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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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제1수석비서관 (1968~1979)

초대
김학렬
제2대
정소영
제3대
김용환

제4대
이경식
제5대
이희일
제6대
서석준

경제제2수석비서관 (1968~1979)

초대
신동식
제2대
오원철

경제제3수석비서관 (1969~1979)

초대
장덕진
제2대
양윤세

경제수석비서관 (1979~2003)


초대
최창락
제2대
이경식
초대
김재익
제2대
사공일
제3대
박영철


초대
박승
제2대
문희갑
제3대
김종인
제4대
이진설
초대
박재윤

제2대
한이헌
제3대
구본영
제4대
이석채
제5대
김인호
제6대
김영섭

초대
김태동
제2대
강봉균
제3대
이기호
제4대
한덕수
제5대
현정택

정책수석비서관 (2003~2004)

초대
권오규

정책기획수석비서관 (2004)

초대
김영주

경제정책수석비서관 (2004~2008)

초대
김영주
제2대
권오규
제3대
윤대희
제4대
김대유

경제수석비서관 (2008~현재)

초대
김중수
제2대
박병원
제3대
윤진식
제4대
최중경
제5대
김대기


초대
조원동
제2대
안종범
제3대
강석훈
초대
홍장표
제2대
윤종원


제3대
이호승
제4대
안일환
제5대
박원주
초대
최상목
제2대
박춘섭




문희갑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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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서구 갑)
제13대
정호용[1]

제13대
문희갑


제14대
정호용





노태우 정부 제2대 경제수석비서관
문희갑
文熹甲 | Moon Hee-gab


파일:99989471-6AE5-4C62-91FE-59FC608A17A1.jpg

출생
1937년 6월 9일 (86세)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1]
거주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관
남평 문씨[2]
현직
푸른대구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
재임기간
제16대 경제기획원 차관
1985년 7월 12일 ~ 1988년 12월 5일
노태우 정부 제2대 경제수석비서관
1988년 12월 5일 ~ 1990년 3월 16일
제28-29대 대구광역시장
1995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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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정송자(鄭松子)[1]
자녀
3녀
소속 정당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2, 13
학력
대구화원초등학교 (졸업)
대륜중학교 (졸업)
경북고등학교 (졸업)
국민대학교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학 / 석사)
경력
제5회 행정고시 합격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사무관 (박정희 정부)
경제기획원 예산국 사무관 (박정희 정부)
경제기획원 방위예산담당관 (박정희 정부)
국방부 예산편성국장 (박정희 정부)
국보위 입법회의 전문위원 (전두환 정부)
경제기획원 경제개발예산심의관 (전두환 정부)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전두환 정부)
민주정의당 국책연구원 정책연구실장
제12대 국회의원 (전국구 53번 / 민주정의당)
제16대 경제기획원 차관 (전두환 정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노태우 정부)
제13대 국회의원 (대구 서구 갑 / 민주자유당)
제28-29대 대구광역시장 (민선 1·2기 / 무소속·한나라당)
국민대학교 총동문회장


1. 개요
2. 생애
2.1. 정치 활동
2.2. 정계 은퇴 이후
3. 선거 이력
4. 소속 정당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rokps.or.kr/1616.jpg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chosun_400000778.jpg
대한민국의 前 관료, 정치인. 독립유공자 문영박의 손자이며, 문태갑 前 국회의원은 그의 사촌 형이다.

대구광역시의 폭염을 낮추는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


2. 생애[편집]


1937년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의 남평 문씨 본리세거지에서 대구우체국장을 지낸 아버지 문긍만(文亘萬)[3]과 어머니 재령 이씨 이재호(李在浩)의 딸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37회)[4], 국민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제관료로 근무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창설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하였다. 이후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을 역임하였다.

경제기획원 예산실장 시절인 1984년에는 방위비를 그동안 유지되어온 "GNP 대비 6%"보다[5] 낮게 책정했는데, 이에 합동참모본부 육군 장성 2명이 권총을 들고 난입해 항의하는 곤욕을 겪기도 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86년 남북 경제회담 수석대표에 임명되었다.

