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왕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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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 宣懿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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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조 왕대비
경순왕대비 | 敬純王大妃



파일:서울_의릉_정자각_원경_미술_2011년(출처___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청.jpg

의릉 전경
출생
1705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조선 한성부 숭교방 사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
사망
1730년 8월 1일(음력 6월 29일)
(향년 26세)
조선 한성부 경덕궁 어조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능묘
의릉(懿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
1718년 10월 25일 ~ 1720년 7월 5일
조선 왕비
1720년 7월 8일 ~ 1724년 9월 30일
조선 왕대비
1724년 10월 5일 ~ 1730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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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종 어씨
부모
부친 함원부원군 어유구
(咸原府院君 魚有龜, 1675 ~ 1740)
모친 완릉부부인 전주 이씨
(完陵府夫人 全州 李氏)
형제자매
2남 6녀 중 4녀
배우자
경종
자녀
없음
전호
경휘전(敬徽殿)
존호
경순(敬純)
휘호
효인혜목(孝仁惠睦)
시호
선의왕후(宣懿王后)


1. 개요
2. 생애
2.1. 노론계 세자빈
2.2. 늦은 왕비 책봉
2.3. 영조 즉위와 왕대비가 되다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조선 20대 경종의 왕비.


2. 생애[편집]



2.1. 노론계 세자빈[편집]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2]의 딸로서 어유구는 노론 영수 김창집의 제자이며 일가가 모두 노론계이다. 즉, 소론계의 배후를 갖던 경종과는 정치 성향이 반대인 집안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은 것.[3][4]

1718년 14세(만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5], 같은 해에 왕세자어의궁에서 친영례를 치르고, 경희궁 광명전에서 동뢰를 치렀다. # 다음 해인 1719년 9월에 관례를 올렸다.


2.2. 늦은 왕비 책봉[편집]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경종의 정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왕비 추봉과 선의왕후의 왕비 책봉을 동시에 주청한 것이 청나라에 트집 잡혀 1721년에야 고명을 받을 수 있었다.

경종 1년, 경종 부부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하여 노론 4대신[6]과 혜순왕대비 김씨(인원왕후)의 강력한 추진으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 결정되었을 때, 선의왕후의 나이는 갓 17세에 불과했다.[7][8] 일설에 따르면 선의왕후 어씨는 연잉군을 반대하여 종실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 탄, 혹은 밀풍군의 아들인 관석을 입양하려 하였으나[9] 경종의 급서로 실패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선의왕후가 이인좌 등에게 비밀리에 언문교서를 내렸는데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10] 바로 잡아라"는 하교를 내렸다고 전한다. 이인좌 등이 왕대비(선의왕후)의 밀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흔적은 영조 실록에 수차례 등장한다.

또한 효장세자 독살 의혹[11]의 배후로 추정되는데 당시 세자를 독살을 했다고 추정되는 궁인이 왕대비 어씨를 끌어들였다. 일개 궁녀가 국본인 왕세자를 독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당시 친국에서도 궁녀가 김상궁이 사주했다고 납초하였고 실록에도 김상궁은 동조(東朝)[12]를 섬기던 상궁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 영조가 이를 서둘러 차단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2.3. 영조 즉위와 왕대비가 되다[편집]


1724년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불과 20세의 나이로 왕대비가 되었다. 영조 2년에는 대비전이 있는 창덕궁이 아닌 경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창경궁 저승전(...)에서 지냈으며, 1730년 8월 12일(음력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겨우 26세로 조선의 역대 왕대비 중 가장 단명한 왕대비이다.[13]

선의왕후를 죽음으로 이끈 병명은 밝혀지진 않았으나 실록에서 왕후가 죽기 전날의 기록을 보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떨며 통곡을 하고 읍성[14]을 냈다고 한다. 또한 손으로 뭔가를 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영조가 의관들에게 그러한 증후를 본 적이 있는지 묻자 중관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선의왕후가 거처하던 저승전은 후에 세자궁으로 개조되어 사도세자의 처소가 되었으며 저승전 건너편에 위치했던 취선당[15]은 세자궁의 소주방으로 개조되었는데,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불길한 저승전에서 자라고 취선당에서 지은 밥을 먹은 탓이라 하였다. 사도세자의 이른 죽음을 저승전의 이름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풍수지리적인 이유를 빼고 보더라도 저승전이나 취선당이라는 장소가 영조에게 있어서는 어쨌든 생애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을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입지였다.[16]

