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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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계 입문 전
2. 종로 3선 국회의원
3. 유죄 확정 이후 공백기
4. 8년 만의 원내 복귀
5. 제20대 대선 출마: 컷오프



1. 정계 입문 전[편집]


1956년 9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내과의사인 아버지의 2남 2녀 중 셋째(아들 기준으로는 차남)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병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함경도에서 의사로 일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 1.4 후퇴 과정에서 월남하여 서울 종로구에 터를 잡았고, 그 곳에 병원을 차렸다. 참고로 6.25 전쟁 때는 육군 제3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일한 적도 있다. 어머니는 함경남도 단천시 출신으로, 평양시에 있다가 역시 월남했고, 박진의 부친과는 부산광역시에서 만나서 결혼했다. 현재는 양친 모두 고인이고, 둘 다 경기도 파주시의 동화경모공원에 매장돼 있다.

아버지는 아들도 본인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를 바랐고, 박진 본인도 원래는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고 싶었다. 원래는 서울덕수초등학교를 다녔다가 4학년 때 서울 은석국민학교전학을 갔다. 그리고 서울 남대문중학교 를 다니다 중퇴했다. 원래는 추첨을 통해 서울 경일중학교입학했지만, 학교 건물이 무허가라 재학 도중이던 중2때 학교가 문을 닫아서 남대문중으로 전학을 갔는데, 그 곳에서 선배들의 꾐에 빠져 담배를 즐겼다가 나중에 정신 차리고 학교를 자퇴했고, 대신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는 중앙고시학원을 다니며 검정고시 준비를 해 친구들보다 1년 빠른 1971년에 경기고에 입학했다. 참고로 경일중학교는 2004년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경기고등학교(70회)를 졸업했다. 동기들이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 김준규 전 검찰총장, 이진성 전 헌법재판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다. 원래는 의사가 되려고 했지만, 고2 때이던 1972년에 귀가해 온 부친이 가져온 한 영자신문에 실린 미-중 데탕트 기사를 읽으며 외교관의 꿈을 키웠고, 이에 부친은 섭섭해 했지만 모친은 아들의 꿈을 응원해 주었다. 또한 학교장을 5번이나 찾아가 문과로 바꾸겠다고 설득까지 했다.

경기고 졸업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74학번)을 졸업한 일명 KS라인 출신의 엘리트이다. 아버지의 공부 머리를 물려받아서 그런지 박진 본인 포함 4남매 모두 하나같이 공부를 잘 했는데, 현재는 세상을 떠난 형은 서울대 지질학과를 나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미국 보스턴 대학교 지질학과 교수를 지냈다. 누나는 서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했고, 여동생은 프랫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서 친구와 함께 듀엣을 결성해 타 학교로 가서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고교동창들이 아예 그룹사운드를 하자고 해서 '뱀파이어'라는 이름의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여기서 박진의 담당은 키보드였는데, 과의를 해서 번 돈으로 야마하 키보드를 구매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 대학생 그룹사운드 경연 대회에 나가 1등도 하는 등 제법 놀아도 봤다고 한다. 그 외에도 기타 연주와 노래 솜씨도 수준급이라고 한다. 더불어서 체육도 좋아해서 그런지 스쿠버 다이빙, 국궁 등 만능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1977년 제11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1978년 대학 졸업 후 외무부 사무관으로 1년간 근무했고, 1980년부터 1983년까지 해군사관후보생 과정을 거쳐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이 기간 중이던 1982년 6월 1일에 현재의 아내 조윤희 여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와는 1975년에 대학교 미팅 자리에서 처음 만났고, 아내는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으며, 남편과는 동갑이다.

이후 1983년, 국비유학생 7기로 선발되어 1985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 1993년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 안토니 컬리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D.Phil)를 취득하였다. # 명예학위로는 상명대학교 명예 행정학 박사학위가 있다.

1989년부터 1년간 킹스 칼리지 런던 연구원을 거쳐 1990년 뉴캐슬 대학교 정치학 조교수로 임용되어 3년간 근무했다.

1993년 2월부터 1996년 7월까지 문민정부 대통령비서실 해외담당 공보비서관을 지냈는데, 한국을 방문한 국빈과의 회담에서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빌 클린턴에게 김영삼 대통령의 좌우명 '대도무문'을 '고속도로에는 톨게이트가 없다(A freeway has no tollgate)'라고 번역해 준 것이나, 넬슨 만델라에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말을 '수탉의 목을 졸라도 동은 튼다(Strangle the rooster, still the dawn breaks)'라고 번역해 줘서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 낸 것은 꽤 유명한 일화이다. 1996년부터는 정무기획비서관을 지내며 1998년 정권교체가 될 때까지 근무했다.

