지한다는 보장이 없고, 월드클래스 공격수들에게 맞서기도 힘들다. 조광래와 최강희 시절 선발되었던 최효진, 오범석, 고요한, 신광훈은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아예 부진의 원흉이 되었다.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에서는 아예 장현수를 풀백으로 깜짝 기용하기도 했을 정도로 슈틸리케호의 오른쪽 풀백은 고민거리.

어쨌든 차두리가 은퇴한 지 3년이 넘어가는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이용이 육탄 방어를 보여주며 독일전 승리를 뒤에서 묵묵히 도우는 등 선전하고 있으나, 일부 축구팬들은 차두리의 피지컬 대체 자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다. 일단 벤투호에서는 이용이 여전히 훌륭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문제는 나이가 많아서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서 폼을 유지할 수 있을 지 문제이다. 일단 백업으로 김태환이 있긴 하다. 그리고 카타르월드컵 본선에서 김문환이 매우 좋은 활약을 보이며 주전 국가대표 오른쪽 풀백의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1] 3,4위전 최종 4위[2] 물론 차범근 세대는 월드컵 나가는 것조차 대단한 위엄일 시절이었고, 1986년 월드컵을 제외하곤 대한민국 대표팀이 본선에 나가지도 못했었다. 이런 환경적 차이 때문에 차범근의 기록은 1972년 아시안컵 준우승1986년 월드컵 출전이 끝이다. 대신 아시안게임 우승을 차범근이 달성했다.[3] 박지성은 안정환, 손흥민과 함께 한국인 월드컵 최다 골(3골) 기록도 가지고 있다.[4] 히딩크를 거처온 체력 좋다는 유럽 TOP급 선수들도 평균 120회정도라고 평가했으니 얼마나 차두리의 심폐지구력이 얼마나 뛰어난둘 알수있었던 부분이다.[5] 이 경기는 차두리가 처음으로 대표팀에서 아버지가 국가대표팀에서 쓰던 11번을 단 날이다.[6] 참고로 계속 옆에서 따라오던 선수가 그 유명한 필립 람이다.[7] 이 경기에서 중계를 맡았던 송재익 캐스터는 그 장면을 보고 아 차두리 기량 아주 많아졌는데요~라는 명 드립을 날렸고, 같이 중계를 하던 신문선 해설위원의 아주 파괴적인...이라는 멘트와 송재익 캐스터의 후속 멘트인 세 명을 제쳤어요까지 묶여서 하나의 밈처럼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8] 물론 이운재는 발락의 방향을 읽으려고 집중하는 중이라서 방향을 가리키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한다.[9] 드리블이란 공을 굴리면서 상대방 선수를 피해 상대 진영으로 공을 몰고 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두리블은 공을 굴리면서 상대방 선수를 튕겨내는 것. 만화 캡틴 츠바사에 꽤 나오고, 실로 한국 캐릭터이고 아버지인 차범근이 베이스인 차인천이란 캐릭터가 중전차 드리블이란 똑같은 기술을 구사한다![10] 여담이지만 그 전 독일 월드컵에서 대표팀의 오른쪽 풀백으로 출전한 송종국이 달았던 등번호도 22번이었다.[11] 이 때의 등번호 를 가지고 그 전의 11번 이던 차두리 와 비교해서 차미네이터 버전 2.2 라는 우스개도 있었다..[12] 아르헨티나는 전 팀이 풀리그로 치르는 월드컵 남미예선이나 예선이 없는 코파 아메리카 덕분에 에콰도르 등 몇몇 남미의 고산지대에서 뛴 경험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의외로 고산지대에서 경기할 기회가 적은 편이다.아시아에 고지대 지역이 어느정도 있는걸 감안하면 이는 미스터리.[13] 셀틱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이적 이후에 경기 외적인 이유로 슬럼프에 빠지면서 폼이 확 떨어졌고, 소속팀에서 출전도 제대로 못하던 때였다.[14] 바로 윗문단에 언급된대로, 차두리의 컨디션을 점검하기 위해 최종 명단을 결정하기 전 마지막 평가전인 그리스전에서 테스트할 생각으로 선발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하차했다. 감독 입장에서도 써보지 못한 선수를 월드컵에 데리고 간다는건 사실 말이 안되는 상황이기도 했다.[15] 물론, 홍명보감독의 박주영, 윤석영 등등 이해할 수 없는 선수 선발 때문에, 차두리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라는 음모론까지 제기되기도 한 상황이지만, 일단, 차두리를 선택하지 않은 건 원칙적으로는 감독의 올바른 선택이다. 하지만 홍명보호의 결말과 최종 엔트리의 논란, 스스로 원칙을 저버렸다는 홍명보의 발언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더라도 차두리급 되는 고참의 영향력과 리더쉽이 필요했던 경기들에서 너무 어렸던 홍명보호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16] 차두리 외에도 현역으로 뛰던 선수들은 몇 있었지만 이미 국가대표와는 거리가 멀어진 상황이었다. 즉, 2002년 당시를 경험한 국가대표 선수 세대의 마지막이 차두리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17] 이 경기 이전에 차두리는 2011년 AFC 아시안컵 3·4위전, 2014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3라운드 5차전, 2014년 친선경기에서 주장을 맡았다.[18] 물론 훈련을 통해 향상시킬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다만 차두리 정도로 사이즈, 파워, 스트렝스, 스테미너가 잘 어우러지려면 잘 타고나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극단적인 예를 들어 메시가 철지한 관리 하에 여러 피지컬적인 요소들을 향상시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키가 180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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