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드 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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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말리아의 전 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 아프리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악명이 자자하며, 소말리아를 오늘날과 같은 파탄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리고 바레는 소말리아 대통령 중 소말리아 전역을 제대로 통치해본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한데, 바레의 축출 이후 나라의 행정력이 무너지면서[6] 부족/지역주의에 기반한 무장 군벌단체들과 알샤바브 등 알카에다와 연계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 세력들이 할거하고, 북부의 소말릴란드는 아예 사실상 독립국가로 떨어져나가면서 국토 전체를 정상적으로 통치해본 사람이 없다.
2. 집권[편집]
2.1. 집권 전[편집]
대략적으로 1910년대에[7] 당시에는 에티오피아 제국의 영토이던 오가덴에 있는 마을 실라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가딘족이었고, 아버지는 다롯족의 일파 중 하나인 마레한족이었다.
바레의 어릴 적에 대해서는 자료도 매우 부족할 뿐더러 앞뒤가 안맞는 자료들이 많은데, 아버지를 여읜 때가 10살 아니면 6살이라고 상충되는 것은 기본에 코란 학교에 다녔다는 증언과 초등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증언이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고 고아가 됐단 것만큼은 확실하며, 학자들은 바레의 잔인성은 이러한 불우한 어린 시절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8]
어쨌든 어린 바레는 양치기로 살아오다가 1936년에 자프티에(Zaptié)[9] 에 보조원으로서 입대한 것을 시작으로 1941년에는 이탈리아군을 무찌른 영국군 산하의 경찰에 입대한 후 영국령 케냐에서 훈련을 받고는 영국 식민지 경찰의 특별 지부에 합류했고, 모가디슈로 가서 중등교육을 이수받은 후 토착민으로서 경찰에서 가능한 가장 높은 직위인 경감에 도달했다.
1952년부터는 이탈리아 사관학교로 유학을 가 정치와 행정을 공부했으며, 1954년에 수석으로 학위를 마쳤을 때에는 중위로 승진했고, 1955년에는 모가디슈의 경찰서장직이 되었으며,[10] 1958년에는 이탈리아 정책의 전무를 포함한 보안군의 수장, 소령에 등극한다. 1960년에 소말리아가 독립한 후에는 소말리아 육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1965년에는 육군 사령관에 등극한다.
1960년대 초, 합동 훈련에서 소련 장교들과 시간을 보낸 후 바레는 마르크스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고는 사회주의 정부와 소말리아 민족주의의 신봉자가 되었다. 당시 부패와 족벌주의[11] 가 만연했던 소말리아에서[12] 바레 준장이 이끌던 군대는 유일하게 청렴한 조직이었는데, 바레가 이끌던 소말리아군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훈련받은 부대들을 성공적으로 통합하면서 대중들에게 신임을 얻었다.
비록 독립 초기가 소말리아 역사상 유일하게 민주적인 시기였다고는 하나, 당대 소말리아의 정당 정치 속에는 씨족 관계가 짙게 반영되게 되었고, 그 결과 지족과 혈족 집단으로 세분화된 60개가 넘는 소수 정당들이 난립하던 상황이었던 데다가 정부 내에서도 씨족 관계를 짙게 반영한 인사 등용이 만연해 국민들의 불안은 날로 갈수록 커져만 갔다.
2.2. 집권 후[편집]
1969년 10월 15일에 2대 대통령인 압디라시드 알리 샤르마르케가 공식 방문 중에 경호원[13] 에게 암살되면서 6일 뒤인 1969년 10월 21일 새벽에 소장 신분으로서 무혈 쿠데타를 일으키고[14] 국회의원 전원과 부족장, 외국과 유착한 정치인들을 체포하고 동년 11월 1일부터 최고 혁명 위원회(CRC)를 이끌며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와 대법원을 해산한 후 과학적 사회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며 국명을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으로 고치며 집권했다.
쿠데타 3일 후에 바레는 라디오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군의 개입은 불가피했다. 더 이상 부패, 뇌물 수수, 족벌주의, 공금 횡령, 종교와 국가 법률에 대한 불의와 무례와 같은 악랄한 일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법은 제쳐두고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했다.
바레는 이와 함께 '노동과 사회 정의에 기초한 사회'를 목표로 여러 개혁 정책을 실시했는데, 대규모 공공 사업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무상교육으로 도시와 농촌의 문맹 퇴치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여 문맹률을 극적으로 낮췄고, 무상의료도 실시했으며, 집단농장을 만들고 산업과 토지, 은행을 국유화하면서 제분소, 사탕수수와 육류 가공 공장들을 건설하는 등 산업화도 시도했고, 이에 첫 6년 동안 소말리아의 경공업은 크게 발전했다. 덧붙여 바레는 집권 후 통일된 국가 문자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1970년대 중반에 소말리어를 교육의 공식 언어로 삼았으며, 이탈리아어와 영어만 써야 했던 공무원들에게 소말리어를 배울 것을 권장했고, 특히 소말리어의 라틴어 표기도 1972년에 도입되었다.[15]
특히 바레는 남녀평등 정책을 실시하면서 소말리아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게 했는데, 바레는 여성들이 풀뿌리 혁명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 것을 넘어 여성들에게 육군과 공군의 장교, 총지배인, 대사, 국장, 장관직을 주기도 했고, 여성을 승진시키는 법을 제정했으며, 여성 모스크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바레는 산림녹화에도 관심을 가져 1971년부터 1988년까지 전국 각지에 대규모 식목 캠페인을 벌여 목표한 336헥타르 중 265헥타르에 나무를 심는 데에 성공했으며, 39개의 방목지 보호 구역과 36개의 산림 조림지가 조성되었다. 이 덕분에 바레 정권 초기는 소말리아의 '황금기'이자 소말리아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기로 간주되고 있다.[16]
여기까지만 보면 부르키나파소의 전 대통령인 토마 상카라나 르완다의 현 대통령인 폴 카가메와 비슷한 개혁자로 보이겠지만,[17] 이 과정에서 바레는 슬슬 독재자의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바레는 자신을 '승리의 지도자(Guulwade)' '선생님' '지혜의 아버지'로 부르게 하고는[18] 시인들에게 자신을 찬양하는 시를 쓰게 했으며[19] 공개 행사, 거리, 공공장소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화와 함께 자신의 초상화를 걸게 하고는 자신의 동상까지 세우는 등 우상화를 했고, 혁명의 새로운 언어, 방법,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1974년에 중등학교를 폐쇄시킨 후 14세~16세 학생 25,000명을 농촌으로 보내 유목민을 가르치도록 했다.