청와대를 나온 뒤로는 1998년 김앤장 법률사무소 고문, 1999년 뉴욕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 LL.M.과정을 이수하고 2000년에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2001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공보특보를 맡으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2. 종로 3선 국회의원[편집]


우리나라에서 선거구로서의 종로구[1]의 위치는 그야말로 어마무시한데, 무려 그 종로구를 정치적 이해관계도 아니고 연고지로 인한 지역구로 10년간 삼은 전적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고령층에서 통하는 서울토박이(본인 포함 3대 이상)의 정의에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박진 본인은 종로에서 나고 자란 것이 맞지만 부친은 실향민 출신이기 때문이다. 내과의사였던 부친이 6.25 후부터 서울 혜화동로터리에 '박내과'를 운영하며 종로에 터를 잡았다.

전통적으로 호남은 민주당계 정당텃밭이고, 반대로 영남은 보수정당의 텃밭이기에 해당 지역 출신 후보들이 각각의 정당에 입당하여 쉽게 당선되는 일이 종로구에서 3번씩이나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쉽다. 물론 이런 일이 예전에도 아예 없던 것은 아니고,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태어나 7세 때부터 종로구에서 자란 윤보선이라는 선례가 있지만, 이 쪽은 지역적인 지지로만 당선되는 여느 지역구 정치인들과는 달리 범국민적인 지지가 있었던 거물급 정치인이었기에 경우가 조금 다르다.

박진의 후임 의원들이었던 정세균, 이낙연 모두 종로와는 크게 연관이 없었던 거물들이며, 종로의 현역 의원인 최재형 역시나 부총리급 헌법기관장인 감사원장, 대선 경선 후보 출신인 거물이다. 앞의 두 사람은 호남 출신이나, 최재형과 박진은 실향민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이낙연은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이전하기 전 혜화동에서 대학생활을 했으며, 최재형은 경기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 고교생활을 했기에 연고가 아주 없지는 않다.

다만 정세균, 이낙연, 최재형 모두 종로 선거에 나서기 직전에서야 주민등록을 종로로 옮겨오긴 했다. 또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종로구에 후보로 나선 다른 인물들도 종로와 연고나 정치적 기반이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황교안, 오세훈 등. 황교안도 경기고등학교가 종로에 있던 시절 고교생활을 했으므로 아예 연고가 없는 것은 아니며, 오세훈은 서울특별시장을 했으므로 서울 어느 지역구에 나가던 명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2002년 여름에 있었던 16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정인봉공직선거법 위반)에서 자신의 고향이자 대한민국 정치 1번지인 종로구에서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하였다. 이후 17대, 18대 총선에서도 승리하며 내리 3선을 했다. 정치 1번지라는 타이틀 때문에 여야 중진 정치인들은 물론 무소속 거물들도 대거 출마하는 종로에서 3선에 성공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16대에서는 공천 잡음 등으로 여당의 표가 갈라지며 어부지리로 당선됐다는 말도 나왔다. 유인태정흥진의 표가 분산되어 박진 승리라고 썼지만, 어차피 과반득표를 했으므로 큰 의미는 없다. 그러나 17대에서 여당(열린우리당) 김홍신과의 매치에서 승리, 18대 총선에서는 당시 야당의 대표이던 손학규와의 1:1 매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제16 ~ 18대 국회에서는 주로 국방위원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정보위원회 등 출신이 출신인지라 외교 안보 관련 상임위를 배정받았다. 18대 국회에서는 3선 의원으로서 통일외교안보통상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이 외에도 한국의원외교포럼 회장, 한영협회 회장, 국제민주연합 부의장 등을 맡아 해외 정치권과의 교류를 이끌기도 하였으며, 17대 대선 이후 이명박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외교통일안보분과위 간사를 맡기도 하였다.


3. 유죄 확정 이후 공백기[편집]


제18대 총선 당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을 받았고, 이후 박연차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수수 및 차명으로 기부한도 초과액를 받은 혐의기소되었다. 1심에서는 둘 다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2심과 3심에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는 무죄, 차명기부액 수수는 유죄로 벌금 80만원의 확정 판결을 받아 가까스로 의원직을 지켜냈다.

이로 인해 19대 총선에서는 불출마했다. 그리고 종로 지역구는 이동관, 조윤선 등이 경선을 벌이나 싶었지만 결국 민주통합당 정세균 의원이 차지하게 되었다. 민주당에서 거물인 정세균을 차출하자 새누리당 역시 거물인 홍사덕을 전략공천한다. 결국 정세균이 승리하고 1번 더 당선되며 국회의장까지 갔지만 홍사덕은 그대로 낙선하고 정치자금법까지 걸리면서 정계은퇴로 이어진다.

제20대 총선에서는 재출마 뜻을 굳히고 열심히 종로구 선거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경선 결과 오세훈에게 패하면서 또다시 출마가 무산되었다. 여담으로 오세훈과는 2006년에 서울시장 출마를 두고 맞붙었으나 경선 직전에 출마를 포기한 바가 있다. 즉 오세훈에게 두 번이나 밀려 출마하지 못한 셈이다.

