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턴 오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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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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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오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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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턴 오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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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 오켈로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제2·6대 대통령
아폴로 밀턴 오페토 오보테
Apollo Milton Opeto Obote


출생
1924년 12월 28일
우간다 보호령 아팍구 아코코로
사망
2005년 10월 10일 (향년 80세)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재임기간
제2대 대통령
1966년 4월 15일 ~ 1971년 1월 25일
제6대 대통령
1980년 12월 17일 ~ 1985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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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마케레레 대학교 중퇴
가족
배우자 미리아 오보테, 슬하 자녀 4명
소속 정당
우간다 인민회의


1. 개요
2. 생애
2.1. 대통령이 되기 전
2.2. 1차 대통령 시기
2.3. 이디 아민에 대한 복수 시도
2.4. 2차 대통령 시기
2.5. 몰락



1. 개요[편집]


우간다의 제2대, 제6대 대통령, 독재자.

2번이나 대통령으로 집권했으나 2번의 집권 모두 쿠데타로 인한 축출로 막을 내린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며, 후에 대통령이 된 이디 아민의 악명이 너무 높아 잊혀진 감이 있지만 오보테 역시 집권 기간 동안에 죽이거나 감금한 사람들은 이디 아민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악랄한 독재자였다. 특히 아민의 학정으로 다시 기회를 잡아 집권했지만, 반군을 물리칠 절호의 기회를 대규모 학살로 어이없게 날리고 권력을 잃고말았으니 무능의 극치라해도 할말이 없다.


2. 생애[편집]



2.1. 대통령이 되기 전[편집]


1924년 12월 28일에 영국령 우간다 북부의 아팍구의 아코코로(Akokoro)라는 마을에서 랑고(Lango)족 족장의 아홉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생애 초반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별로 없으며, 1940년에 개신교 선교사 학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뒤, 마케레레 대학교에서 영어와 지리학을 배우다가 파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후에는 우간다 남부의 부간다에서 일하다가 케냐의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하면서 우간다의 독립운동에도 눈을 뜨게 된다.

1956년에 우간다로 귀국하여 우간다 국민회의(UNC)에 가입한 후 바로 다음 해인 1957년에 식민지 입법위원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오보테는 우간다인민연합과 합병하여 우간다인민회의(UPC)를 창립, 1961년 9월에 우간다의 독립을 위해 랭커스터 하우스에서 영국 정부가 조직한 우간다 헌법 회의에 UPC 대표로 참석했다. 우간다의 독립 선거를 앞두고는 부간다의 왕당파 정당인 카바카 예카(Kabaka Yekka)와 연합을 결성하고는 의회 다수를 차지하게 되며 1962년 4월 30일부터 우간다의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참고로 우간다의 초대 대통령직은 우간다의 독립 이후인 1963년 10월 4일부터 당시 부간다의 왕이던 에드워드 무테사 2세(Edward Mutesa II, 1924~1969)가 취임했다[1]. 이후 1963년 10월에는 미리아 오보테(Miria Obote, 1936~)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뒀다.

한편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 이디 아민이라는 육군 중위가 1962년 3월에 케냐의 투르카나에서 온 한 무리의 소도둑떼를 발견한 후 부하들을 동원해 투르카나족 1천여명을 연행해 가혹행위를 가하고 처형한 적이 있었는데, 이 소식은 상부에도 보고되었으나 우간다의 둘 뿐인 흑인 장교였던 아민이 우간다의 독립 직전에 재판을 받게 되면 '정치적 재앙'이 될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1962년 9월 12일 아민은 재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당시 우간다의 총독이던 월터 쿠츠(Walter Coutts, 1912~1998)는 오보테에게 "아민은 최소한 군대에서 해고되어야 한다."는 충고를 했으나 오보테는 "엄중한 질책이면 충분하다."고 이를 거절했고, 이에 쿠츠는 "이 장교는 미래에 당신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응수했다.


2.2. 1차 대통령 시기[편집]