1974~1975년에 북부 지역에서 심각한 가뭄을 겪자 소련의 협조를 받아 대대로 목축을 해오던 9만여 명을 소말리아 남부의 새로운 정착지로 이주시켜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게 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은 유목민을 분산시키고 씨족이 통제하는 땅에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씨족 결속을 약화시켜 굳건한 국민 국가 의식을 심기 위한 의도도 컸는데, 바레는 이와 비슷한 여러 차례의 대이주를 실시했으며, 이의 연장선으로 씨족주의를 금지시키며 이를 위반한 모든 사람들을 체포했다.
이런 상황에서 바레는 1976년 6월 26일에는 SRC를 해산한 후 그 자리에 과학적 사회주의와 이슬람 교리에 기초한 유일한 합법 정당인 소말리아 혁명사회당(SRSP)을 세우고는[20] 당 총서기에 앉으며 공산주의 국가를 선포했고,[21] 1979년 8월 25일에 공식적으로는 99.78%의 찬성을 얻은 국민투표를 통해 1961년 이후 18년 만에 개정된 새 헌법[22] 이 승인되었으며, 이 법은 8월 29일부터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동년 12월 30일에 열린, 171명의 단일 후보 목록을 놓고 열린 인민의회 선거 역시 99.95%의 찬성으로 치러졌고 여기에 바레가 임명한 6명의 의원이 추가적으로 더해졌다. 1984년 인민의회 선거도 찬성이 99.89%로 줄어든 것 외에는 이와 판박이였다.[23]
그리고 바레는 소말리아와 아랍 세계와의 전통적, 종교적 연결을 강조하여 1974년에는 아랍 연맹에 가입했고, 같은 해 6월 12일부터 1975년 7월 28일까지는 아프리카 단결기구(OAU)[24] 의 의장직도 역임했으며, 외교적 수완이 뛰어나 1972년에 밀턴 오보테 전 우간다 대통령이 이끄는 반군[25] 이 이디 아민의 우간다를 침공한 사건[26] 과 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에서 중재를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그리고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홍해 입구에 위치한 소말리아의 지정학적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2.2.1. 학정[편집]
유엔 개발 계획(UNDP)가 '시아드 바레의 21년 정권은 아프리카에서 최악의 인권 기록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바레의 학정은 아주 잔혹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바레의 소말리아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언론의 자유도 없어 국영 언론을 제외한 모든 언론이 폐쇄당했으며, 시위와 독립적인 노동조합은 금지되었고, 편지와 전화 같은 국민들의 '개인 통신'에도 정부가 간섭했으며, 사회주의 정책 하에 종교도 탄압받아 예배의 자유에 대한 제한에 항의한 이슬람교 지도자들은 투옥되고 처형당했다.
심지어 당시 소말리아는 이동의 자유도 '심각하게' 제약을 당했는데, 그나마 다행히도 바레는 북한과 민주 캄푸치아,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처럼 국내 여행도 려행증과 비슷하게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가능하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 바레는 주요 도시에 통금 시간을 적용한 후 이를 자의적으로 제한해 군인과 통금 시간 순찰대가 민간인들을 강탈하는 것을 용이하게 했으며, 국내 여행을 하려는 사람도 군사 검문소에게 방해를 받게 했다.
