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뇨 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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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
Franjo Tuđman
[1]


파일:1_Franjo-Tuđman-2.jpg

출생
1922년 5월 14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벨리코트르고비슈체
사망
1999년 12월 10일 (향년 77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국적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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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90년 12월 22일 ~ 1999년 12월 10일
역임
크로아티아 대통령 (1990–1999)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1990)
크로아티아 민주연합 대표 (1989–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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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父: 스테판 투지만(Stjepan Tuđman)
母: 유스티나 그마즈(Justina Gmaz)
배우자
안키차 투지만(Ankica Tuđman)[1]
자녀
3명
소속 정당
(1989–1999)


1. 개요
2. 생애
2.1. 크로아티아 독립 이전
2.2.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유고슬라비아 전쟁
2.3. 국내정치
2.4. 사망



1. 개요[편집]


크로아티아의 정치인.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독립국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이다.


2. 생애[편집]



2.1. 크로아티아 독립 이전[편집]


1922년 5월 14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벨리코트르고비슈체(Veliko Trgovišće)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스테판 투지만(Stjepan Tuđman)은 크로아티아 농민당 위원장으로 1941년 나치 독일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멸망하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들어서자 투지만은 학업을 중단하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지도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입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6년, 투지만은 정식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군에 입대하여 1959년 소장이 되어 유고슬라비아군 최연소 장성이 되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세르비아인몬테네그로인이 유고슬라비아군을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군 장성 계급 중 70%가 두 민족 출신이었는데 투지만은 크로아티아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별을 달았던 존재였다.

1961년 결국 투지만은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으로 채워져 가는 유고슬라비아군을 떠났다. 1963년 자그레브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여 정치학을 전공하고 크로아티아 노동운동 역사 연구소(Institut za historiju radničkoga pokreta Hrvatske) 소장으로 부임해 연구를 계속했다. 투지만은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유고슬라브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크로아티아인 민족주의자로 전향하였으며, 크로아티아인 민족주의가 유고슬라비아 왕국 붕괴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당시 유고슬라비아 역사학계의 주장에 정면 반박하였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주장에 투지만은 반체제 인사로 몰려 1967년 연구소장 직에서 쫓겨났으며 이에 유고슬라비아에 미련을 버린 투지만은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탈당했다.

한편 1968년68혁명의 영향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에서도 개혁의 움직임이 일면서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서 크로아티아의 봄(hrvatsko proljeće)이라는 각성 운동이 불었다. 처음에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주도한 자유주의 운동으로 시작했던 '크로아티아의 봄'이 시간이 지나 유고슬라비아 체제 비판과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로 이어지자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실권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이를 분리주의 운동으로 보고 탄압했다. 투지만은 1970년대 이전까지는 같은 크로아티아인이던 티토와 나쁘지 않은 관계였으나, 1970년 투지만이 '크로아티아의 봄'에 동조하며 크로아티아 독립운동에 가담하자 '형제애와 일치' 정책을 추구하며 유고슬라비아의 통합을 주장하던 티토와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1972년 투지만은 체제 전복 활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9개월만 복역하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티토는 각 지역의 분리주의를 억지로 탄압할 경우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본인의 생전에 터질 것을 우려하여 1974년 헌법을 통해 각 자치 공화국에 권한을 더 주는 개헌안을 내놓으며 민심을 달랬다.

1977년 프라뇨 투지만은 위조 여권을 이용해 그리스를 거쳐 스웨덴으로 출국, 스웨덴 TV와의 인터뷰에서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크로아티아인의 처우에 대해 비판하며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진행하였다. 사태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티토는 투지만의 여행을 지켜보고 있다가 투지만이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 테살로니키에서 납치하였다. 1981년 투지만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년, 가택연금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티토는 이미 사망한 다음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각 민족별로 극단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강조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될 징조를 보이자 투지만 역시 독립 크로아티아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1987년 투지만은 캐나다로 여행을 떠나 크로아티아계 캐나다인 이민자들과 회동을 가졌다.[2]


2.2.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유고슬라비아 전쟁[편집]