19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같은 해 12월부터 1990년 초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하였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토지 공개념도 도입하려다 땅투기에 열 올리던 재벌 총수들에게 빨갱이 소리도 들었다. 1989년 조순 경제부총리와 함께 토지 공개념 3개법안 입법을 주도하여 통과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 강력한 투기억제책이었는데, 야권의 지지를 받았지만 오히려 여당인 민정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 법안은 10년 뒤에 모두 "법 설계 측면에서"[6] 위헌판결을 받았다. 「택지소유상한제」와 「토지초과이득세」는 지나친 규제라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고 1998년 폐지됐다. 「개발이익환수제」는 2002년 1월부터 부과를 중지했다. 수도권에 대한 부담금 부과는 2004년부터 중지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공개념 정책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여전히 세를 얻고 있다. 토지공개념 관련 경향신문 칼럼(2020-08-03)

또한 분당, 일산1기 신도시 건설을 주도하여 부동산 폭등 억제정책을 주도하였으며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 도시에 영구임대주택 20만 호 건설도 추진하였다.

영종도에 동북아 허브공항을 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이것이 오늘의 인천국제공항의 기원이다. 경부고속철도 건설을 주도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KTX의 기원이다.


2.1. 정치 활동[편집]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그 해 7월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다.

1990년 초, 5.18 민주화운동 관련 여론과 청와대의 압력으로 민주정의당 정호용 국회의원이 사퇴하자 치러진 대구직할시 서구 갑 선거구의 재보궐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무소속 백승홍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7] 하지만 백승홍 후보가 무려 42.5%를 득표하면서[8] 겨우 9% 차이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여당 텃밭 대구에서 3당 합당의 시너지 효과조차 거두지 못한 찜찜한 의정복귀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9][10]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호용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복당한 정호용에게 지구당위원장 자리도 내 주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1995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였다.


2.1.1. 대구광역시장 재임[편집]


민주자유당을 탈당했던 1995년에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럼에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로 TK지역에서 문민정부에 대한 반감이 거세진 상황에 힘입어 자유민주연합 이의익 후보, 무소속 이해봉 후보, 민주자유당 조해녕 후보[11]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경제관료 경력을 내세워 '대구의 분노 선거로 보여주고 대구의 자존심 경제로 살립시다' 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재임 기간 동안 경제시장을 표방했으며,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 역대 민선 대구광역시장 중 유일하게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난 대구광역시 출신 시장[12]이기도 하다.

다만 지난날의 정책 입안 행보와 별개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회창을 지지하여 새로 개편된 "친정" 한나라당에 복당한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대구광역시장 재임 당시 많은 반발을 무릅쓰고 "도심지의 노른자위 땅에" 2.28기념중앙공원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옛 중앙공원을 경상감영공원으로 재정비하고, 쓰레기 매립장을 대구수목원으로 탈바꿈시키고, 도시 곳곳에 나무를 심는 등 대대적인 녹화사업을 실시하였다.[13] 문희갑 시장의 재임기간 동안 600만 그루가 넘는 나무가 대구 시내 곳곳에 심어졌으며, 후임 대구 시장들도 나무심기 사업을 전개하였다.[14]이 사업은 단순 경관 개선 효과를 넘어, 2000년대 중반부터 대구가 전국 최서지역에서 벗어나는 기념비적인 현상이[15] 나타나 주목받게 된다.[16]

나무 심기 외에도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착공과 대구공항의 국제화를 이루어냈으며, 신천대로의 보조격 도로 신천동로를 건설했으나 복잡한 구조로 인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낙동강변을 따라 도시고속도로 건설도 추진하였으나 민자 유치 실패로 무산되었다.

이해봉 전 의원이 시장 시절 구상한 경대사대부중고를 이전시키고 옛 대구상고(현 상원고) 부지[17]를 묶어 대구광역시청 신청사를 건립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무산됐다.#

행정구역 개편 관련해서는 1996년 대구와 경북 전체의 통합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대구와 같은 생활권인 경산시, 칠곡군, 고령군 일부를 대구에 편입해야 한다고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무난하게 시장 직무를 수행했으나, 밀라노 프로젝트로 적지않은 예산이 대구시로 유입되었음에도 막상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래도 대구 지하철 참사를 엉망으로 수습한 조해녕보다야...

2002년 비자금 파동 등이 불거지며 2002년 3월 곧 있을 지방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결국 시장 임기 말엽인 2002년 5월, 지역 건설사인 태왕그룹으로부터 9천여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5월 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0월 23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2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되며 출소는 했으나, 형 확정일로부터 피선거권이 10년간 제한됨에 따라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2.2. 정계 은퇴 이후[편집]


정계 은퇴 후에도 대구에서 거주하며 지역 원로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중이다.