집권 3개월도 안 된 1970년 1월 8일에 소련의 KGB의 도움으로 창설된 국가안보국(NSS)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범죄로 의심되는 사람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는데, '국가의 독립, 통일 또는 안전에 반하는 행위'[27] 는 법으로 금지되어 그러한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져야 했다. 동년 9월에 정부는 국가보안법 제54호를 도입하여 국가보안법에 비판적 견해를 표명한 사람을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무기한 체포·구금할 수 있는[28] 권한을 부여했다. 특히 1970년부터 1983년까지 NSS 수장 겸 내무부 장관[29] 을 역임한 아흐메드 술레이만 압달라 '다플'(Ahmed Suleiman Abdalla 'Dafle')은 바레의 사위였으며, 1969년 쿠데타의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NSS 요원들은 무제한의 체포 및 구금, 수색, 재산 몰수 권한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이렇게 수감된 사람들은 족쇄가 채워진 채 몸을 설 수도 펼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지하의 독방에서 하루를 빵 한 조각과 물로만 버티면서 살아가야 했다. 동독의 슈타지로부터 훈련받고 고문 기구를 제공받은 소말리아의 고문기술자들은 체포된 사람들에게 사람을 뒤틀린 자세로 묶고는[30]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것은 기본에 양동이나 물탱크에 머리를 담그거나, 오랫동안 거꾸로 매달거나, 살해 위협을 가하거나, 칼로 찌르거나, 굶기거나, 철제 침대에 눕힌 채 침대에 전류를 가하거나,[31] 남녀 가리지 않고 수감자를 강간하거나, 모의 처형을 가하거나, 여성 수감자들을 나체로 행진시키는 등 다양한 고문을 가했고, 심지어는 손과 발을 묶은 뒤 물탱크에 던지거나 자루에 사람을 넣고는 자루를 묶은 후 바다에 던진 뒤 익사 직전에야 건져내거나 고환을 손으로 비틀기도(!) 했다. 가장 악명 높은 심문 센터는 '고드카(Godka)'라고 불린 모가디슈의 센터였는데, 당시 소말리아의 구금 센터는 '매우 끔찍한' 시설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바레는 이에도 만족하지 못해 '행가시(Hangash)'라고 불리는 국방안보국을 설치했는데, 1978년 쿠데타 미수 사건 후 소말리아 군대와 NSS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행가시는 점차 NSS와 중복되는 권한을 얻었고, 역시 법적 권한 없이 운영되어 NSS보다 더 두려운 존재로 인식될 정도였다. 준군사 조직이자 비밀 경찰 부대인 '승리의 개척자들(Guulwadayal)'도 직장, 학교, 모스크, 개인 저택 등 모든 도시와 마을에 존재했으며, 심지어 바레는 이도 모자라 또 다른 군사경찰인 '백브레이커(Dhabar Jabinta)', 바레의 경호원들이자 정예 부대인 '붉은 베레모(Red Berets)', 여당에 소속된 SRSP 수사국 등의 조직을 만들어 국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도록 했다. 이도 모자라 바레는 야당 무장 세력과 관련 민간인에 대응하기 위해 이동군사법원(MMC)까지 만들며 군 관리로 하여금 보여주기식 재판만 거치게 한 후 판결 직후 사형에 처하게 했다. 인류 역사의 독재국가 중에서도 바레 이상으로 촘촘하게 국민들을 감시한 나라는 북한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말리아는 그야말로 숨도 쉴 수 없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 '반혁명적'인 행동과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1969년부터 1980년까지 공개처형된 사람만 무려 61명에 달했다고 하며, 재판 없이 초법적으로 처형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반군을 위해 기금을 모금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한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반정부 활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도 야당 조직원과 혈통을 공유했던 사람도 구금되고 고문당했다. #
2.2.1.1. 이슬람 학자 대량 처형 사건[편집]
1975년 1월 11일에 바레는 샤리아에 입각한 전통적인 이슬람 가족 구조와 관행을 크게 변화시켜 소말리아 사회를 현대화하고 세속화하고자 '가족법'[32][33] 을 새로 제정했는데, 동년 1월 16일에 모가디슈의 압둘카디르 모스크에서 이슬람 성직자들이 이 법이 '이슬람법과 전통적인 소말리아 가치를 위반한다'고 항의하자[34] NSS는 모가디슈의 사원들을 급습해 35명의 이슬람 학자들을 포함해 수백 명의 이슬람교도들을 체포했다. 이때 체포된 이슬람 학자들은 '아랍 갱단과 협력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아랍 국가로부터 자금과 훈련을 받았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1월 18~19일에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 결과 이들 중 6명은 징역 20년형, 17명은 징역 30년형, 나머지 10명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월 23일에 사형 선고를 받은 10명은 모가디슈 경찰학교에서 공개적으로 총살형된 후 시신은 쓰레기 처리장에 유기되었다. 게다가 이 처형에 항의한 사람들과 군인들과의 '전투'로 인한 사망자까지 더해져 총합 52명이 단 하루 만에 사망했다.
많은 소말리아인들에게 이 처형 사건은 '소말리아 내에서 더 많은 분열과 불안정을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소말리아의 새로운 재앙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줬고, 국제적으로도 파장을 일으켜 국제앰네스티도 이 사건을 비판했다. 더욱이 이 사건은 오히려 소말리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활성화를 야기한 것으로 평가받는데, 이 사태로 야기된 이슬람 학자 탄압 과정에서 주요 학자들은 투옥되거나 살아남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지부티, 이집트, 수단 등으로 망명했고, 그 결과 소말리아의 이슬람교는 분열되어 극단주의가 강화되었다.
#1 #2 #3
여기까지만 봐도 충분히 악질 독재자인 것을 알 수 있지만, 사실 그가 진짜로 지탄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말년에 행한 북부 소말리아인들에 대한 제노사이드.[35]
2.2.2. 학살[편집]
제노사이드는 우리 언어에서 가장 추악한 단어 중 하나입니다. 의도적으로 인구를 줄이려는 시도는 아돌프 히틀러, 폴 포트 및 이디 아민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독재자 3명(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 소말리아의 시아드 바레)을 위해 이 대량 살인범 갤러리에 곧 새 자리를 예약해야 합니다.
