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 문씨(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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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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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국왕 · 역대 왕비 · 환조 ~ 연산군 후궁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고종의 후궁 보현당 귀인 정씨, 광화당 귀인 이씨, 복녕당 귀인 양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김씨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후궁이 되었으므로 조선의 후궁이었던 적이 없다.






조선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 | 淑儀 文氏

출생
1733년 추정
사망
1776년 9월 11일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소원
1753년 3월 12일 ~ 1771년
조선 숙의
1771년 ~ 1776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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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미상
부모
부모님[1]
형제자매
오빠 - 문성국(文聖國)
배우자
영조
자녀
슬하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화령옹주(和寧翁主, 1753 ~ 1821)
차녀 -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 ~ 1772)

봉작
소원(昭嫒) → 숙의(淑儀)


1. 개요
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으로
2.2. 부자(父子)의 불화를 부추기다
2.3. 몰락
3. 평가
4. 자녀
5.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조선 영조후궁으로 주로 문녀(文女)라고 불린다. 소생으론 화령옹주화길옹주가 있다.


2. 생애[편집]



2.1. 궁녀에서 후궁으로[편집]


영조의 맏아드님이신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궁이 죽었는데, 영조께서 효부를 잃으시고 애통하시어 상례에 친히 납시어 곡진히 정성을 다하시니라. 그런데 그곳에 소위 문녀(文女)라는 시녀나인이 있으니, 별감 문성국의 동생이라.

한중록

문씨는 본래 영조의 서장남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 조씨를 모시는 궁녀였다. 그런데 현빈 조씨의 장례를 치를 때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영조는 현빈 조씨가 지내던 창경궁 건극당 아래의 고서헌이라는 전각을 문씨에게 주어 살게 했다고 한다. 아끼던 며느리의 상중에 그 휘하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는 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 아니었지만, 영조는 한번 총애하기 시작한 사람에겐 물불 가리지 않고 특혜를 주었던 듯 하다.[1]

그러나 영조가 문씨를 정4품 소원으로 책봉할 때 승지 윤광의가 어명을 받들지 않자 다른 승지를 시킨 일이나,[2] "그 남매가(문씨와 그녀의 오빠 문성국) 아들을 못 낳아도 다른 자식이라도 들여서 아들을 낳았노라 하려 한다", "그 어미는 이 되었다가 딸의 해산에 환속하여 들어왔다" 등 괴이한 말이 낭자하였는데 이는 그만큼 당시에 문씨가 논란의 중심이었다는 증거도 된다.


2.2. 부자(父子)의 불화를 부추기다[편집]


10대 후반이었던 세자가 아버지형수의 장례식 중에 젊은 궁녀후궁으로 들이는 걸 좋게 생각했을 리도 없거니와[3][4] 문씨의 처신도 올바르지 않았다.

한중록》에 따르면 문씨의 오빠 문성국은 세자의 처소인 동궁전 별감들과 내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별감들은 동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듣는 족족 숙의 문씨에게 알려주었고, 문씨는 그 이야기를 그대로 영조한테 일러바치며 부자간의 사이를 악화시켰다.

영조께서 모르실 때도 의심하셨는데 날마다 들으시니 불쾌하신 마음에 부자 사이는 갈수록 갑갑해지니라. 국운이 불행하여 요녀(妖女)와 간적(奸賊)까지 나니 섧도다.

한중록

또한 정조는 즉위하자 "옛날 창경궁 낙선당에서 일어난 화재 원인도 문성국 때문"이라고 말했다.[5]창경궁 낙선당에서 일어난 화재란 과거에 낙선당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영조는 이것도 사도세자의 잘못이라고 크게 꾸중했고, 잘못도 없이 불똥을 맞은 사도세자가 울분이 폭발해 저승전 앞뜰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 시도까지 했던 사건을 말한다. 정조의 언급은 문씨 남매가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기 위해 일부러 화재를 일으켰다는 뜻이다.

