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제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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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권력에 관해서는 그 어떤 인간도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그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게 헌법의 사슬로 묶어놔야 된다.
- 토마스 제퍼슨 (1798, 버지니아-켄터키 결의안 중)
미국의 제3대 대통령. 미국 건국의 주역들 중 한 명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통령 뿐만 아니라 철학자, 사상가, 건축가, 교육자, 초대 국무부 장관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은 제퍼슨 민주주의라고도 불린다.
2. 약력[편집]
- 1779년 6월 제2대 버지니아 주지사 (1779년 6월 1일~1781년 6월 3일)
- 1789년 9월 초대 국무장관 (1789년 9월 26일~1793월 12월 31일)
- 1797년 3월 제2대 미국 부통령
- 1801년 3월 제3대 미국 대통령
3. 일생[편집]
3.1. 대통령이 되기 전[편집]
건국 초기의 미국 대통령들이 대부분 그렇듯, 제퍼슨도 부유한 농장주 가문 출신 사람이었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서는 변호사가 되어 여러 법 문제를 다루게 되었고, 나중에는 식민지 의회의 의원까지 지내게 된다. 그러나 미국 식민지와 영국 정부는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때 제퍼슨은 영국 본토가 식민지에서 벌이는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다.
이후 미국 독립전쟁에서 그는 미국을 지지하였고,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해 인권 등의 문제에 대해서 작성하였다. 이렇듯 제퍼슨은 인권 문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억압적인 정책에 반대하였다.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 It is it’s natural manure.
자유의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피는 즉 자유의 선천적인 거름이다.
그 후 버지니아 주지사와 프랑스 공사를 연연하고 국무장관의 자리에 올라 반연방주의(공화주의)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존 애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등의 연방주의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들의 대립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 독립전쟁 후 군비 등으로 생긴 채무를 각 주가 균등하게 나눠서 갚느냐, 아니면 각자 알아서 갚는가의 문제. 빚을 덜 진 주의 이익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제퍼슨은 해밀턴의 균등한 분배를 반대하였다. 결국 해밀턴은 수도를 워싱턴 D.C.로 이전하자는 합의안을 이끌어 각 주가 빚을 균등하게 갚자고 타협하였다.
1794년에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났는데, 혁명 프랑스의 미국 공사 에드몽 주네가 (중립 포지션을 취하는) 미국을 비판하며 '혁명의 적 늙다리 워싱턴을 처형해야 한다!' '프랑스가 원하면 얼마든지 미국을 전복시킬 수 있다!' 며 패기롭게 떠들어댄 것이 컸다. 친불파 포지션이었던 제퍼슨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이었을 것이다.
(사실 프랑스도 미국 독립전쟁에 20억 리브르 이상을 썼는데, 미국이 미적미적 중립을 취하니 열불이 나는 게 당연했다. 물론 해군 말아먹은 주제에 처형이니 전복이니 외친 주네는 그시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정신나간 수준이었다.)
3.2. 선거 출마[편집]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불출마 선언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은 연방주의자들의 후보인 존 애덤스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으나, 당시에는 2등이 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부통령이 되었고 당연히 제퍼슨은 사사건건 대통령 애덤스의 정책에 반대하며 그와 대립했다.
3.3. 대통령이 되다[편집]
... a wise and frugal government, which shall restrain men from injuring one another, which shall leave them otherwise free to regulate their own pursuits of industry and improvement, and shall not take from the mouth of labor the bread it has earned. This is the sum of good government, ...
... 현명하고 검소한 정부로서,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는 못하게 하되, 그 외에는 각자에게 맡겨 자유로이 스스로의 근면과 발전을 자율적으로 추구하도록 하며, 노동을 통해 얻은 양식을 빼앗지 않는 것. 좋은 정부라 함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이고, ..."
대통령 취임 연설 中
그 후 다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1801년 3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꽤 험난했다. 당시 선거에서는 토머스 제퍼슨과 에런 버가 선거인단에게서 정확히 동수(73표)의 표를 얻어 1801년에 하원 투표로 넘어갔는데, 35번이나 투표를 치르고도 대통령이 결정되지 않았다가 36번째 투표에서 메릴랜드, 버몬트, 델라웨어,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입장을 바꿈으로써 제퍼슨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연방주의자들이 그나마 제퍼슨보다 성향이 가까운 버를 밀어주다가, 연방주의자의 거두이자 버와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36번째 투표 직전에 입장을 번복하고 정적인 제퍼슨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미국에는 16개 주가 있었는데, 처음 투표 당시에는 8개 주가 제퍼슨을 지지했고, 6개 주가 버를 지지했으며, 2개 주가 기권을 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과반수 주의 지지를 얻어야 대통령이 될 수 있기에 제퍼슨은 딱 한 주가 모자라서 첫 투표에서 대통령이 되지 못했지만 결과를 볼 때 제퍼슨이 대세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었는데, 버는 제퍼슨과 정적이었기 때문에 끝끝내 후보 사퇴를 거부했고, 결국 투표가 반복된 것이다.