저승전은 영조 24년(1746년) 월랑이 화재 피해를 입었고# 16년 뒤인 영조 40년(1764년) 건물 전체가 불에 타 사라졌다. 이후 신하들이 저승전을 다시 지을 것을 청했으나, 영조는 "조종의 검소한 덕을 본받아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저승전은 두 번 다시 재건되지 않았다.

3. 여담[편집]


  • 시동생인 영조와 사이가 두드러지게 좋지 않았다. 즉위 초부터 선의왕후는 남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조를 위한 예식과 절차를 거부하기 일쑤였고 영조는 왕대비(선의왕후)에게 올려지는 물품을 매번 삭감하여 국고나 백성에게 돌렸다. "왕대비(선의왕후)에게 진연을 올리자"는 홍치중의 주청이 있자 영조가 진노어린 비답을 내려 종실 전성군 이혼 등 종친부가 일제히 상소하여 진연 올리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조는 "나의 성의가 부족한 것 때문에 (선의왕후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며 비난과 책임을 회피하였고 이후 진연을 올리는 것이 정해지기는 하였지만 수 차례 연기되었다. 심지어 영조는 선의왕후의 국상 기간 중에[17] 후궁 귀인 이씨를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삼고 대대적인 잔치를 열어 도성 안팎은 물론 노론 대신들까지 탄식을 쏟아낼 정도였다.

  • 선의왕후가 사망한 이유는 지문에 기록된대로 오랜 지병을 앓아서가 아니라 죽기 약 4개월 전인 1730년 4월 15일에 발생했던 영조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어조당에 유폐되자 분개하여 식사를 거부한 끝에 아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 선의왕후의 외가를 살펴보면 의외의 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선의왕후의 외할아버지는 이하번이라는 인물인데 이하번의 4대조 (고조할아버지)가 영양군 이거이다. 봉군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왕족으로 정확히는 중종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데 영양군의 동생이 다름아닌 덕흥대원군, 바로 선조의 아버지다. 경종이 덕흥대원군의 7대손이고 선의왕후는 외가로 영양군의 6대손이니 경종과 선의왕후 부부는 촌수로 15촌 사이이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한중록 선의왕후.png
《조선왕조 500년 - 한중록》의 선의왕후
1회에서 영조(김성원)가 의릉(경종의 능)에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천해(정상철 분)에게 "선왕을 독살한 살인마!"란 소리를 듣고 심란해할 때 등장한다. 정성왕후(김애경)에게 의혹을 밝혀달라는 부탁을 받으나,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다.[18] 그래도 이후 영조가 경종 승하 당시의 정황을 백성들에게 알리려하자, 인원왕후(강부자)와 함께 영조를 찾아가 "주상의 결백함을 안다" 며 말린다. 그것으로 등장 끝.

파일:장희빈 선의왕후.jpg
《장희빈》의 선의왕후
마지막회에서 경종(이승형)의 즉위식 때 잠깐 나왔다.

  • 홍예진 - 2016년 SBS 드라마 《대박
파일:대박 선의왕후.jpg
《대박》의 선의왕후
효장세자(최승훈) 독살에 관여한 것으로 나온다. 이에 분노해 칼을 들고 대비전에 와서 왜 그랬냐고 묻는 영조(여진구)에게 "몰라서 그러시냐. (경종(현우)이 죽던 그 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이제야 제 고통을 아시겠느냐"고 말한다.[19] 그리고 어조당에 유폐당한다.