오가덴 전쟁의 패전으로 1970년대 후반부터 소말리아 북부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는 등 1980년대 중반까지 에티오피아가 지원하는 반정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생겨났는데, 결국 1980년대 말에 가면서는 전국적으로 바레의 축출을 목표로 바레에 저항하는 반정부군 조직들[36] 과 바레 정권의 정부군 사이에 대립으로 사실상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에 이른다.[37] 이 과정에서 바레 수하의 정부군이 저지른 학살은 상술한 것처럼 아돌프 히틀러, 폴 포트, 이디 아민처럼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인물들에 필적한다고 언급되기까지 했을 정도로 단순히 잔혹하다는 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수준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바레의 학정에 대한 국내의 저항이 증가하자 '붉은 베레모'와 '승리의 개척자들'은 마지어틴족과 이사크족을 위시한 소말리아의 여러 부족들에 대한 조직적 테러를 수행했는데, 그 정점은 1988년 5월부터 1989년 3월까지 있었던 이사크족 학살이다.
조사에 따르면 국가의 지원 하에 '붉은 베레모' 등의 단체들에 의해 주민들이 물을 마시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우물과 저수지를 부수고 매립하거나 물에 독을 풀었고, 가축들을 몰살했다. 그리고 약 5만~10만 명, 최대치로는 20만 명의 이사크족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당했고, 여성들은 나이 상관없이 무자비하게 강간당했으며, 도시와 목초지는 무자비하게 약탈당하고는 방화나 폭파, 폭격으로 황폐화되었으며, 심지어는 리비아로부터 사린과 소만 등의 화학 무기를 수입했다는 주장도 있다.[38] 이 과정에서 집을 잃은 사람만 최대 80만 명, 이들 중 해외로 피신한 사람은 30만~50만 명에 이르어 '아프리카 역사상 가장 빠르고 가장 큰 강제 이동 중 하나'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바레는 이사크족에 대한 외부의 식량 원조를 거부했는데, 당시 소말리아 식량의 거의 절반이 외부의 식량 원조로 채워졌단 것을 감안하면 이는 특히 치명적인 조치였다.
학살 방법도 참수, 철사로 목 졸라 죽이기, 총살하기 전에 몽둥이로 죽지만 않을 수준으로 구타하기, 산 채로 불태우는 등 잔인하기 그지없었으며, 신체 일부를 절단하거나 산을 부어 태우는 등의 가혹행위도 행해졌고, 한 번에 30~40명이 처형되기도 한 것을 넘어 13세 소녀가 6명의 군인들에게 윤간을 당했다거나 돈과 음식을 가지고 지나가던 한 남성은 강탈, 구타 후에 총살되고는 시체가 버려져 하이에나에게 허리까지 먹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모가디슈(!)처럼 SNM이 활동하지 않은 곳에서도 이사크족들이 학살당했고,[39] 1988년 10월에는 엘 아프웨인 지역에서 반군이 설치한 지뢰에 육군 장교가 사망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300명 이상을 학살하기도 했다.
그리고 군인들은 이사크족 난민들에 대한 해외의 구호도 거부하여 1989년부터 소말릴란드 지역의 사나그 지역에서 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옥스팜 직원에게 총을 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총에 맞아 사망한 민간인들의 장례식은 친척이 몸값을 지불할 때까지 허용되지 않았고, 군인들은 온갖 악행들을 저질러도 기소, 징계가 면제되었다. 학살된 사람들은 재판도 없이 초법적으로 처형되었으며, 재판을 거치더라도 같은 날에 처형되어야 했다. 이러한 초법적 살인은 '특정 지역에서 SNM이 활동하면 그 지역 주민들은 모두 SNM의 지지자일 것이다'라는 황당한 논리 하에 행해졌다.
이를 넘어 소말리아군은 북부 지역의 거리, 주택, 우물 주변에 아무 표시도 없이 100만~200만 개의 대인 지뢰와 부비트랩을 설치했으며, SNM과 북부 소말리아인들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40] 방목지, 목초지, 물웅덩이 근처, 가축 도로, 농경지에다 지뢰를 심었다. 이 때문에 바레의 몰락 후 집으로 돌아온 주민들이 지뢰를 밟고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일들이 빈번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집에 돌아와도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 집 밖에서 사는 사람도 생겼다. 이런 극악무도한 악행들은 '이사크족의 완전한 말살'을 목표로 두고 행해졌다.
이사크족에 대한 집단 처형은 대체로 사람들을 비밀리에 끌고 가 총살하고는 비밀리에 매장되는 것으로 행해졌는데, 이렇게 처형된 사람들이 매장된 집단 무덤만 무려 200개가 넘는다고 하며, 폭우가 오면 집단 무덤에 매립된 유골이 노출될 정도라고 한다. #
2.2.2.1. 1988년 하르게이사-부라오 학살[편집]
1988년 5월 27일~6월 1일에 SNM은 북서부 지역에서 소말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하르게이사와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부라오[42] 를 점령했는데, 바레의 '이사크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북서부의 주요 도시에 대한 포격 및 공중 폭격과 이사크족의 주거지, 정착지 및 수역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라" "SNM을 도울 수 있는 신체 건강한 이사크족은 모두 살해되어야 하며, 사회적 지위 때문에 SNM에 재정적 도움이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은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43] 는 지침에 따라 소말리아군은 대학살극을 벌이게 된다.
하르게이사 지역에서 모든 은행은 폐쇄되고 전기와 상수도도 모두 끊겼으며, 모든 이동수단은 압수된 후[44]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45] 그리고 군인들은 사람들을 대규모로 체포한 것은 물론 도시의 모든 창고와 시장을 약탈했으며,[46] 귀중품을 건네는 것을 거부했다는 등의 갖가지 이유로 민간인들을 즉결 처형했고, 심지어는 모스크를 습격해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지역 인근에 10만 개의 지뢰밭을 설치하기도 했다.[47] 특히 5월 29일부터는 소말리아 공군을 동원해 하르게이사를 폭격하여[48] 도시의 70~90%를 파괴하도록 했고,[49] 기총소사와 로켓 공격도 동원했다.
