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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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us Lucretius Carus
(B.C. 99 ~ B.C. 55)

1. 개요
2. 생애와 사상
3. 기타



1. 개요[편집]


기원전 1세기에 활동한 로마 공화국시인, 철학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는 현재까지 전승되는 몇 안 되는 에피쿠로스 학파 텍스트로 알려져 있다.[1] 그러나 세부적으로는 에피쿠로스와 구분되는 그만의 독자적인 사상을 남겼다.

2. 생애와 사상[편집]


기원전 99년에 태어나 기원전 55년 약 44세의 나이로 죽은 것을 제외하면,[2] 루크레티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다. 전승에 따르면 루크레티우스는 애인이 준 사랑의 묘약을 먹고 광기에 빠졌는데, 제정신이 들 때마다 쓴 책이 바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고 한다.

루크레티우스는 철저한 무신론유물론에 기반해 합리론쾌락주의 입장을 취했는데,[3] 이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현재 기준으로도 참신하고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대의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면, 그 모습이 떠오르고 그녀의 달콤한 이름이 귓가에 울리리라. 그러나 그대는 그 모습으로부터 벗어나 사랑을 끊어내고, 그대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 아무 몸 안에 그대의 정액을 쏟아부어라. 단 한 명의 애인을 위해 즐거움을 인내하면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마주할 뿐이니, 고름이 양분을 먹고 자라나 만성질환이 되고, 하루하루 불안이 부풀어 그대를 짓누르리라. 그러니 새로운 일에 몰두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라. 자유롭게 배회하는 베누스[4]

뒤쫓아 배회하며, 그대의 혼란을 다른 곳으로 돌려라.

ㅡ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4권 1061-1072

이처럼 대놓고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권유하는 투로 글을 써서(...) 5세기 이후 기독교 사회에 접어든 유럽에서 루크레티우스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가령 교부 히에로니무스는 아예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그의 사상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는데, 이로 인해 루크레티우스의 저작은 천 년 넘게 서구 지성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러서야 루크레티우스는 지식인들에게 재발견되어, 후대 많은 사상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영향을 받은 유명인으론 대표적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니콜로 마키아벨리, 미셸 드 몽테뉴, 조르다노 브루노, 토머스 제퍼슨, 퍼시 비시 셸리, 프리드리히 니체, 질 들뢰즈 등이 있다.

3. 기타[편집]


베르길리우스가 젋은 시절에 무척 좋아했던 시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성인이 된 이후 스토아 학파로 기울었기에,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적 영향은 미미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그 사상적 영향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아이네이스〉의 주인공 아이네이아스도 추상적인 가치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 평론가해럴드 블룸은 루크레티우스를 시인으로서 극찬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의 본연 그대로, 강렬함 속에 있는 그 위대한 힘으로 '신성한 즐거움'을 노래한다. 우주론적 자기 확신을 갖고 있는 루크레티우스는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를 무관심한 일로 돌리라고 권한다. … 베르길리우스의 시에 비해 그리 다양하지 않은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내게 끼친 미학적 영향은 베르길리우스만큼 크지 않지만 읽는 보람은 훨씬 더 크다.[5]

해럴드 블룸

[1] 사실상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들의 생애와 그들의 주장》과 더불어, 현존하는 유이(唯二)한 에피쿠로스학파 자료이다.[2]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과격하게 요약하면, "이 세상에 추상적인 가치는 없다. 오직 물질 뿐이다. 그러니 즐기며 살아라!"라고 할 수 있다.[4] 창녀에 대한 은유로도 해석한다.[5]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세계문학의 천재들」, 손태수 역, 들녘, 2008,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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