1989년 동유럽 혁명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민주화를 결정하고 각 공화국 별로 선거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흐름에 맞춰 투지만은 1989년 크로아티아 독립을 주장하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정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을 창당하여 당대표로 취임하였다. 이윽고 1938년 이후 크로아티아에서 처음 치러지는 자유선거인 1990년 4월 22일부터 4월 23일까지 시행된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열풍에 힘입은 HDZ가 전체 356석 중 205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1990년 5월 20일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신정부는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공산주의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국명인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사회주의'를 뺀 '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었으며 국기국장에서 공산주의적 상징을 지워버렸으며 헌법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그러나 이렇게 크로아티아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크로아티아인 민족국가로 급변하는 과정에서 크로아티아가 체크무늬 국장을 도입하고 공용어인 크로아티아어의 표기를 라틴 문자 단독 표기로 바꾸고 세르비아인 공무원들에게 충성 맹세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그자리에서 해고하는 등 본격적으로 반세르비아 정책을 시행하자 50년 전 우스타샤의 재림이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들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윽고 세르비아인들은 자체적으로 민병대를 결성하고 일부 인사들은 세르비아에 합류하자는 대세르비아주의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등 크로아티아 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990년 8월 17일 크라이나의 세르비아인들이 수도 자그레브달마티아를 연결하는 도로들을 통나무로 차단한 일명 '통나무 혁명'을 시작으로 12월 20일 크로아티아 의회가 신헌법을 비준하자 유고슬라비아군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 민병대들이 크닌 등 세르비아인 다수 지역을 장악하고 크라이나 세르비아 자치주(Српска аутономна област Крајина/САО Крајина)를 수립하여 일방적인 자치를 선포하는 등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정부와 세르비아계 민병대 간에 갈등이 격화되는 와중에 투지만은 슬로베니아 대통령으로 당선된 밀란 쿠찬과 함께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연방제도를 각 연방내 공화국들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행사하는 국가연합 형태로 재개편할 것을 주장하며 당시 세르비아의 대통령이었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연방제 재개편을 둘러싼 협상을 했지만 협상은 밀로셰비치 등을 비롯한 세르비아계 출신 유고슬라비아 정치인들의 반대와 거부로 실패했고, 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투지만의 크로아티아와 쿠찬의 슬로베니아는 티토 사후 세르비아의 연방 내 권력 독점으로 변질되어 가는 유고슬라비아에 미련을 버리고 본격적인 독립 절차에 착수했다.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세르비아계가 국민투표를 보이콧한 가운데 투표 결과 93%에 달하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 찬성이 결정되었고 이에 1991년 6월 25일 쿠찬의 슬로베니아 공화국과 투지만의 크로아티아 공화국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탈퇴하는 형식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를 거부한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군을 동원해 전면적으로 두 나라를 침공하면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즉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1991년 7월 10일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쟁취했으나 크로아티아는 1991년 9월 17일까지 독립 선언을 연기한다는 조건 하에 일단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중지했다. 그러나 분란은 엉뚱한 곳에서 터졌는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의 크로아티아인들이 크로아티아에 합류를 검토하면서[3] 세르비아인들이 반발하자 투지만 대통령은 1991년 9월 11일 일방적으로 독립을 다시 선언하고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재개를 선언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군과 그들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무장이 빈약한 크로아티아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크로아티아 전 국토의 4분의 1을 장악했고 12월 19일 크라이나 세르비아 자치주의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수립하여 크로아티아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시피하는 상황에서도 처절하게 버티면서 세르비아가 목표로 한 대세르비아주의 수준의 영토 확보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고 때마침 세르비아 바로 옆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상황이 악화되자 거기에 집중하기 위해 1992년 1월 2일 UN의 중재로 크로아티아와 유고슬라비아는 휴전협정을 맺고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은 일단락되었다.

크로아티아가 휴전으로 잠시 숨을 돌릴 동안 보스니아에서는 무슬림 보슈냐크인과 가톨릭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정교회 세르비아인 사이의 갈등이 악화되고 있었다. 1991년 12월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들은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동체(Hrvatska Zajednica Herceg-Bosna)를 결성하여 크로아티아인의 자치를 주장하였고 이 상황을 본 투지만은 세르비아의 관심을 크로아티아에게서 돌리고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대크로아티아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보스니아에 손을 뻗쳤다. 투지만의 지원을 얻은 크로아티아인들은 보스니아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보슈냐크인과 연합해 보스니아의 독립을 주장했고 이에 반발하는 세르비아인을 무시한 채 1992년 3월 1일의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4월 6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치고비나 공화국의 독립 선언과 동시에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은 스릅스카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지원을 얻어 보슈냐크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을 공격하면서 보스니아 전쟁이 터졌다.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은 동맹을 맺어 세르비아인에게 저항하였고 투지만의 크로아티아는 이들을 지원하면서 크로아티아 역시 보스니아 전쟁에 참전하였다.

