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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Ἱππίας
Hippias of Elis

1. 개요
2. 엘리스의 히피아스
3. 아테네의 히피아스


1. 개요[편집]


고대 그리스에서 유명한 히피아스는 두 사람이 있는데, 엘리스의 히피아스와 아테네의 히피아스가 있다. 엘리스의 히피아스는 소피스트이자 현대적 관점으로는 철학자이며, 아테네의 히피아스는 정치가이다.


2. 엘리스의 히피아스[편집]




엘리스의 히피아스는 기원전 460년 즈음에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천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스 전역을 여행한 탓에 풍물에 능통하고 박식했다. 스스로 고안해낸 기억술로 인해 기억력에 자신감이 있었으며, 한 번에 50개의 이름을 외울 수 있었다고 한다. 풍문에 따르면 기억력을 보강해주는 약물도 만들었던 애용했던 모양이다. 천문학, 수학, 기하학, 족보, 역사, 신화, 회화, 조각, 음악, 글쓰기 등 수많은 것을 강의할 수 있었다고 하며 본인 스스로도 문학 작품을 썼던 모양이다.

이와 같은 박식함으로 인해 그는 널리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스파르타에 자주 다녀왔다고 한다.

반면 플라톤은 히피아스를 대화편에서 땅콩 까듯 까는데,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나타나는 히피아스는 거만하고 허영심이 많은 모습이며, 많은 주제에 대해 알지만 어느 하나라도 깊이 있게 알지는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히피아스는 올림픽 승리자의 목록을 올림피아드 지방의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했으며, 이를 통해 투키디데스가 그의 저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수학에 있어서의 공헌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철학사가로 추정되기도 한다. 히피아스 저술의 인용으로 보이는 문구가 전해지는데, 그 구절에서는 오르페우스, 무사이오스, 헤시오도스, 호메로스와 기타 등등을 언급하며 이들 주장의 공통점을 엮어 보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플라톤이 선배 철학자들을 능숙하게 계보로 정리하는 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헤르만 딜스와 로자몬드 켄트 스프라그가 함께 지은 책에서는 히피아스를 자연법의 창시자로 본다. 자연법은 대체될 수 없는데 왜냐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엘리트 계층이라 할지라도 그 개개인은 사회라는 덩어리 안에서는 다른 이들과 구분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회는 마치 서로서로가 서로서로에 대한 개인 정보를 잘 모르는 익명인 것처럼 대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1] 이는 키니코스 학파스토아 학파를 거쳐 로마법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3. 아테네의 히피아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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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정
솔론
평지당 리쿠르고스 | 해안당 메가클레스 | 산지당 페이시스트라토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당쟁 승리, 정권 장악
참주정
페이시스트라토스
히피아스
히피아스
히파르쿠스
스파르타-알카메온가의 참주정 축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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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고라스
클레이스테네스
클레이스테네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델로스 동맹
아테네 제국
클레이스테네스
키몬
페리클레스
에피알테스
민주정의 등장
아테네 제국
페리클레스
민주정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 제국
페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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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파기 및 붕괴
스파르타 제국에 복속
민주정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2대 참주이자 마지막 참주. 참주정을 구축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아우 히파르쿠스와 공치제였으나 히파르쿠스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홀로 통치하게 되었다. 상당히 폭압적인 통치를 펴서 많은 미움을 샀으며 결국 아테네 망명객들이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그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으로 도망쳐 마라톤 전투 당시 페르시아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참전,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재위 초기엔 여러 도시를 통합시키기 위해 제우스 신전디오니소스 신전 건축을 주도하였고 아고라의 서쪽, 폴리아스 신전을 보수하는 등 아테네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동생이자 공치제인 히파르코스가 기원전 514년 축제가 한창인 아테네에서 아리스토게이톤에게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폭정을 일삼게 되었으며 연이은 폭정으로 귀족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자 히피아스는 람사쿠스의 왕과 정략결혼을 통해 외부 세력을 끌여들이려 했으나 이는 귀족들과 시민들 전체를 반발하게 만들었고 기원전 510년 알크메온가(家)가 스파르타 국왕 클레오메네스 1세를 끌여들여 아테네를 침공했고, 히피아스를 축출시켜[2] 참주정을 멸망시켰다.[3]

추방당한 히피아스는 아케메네스 왕조로 건너가 다리우스 1세의 신하가 되어 그들의 비호를 받았으며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원정할 때 그의 앞잡이가 되었다. 이후 아테네의 참주로 복위를 목적으로 페르시아군에 참잔하여 마라톤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하고 그 직후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1] 고대 폴리스 세계가 도시국가인 것을 감안해 보면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장이다. 왜냐면 이 말은 그 전까지 폴리스의 법정과 판결은 한 개인에 대한 정보와 배경을 바탕으로 진행되고 이루어졌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아, 물론 소크라테스의 사건을 가만 생각해 보면 피리아스의 이 발언이 없어도 개인정보가 중요했겠구나 하는 사건은 있다. 사실 법의 차등적용은 현대사회에서도 끊임없이 문제시되고 있으니 고대에는 정말 난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2] 이미 귀족들과 시민들 전체가 폭정을 일삼은 히피아스를 증오한터라 그를 위해싸울 생각이 없었고 스파르타군과 손잡아 히피아스를 붙잡아 가두었다. 히피아스는 재판에서 사형을 면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추방당하고 만다.[3] 이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립하는걸 감안하면 얄궃지만 사실 스파르타도 아테네 못지않게 참주정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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