국제앰네스티는 소말리아 정부군이 민간인을 대규모로 표적으로 삼아 살해했으며, 50만 명이 외국으로 도피했고, 14,000개의 건물이 파괴되고 12,000개의 건물이 심하게 손상되어 하르게이사가 '유령 도시'로 축소되었다고 보고했고, 미국 회계 감사원(GAO)는 1989년 5월에 쓴 보고서 '소말리아 - 북부 분쟁 및 결과 조건에 관한 관찰'에서 이 학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소말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하르게이사는 포격과 공중 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가장 피해가 큰 곳은 민간인 밀집도가 가장 높은 주거지역과 시장, 도심 공공건물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대사관은 도시의 70%가 손상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대략적인 육안 검사를 통해 이 추정치를 확인합니다.
하르게이사의 대부분은 '유령 도시'인 것처럼 보이며 많은 집과 건물이 사실상 비어 있습니다. 1988년 7월 말부터 군대가 도시를 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약탈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하르게이사에서 군대가 사유 재산을 집에서 빼앗았다고 들었습니다. 집에는 문, 창틀, 가전 제품, 옷, 가구가 없습니다. 약탈로 인해 모가디슈와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지역 전체에 '하르게이사 시장'이라고 불리는 시장이 열렸습니다. 한 관찰자는 하르게이사가 하나씩 해체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격렬한 전투가 끝난 후 하르게이사 상품을 가득 실은 긴 트럭 행렬이 도시를 떠나 모가디슈를 향해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르게이사 주지사는 현재 인구를 약 70,000명으로 추산하여 분쟁 전 인구 수치인 370,000명에서 감소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 하르게이사 주민은 이전 이사크 주민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관찰자들은 하르게이사가 현재 하르게이사에 상당한 수의 오가덴 난민, 그리고 도망친 사람들의 재산을 사용하고 있는 무단 거주자들에 실질적이고 눈에 띄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군대의 부양 가족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민간인들의 도피도 열악하기 그지없었는데, 물, 음식 하나 없이 도망치는 민간인들은 어린이들을 품에 안거나 피난 도중에 출산을 하는 등 길고 참혹한 길을 걸어야 했는데, 소말리아군들은 도망치는 민간인들도 전혀 봐주지 않고 도망치는 민간인들에게 헬리콥터 기총소사를 넘어 폭격을 퍼붓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진행되던 부라오 학살도 잔인함에서는 하르게이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휴먼라이츠워치는 1990년에 쓴 보고서 '소말리아: 자국민과 전쟁 중인 정부'에서 아예 대놓고 '5월 27일~28일에 소말리아군들은 도시에 진입하자마자 날뛰었다(went on a rampage)라고 적었을 정도였는데, 후술할 내용들을 보면 왜 공식 단체조차 과격한(?) 말을 대놓고 썼는지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말리아군은 학생들을 포함한 남자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어 즉결 처형했고, 약탈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하기도 했으며, 이사크족이 SNM을 환영한 것에 대한 분노와 SNM의 진격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까지 합해져 '마치 적인 것처럼' 민간인들을 공격했다. 건물과 민간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군인들은 기관총, 수류탄은 물론이고 중포병, 탱크까지 동원했으며, 상술한 GAO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웃에 SNM 전투원이 있을 거라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의 집을 포격으로 파괴했다고 한다. 이후 5월 31일에는 강력한 공중 폭격으로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고, 이에 주민들은 에티오피아로 도피하며 부라오는 단순간에 '비워졌다.'
부라오 학살이 철저히 계획된 제노사이드라는 것에 더욱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전투가 발발하자마자 정부는 확성기를 통해 출신지를 물으며 이사크족과 비이사크족을 구분하도록 했고, 비이사크족들에게는 교통수단을 제공하면서 떠나는 과정에서 마을을 불태우고 떠날 것을 권장했다. 이 공격으로 1만 5천~2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1988년 5월부터 1989년 3월까지 소말리아군이 의도적으로 살해한 비무장 이사크족도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를 본 미국은 바레의 실상을 알고는 경악하여 바레 정권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소말리아군은 1988년 7월 17일에 부라오를 탈환했고,1988년 7월 말까지 전례 없는 수준의 내부 증원, 비이사크족 민병대 및 무장한 오가덴 난민들, 아랍에미리트와 이탈리아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 리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짐바브웨의 용병들을 통해 두 도시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1989년 6월까지 SNM은 수송로를 봉쇄하고 군 수비대에 대한 정권 보급을 방해하면서 북서부의 주요 거점에 대한 공격을 적극적으로 가했으며, 그 결과 바레 정권은 1989년 12월까지 SNM의 활발한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주요 도시를 제외하고는 점차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 1989년 12월 5일, 결국 하르게이사를 다시 SNM에게 빼앗기기에 이른다. 이로써 북부 소말리아에 있던 모든 소말리아 군대 부대는 기지에서 차단되었으며 라디오, 보트 또는 비행기로만 모가디슈와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SNM도 오가덴 난민들이 거주하는 북서부 난민 수용소를 공격해 400명을 학살하는 등 학살을 아예 저지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SNM의 학살은 모두 1988년 5~8월에 국한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정부군의 학살이 너무 커서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이렇게 도피한 난민들은 에티오피아 국경의 작은 마을 하르타 셰이크(Harta Sheikh)를 난민촌으로 삼으며 살아갔고, 하르타 셰이크는 1988년부터 2004년에 폐쇄될 때까지 세계 최대의 난민촌이었다고 한다.