버는 당시 헌법에 따라 2등 득표자로서 부통령이 되었지만 제퍼슨의 정책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웃긴 건 에런 버는 제퍼슨과 같은 민주공화당 소속이었다는 것. 같은 당 소속인데도 버와 제퍼슨은 죽어라고 싸워댔다. 사법부 역시 대부분은 전임 존 애덤스가 임명한 인물들이어서 사사건건 제퍼슨을 견제하였다. 그래서인지 제퍼슨은 해밀턴과의 협의로 연방주의자들과 타협해 내각 자리를 마련해주고[3] 1기 재임 시절엔 연방주의 기조도 무리하게 바꾸지 않는다. 허나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연방주의자들의 정책은 높은 과세로 인기를 잃은 데다 수장들이 정치를 은퇴하는 등 지도부가 사라져[4] 점차 소멸하여간다.
제퍼슨의 재임 기간 동안 벌어진 큰 사건으로는 미국의 영토를 크게 넓힌[5] , 당시 나폴레옹과 한 루이지애나 거래가 있으며[6] 해적들을 토벌하기도 했다. 미국 시민권을 따기 위해 이민자의 체류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늘린 외국인법이 폐지되었고, 보안법으로 체포된 기자들과 시민들도 석방시켰다.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하였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문명화시키려고 노력했다.[7] 정확하게 말하면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을 미국의 영토로 선언해 동부 인디언들은 백인 문화로 편입시키고 나머진 미시시피 서부로 몰아내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이때부터 상당수 원주민들과는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또한 클라크와 루이스 원정대(Lewis and Clark Expedition)를 보내어 미국 서부에 대한 과학적 탐사를 시키지만, 서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포함하고 있어서 당시 서부를 통치하고 있던 스페인과 은근한 신경전도 벌인다.
3.4. 퇴임 이후[편집]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826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사망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몇 시간 후 그의 정적이자 친구, 전임 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도 세상을 떠났다.[8]
그의 묘비명은 이렇다.
보다시피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은 안 적혀 있다. 세 가지는 가장 기억되고 싶은 자기의 흔적을 적은 것. 어차피 반연방주의자로서 대통령을 그렇게 기념할 만한 자리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4. 가족관계[편집]
부부의 사이는 매우 좋았던 것으로 전해지나 안타깝게도 마사는 마지막 아이를 낳은 지 4개월 만인 1782년 9월 6일, 난산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이는 제퍼슨을 큰 비탄에 빠지게 했다. 아내의 죽음 이후 3주 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정상적인 생활을 못했을 정도.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사는 임종 때 남편에게 자기가 죽은 뒤에도 재혼하지 않을 것을 부탁했고[12] 그는 아내에게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아내에게 한 약속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후 제퍼슨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13]
하지만 마사 제퍼슨과의 결혼 당시 딸려온 마사의 이복여동생 겸 흑백혼혈 노예인 샐리 헤밍스와 아내 사후 오랫동안 내연 관계에 있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실제 샐리가 아버지가 불분명한 쿼터혼혈 아이들을 여러 명 낳은 건 사실이고,[14] 스캔들이 터진 게 제퍼슨의 아내가 이미 죽은 후인지라 샐리가 죽은 제퍼슨의 아내 대신 제퍼슨의 정부 노릇을 했다는 건 당시부터 오랫동안 미국 정가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이 떡밥은 당시부터 정적들에게 회자되었는데, 제퍼슨 본인은 샐리의 아이들에 대한 정적들의 비난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샐리도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제퍼슨의 처제라는 점과 샐리의 어머니도 백인 혼혈[16] 이고 제퍼슨 장인의 몸종이었다. 골때리는건 첫 아이의 나이를 역산하면 샐리가 제퍼슨과 첫 성관계를 맺은 나이는 대략 10대 중반 쯤으로 추정된다.
5. 평가[편집]
토머스 제퍼슨은 그가 내세운 사상과 행적이 오늘날에도 평가를 받아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에도 새겨지는 등 대우를 받고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그가 내세운 공화주의와 인권주의,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미국의 영토를 크게 넓힌 점 등 미국의 성장(Growth)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미국에서 평가나 인지도가 높은 대통령 중 한명이다.[19] 리버럴이나 리버테리안들이 좋아하는 대통령이기도 하다.[20][21]미국 정신에 대한 정치적 선지자(先知者)의 표현은 지금까지도 세계에 혁명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A political visionary's expression of the American mind still inspires revolution around the world.