숙의 문씨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대들었다가 노한 대왕대비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은 전력도 있었다. 그것도 사도세자가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았다. 아무리 문씨가 영조의 총애를 받았어도 이는 도의적으로나 예법상으로나 내명부의 법도와 위계질서를 어긴 무개념 짓이었다. 문씨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품계도 높은 정1품 빈이자 세자의 생모인 영빈은 내명부에서 입지가 전혀 다르기에 인원왕후가 왕실의 어른으로서 나선 것이다.[6][7][8] 그 후 영조가 삐졌는지 인원왕후에게 "나 양위하려는데 OK해 주시죠" 그리 말한 것을 인원왕후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러쇼 했던 것[9]이 영조의 양위 쇼로 번지고, 인원왕후는 자기가 귀가 먹어 잘못 대답한 죄라며 아래 거처로 이사가는 등 모자 간 기싸움까지 났다고 한다. 영조로서는 젊은 첩을 그렇게 팼다고 나서서 따지긴 창피한 걸 아니까 어떻게든 티를 내고 싶었던 모양.

"사가에서 몰래 사내아이를 들여와 왕자라고 속이려 했으나 영의정 이종성에게 발각되어 무산되었다"는 야사도 있다.[10]

2.3. 몰락[편집]


문씨 남매는 영조의 생전에는 이렇게 위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영조가 승하하자 말 그대로 화무십일홍의 처지로 몰락하고 말았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그동안 문씨가 저질러온 죄악에 대해 포고했고, 문씨의 일가친척들은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전락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문씨 본인은 사도세자를 무고했다는 혐의로 유배 당한 뒤 끝내 사약을 받아 사망했다. 당시 실록을 보면 조정의 중론은 거의 대부분 문녀를 하루라도 빨리 사형시키자는 것이 중론이고 그녀의 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문씨의 어머니는 제주도의 관노비가 되고, 오빠 문성국도 노적(孥籍)[11]에 오르고 가산을 적몰당했다. 문성국의 아들 문경행(문씨의 조카)은 유배, 나중에 성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가 발견된 문성국의 처남 박도오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문씨의 장녀 화령옹주의 남편 청성위 심능건은 문씨의 집을 마음대로 처분했다고 처벌을 받았고,[12] 5년 전 일찍 요절한 화길옹주의 장례에 10만 냥이나 지출한 일도 화두에 올랐다.

아예 숙의 문씨의 두 딸 화령옹주화길옹주의 작위를 박탈해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라왔는데, 정조는 "두 옹주는 영조의 골육이며 문씨가 흉계를 꾸밀 때는 강보에 싸인 아기였을 뿐"이라며 감싸주었다.[13] 하지만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정조가 그냥 놔둔 것일 뿐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99% 아기고 자시고 간에 사약으로 죽여 없앴을 것이다. 당장 자신의 권좌에는 아무 위협이 되진 않는다 하더라도 제2의 수양대군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14]이다.

그 덕에 화령옹주는 순조 시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화유옹주가 사망하자 "선조의 옹주 가운데 궁중을 출입한 사람은 단지 이 옹주 하나 뿐이었는데" 라고 말하는데,[15] 이를 토대로 봤을 때 아마도 화령옹주는 궁에 출입하지도 못하고 왕녀로서 제대로 된 예우는 받지 못한 듯 하다.


3. 평가[편집]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와는 왕의 총애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굴었으며 뒷배가 되어주던 왕이 승하하자마자, 그동안의 악행이 폭로되어 사사당하고 자식들도 연좌제로 인해 작위를 빼앗길 뻔했던 것 등이 매우 닮았다.