소말리아: 시아드 바레의 몰락과 내전
2.2.3. 오가덴 전쟁과 1978년 쿠데타[편집]
바레는 '대소말리아주의(Soomaaliweyn)'라는 개념을 주창했는데, 이는 소말리아 민족이 거주하고 역사적으로 우세한 인구를 대표해 온 아프리카의 뿔 지역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바레는 1977년 7월 13일에 오가덴 전쟁을 일으켜 에티오피아에 있는 소말리아인들의 거주지들을 '대소말리아'로 통합하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소말리아군 거의 전원을 동원해가며 오가덴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했으나 소련과 쿠바의 지원이 에티오피아로 옮겨가면서 전세는 급격하게 역전되었고,[50] 전쟁은 1978년 3월 15일에 에티오피아군이 오가덴을 탈환하고 소말리아군이 오가덴 밖으로 밀려나며 에티오피아의 승리로 끝난다.
오가덴 전쟁 패전 후 바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외관을 버리며 (자신이 그동안 반대해오던) 씨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했는데, 소말리아군은 상부의 지시를 받아 도시의 특정 씨족을 학살한 것은 물론이고 의도적으로 농촌 씨족간의 갈등을 조장했으며, 정치·경제·군대의 요직들은 소위 'MOD(마레한족, 오가덴족, 달바한테족)[51] '가 독점했다.[52] 그리고 북부 지역 자체도 의도적으로 차별되어 대통령은 물론 총리,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등의 요직을 이 전부 남부 소말리아 출신이고 남부 소말리아가 개발 원조의 95% 이상을 차지한 것과 달리 북부 소말리아는 제대로 된 학교도 없던 데다가 개발 원조의 나머지만을 차지했다. 이러한 차별 정책으로 소말리아 씨족들 간의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가덴 전쟁과 바레의 씨족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로 1978년 4월 9일에는 모하메드 오스만 이로(Mohamed Osman Irro, 1943~1978) 대령이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아 모가디슈 남부에서 장교 24명, 군인 2000명, 탱크 65대가 연루된[53]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하루 만에 진압당했고, 바레는 이 쿠데타를 빌미로 쿠데타에 연루된 씨족들의 구성원들을 정부와 군대에서 축출했다. 이후 오스만을 포함해 쿠데타 주모자로 추정된 17명은 1978년 9월 12일에 사형을 선고받은 후 동년 10월 26일에 모가디슈 외곽의 모래 언덕에서 수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 총살형에 처해졌으며,[54] 이 재판에서 나머지 30명은 20~30년의 장기 징역형에 처해졌다.[55] #1 #2 #3 쿠데타 이후 바레는 내각과 군대에서 마지어틴족들을 숙청한 것은 물론 최소 2천 명의 마지어틴족을 학살했는데, 당시 동원된 수법은 상술한 이사크족 학살의 수법과 유사했다고 한다.
바레는 자신의 패전을 인정하기는 커녕 자신의 전쟁 처리 방식에 반대했다고 78명의 군 장교들을 에티오피아 영토에서 처형시켰고, '신제국주의자'들인 소련과 쿠바 고문들이 자신을 버리고 에티오피아에게 붙은 것도 모자라 쿠데타를 지원하였다며 여기에 분개하여 이들을 모조리 추방한 것은 물론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의 관계 역시 소련과 대립하고 있던 중국,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끊었으며,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친미/친서방 노선의 중동 이슬람 국가들과 미국, 이탈리아 등 서방 자본권 국가들과 친하게 지내고 특히 미국으로부터 연간 약 1억 달러를 지원받는 등 철저한 친미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바레가 반소 정책을 펼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국은 바레의 학살을 눈감아줬다.
1980년에 바레는 원래 소련이 사용하던 베르베라의 항구와 공군기지를 미국이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가로 5300만 달러의 경제 원조와 4000만 달러의 군사 원조를 받기도 했고, 1985년에는 이탈리아로부터 5500억 리라의 천문학적인 원조를 받아내는 협정에 서명하기도 했다.[56] 이 과정에서 바레는 소말리아를 "이탈리아의 21번째 지역"이라고 칭하며 이탈리아에 노골적으로 굴종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한편 1986년 1월에 바레는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57] 과 지부티에서 만나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으며, 1988년 4월 3일에 에티오피아-소말리아 협정을 체결한 후 에티오피아 영토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멈추고는 그 대가로 '서로의 영토에 기반을 둔 반군 조직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합의 하에 소말리아의 지하 반에티오피아 조직인 '서부 소말리아 해방 전선(WSLF)'를 해체했다. 바레는 그 대가로 멩기스투가 에티오피아 국경 인근에서 활동하는 SNM 반군을 해체시킬 것을 기대했지만, 이 협정에 대한 응답은 SNM이 소말리아 북부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2.3. 정권 붕괴[편집]
한편 부패한 관료들과 저조해지는 경제 성과, 본인이 소속된 남부의 민족에게만 특혜를 주는 정책으로 인해 1970년대 중후반부터 바레에 대한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고, 오가덴 전쟁의 패배로 에티오피아에 있던 수많은 소말리인 난민들이 에티오피아에서 소말리아로 이주하면서[58] 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워져갔으며, 바레의 개혁들도 부족 사회의 전통과 지역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너무 급진적으로 시행되어 성공하기는 커녕 소말리아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며 실패로 끝났다.