타임지, 1999년 송별호에서 선정한 각 세기의 인물 중 18세기 인물로 토머스 제퍼슨을 선정하며. 기사 원문
실제 그가 내세운 반연방주의 사상과 인권주의는 연방 정부의 지나친 권력 독점 횡포를 막고[22] 주 정부와 국민들의 권리를 수호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허나 한편으론 그의 지나친 중앙 정부 견제[23] 로 인해 미국에 강한 정부가 없어 결국 남북전쟁의 홍역을 치러야 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 본인이 대농장주로 노예들을 부리기도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24] 그가 내세운 인권주의도 결국엔 백인이나 특정 계급만의 인권, 자유 아니냐는 식으로 내로남불이라고 까는 사람도 있다. 어린 흑인 노예와 만나[25] 사생아까지 낳았을 확률이 높다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런 점을 들어 2020년 BLM 운동 당시 제퍼슨의 동상 역시 철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일부는 실현되기도 했다.#
허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이 당대 심지어 현대의 시각으로 봐도 꽤나 진보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제퍼슨을 비롯한 반연방주의자들의 이러한 견해는 후에 권리장전(수정헌법)이라는 개념으로 도입된다. 종교관에서도 그의 자유주의적 성향이 묻어나는데, 당시만 해도 영국이 성공회를 국교로 두듯이 미국도 주에 따라 국교를 정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13개 주로 이뤄진 미국 연방을 운영하는 데에 기독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영국처럼 국교를 따로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 상충했던 것. 실제로, 메릴랜드는 가톨릭, 펜실베이니아는 퀘이커, 버지니아/뉴욕/조지아는 성공회가 공식 종교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퍼슨은 “진리는 위대해서 홀로 내버려둬도 승리한다. 우리는 성공회도, 가톨릭도 침례회도 아니다. 모두 크리스천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공화주의자들과 함께 국교제 폐지를 주장했고 정교분리 원칙을 못박았다. 이는 이신론적인 그의 종교관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제퍼슨은 중상주의를 주창한 해밀턴과 반대로 그 자신이 지주이기도 한만큼 중농주의를 주창했고, "나는 정부에 자신의 힘을 믿고 도전하며 법도 어길 수 있는 주식회사 재벌이 생겨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상인에겐 조국이 없다. 그들에겐 태어난 곳이 돈을 긁어모을 수 있는 땅만큼 사랑스럽지 않다.", "나는 확신한다. 은행이 군대보다 위험하다. 다음 세대가 갚아야 할 채권의 발행을 정당화하는 재정 이론은 후손들을 상대로 한 대규모 사기극일 뿐이다.", "정부가 돈 놀이하는 기관과 돈 많은 기업들 손아귀에 떨어지는 날, 민주주의와 미국 독립도 종말을 고할 것이다." 등의 말을 하며 재벌의 탄생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 그는 자작농을 공화주의 미덕의 모범이라 보고 도시와 자본가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하여튼 현대 진영에선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인물.
언론사를 운영했던 경력이 있다보니 당시에 남겼던 몇몇 말들이 아직까지도 언론 자유와 관련해 유명한 명언으로 회자된다. 대표적인 것이 상단에 인용한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 발언이다. 또 하나는 "언론이 자유롭고 국민 모두가 글 읽을 줄 아는 나라에서라면 만사가 안전할 것이다.". 언론 사상사에서도 신문이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한 인물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it left to me to decide whether we should have a government without newspapers, or newspapers without a government, I should not hesitate a moment to prefer the latter. But I should mean that every man should receive those papers and be capable of reading them.
...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하겠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받아 보고 읽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대통령 취임 14년 전, 신문사 사장 시절의 발언.
6. 종교관[편집]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나는 나만의 종파에 속해 있다.
1819년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로부터 예수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아테나가 제우스로부터 태어났다는 우화와 같은 수준으로 여겨질 날이 언젠가 오게 될 것이다. (중략) 이성의 빛과 생각의 자유가 미국에서 이런 인위적 발판을 제거할 것으로 생각한다.
1823년
The god who gave us life gave us liberty at the same time.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토마스 제퍼슨의 행적에 비추어, 그가 이신론자였다고 주장한다. 특히, 제퍼슨 성경은 토마스 제퍼슨이 이신론자였다는 근거로 활용된다. 토마스 제퍼슨은 복음서의 내용을 편집해 자기만의 성경을 만들었는데, 이 요약본에는 예수가 행한 기적들, 죽은지 3일만에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모두 지워져 있다. 제퍼슨 성경 스캔본. 사실 제퍼슨 외에도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 중 상당수가[26] 당시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이신론, 무신론에 빠졌다는 해석은 지금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퍼슨은 이 부분이 특히 잘 드러나는 편이다. 이런 제퍼슨의 이신론적 성향과 당대 기독교에 비판적인 입장 때문에 당시 미국 전역의 목사들은 제퍼슨에게 적대적인 편이었다.[27]
7. 기타[편집]
다재다능하고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지만 의외로 언변에는 그다지 능숙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본인 역시 대단히 수줍음을 많이 타서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싫어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 연설한 것이 단 두 번이었을 정도다. 그것도 둘 다 대통령 취임 연설이었다. 드라마 《존 애덤스》에서도 제퍼슨이 애덤스에게 "저는 당신처럼 능변의 재능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동지이자 라이벌인 애덤스가 변호사로 상당히 변설에 뛰어났던 것과 달리 제퍼슨은 학자 출신이자 독립선언서의 대부분을 기초했던 만큼 말빨보다는 글빨이 더 좋았던 인물이었던 듯.