그러다가 오보테는 1964년 말에 후에 대령으로 승진한 이디 아민과 함께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의 반군을 이끌던 크리스토프 그베니예(Christophe Gbenye, 1927?~2015)를 비밀리에 지원하는 과정에서 금 밀수에 가담하여 부당한 이득을 얻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정치적으로 큰 위기에 몰리는데, 1966년 초반부터 의회는 오보테에 대한 조사와 아민의 축출을 요구했다. 이에 오보테는 자신의 경쟁 파벌의 지도자였던 내각 구성원 4명을 혐의 없이 구금하고는 헌법을 중지시킨 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는 1966년 2월 24일에 대통령 직무 정지를 선포하고는[2] 4월 15일에 자신을 우간다의 새 대통령으로 선포하고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자신에게 할당했다. 그러고는 5월 22일에 아민을 시켜 무테사의 궁전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아민은 이 명령을 충실히 따라 5월 23일부터 이틀간 무테사의 궁전을 포위 공격하여 무테사의 궁전을 불태웠으며, 자원봉사자들은 궁전 인근에서 무테사측 인원의 시체를 200구 넘게 봤다고 한다. 이후 무테사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영국으로 도피했으나 45세 생일로부터 정확히 이틀 뒤인 1969년 11월 21일에 런던의 아파트에서 의문의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오보테는 1967년 9월자 개헌으로 부간다를 포함한 우간다의 모든 왕국과 독립헌법의 연방구조를 폐지하고는 행정부 수반을 신설하며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고, 1969년 12월 19일에 2명의 암살자에게 암살당할 뻔하자 그 보복으로 모든 야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가 집권할 대부분의 기간 동안 비상사태가 발효되며 많은 오보테의 정적들이 재판도 없이 무기한 투옥되었고, 특히 오보테의 사촌이 이끌던 비밀 경찰은 우간다 국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친영·친서방 정책을 펼친 무테사와 달리 오보테는 친소·친동방 정책을 펼치며 1970년까지 국내 주요 기업과 은행 주식의 51%를 국유화하는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극심해지고[3] 특히 우간다의 상권을 지배하던 인도인 상인을 탄압하면서 식량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 종래의 종주국 영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오보테에 불만을 가진다.


2.3. 이디 아민에 대한 복수 시도[편집]


그러다가 1971년 1월 25일에 싱가포르에서 영연방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디 아민은 쿠데타를 일으켜 오보테를 축출하고 대통령이 되자 오보테는 케냐나이로비로 망명했다. 참고로 당시 오보테가 얼마나 국민들에게 증오를 받았냐고 하면 아민이 집권하자 오보테의 포스터를 갈기갈기 찢거나 짓밟은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며, 아민은 국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오보테가 가둔 야당 인사들을 석방하고 1971년 4월에 방부처리가 된 무테사의 시신을 우간다로 봉환하기도 하면서 초반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아민은 오보테를 능가하는 가혹한 학정을 펼쳤는데, 아민은 오보테에 대한 은혜를 원수로 갚아 고문실 이름을 '싱가포르'라고 지은 것은 애교에 오보테가 속해있던 랑고족과 오보테를 지지하던 아콜리족을 대량으로 학살했고[4], 심지어 우간다에서 이 두 부족을 모두 제거할 '마스터 플랜'을 짜기까지 했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1972년 9월에 탄자니아의 지원을 받은 '인민군'과 요웨리 무세베니 등이 주도하는 우간다 반군을 동원해 우간다를 침공하여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는데, 오보테는 이를 위해 '9월 15일에 반군은 동아프리카 항공[5]DC-9을 '빌려' 80명의 특공대원을 엔테베 공항으로 수송하여 공항을 검거한 후 캄팔라로 진군해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해 내가 녹음한 연설을 틀어 민간인과 군인의 봉기를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9월 17일에 나와 협력하는 두 반군은 탄자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우간다 남부의 중요 도시인 음바라라와 마사카를 점령한 후 캄팔라로 진격하라.'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도중에 우간다 군인들에게 유출되었고, 우간다 군인들은 이 침략 가능성, 즉 외국으로 망명한 전직 대통령의 쿠데타 가능성을 이미 전해 들었는데도 이를 무시하며 적절한 대응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누가 봐도 오보테가 질 수 없을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의 결과는 처음부터 오보테의 '완벽한 대실패이자 재앙'으로 끝났다.[6]

이 작전은 첫 전개부터 황당하기 그지없었는데, 오보테가 엔테베 공항에 착륙할 비행기 조종을 맡긴 인물로 정한 사람이 전문적인 비행기 조종사도 아닌, 친구의 아들이었던 데다가, 전문 조종사가 아니란 것을 감안해도 비행 경험도 부족했던 그가 무리하게 비행기를 몰다가 너무 빠른 속도로 엔테베 공항에 착지하여 비행기의 랜딩 기어가 파괴되면서 엔테베 공항 점거부터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우간다 남부를 장악하려고 우간다에 침투한 반군들은 경험, 훈련, 무기, 보급품 등 모든 것이 우간다군에 비해 열세였기 때문에 우간다군에게 밀리다가 9월 19일에 아민은 '반군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선포했고, 결국 9월 29일에 전투가 거의 완전히 중단되며 오보테측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한편 1972년 9월 18일에 아민은 탄자니아의 지원을 받은 우간다 반군에 대한 보복으로 우간다 공군에게 탄자니아의 국경 인근 마을을 폭격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탄자니아도 국경 인근에 군대를 배치했다. 분쟁이 우간다와 탄자니아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기 전에 두 나라는 시아드 바레 소말리아 대통령의 중재 하에 휴전에 합의했고, 이후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모가디슈에서 조약을 비준했다. 그러나 이 일은 이전부터 나빴던 우간다와 탄자니아 사이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고 궁극적으로 탄자니아군에 의한 우간다 침공, 즉 이디 아민의 퇴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실패 이후 오보테는 줄리어스 니에레레 탄자니아 대통령의 개인 주거지에서 가까운 해변 별장에서 공개적 활동도 거의 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살면서도 정권 수복의 꿈(?)을 멈추지 않았고, 때로는 본인이 직접 소규모 반군을 조성하여 우간다로의 침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민의 학정 속에서도 우간다에서 오보테의 인기는 여전히 낮아 아민을 싫어하는 사람들마저 오보테의 복권을 원하지 않을 정도였다.[7]