파일:해치 선의왕후.jpg
《해치》의 선의왕후
경종(한승현)을 굉장히 아끼고 사랑하나, 그만큼 경종 반대 세력들에게는 상당히 날을 세운 모습으로 나왔다. 경종이 용포를 입을 때 살 때문에 안맞자, 나인들이 비웃었는데 경종이 나간 후 크게 화를 내며 나인들을 꾸짖고 회초리를 들었다. 대비(남기애)가 이 모습을 보고 말리자 "이런 일까지 참으라고 하십니까? 나인들까지 전하를 우습게 봅니다. 전하에게 후사가 없어서 생긴 일 아닙니까. 다 힘없는 왕이라는 얘기지요.”라고 한탄했다. 경종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인 세제 이금(정일우)을 굉장히 눈엣가시로 여기며 경멸해한다. 경종이 위독할 당시 밀풍군(정문성)이 내의원 약재에 독을 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제가 탕약을 금지시킨 것을 두고, 세제가 경종이 빨리 죽길 바라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며 폭언을 했고 이후 세제를 굉장히 매섭게 쳐다보았다.

  • 복원가의 집》에서 경종과 함께 등장한다. 원귀가 밤마다 의릉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왕릉을 보호하는 결계 때문에 입구의 홍살문만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주인공 유성우와 중평군 일행이 의릉을 방문했을 때 봉분 위에 앉아 '언제 오려나?'만 반복해서 되뇌인다. 그러다가 유성우가 감정을 맡은 궁중 유물 중 왕실용 물건치고는 수수한 신발이 있어 선의왕후에게 가져가자 '은향에게 줄 선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중에 밝혀진 진실은, 의릉으로 들어오려던 원귀의 정체가 바로 은향이었다.
선의왕후가 입궁했을 때 경종의 측근들은 왕비를 감시할 목적으로 궁녀 은향을 심어두나, 선의왕후는 음모를 꾸미는 건 고사하고 뭘 해도 어설픈 허당이라 은향이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줬고 그런 은향이 고마웠던 선의왕후는 윗사람이 내리는 선물을 받아도 아랫사람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신발을 마련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와 선의왕후의 배려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은향은 함경도에 있는 부모를 만나고 온다며 궁궐을 떠나지만 배신을 눈치챈 경종의 측근들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된다. 이런 내막을 알지 못한 선의왕후는 은향을 기다리며 '언제 오려나?'를 연신 반복했던 것.
원귀가 된 은향이 느슨해진 결계를 넘어 의릉으로 들어오자 선의왕후는 '함경도까지 다녀오느라 오래 걸렸나보구나. 먼 길 갈 때 이걸 신으면 발이 아프지 않을 게다.'라고 말하며 신발을 건네주고, 은향은 원귀의 모습에서 정화되어 신발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성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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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캠퍼스가 있는 명륜동 일대이다.[2] 노론계열의 명유이자 호락논쟁에서 낙론을 이끌었던 어유봉은 어유구의 형이다[3] 아이러니하게도 딸 선의왕후는 소론으로 전향하면서 아예 영조의 철천지 원수이자 정적이 되었지만 아버지인 어유구는 그런 딸과 정반대로 일관되게 노론으로서 영조를 옹호했다. 이 때문인지 선의왕후가 왕대비가 된 이후에도 영조는 형식상 외척이나 다름없는 어유구에게 따로 벼슬을 내리려했다.[4] 참고로 어유구는 딸 선의왕후보다 10년 더 오래살아 1740년에 사망했고, 그 중간인 1735년에 영조에 의해 벼슬을 했다가 사퇴하였다.[5] 이때 본래는 18세~22세까지의 처녀를 간택하려고 했는데 이는 어떻게해서든 당시 30이 넘었던 경종과의 나이차를 최대한 좁히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조혼 풍습으로 13,14세가 되면 거의 다 결혼을 해버리는 까닭에 들어오는 간택단자가 매우 적어졌고 결국 범주에 드는 나이를 몇번이고 낮추어 당시 14세였던 선의왕후가 간택될수 있었다.