특히 오가덴 전쟁으로 인한 군비 지출로 소말리아 경제는 빠르게 마비되었는데, 가령 외채는 수출 수입보다 더 빠르게 증가했고, 나중에는 소말리아의 부채(40억 실링)가 75년치 바나나 수출 수입과 맞먹을 정도가 되었다.[59] 그리고 1978년까지 공산품 수출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주요 외화 획득원이던 가축의 수출도 멈췄고, 물품 부족으로 인플레이션이 진행된 데다가, 소련의 지원이 쇠퇴하면서 바레 정부는 1981년에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레는 군비 지출 60% 삭감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해 구제금융을 받는 데에 실패했고, 1980년대 중반에도 또다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으나 이번에도 군비 지출 삭감에 불응해 또다시 구제금융에 실패했다. 1980년대 후반에도 IMF, 파리클럽, 국제개발협회(IDA)과 협정을 맺어도 경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소말리아의 농업은 붕괴하고 서방권의 경제제재로 인해 1989년~1990년에는 소말리아 실링의 가치가 크게 하락하는 등 경제 악화의 정점을 찍었다.
이에 바레는 민주화를 여러 변 이행하겠다고 말했지만 지킬 리는 없었다. 1986년 12월 23일에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나가[60] 99.9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1989년 7월에는 모가디슈에서 2천 명의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했으나 국제사회는 이에 대한 반발로 1990년에 소말리아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끊어버린다. 그러고도 바레는 1990년 7월에 모가디슈의 경기장에서 열린 축구 경기에서 관중들이 자신에 대한 반대를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관중들에게 발포해 60~100여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다만 1989년에는 SRSP 중앙위원회 임시총회에서 1990년 말에 다당제를 도입할 것으로 결정하긴 했으나, 국가가 파탄 상태에 다다르며 이는 이행되지 못했다.
바레의 만행들 때문에 나라의 거의 모든 씨족들이 반군을 만들었을 정도로 나라에 반군들이 판을 치며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져들자[61] 바레는 1990년 중반까지 수도 모가디슈와 부르도보를 제외한 모든 지역과 주요도시에서의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려 반 바레파 세력들로부터 '모가디슈 시장(市長)'이라는 놀림을 받는 처지에 이르렀고, 심지어 두 번째로 큰 반군은 수도 모가디슈와 거리상 가까운 남부 지역을 거점으로 두고 활동하며 이제는 수도 모가디슈마져도 수도 근교에까지 반군과 정부군 간의 교전이 일어나는 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바레의 버팀목이던 소말리아군에서도 대규모 탈영이 발생했으니, 1980년대가 종결되면서 바레는 이제 권력도 국민들의 지지도 다 잃은 퇴물이나 다를 바 없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수도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구 소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들의 협공을 받으며 4개월 가량을 숨어서 살다가 자살한 나치 독일의 최고지도자 아돌프 히틀러 같이 대통령 관저 근처의 벙커에서 숨어서 거주하는 처지에 이른다.[62] 이때쯤이면 바레는 당뇨병, 불면증에 시달리는 데다가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장관들과 관리들이 지쳐도 새벽까지 자지 못하게 하는 병약한 노인에 지니지 않았다.
결국 1990년 12월 30일 반 바레파 반군 연합인 통일 소말리아 회의(USC)가 수도 모가디슈에 입성하여 4주간의 대공세를 단행하여, 이듬해인 1991년 1월 26일 모가디슈에 있던 소말리아 정부군들을 격파해 수도를 점령하자 바레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모가디슈가 함락되자 그는 막대한 양의 돈을 챙기고[63] 장갑차에 탑승하여 사위-딸 부부와 함께 가족들의 거점이자 바레 정권을 지지하는 정부군의 잔당 세력들이 남아있던 소말리아 남서부의 부르두보로 도망쳤다. 바레가 관저에서 도망친 것은 반군이 관저에 진입하기 15분 전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15분만 늦었더라면 바레는 라이베리아의 새뮤얼 케니언 도 전 대통령처럼 반군에게 붙잡혀 반군들과 그의 독재 통치에 분노한 소말리아 시민들(특히 북부 지역 출신들)에 의해 참혹하게 조리돌림을 당하며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한편 바레가 도망치는데 성공하자 바레를 잡지 못하는데 실패한 소말리아 반군들은 대신 바레 정권 하에서 비밀경찰과 군부의 주요 요직을 맡아왔던 나머지 인사들을 붙잡아 그들을 조리돌림, 총살하거나 바레 정권 시절 경찰서, 군부대, 관공서, 도심 길거리 등지에 걸려있던 바레의 액자 사진과 초상화들에까지 기관총탄을 갈기는 식으로 분풀이를 했다.
