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디보 케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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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 공화국 초대 대통령
모디보 케이타
Modibo Keita


파일:modibo keita.jpg

출생
1915년 6월 4일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바마코
사망
1977년 5월 16일 (향년 61세)
말리 바마코
재임
초대 대통령
1960년 6월 20일 ~ 1968년 11월 19일
정당
수단 연맹-아프리카 민주연합

1. 개요
2. 초기 생애
3. 대통령 집권
4. 쿠데타와 실각
5. 수감과 죽음



1. 개요[편집]


말리정치인이자 독재자이다.


2. 초기 생애[편집]


혈통상 말린케족으로, 원래는 교사로 일하고 있다가 1945년부터 말리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56년, 프랑스령 말리의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이 되었고, 1960년 6월 20일, 마침내 말리의 독립을 이루었으며, 독립 후에는 말리 연방의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반불 사회주의 성향의 모디보 케이타와 달리 친불 성향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와의 갈등으로 이에 반발한 세네갈1960년 8월 20일에 말리로부터 분리독립하고 말았고, 말리는 내륙국이 되었다.


3. 대통령 집권[편집]


말리1960년 6월 20일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으며 같은 날 모디보 케이타는 말리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1960년 9월 22일에 말리 공화국을 선포함으로서 프랑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모디보 케이타는 서방국가들 대신 소련 등과 같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 친교를 다지며 친사회주의적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국내 자산들에 대한 국유화 조치를 시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말리수출입회사를 설립하여 국내에서 생산된 공산품과 농산품에 대한 수출권과 수입된 물품들에 대한 분배권까지도 독점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1962년에는 프랑스가 주도하는 CFA 프랑/서아프리카에서 탈퇴하여 독자적인 말리 프랑을 창설하였으나 국내적으로 많은 혼란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케이타는 이 조치에 대항하는 야당 정치인들인 하마둔 디코와 필리 시스코 같은 인사들을 1962년 7월20일에 상인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숙청했다. 모디보 케이타가 실시한 여러 사회주의적 조치들은 1967년 말리 프랑에 대한 50%의 평가절하를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높은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켜서 말리 경제를 심각한 위기로 몰고 갔다. 그러나 케이타는 더욱 국가적으로 사회주의화를 가속화 시켰는데. 대표적으로 1967년 8월 22일에 중국문화대혁명을 모방하여 말리의 문화혁명을 선포하고 이를 위해서 그 동안 국정운영을 총괄했던 국가정치국을 해체하고 1966년에 설치된 혁명방위국가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수정하여 그 기능을 대신하도록 했다. 이 위원회는 말리의 모든 지역의 지역위원회 뿐만 아니라 민병대까지 설치하여 이러한 '혁명'을 행정적으로나 무력적으로 수행하는 데 크게 기능했다. 또한 혁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고위 관료와 민병대의 개별인사들까지도 토지소유와 같은 주요 이권을 차지하거나 강탈하면서 전국적인 불만이 쌓아가기 시작하였다. 1968년 1월 16일에 말리 국회는 모든 권한을 혁명방위국가위원회에 이관하고 자진 해산하였으며 모디보 케이타는 혁명방위국가위원회의 온건파 인사들을 숙청하고 강경파 인사들을 등용하면서 민병대들을 동원하여 정권에 불응하는 군 장성 및 고위 관료와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체포,구금,처형 등을 법적 절차 없이 진행하는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4. 쿠데타와 실각[편집]


이러한 무분별한 모디보 케이타의 초법적인 권력 행사는 혁명방위국가위원회와 군부 사이의 갈등이 깊게 만들었으며 1968년에 들어서는 극에 달했다. 혁명방위국가위원회는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들을 동원했으며 이것이 군부내의 불안과 불만을 극대화시켰으며 또한 모디보 케이타가 기존 군부를 해체하고 민병대를 중심으로 군부를 재편할 것이라는 소문 역시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따라서 군부와 민병대들의 충돌도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군부에 모디보 케이타에게 민병대를 해체하거나 군부의 통제하에 두는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디보 케이타는 거부하였으며 비밀리에 주동자들에 대한 체포계획을 세웠으나 이 정보가 군부내로 들어갔다.

1968년 11월 18일 밤에 젊은 장교 14명들은 중위 무사 트라오레를 중심으로 케이타 정권에 대한 타도를 결의했다. 이들은 당시 모디보 케이타의 무분별한 좌파적 사회주의 정책이 국가를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판단하고 좌파척결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다. 다음 날인 19일 오전 쿠데타군은 말리의 도시 중 하나인 몹티에서 개최된 지역경제 관련 포럼에 참석하고 바마코로 돌아오던 모디보 케이타를 쿠릴포로 인근에서 체포하고 혁명방위국가위원회의의 위원들과 정부 내의 핵심 관료들을 체포하고 감금하였다. 민병대의 수뇌부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체포되거나 제거되었으며 민병대의 젊은 병사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쿠데타군에게 항복하였다. 11월 19일 정오에 무사 트라오레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케이타 정권의 종식을 선언하고 쿠데타 주역들을 중신으로 국민해방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국정운영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5. 수감과 죽음[편집]


실각한 모디보 케이타는 쿠데타군에 의해 감옥으로 보내졌으며, 1977년 5월 16일에 바마코의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향년 6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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