미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엄친아 중 하나로, 지성이라는 측면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 제퍼슨의 지성에 견줄 만한 사람은 정치학자이자 행정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우드로 윌슨 정도 뿐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제퍼슨은 살아생전 무려 7개의 언어를 구사하였는데, 아일랜드 시인 오시안의 작품들을 아일랜드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만든걸로 유명한 암호장비인 제퍼슨 디스크는 이후 2차 세계대전을 넘어 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까지 쓰이게 된다.
맥앤치즈를 좋아했으며, 벤자민 프랭클린과 마찬가지로 술을 매우 즐겼다. 특히 와인을 좋아해서 와인에 대해 남긴 발언이 여럿 남아있는데, 개중엔 "와인을 싸게 살 수 있는 나라치고 국민이 취해 있는 법이 없고 증류주가 와인을 대신하는 나라치고 국민이 깨어 있는 법이 없다."란 발언도 있다. 직접 포도를 재배해서 와인을 제조하려 했으나 제조 기술도 부족하고 품종도 포도주에 맞지 않아 실패한 적도 있다. 몬티첼로에 있는 저택에는 와인 수천 병을 저장한 와인셀러까지 있었다.
엄청난 매머드 덕후였다. 그 이유인즉슨 미국이 건국될 당시만 해도 신대륙은 볼품없는 소동물만 돌아다니며[28] 이는 원주민과 식민지 출신 백인에게도 영향을 미쳐 구대륙의 인간들보다 열등하다는 우생학적 사상이 팽배했는데, 당연하겠지만 제퍼슨은 이를 굉장히 기분나빠했다. 그러던 중 제퍼슨의 수중에 마스토돈(당시에는 매머드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화석이 들어왔고, 미 대륙에 과거에 이런 큰 짐승이 살았다는 것에 감동했기 때문. 이후 제퍼슨은 이런 크고 아름다운 짐승이 그냥 멸종했을린 없다는 생각을 가졌고, 이는 제퍼슨이 루이지애나 구입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설이 있다.
드라마 《슬리피 할로우》에서 현대에 부활한 독립전쟁 시대의 군인인 이카볼드 크레인이 제퍼슨의 불륜설을 듣고 멘붕하는 장면이 있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 3에서 등장한다. DLC인 워싱턴 왕의 폭정의 3편 에피소드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독립전쟁 후에 폭정을 일삼는 워싱턴을 막기 위해 잔존한 영국군들을 이끌고 뉴욕의 그의 왕궁인 피라미드를 공격하나 도리어 포위당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려던 찰나에 주인공 라둔하게둔에게 도움을 받아 탈출하고 이후, 함께 워싱턴을 몰락하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이 DLC는 선악과가 보여주는 환상인지라 진짜 역사는 아니다. 여담으로 아직 대통령 되기 전이라서 그런지 게임에서는 위에 나온 초상화보다 꽤 젊게 나온다.
미국 조지아주에 제퍼슨빌이라는 도시가 있고, 그 옆 도시인 루이스빌에 이 대통령의 이름을 딴 학교가 있다.
7.1. 숫자 3과의 관계[편집]
기이하게도 유난히 3이라는 숫자와 연관이 많다.
- 자기 가문에서 세 번째로 '토머스'라는 이름을 가졌다.
- 셋째 아들.
- 세 군데의 학교를 다닌 끝에 윌리엄 & 메리 대학교 졸업
- 33세에 독립선언서 기초
- 독립선언 기초위원 3번 역임
- 제3대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로 3년 근무
- 워싱턴 내각에서 세 번째로 각료에 임명(국무장관)
- 미국 철학협회 제3대 총재
- 존 애덤스에게 3표 차이로 패배하여 2대 부통령 역임
- 미합중국 제3대 대통령
- 사망 당시의 나이도 83세
- 묘비에 쓴 것도 세 가지
-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세 번째의 장신. 1위는 에이브러햄 링컨(193cm), 공동 2위는 린든 B. 존슨, 도널드 트럼프(192cm), 제퍼슨은 190cm이다.
- 한글로 이름과 성 모두 세글자.
- 이름, 성 영어 알파벳 모두 3의 배수.
- 역대 미국 대통령 보유 자산 순위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