2015년 40대 이상 대구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가운데 역대 대구 민선시장 중 일을 잘한 시장 1위에 꼽혔다. 37.6%의 지지도를 받아서 2위인 김범일 시장(19.6%)보다 2배 가량 지지도가 나왔다. 링크

그래서인지 정계 은퇴 후, 정당과 지역구를 가리지 않고 러브콜을 받고 있다. 문희갑 전 시장 모시기 러브콜 쇄도-2015년 12월 29일 대구일보 기사 본인도 다른 대구 지역 원로들과 달리 민주당계 후보들을 마냥 꺼리지는 않아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2016년 1월 15일에는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사무실을 찾아 덕담을 건넸고김부겸 선거사무실 찾은 문희갑 前 대구시장, 제7대 지방선거를 앞둔 2018년 5월 23일에는 자택을 방문한 진보 성향 홍덕률 교육감 후보에게 덕담을 해주기도 했다. 문희갑 전 대구시장, “홍덕률 후보, 교육감 되면 솔선수범하라”[18]

대구시 녹지 조성사업으로 도시 경관 개선과 폭염을 낮추는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로, 정계에서 은퇴한 현재는 푸른대구[19] 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전부터 각종 논란에 휩싸이더니 대구광역시 코로나19 허위 백신 도입 추진 사건으로 비판이 절정에 이른 권영진 대구시장을 향해서 대통령 바꾸는 것만큼 대구시장 바꾸는 일도 중요하다고 제대로 쓴소리를 날렸다. 사실 이 기사는 권영진의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등 시민들의 비판을 받는 정책에 시민 여론과 반대로 우호적인 논조를 가진 영남일보라 조금 축소 보도된 것으로, 프레시안 기사에선 통합신공항 이전이나 정치적 행보 등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 드러났다.# 이 같은 비판에 권영진 시장 본인은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지만, 권 시장의 측근인 장원용 대구평생교육위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원로의 길'이란 글에서 그를 꼰대라고 비난했다.#

2022년 들어서는 홍준표 수성구 을 의원에게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구광역시장 출마를 권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홍준표 의원은 대권주자인 자신을 향해 대구시장에 출마하라는 말에 불편한 내색을 보였으나 경선 탈락 이후 문 전 시장이 “대구는 더 이상 망할 데도 없고 더 이상 망해서도 안 된다“며 출마를 강력히 권유하자 출마설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이후 홍준표가 대구광역시장 출마를 결심하자 그를 지지하였고, 후보로 확정되자 후원회장이 되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7,040,477 (35.2%)
당선 (53번)
초선
1990
4월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대구 서 갑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41,970 (51.55%)
당선 (1위)
재선[20]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26,763 (27.30%)
낙선 (2위)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광역시장

[[무소속|
무소속
]]

383,272 (36.79%)
당선 (1위)
초선[21]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570,167 (71.98%)
재선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5 - 1990
정계 입문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5
합당[22]

[[무소속|
무소속
]]

1995 - 1997
탈당[23]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997 - 2003
복당

[[무소속|
무소속
]]

2003 - 현재
탈당
정계 은퇴


5. 둘러보기[편집]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전국구 제12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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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61석