[6] 이이명, 김창집, 이건명, 조태채[7] 이게 당장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게 그때 경종의 나이가 34세로 몸이 약하기는 해도 나이가 창창한 왕에게 후사를 보시라고 권하는 게 아니라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라고 하는 시점에서 경종이 앞으로 후사를 볼 수가 없다고 전제하고 일을 추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제 책봉 과정도 수렴청정 중도 아니고 경종 자신이 친정하는 상황인데도 굳이 대비에게 가서 "세제 책봉에 대해 대비께 동의를 받으시라"고 권하는 등, 심하게 말하면 경종이 당장 내일이라도 왕 노릇 그만둘 사람처럼 대한다. 당장 세제 책봉을 청에 알리러 갔을 때도 청에서 "왕이 아직 젊은데 왜 벌써 동생을 세제로 책봉한다는 거냐?"며 의아해 했고, 이때 조선 사신 이건명의 대답이란 "왕이 발기불능이라서 자식을 둘 수가 없다"라는, 군주로써의 경종은 물론 이균(李昀)이라는 인간 개인에 대해서도 대놓고 그 인격을 모욕하는 발언이었다. [8] 보충하자면 이것은 왕비인 선의왕후를 간접 모욕하는 것이기도 했다. 동서고금 왕비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후손을 생산하는 것인데 선의왕후는 아버지인 어유구부터가 강경 노론에 속해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경종의 왕비라는 이유로 아버지와 같은 편인 노론에게 자손 생산 능력이 없는 것으로 낙인이 찍혀 왕비로서의 존엄성을 훼손당한것이었다. 즉, 어처구니없게 뒤통수를 맞은셈이다. 선의왕후 입장에서는 왕비로서의 자리보전 자체도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고, 먼저 뒤통수를 당한 쪽이니 소론으로 전향할수 밖에 없었던 것.[9] 다만 이쪽도 딱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게 밀풍군은 경종과 촌수가 8촌으로 왕실에 자손이 없기로서니 엄연히 친동생이 있는 마당에 밀풍군 영입은 명분없는 행동이었고,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복권되었다고 하지만 잘못하면 예송논쟁마냥 효종의 정통성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 물론 양자가 된다는 건 아들이 되는 것이므로 아들이 동생보다 정통성에서 보다 우위에 서기는 한다.[10] 물론 '씨가 바뀌었다'는 말도 유전학적으로 이씨 종실의 왕족이 아닌 자가 왕이 되었다는 의미라기보다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즉 정통성이 부족한 자가 왕이 되었다는 의미로 보면 말은 된다.[11] 효장세자의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이다. 다만, 실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효장세자가 독살당했다고 추정은 해볼 수 있으나 결국은 사건이 유야무야되어 정확한 진상은 파악할 수 없다.[12] 대비의 처소를 가리켜서 동조라고 부른다.[13] 물론 선의왕후의 전후 배경상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연사했을 확률이 낮은것도 크다. 공교롭게도 왕대비 중에서 두번째로 단명한 사람은 선의왕후의 시조모인 명성왕후인데 명성왕후도 무당의 말만 듣고 한겨울에 얼음물 세례를 받아서 사망한걸 생각하면 역시 완전 자연사 했다고 보기엔 어렵다.(명성왕후의 사례까지 자연사했다고 보기 어려우면 자연사한 왕대비 중에 가장 단명한건 인순왕후이다.)[14] 눈물을 흘리며 우는 소리[15] 희빈 장씨가 살던 곳.[16] 선의왕후 어씨는 경종의 왕비로 시동생인 영조와의 사이가 결코 양호하지는 못했고, 희빈 장씨는 숙종에 의해 사사되었을 뿐 아니라 경종의 생모다.[17] 선의왕후의 사망날(1730년 8월 12일)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730년 11월 27일[18] "시신이 상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한다. 정성왕후는 "여름이라 그런 게 아니냐"고 하지만, 선의왕후는 "추석 지나고도 열흘 뒤의 일인데 날씨 탓을 할 수 있냐"고 반박한다.[19] 이 작품에서는 경종이 영조가 올린 게장과 생감을 먹은 후 사망한 것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