다만 이에 대해 숙의 문씨를 일종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해석도 있다. 문씨의 행적이 영 좋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사도세자를 참소했다는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임오화변 문서에 나오듯이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일개 후궁이나, 신하들이 거짓으로 모함하는 수준으로는 절대 생길 수 없었다. 후대부터 현재까지 학자들도 이 사건의 근본은 사도세자와 영조 두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할 당시엔 임오화변이란 거대한 사건의 후폭풍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고 희생양을 만들어서라도 왕실과 조정 내 혼란을 무마시켜야 했다. 노론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던 정조는 노론 주류와 큰 연관이 없는 문씨를 공격해서 그들을 안심시켜야 했고, 노론 입장에서도 문씨가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임오화변의 책임에서 벗어나는데 유리했다. 게다가 궁녀 출신에 선왕의 일개 후궁에 불과한 문씨에겐 마땅한 권력과 지지세력도 없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정조와 조정 전체가 문씨를 임오화변의 범인으로 몰아간 것. 같은 예로 김상로가 있는데, 그는 영조가 문씨 남매와 함께 사도세자를 모함한 인물로 언급한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김상로는 이전부터 사도세자를 옹호했고 임오화변 당시에는 이 문제 때문에 파직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정조가 즉위했을 때는 이미 김상로는 사망했으므로 관작을 추탈하고 가족들을 유배형에 처하는 것으로 끝났다. 김상로가 한 때 노론의 영수이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김상로 집안을 제외한 다른 노론 인사들의 처벌은 없었다.

결론을 내리면 숙의 문씨와 김상로를 희생양으로 삼은 대가로 정조와 노론은 임오화변의 원한을 끝내고 상호협력할 수 있게 된 것.

4. 자녀[편집]



5. 창작물에서[편집]


  • 조선왕조 오백년 - 김혜선. 김혜선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작품이다. 여기에서는 사실상 영조를 꼬드겨서 좌지우지하는가 하면 같은 시기에 임신한 다른 산모의 아들을 궁으로 몰래 들여와 자신이 왕자를 낳은 것처럼 조작하려다가 실패하는 이야기도 나온다.[16]

  • 대왕의 길 - 윤손하. 어려운 집안 형편에 궁녀로 들어간다. 역사대로 현빈 조씨 궁에서 침방 나인을 한다. 꾀가 많아서 나인 시절부터 상궁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17] 영조와 사도세자간의 수상한 기운을 느끼고 한량인 자기 오라버니에게 돈을 쥐어 주고 궁궐 별감들과 어울리라고 이야기하며 정보 수집에 애를 쓴다. 현빈 조씨가 사망하자 찾아온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는다.[18]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된 후로 계속 영조의 총애를 입었고,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질한다. 바라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둘 낳자 외부에서 남의 사내 아기를 몰래 데려 오려고 한다. 결국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뒤주에 못이 많이 박혀 뽑느라 장례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자, "못 뽑는 수고는 왜 하누? 뒤주채 묻으라지."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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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출신으로 영조의 승은을 입고 회임을 한다. 영조의 총애가 대단해서 위세가 대단하다. 정성왕후환갑에 대해 영조가 별 말이 없자, 이에 대해 영조를 두둔하는 척하며 영빈 이씨를 나무랐다가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는다. 그런데 그걸 안 영조가 등판해서 후궁 하나 제 맘대로 못한다고 양위 선언을 해 버렸고, 그걸 또 인원왕후가 "윤허하오~"하고 쿨하게 받아들여서(...) 한바탕 난리가 난다. 나중에 딸을 출산하면서[19] 영조의 총애도 사라지고 기세등등하던 위세도 꺾인다.[20]#