2.4. 2차 대통령 시기[편집]


그러나 아민이 우간다 망명자들의 지원을 받은 탄자니아군의 침공으로 1979년 4월 11일에 실각하며 망명을 떠났고[8], 이후 우간다는 1년여동안 3명의 대통령의 산발적인 통치가 이어지다가 1980년 5월 12일부터는 '우간다 대통령 위원회'라는 단체가 집권한 과도정부격 시기가 이어졌고, 1980년 12월 10~11일에 열린 총선에서 UPC가 승리하며 오보테는 꿈에 그리던(?) 우간다의 대통령 복귀에 성공한다. 그러나 한때 오보테와 협력하던 무세베니는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면서 선거에 불복했고, 이에 국민저항군(NRA)을 이끌고 오보테에게 게릴라전을 벌이게 된다.

오보테의 정부군이나 다를 바 없던 우간다민족해방전선(UNLF)은 반군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강간을 저질렀는데, 이 내전으로 10만~50만 명에 달하는 우간다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9][10], 결국 오보테는 민심을 잃고 1985년 8월 27일에 아콜리족 출신으로서 이디 아민을 축출한 쿠데타를 주도한 바질리오 오라라 오켈로[11]과 티토 오켈로[12]가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후 무세베니는 쿠데타를 일으켜 오켈로를 몰아내고는 1986년 1월 29일에 우간다의 대통령으로 취임해 2023년 현재까지도 집권하고 있다.


2.5. 몰락[편집]


두 번째 대통령 직위에서도 쫓겨난 오보테는 케냐로 망명했고, 그 후에는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서 망명 생활을 보냈다. 이후 오보테는 2005년 8월에 UPC 대표직 사임을 선언했고, 동년 9월에는 '오보테가 올해 안에 우간다로 돌아올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졌으나, 오보테는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0월 10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의 한 병원에서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보테의 장례식은 캄팔라에서 무세베니가 참석한 가운데 국장으로 치러졌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우간다 국민들이 경악했다고 한다.

한편 오보테의 부인인 미리아 오보테는 남편의 사후에 고국으로 돌아와 동년 11월 28일에 UPC의 신임 대표로 선출되었고, 2006년 2월 23일에 있던 우간다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으나 득표율은 고작 0.8%로 5명의 후보 중 꼴등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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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간다는 1962년 10월 9일에 독립했다.[2] 그 하루 전에 이디 아민은 육군 및 공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3] 다만 오보테는 적어도 해외 비자금은 전무했다고 한다.[4] 참고로 아민이 오보테 지지자를 판단한 기준이 걸작인 것이, 겨우 '성씨가 알파벳 'O'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오보테의 지지자일 것이다'라는 판단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한다.[5] East African Airways, 1946년부터 1977년까지 존속한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항공사. 본사는 케냐의 나이로비에 있었으며, 재정난과 항공사를 운영하던 삼국의 관계 악화로 1977년 1월에 해체되었다.[6] 그나마 1982년 케냐 쿠데타보다는 낫긴 하다. 사실 케냐 쿠데타는 무려 일등병이 주도한 쿠데타였다는 등 여러 면에서 막장 그 자체이긴 했지만...[7] 실제로 장 베델 보카사의 경우처럼 아프리카에서는 이전 독재자 시절보다 이후 독재자 시절이 더욱 악화된 경우에는 이전의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프리카 독재자 중에서도 최악으로 꼽히는 이디 아민의 학정을 겪으면서도 전 독재자였던 오보테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던 것에서 오보테가 얼마나 집권 시기에 국민들에게 인망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8] 이후 아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정신을 차리기는 커녕 오히려 1989년에는 오보테가 했던 것처럼 반군을 동원해 우간다를 탈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아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조용히 살다가 2003년에 사망했다.[9] 특히 이디 아민 정권을 후원해준 적이 있는 북한은 UNLF에 군사 장비를 지원했으며, 조선인민군 장교를 우간다에 파견해 군사 고문 역할을 수행하거나 군인들의 훈련을 담당하게 했다.[10] 국제앰네스티는 1985년 7월까지 오보테 정권이 우간다 전역에서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추정했으며, 특히 무세베니가 게릴라전을 시작했던 캄팔라 북부 지역에서 인명 피해가 컸다.[11] Bazilio Olara-Okello, 1929~1990, 우간다 제7대 대통령.[12] Tito Okello, 1914~1996, 우간다 제8대 대통령, 상술한 오보테의 우간다 침공 시도에서 마사카를 표적으로 삼은 반군을 이끈 사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