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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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3. 결과
4. 출처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6.25전쟁 때 원산시에 대해 미군, 대한민국 국군, 유엔군이 시행한 대규모 폭격.


2. 전개[편집]


파일:1280px-Korean_War_bombing_Wonsan.jpg
파일:external/www.warmemo.or.kr/0160.jpg
폭격을 받고 있는 원산시
1950년 10월경 원산 시내

"미 함정은 원산을 밤낮없이 폭격했다. 하나의 도시를 두고 그토록 함포와 공중 폭격으로 두들겼던 사례는 아마도 그 어떤 역사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원산에서는 길거리를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24시간 내내 어느 곳에서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미국 해군 소장 올리버 스미스의 증언[1]


"미군은 7월 6일과 13일 두 차례에 걸쳐 원산에 폭격을 감행했는데 그중 13일의 폭격은 가장 심한 것이었다. 미군이 그날 아침에 500톤의 폭탄을 구름 위에서 주택구역을 선택하여 투하한 결과, 1,249명이 희생되었다. 그 가운데 195명은 여성이었고, 125명은 어린이였고, 122명은 노인이었다."

『조선인민보』 1950년 7월 26일자 기사[2]


한국전쟁 초기 미국 공군의 북한 지역 폭격은 적의 병력 및 물자 이동을 차단하는 '차단작전'과 적의 핵심목표를 구조적으로 파괴하는 '전략폭격'으로 이뤄졌다.[3] 그리하여 미군은 대도시와 공장지대, 철로 등에 대해 무차별폭격을 시행하였는데, 원산은 그중에서도 일차적인 공격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원산이 중요한 전략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원산에는 원산항이 위치하고 있었고 철로가 지나는 곳[4]이었다. 게다가 원산에는 석유를 취급하는 정유소[5] 또한 위치해 있었다.


미군의 원산 지역 폭격 일지
날짜
폭격 대상
비고
1950년 7월 6일

한국전쟁기 첫 폭격
1950년 7월 7일


1950년 7월 13일
원산 선착장
선착장 근처 저장시설
원산 조차장
B-29 56대 동원
1950년 7월 22일
원산정유공장

1951년 2월 24일
원산항
원산항 봉쇄 작전 실시
함포 포격
1951년 3월 19일
원산항
USS 미주리호의 포격
1953년 7월 27일
원산항
원산항 봉쇄 작전 종료
정전 1분 전까지 폭격

원산에서 처음 폭격이 이뤄진 것은 1950년 7월 6일로 B-29가 폭격을 시행했다. 이후 7월 13일 B-29 56대[6]가 동원되어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이 때의 폭격으로 원산 선착장과 근처 저장시설의 50% 정도가 파괴된 것으로 추측되며 선착장 부근의 인구밀집지역 또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신문 <조선인민보>는 13일의 폭격에 대해 500톤의 폭탄을 투하했다며 1,249명[7]이 희생되었다고 보도했다. 이에 북한 외무상 박헌영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말리크에게 공식 항의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 폭격의 성과를 만족하게 여겼고, 7월 17일에는 가치 있는 폭격물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폭격 대상에서 제외시키기도 했다.

1.4 후퇴 이후 미군은 다시 북한 지역으로의 진격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군사 작전을 지원할 요충지가 필요하였다. 원산은 그 요충지에 들어갔으며 이를 위해 미군은 1951년 2월 16일부터 원산항을 원천 봉쇄하였다.[8] 물론 이 봉쇄 기간 동안에도 원산항을 비롯한 원산 지역에 계속된 폭격이 이어졌다.

폭격은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당일에도 폭격은 계속 되어 휴전 1분 전인 오후 9시 59분[9]까지 폭격이 이어졌다.

3. 결과[편집]


파일:20200103_170145.jpg
파일:attachment/OSB1952.jpg
1950년 여름경
1952년 항공사진

"평양시내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건물이 단 세 채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중략) 전쟁 후 원산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도 평양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평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김진계 구술·김응교 기술, 『조국 상』, 현장문학사, 1990, 182쪽.


이 폭격으로 원산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세워져 있던 항구, 조차장, 공장지대는 완전히 사라졌다. 시민들의 주거지역 또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원산역은 도심이 아닌 외곽에 위치해 있다.

4. 출처[편집]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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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2001, 158-159쪽.[2]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109-114.[3] 김태우, 『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104-105쪽.[4] 원산에는 당시 한반도에서 두번째로 큰 열차수리시설인 원산 기관차 공장이 있었다.[5] 원산정유공장은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큰 정유소였다.[6] 이는 당시 미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 소속 비행기의 98%였다.[7] 여성 195명, 어린이 155명, 노인 122명 포함[8] 이 해상 봉쇄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일까지 이어졌다. 이는 장장 861일의 봉쇄로서 현대사상 가장 긴 봉쇄 기간이다.[9] 휴전협정에는 일체 규정이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부터 효력이 발생한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