  •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영조가 사망한 후 정조에 의해 폐출되며 궐 밖으로 쫒겨나갈 때 정순왕후와 자신의 태생적인 신분 차이에 대해 한탄하고 결국 사약을 받고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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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조는 형수인 왕대비 선의왕후의 상중에도 영빈 이씨를 봉작한 전례가 있다. 다만 이건 선의왕후가 기록에도 남을 정도로 영조와의 관계가 험악했던 탓도 있을 듯.#[2] 영조실록 79권, 영조 29년 2월 8일 갑오 4번째기사.#[3] 영조는 손자인 정조가 친형인 의소세손의 상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들 사도세자처럼 총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말이 안 되는 트집이었다. 정조의 탄생은 의소세손이 사망하고 6달 반 뒤의 일이었으므로,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합궁은 의소세손의 사망보다 3달도 더 전이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상중에 며느리의 시녀와 관계를 맺은 것과, 첫째가 죽기 거의 3달 전에 부부가 관계를 맺은 것 중 뭐가 더 부적절한지는 뻔한 이야기다.[4] 정작 영조는 세자가 대비 인원왕후(영조의 계모, 사도세자의 할머니)의 나인 경빈 박씨를 후궁으로 들였을 때도 노발대발했는데 자기 기준으로만 자식들 차별, 편애가 심각했다.[5]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5월 13일 계미 2번째 기사.#[6] 내명부의 수장이자 중전인 정성왕후가 아닌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나선 이유는 영조가 정성왕후를 긴 시간 동안 왕비 대우조차 안 할 정도로 홀대하던 게 크다. 그런 영조의 성격상 정성왕후가 나섰다간 되려 영조가 정성왕후의 권위도 짓밟으면서까지 문씨를 대놓고 감쌀게 뻔하고 이렇게되면 인원왕후가 중시하는 내명부 질서와 법도가 크게 무너지게 된다. 이런 일을 아예 방지하기 위해 인원왕후는 영조의 큰 지원자이자 대왕대비인 자신만큼은 영조가 어찌할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정성왕후 대신 나선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영조는 인원왕후조차 예상 못할 정도로 치졸해서 이것을 핑계삼아 사도세자의 석고대죄까지 유도하고, 결국 사도세자를 아끼던 인원왕후가 백기를 들고 만다.[7] 다만 인원왕후경종에 대해서는 왕실의 어른으로서가 아닌 영조를 돕기 위해 간접적으로 노론의 편을 들었다. 이는 경종이 자신이 아닌 선대 왕비인 인현왕후의 자녀로 입적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8] 영빈 이씨에게 대들어 회초리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대천록》에서 나온다.[9] 사도(영화)에서는 영조가 그 나이에 생떼를 부리다시피 양위하겠다고 하자 인원왕후가 "어이구 그래 어디 주상 맘대로 해보십쇼"하는 태도로 OK 한 것으로 나온다.[10] 이게 그냥 카더라가 아닌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할 때 정조가 쓴 묘지문에도 어느정도 언급되니 반쯤 공인이긴 한데 문제는 이 묘지문이 워낙 실제역사와 다른점이 많아서 신뢰성을 보장할 수 없다.[11] 모역, 반역 등의 중죄에 대해 죄인은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의 적에 올리고 재산은 몰수하는 처벌을 말한다.[12]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윤5월 25일 정묘 1번째기사. #[13]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5월 14일 갑신 1번째기사. # [14] 순조가 즉위한 1800년에 순조 본인은 단종과 비슷하게 어린 나이인 10살이지만 화령옹주는 무려 47살이나 되었다.[15]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5월 21일 을유 1번째기사.#[16] 실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로 드라마 최초 방영 전에 연재된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17] 처치 곤란한 오라버니의 비단을 잘 처분해 주었다.[18] 이때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이야기를 적절히 이용한다. 빈소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갑자기 영조가 들이닥쳤고 바느길감을 감추면서 손도 감췄다. 영조가 뭘 감췄냐고 묻자 부끄러움을 숨겼다고 하니 영조가 무엇이 부끄럽냐고 물으니 "거친 손, 곱지 못한 손이 부끄러워 숨겼을 뿐"이라고 답한다. 드라마 상에서 숙빈 최씨가 어릴 적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 손이 못 생긴 걸로 나오고 영조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무척 큰데 이걸 이용한 것이다.[19] 영조가 사도세자를 나무랄 때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하는 장면이 있다. 혹 아들이 태어났다면 세자 등극까지는 어렵겠지만, 광해군 - 영창대군의 관계처럼, 최소한의 견제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미 영조에게 단단히 밉보여 정신적 학대를 받고 있던 사도세자 입장에서는 이복동생에게 편애가 쏠려서 마음고생을 더 했으면 더 했지 별 도움은 안 됐을 가능성이 높다.[20] KBS 단막극 드라마 붉은 달에서는 화완옹주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영조 입장에서는 후궁에서 딸이 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