2.4. 최후[편집]
부르두보에서 바레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정부군 잔존 세력들을 모아 재집권을 도모해 2번이나 모가디슈 탈환 및 정권 재장악을 시도했으나 1991년 5월을 끝으로 끝내 진압당해 실패했고, 결국 마지막 바레 정권의 거점지였던 부르두보도 반군에게 함락당하면서 바레 정권 붕괴 이후에 남아있었던 바레의 잔당들은 소말리아에서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남은 정부군 잔존 병력들마저 잃어버린 바레와 그의 가족들은 당시 소말리아를 장악한 반군 출신 군벌들의 추격과 수배를 받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목숨의 위협을 받았고,[64] 이듬해인 1992년에 소말리아를 탈출하여 이웃 아프리카 국가인 케냐의 나이로비에 가서 케냐 정부에게 본인과 일가족, 측근들의 케냐 망명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케냐에서 거주하던 소말리아인들은 과거 자기나라를 장기 독재와 내전 초래로 망치다 못해 자신들을 전쟁 난민으로 몰아갔던 악랄한 독재자 바레의 케냐 망명에 결사반대하며 당시 대니얼 아랍 모이 케냐 대통령에게 항의했고,[65] 결국 케냐 정부는 바레의 케냐 망명 불허를 내렸다. 케냐 망명이 끝내 불허되자 바레는 나이지리아로 이주하여 나이지리아 망명을 신청하였고, 나이지리아 정부는 그의 자국 망명을 승인하였다. 이후 바레는 망명국이던 나이지리아의 항만 도시 라고스에서 3년 동안 망명생활을 해오다가 1995년 1월 2일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에 사망했다. 사망 후 시신은 나이지리아 라고스 병원의 시신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가 고국인 소말리아로 옯겨져 소말리아 남서부의 게드 주에 안장되었다.
바레의 만행으로 인한 후폭풍은 오히려 후세대들이 더욱 크게 입게 될 정도로 엄청났다. 바레의 독재 자체로 인한 피해도 엄청났지만 정권 말기 바레 정권에 대항하던 반군 세력들이 1991년 바레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 벌인 주도권 쟁탈전이 상술한 것처럼 소말리아 내전으로 확산되며 소말리아는 2012년에 정식 연방정부가 성립될 때까지 21년 동안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전락했고, 당연히 치안은 완전히 붕괴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1991년 5월 18일에는 소말리아 북부 지역이 일방적으로 소말릴란드로서 독립을 선언하며 영토의 1/5 가량을 잃어버렸으며,[66] 바레의 씨족 분열 정책으로 인해 소말리아의 각 지역들에는 씨족에 기반을 둔 군벌이 활개치고는 이들이 씨족 관습법으로 지역을 통치하니 소말리아의 중앙집권체제는 완전히 붕괴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내전의 영향으로 소말리아는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거덜나 소말리아는 2023년 기준으로도 1인당 GDP는 (IMF 통계 기준으로) 544$로 195개국 중 188위, 취약국가지수는 120점 만점에 111.9점으로 전체 1위, 영양부족 인구 비율은 2020~2022년 UNICEF&FAO 통계 기준으로 48.7%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함께 공동 2위를 차지한[67] , 한마디로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세계 최악의 파탄국가로 전락했다. 한마디로 바레 한 명만 없었더라도 소말리아는 적어도 아프리카의 흔한(?) 최빈국으로 남았어도 지금과 같이 내전과 테러, 살육, 기근이 지속되는 생지옥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매체[편집]
- 모가디슈: 2021년 개봉한 한국 영화. 몇몇 장면에서 모가디슈 도심 여기저기에 걸린 그의 초상화, 민중에 의한 타도의 대상으로 시위대의 화염병을 맞고 불타는 초상화나 피켓에 적힌 '바레 타도' 등의 문구로 간접 등장한다.
4. 기타[편집]
- '바레'라는 이름은 성씨가 아닌 어릴 적에 붙은 별명으로, '외향성'을 의미한다.
- 1986년 5월 23일에는 모가디슈 근처에서 자신이 타던 자동차[68] 가 폭우로 버스 뒤편을 들이받고, 경호원의 차가 바레의 차 뒤편을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당해 중상을 입어[69]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병원비행기로 이송되고는 1달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 때 한동안 모하마드 알리 사마타르(Mohammad Ali Samatar, 1931~2016) 중장이 국가원수 대행을 역임했다.[70]
- 죽기 얼마 전에 바레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저는 단지 사람일 뿐이고, 이는(소말리아의 파탄은) 불행하게도 내 실수였습니다. 영국 속담에 '조금만 하면 실수가 적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 비록 바레가 피에 굶주린 독재자이자 소말리아를 최악의 파탄국가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긴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소말리아 국민들 대부분은 바레의 독재정권 시기를 그리워한다고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로 '바레 시절이 지금보다 먹고살기 좋았고, 알샤바브나 여타 군벌 세력들이 일으키는 테러와 내전도 없이 집 밖으로 나가려거든 목숨을 걸고 나가야되는 현 상황보다는 사회도 안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소말리아 각지에 남아있는 항만과 공항 시설들 대부분은 1970년대 당시 바레의 경제개발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게 상당히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오랜 내전과 혼란이 이어지고 있는 수도 모가디슈 등 남부 지역에서의 이야기고, 정치적으로 남부보다 안정되어 있고, 바레 정부 시절 정치적 탄압과 소외를 겪었던 소말릴란드 등 북부 지방의 경우 시아드 바레는 바레 정권 붕괴 이후 30년 넘게 혼란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남부 소말리아 지역의 소말리아인들과는 달리 이 일대의 현지인들 사이에서 얄짤없이 마귀나 학살자 취급을 받고 있다.[72] 당장 이 글만 봐도 알 수 있듯 소말리아 네티즌들 사이에서 바레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 NSS와 관련된 사람들 중 몇몇은 내전 시기에도 요직을 차지하며 건재함을 보여줬다.[73] 당장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것만 해도 재무부 장관[74] 총리 2명,[75] 심지어 대통령[76] 까지 배출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전직 소말릴란드 대통령 중에도 NSS 출신이 있다.[77] 그리고 이스마일 오마르 겔레[78] , 멜레스 제나위,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79] 같은 소말리아 이웃 국가들의 지도자들도 NSS와 연관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