이 8년간의 공백기 동안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유엔평화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아시아미래연구원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4. 8년 만의 원내 복귀[편집]


제21대 총선에서는 황교안 대표에게 종로구를 넘겨주고 서울 강남구 을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미래통합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상대는 당시 민주당의 현역 전현희 의원이다. 여담으로, 20대 총선 당시 종로구 경선에서 오세훈 후보를 가리켜 '오세훈은 강남스타일'이라고 발언했는데 실제로 오세훈은 16대 총선 때 강남구 을에서 당선된 바 있었다. 그리고 21대 총선에서는 본인이 강남에서 출마하게 되었다.

2020년 3월 28일 태구민 강남구 갑 후보자, 유경준 강남구 병 후보자와 함께 강남 어벤져스를 결성했다. 태구민은 통일·북한인권 전문가, 박진은 외교·안보전문가, 유경준은 경제전문가라고 한다. #

선거 결과 전현희 의원을 꺾고 승리하면서 원내 복귀에 성공하였다. 특히 기존의 보수 강세지역인 개포동에서는 70% 이상의 득표율로 압승했고, 지난 총선에서 김종훈이 패배했던 일원본동과 일원1동의 탈환에도 성공했다.

사실 김종훈이 강남구 을에서 패한 건 당시 개포2동이 재개발 중이여서 고소득 유권자가 빠져나간 것도 있지만, 상대 후보인 전현희 후보에 비해 강남구 을의 현안을 모르는 것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개포1동과 수서동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패배를 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박진 후보는 부유층이 유입된 개포1,2동은 물론, 일원1동과 일원본동에서도 승리를 거둔 바 있었기에 의미가 있었던 것, 표차를 감안하면 일원1동과 일원본동에서 만약 패했다면 개포1,2동에서 60%p 이상을 얻고도 전현희에게 석패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

미래통합당이 참패하는 와중에도 배현진과 함께 유이하게 서울에서 민주당 현역 의원을 꺾고 당선된지라 의미가 크다.

2020년 6월 15일, 상임위 배정에서 예상대로 외교통일위원회에 배정되었다. 6월 28일 대한민국의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섣부른 종전 선언은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서울 지역 4선 의원으로서 국민의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선출된 오세훈의 선거대책위원회에 공동위원장으로 합류했다. #


5. 제20대 대선 출마: 컷오프[편집]




대선 출마 선언

2021년 7월 13일 "문재인 정부 4년간 무너진 공정과 정의를 세우겠다"며 국민의힘 후보로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캐치프레이즈로 선진국형 외교안보대통령을 표방했다.

비전발표회와 3대 공약 PT 발표회에서 뛰어난 발표실력과 깔끔한 PT, 외교안보분야에서의 전문성을 보여주며 타 군소후보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다. 여러 모로 대기업 제품발표회 같다는 평가. 3대 공약 PT 질의응답 시간에 홍준표 후보의 질문을 받아 미중갈등 국면에서 중국과 미국 상대 외교 비전을 설명했다. 홍준표 후보는 "엑설런트합니다"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인지도 부족으로 1차 컷오프에서부터 탈락했다. 이후 윤석열 후보 지지 선언을 하였고 2021년 10월 24일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 김태호 의원, 유정복 전 인천광역시장과 함께 윤석열 대선캠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합류했다.


6. 외교부장관[편집]


2022년 4월 13일, 윤석열 정부의 첫 외교부장관으로 지명됐다. # 그러나 아래 문단에 서술된 것처럼 각종 논란 및 의혹이 조명되며 부적격 기류가 감지되었다. 특히 장남의 해외 도박사이트 운영사 임원 근무 사실과 관련하여 비판이 거세다. 박진은 이에 대해 거짓 해명을 일삼다 반박당하기를 반복했고, 급기야 5월 2일에 열린 외교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는 "온라인 포커도 넓게 보면 게임"이라는 황당한 발언을 했다. 결국 여야는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청문회를 마쳤다. #[2]

2022년 5월 7일 윤석열 당선인은 박진을 비롯하여 국회에서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은 장관 후보자 6명(원희룡(국토교통부), 이상민(행정안전부), 정호영(보건복지부), 박보균(문화체육관광부), 이종섭(국방부))에 대해 취임 전날인 5월 9일까지 보고서를 보내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이에 대해 사실상 임명 강행 절차에 들어갔다는 해석이 나온다.#

2022년 5월 12일 윤석열 대통령은 2022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박진 임명을 강행했다. #

2022년 6월 13일부터 6월 16일까지 미국을 방문해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 등을 접견하고 경제 안보 관련 현안을 논의했다.

이후 조건 없는 남북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 대통령을 3명이나 배출했으며, 대권주자급 거물들도 많이 배출했다.[2] 국회의원의 경우 국회법에 따라 대통령을 제외한 국무위원은 겸직이 가능하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 또한 국회의원일 때 총리를 한 바 있는데 이럴 경우 고위직 공무원을 두 가지 하는 셈이라 일이 엄청 늘어나 한 쪽에만 집중하지 못하여 실제로 추미애처럼 장관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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