하지만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동맹은 어디까지나 오월동주나제동맹에 가까운 성격의 동맹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 민족 사이의 관계 역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있어서는 보슈냐크인들 역시 세르비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고까운 존재였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주거주지인 헤르체고비나 지방을 넘어 은글슬쩍 보슈냐크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중부 보스니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보슈냐크계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하는 등 제노사이드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1992년 8월 보스니아를 민족별로 3개 공화국으로 재편하는 내용의 중재안인 오웬-스톨렌텐베르그 안이 제시되자 크로아티아인들은 여기에 동의하고 자체적으로 크로아티아인 공화국인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선언하였으나 보슈냐크인들이 중재안을 거부/반발하면서 파토가 났다. 이윽고 보슈냐크인들은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의 인정을 거부하고 크로아티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면서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동맹은 결렬되었고 이윽고 서로를 공격하면서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게다가 투지만은 대크로아티아주의를 내세우면서 미친 짓을 저지르는데,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의 회담 도중 비밀리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분할을 요청한 것이다. 1991년 3월 25일 투지만은 밀로셰비치를 비밀리에 카라조르제보(Karađorđevo)에서 만나 이른바 "카라조르제보 조약"을 맺는데, 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는 보슈냐크인을 전부 제노사이드하고 세르비아계 65% + 크로아티아계 35%로 나누자고 하는 제안이었다. 밀로셰비치는 처음에 투지만이 제안한 카라조르제보 조약을 반대[4]했으나 보스니아 세르비아 민주당 대표인 라도반 카라지치[5]가 조약 체결을 주장하여 카라조르제보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후 카라조르제보 조약의 주인공 라도반 카라지치는 1992년 5월 6일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 대통령 마테 보반 및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공개적으로 회동하여 이른바 '양보'를 통해 세르비아계 55% + 크로아티아계 45%를 지분으로 제시하며 무슬림 제노사이드를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함께 진행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투지만은 영토 욕심에 눈이 멀어 그라츠 조약을 수용했다. 카라조르제보 조약과 그라츠 조약에 대한 내용은 슬로보단 프랄략 등 크로아티아 전범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하기 시작한 2003년에 폭로됐으며, 이 두 개의 조약이 드러나면서 투지만은 빼도박도 못하는 전범이 되고 말았다.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출된 카라조르제보 조약 관련 내용

투지만의 크로아티아는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들을 도와 보슈냐크인들을 공격하면서 야욕을 드러냈으나 아직 자국 영토에서 세르비아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판국에 괴뢰국을 앞세워 보슈냐크인을 학살하고 보스니아를 집어삼키려 한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 투지만은 미국 워싱턴으로 끌려가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보슈냐크인 공격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크로아티아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끊고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을 인정하겠다는 압력을 받았다. 결국 투지만은 1994년 7월 18일 워싱턴 협정과 7월 22일 스플리트 협정을 체결하면서 보스니아를 합병하려는 야욕을 포기했다. 그리고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인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결성하면서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을 끝내고 다시 동맹을 체결했다.

워싱턴 협정과 스플리트 협정을 계기로 미국의 크로아티아 지원이 본격화했고, 1995년 군사적인 성장을 이룬 크로아티아군은 1995년 5월 1일 '섬광 작전(Operacija Bljesak)'으로 단 3일 만에 서슬라보니아 일대를 점령하였고, 1995년 6월 헤르체그보스니아를 통해 스릅스카 공화국(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괴뢰국)을 공격하여 크라이나의 수도 크닌과 스릅스카의 수도 바냐루카를 잇는 고속도로를 1995년 7월 26일 절단해버렸다. 그리고 13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폭풍 작전(Operacija Oluja)'을 개시해 단 4일만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사실상 멸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995년 11월 22일 에르두트 협정으로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이 사실상 항복하면서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은 크로아티아의 승리로 끝이 났다.