이재형

진의종

노태우

왕상은

유학성

이상재

서정화

박종문

강경식

황인성
----
박동진

이용훈
----
나웅배

조일문

권중동

이성렬

김현자

배성동

현홍주

이영욱
----
김영작

조상현

김영정

안갑준
----
김성기

조종호

이상희

류근환

한양순

홍종욱

정창화

김종인

김영구

최병렬

강용식

송용식

지연태

임두빈

정현경

진치범

최영덕

임영득

김집

지갑종

최명헌
~~~~
이종률

조경목

김형효
----
김학준

서정화

김두종

양경자
----
문희갑
~~~~
김양배

정휘동

김장숙
----
박혜경

이철우

안영화

최상진

이성호

이진

정호근

김중위

박성태

김정균

김태수

홍희표

김문기

정동윤

심국무

김종열
신한민주당

17석


신달수

임춘원

고한준

김형경

정재문

한석봉

윤영탁

신병렬

박종률

조영수

김병수

김동욱

이길범

김용오

장충준

최훈

신경설
민주한국당

9석


이태구

박해충

신재휴

손태곤

정상구

최운지

신동준

황대봉

송현섭

한국국민당

5석

----
김종철

정시봉

문병하

김규원

최재구

조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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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파일:민주정의당 심볼.svg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제12대 국회 전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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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진의종
노태우[B]
왕상은
유학성
이상재
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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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식
황인성[B]
박동진[B]
이용훈
나웅배[B]
조일문
권중동
이성열
김현자
배성동
현홍주
이영욱
김영작[B]
조상현
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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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호
이상희
류근환
한양순
홍종욱
정창화
김종인
김영구
최병렬
강용식
송용식
지연태
임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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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덕
임영득
김집
지갑종
최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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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효
김학준[B]
서정화
김두종
양경자
문희갑[B]
김양배[B]
정휘동
김장숙
박혜경[B]
이철우
안영화
최상진
이성호
이진[C]
정호근[C]
김중위[C]
박성태[C]
김정균[C]
김태수[C]
홍희표[C]
김문기[C]
정동윤[C]
심국무[C]
김종열[C]
[B] A B C D E F G H I J K 임기 중 사퇴.[C] A B C D E F G H I J K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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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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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충북
홍선기
심완구
임수복[2]
최각규
주병덕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심대평
유종근
허경만
이의근
김혁규
제주
신구범
[1] 권한대행, 전임자 조순 사퇴 (1997.9.9)[2] 권한대행, 전임자 이인제 사퇴 (1997.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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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평 문씨 집성촌이다.[2] 의안공파-이곡-참의공-의곡파 33세손. 족보명은 문희좌(文熙佐).[3] 족보명 문형채(文馨采).[4] 박성달과 동기다.[5] 일본 <세카이(世界)>誌 야스에 료스케 편집국장이 자신의 칼럼에 "GNP 6% 이상을 책정하면 국가 살림이 거덜나는 건 시간문제"라는 표현을 넣기도 했을 만큼, GNP 기준 시절 국방예산 책정의 상한선으로 간주되었다.[6] 즉, 법안 제정 취지 자체는 헌재에서도 인정했다는 얘기이다.[7] 백승홍은 후일 15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서구 갑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16대 총선부터 서구가 단일선거구로 통합되어 중구에서 출마, 재선 의원을 지냈다.[8] 2005년 대구 동구 을 재선거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이강철 후보가 득표율 44.05%를 기록하기 전까지 대구 지역 역대 범민주계 후보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이었다.[9] 이는 정호용의 후보사퇴가 '지역구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의원직을 사퇴한 데 이어 후보직까지 마음대로 사퇴했다'는 반발심을 초래하고 백승홍 후보가 정호용의 후보사퇴에 정권의 압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정호용 후보 지지자들을 흡수한 것이 주 요인이다.[10]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있었던 선거고 워낙 접전이라 꽤 많은 선거자금이 투입되었는데, 정호용의 후보사퇴로 선거자금이 남은 것이 후일 비자금 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는 관측도 있다.[11] 집권여당 소속임에도 YS가 대구를 홀대한다는 여론과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로 무려 4위(...)로 낙선했다. 대구에서 집권여당, 보수정당 후보가 이렇게 참패한 사례는 전무하다. 조해녕 후보는 이후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선되어 2006년까지 대구광역시장을 역임한다.[12] 조해녕경산시, 김범일예천군, 권영진안동시, 홍준표는 경남 창녕군 출신이다.[13] 사실 대구 도시 녹화사업의 원조는 이상희 전 시장으로, 재임 당시 대구 시민의 기질을 부드럽게 바꾸려고 배롱나무를 심고 신천대로도 그가 구상한 초안에서는 중앙과 양 옆에 녹지를 갖춘 형태였다. 당시 용산동에 있었던 50사단을 수성구 만촌동으로 옮기고 그 부지를 공원화하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무산됐다.[14] 이후 2000만 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었다.(...) 아직도 심고 있다.[15] 연 평균기온이 2도 낮아졌다고 한다.[16] 광주가 대구보다 여름에 더운 것으로 집계되기도 한다. 때문에 박광태 광주광역시장이 대구처럼 나무심기 사업에 나서기도 하였다.[17] 현재는 센트로팰리스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18] 이상희 전 대구시장도 홍덕률 후보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바 있다. #[19] '푸른 대구 밝은 미래, 세계 속의 패션 대구'가 문 시장 시정의 서브슬로건이기도 했다. 위 슬로건은 2021년 현재에도 북대구IC 부근 산 중턱에 있다.[20] 전임자 정호용 의원직 사퇴.[21] 1997.12.3. 한나라당 복당.[22]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2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