2.3. 국내정치[편집]


전쟁이 끝난 후 투지만은 전후 안정화 작업에 착수했으나 동시에 권위주의적 통치로 크로아티아 사회를 억압했다. 비록 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1995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은 구 크로아티아 공산당인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을 필두로 한 야권 연합을 상대로 127석 중 75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수도 자그레브의 시장 자리를 사회민주당에 빼앗기는 굴욕을 당했다. 그러자 투지만이 자그레브 시장 임명을 거부하면서 2년 가까이 자그레브 시장이 공석이 되는 사태를 일으켰다. 1996년에는 자신과 집권당을 비판하는 라디오 방송사인 라디오 101(Radio 101)의 영업 허가를 취소하였다가 시민들의 대대적인 시위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프라뇨 투지만은 같은 크로아티아 독립 동료이자 마지막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대통령이던 스테판 메시치(Stjepan Mesić, 크로아티아 민주연합 당대표)와도 갈등을 빚다가 결국 메시치에 대한 탄압을 했다. 스테판 메시치는 크로아티아의 독립에는 찬성했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세우는 투지만을 비난하며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을 하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그러자 투지만은 메시치를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에서 제명했으며, 메시치가 헤르체그보스니아의 해체를 요구하기 위해 마테 보반(Mate Boban, 헤르체그보스니아 대통령)을 만나러 크로아티아에서 나가 보스니아로 들어간 사이 메시치의 귀국을 금지하였다. 메시치는 1996년 5월에 와서야 크로아티아로 돌아왔다.

권위주의적 통치에도 불구하고 1994년 화폐개혁을 계기로 크로아티아 경제는 안정화되어 다시 정상가도에 오르기 시작했고 경제 안정화와 야권의 분열의 힘입어 1997년 대선에서 61.4%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1997년 크로아티아 대통령 선거는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OSCE(유럽안보협력기구)에서는 후보 등록이나 후보의 발언에는 제한이 없었지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적인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 30만 명에게 크로아티아 대선 선거권을 부여하고[6], 프라뇨 투지만이 대거 선거구 주민들한테 뇌물을 뿌리고, 기업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 등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저질러졌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유럽연합1997년 크로아티아 대선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후 2000년 크로아티아 대선에서 당선된 스테판 메시치 대통령이 1997년 크로아티아 대선의 효력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더딘 민영화 작업과 각종 부정부패 스캔들에 발목을 잡혀 투지만 정부는 점차 인기를 잃어갔고 결정적으로 1998년 외채 위기로 인한 불황이 크로아티아에 닥치면서 경제 문제가 폭발, 결국 1999년 투지만 사망 직후인 2000년 1월의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은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에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7]

2.4. 사망[편집]


투지만은 1993년 위암 판정을 받았으나 전쟁 와중이라 몸을 돌볼 새가 없었다. 결국 천공성 장염을 비롯한 위암이 악화되어 1999년 12월 10일 사망하였고 시신은 미로고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수많은 세르비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 그리고 알바니아계·튀르키예계 구 유고슬라비아 주민들이 기뻐했다.

[1] 국제음성기호 표기는 [frǎːɲo tûdʑman\]. 세르보크로아트어 문자 Đ, đ를 입력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Đ, đ의 대용 표기인 Dj, dj를 이용해서 Tudjman이라 한다.[2] 이때 투지만이 만난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 상당수가 크로아티아 독립 이후 크로아티아로 귀국하여 도로 크로아티아로 귀화하고 정치인이 되었기 때문에 투지만이 이미 이때부터 벌써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존재한다. 여담으로 투지만이 캐나다 여행 당시 만난 대표적인 인물로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 국방장관을 역임한 고이코 슈샤크(Gojko Šušak, 1945–1998)가 있다.[3] 이들은 나중에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이라는 크로아티아의 괴뢰국을 세운다.[4] 이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 크로아티아세르비아 밖에 있다는, 즉 외국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5] 이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괴뢰국인 스릅스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다.[6] 한국으로 따지면 한국계 외국인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것에 비유될 수 있다.[7] 재미있게도 투지만의 정적으로 유명한 밀로셰비치 역시 2000년 불도저 혁명으로 권력을 잃었고, 야당인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 물론 세르비아 사회당이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나 밀로셰비치의 실각 및 투지만의 사망 이후에 정권을 탈환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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