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황족

최근 편집일시 :

분류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대한제국의 구황실에 대한 내용은 대한제국/황실 문서
대한제국/황실번 문단을
대한제국/황실#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 펼치기 · 접기 ]
신위
천황 (역대 천황 · ) · 황후 (역대 황후 · ) · 황태후 · 태황태후 · 상황 () · 상황후 · 황사 [황태자 · 황태손] · 황사비 [황태자비 ([[일본/역대 황태자비|역대 황태자비]]) · 황태손비] · 섭정 () · 친왕 · 친왕비 · 내친왕 · 왕 · 왕비 · 여왕
칭호
어칭호 · 미야고
분가
미야케 () · 구황족 () · 세습친왕가 ()
가계도
황실 전체 가계도 · 구황족 전체 가계도 · 내정 가계도 · 아키시노노미야 가계도 · 미카사노미야 가계도 · 다카마도노미야 가계도
상징
십육엽팔중표국문 · 니시키노미하타
거주
일본의 어소 (고쿄 · 교토고쇼 · ) · 일본의 이궁 ()
신앙 및 궁중제사
삼종신기 () · 아라히토가미 · 이세 신궁 · 천양무궁의 신칙 · 황조신 ()
행사
일반참하 · 천황탄생일 · 황기2600주년 기념 봉축곡
제도
황기 · 황실전범 (제국) · 황적이탈 ()
조직
궁내청 · 내대신부 (역대 내대신 틀) · 추밀원 (역대 의장 틀) · 황궁경찰본부 · 황실회의 (의원 틀)
역사
결사팔대 · 남북조정윤론 · 만세일계 · 북조 천황 () · 인세이 · 추존 천황 ()
문제
후계자 대책





한국어
구황족
구궁가
한자(구자체)
舊皇族
舊宮家
일본어
신자체
旧皇族
旧宮家
히라가나
きゅうこうぞく
きゅうみやけ

1. 개요
2. 역사
2.1. 세습친왕가
2.2. 황적이탈
3. 구 미야케
4. 1947년 기준 가계도
5. 복귀 주장
6. 근황
7. 계보
7.1. 스코 덴노 ~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7.2.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이후


1. 개요[편집]


구황족(舊皇族)은 1947년 10월 14일에 일제히 황적이탈미야케 11곳 및 황족 51명과 그들의 남계 자손을 일컫는다.


2. 역사[편집]




2.1. 세습친왕가[편집]


일본의 현 황족은 13세기 남북조시대 북조계열로 현 후시미계 직통이 기반인 3대 세습친왕가에 있었다. 각각 후시미노미야, 가쓰라노미야, 아리스가와노미야 3곳으로 이 가운데 후시미노미야가 적통으로 천황을 계속 내고 가쓰라노미야와 아리스가와노미야는 15세기에 생긴 후시미계 방계 세습친왕가였다.

이렇게 500년 가까이 3가문의 세습친왕가를 유지했지만, 아리스가와노미야와 가쓰라노미야가 200년의 시간 사이 이미 너무나도 황통과 먼 가문으로 바뀌고 후시미노미야 하나만으로는 후손이 모자랐다. 그래서 17세기의 히가시야마 덴노가 황통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새로운 세습친왕가를 만들었는데, 이때 현 직황족의 직계 조상인 간인노미야가 탄생했다. 이것이 4대 세습친왕가이다.

그리고 혹시나가 역시나로, 히가시야마 천황이 죽은 지 4대 70년 만에 후시미계 직계 황통은 고모모조노 덴노를 마지막으로 단절한다. 이때 간인계에서 고카쿠 덴노를 내면서, 황통은 간인계로 넘어갔다. 후시미노미야에서 간인노미야로 주도권이 넘어간 뒤 후시미노미야에서는 수많은 분가들이 나오는데, 이 가문들이 이른바 지금 구황족으로 부르는 가문 가운데 후시미계의 방계 10이다. 이들은 모두 후시미노미야의 19대 당주 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伏見宮貞敬親王)의 자손이 개창한 가문이었다. 세습친왕가 간인노미야 역시 그의 손자인 고토히토 친왕이 계승하면서 10궁가 중 하나가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세습친왕가 가운데 아리스가와노미야와 가쓰라노미야 궁가는 단절했다. 그 뒤, 후시미노미야를 포함한 11궁가는 1947년 10월 14일 모두 황적이탈하여 다이쇼 덴노의 후손들인 직황족만 남게 된다.


2.2. 황적이탈[편집]




[ 펼치기 · 접기 ]

덴표 8년(736년) 강하


덴표 11년(739년) 강하


















덴표 11년(739년) 강하


덴표칸포 3년(751년) 강하


덴표칸포 4년(752년) 9월 12일 강하


















덴표칸포 7년(755년) 강하


덴표칸포 9년(757년) 강하


덴표칸포 9년(757년) 강하


















덴표호지 3년(759년) 복귀


덴표호지 8년(764년) 강하


덴표진고 원년(765년) 강하


















덴표진고 원년(765년) 강하


진고케이운 3년(769년) 5월 강하


















호키 2년(771년) 복귀


















호키 2년(771년) 복귀


호키 2년(771년) 7월 복귀


호키 2년(771년) 9월 강하


호키 3년(772년) 12월 복귀


















호키 5년(774년) 12월 복귀


엔랴쿠 6년(787년) 2월 5일 강하


엔랴쿠 21년(802년) 12월 27일 강하


















엔랴쿠 23년(804년) 6월 21일 강하


엔랴쿠 25년(806년) 4월 16일 강하


고닌 5년(814년) 5월 8일 강하


















고닌 5년(814년) 5월 8일 강하


덴초 2년(825년) 7월 6일 강하


덴초 3년(826년) 강하


















강하


덴초 5년(828년) 강하


강하


강하


















강하


조와(承和) 2년(835년) 강하


강하


강하


















조와(承和) 11년(844년) 강하


닌주 3년(853년) 강하


조간 4년(862년) 강하


조간 12년(870년) 2월 14일 강하


















조간 12년(870년) 2월 14일 강하


간교 4년(880년) 강하


간교 6년(882년) 강하


















간교 6년(882년) 강하


















겐나 8년(884년) 6월 강하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복귀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취득


















닌나 3년(887년) 8월 25일 취득


간표 원년(889년) 5월 13일 강하


간표 3년(891년) 12월 27일 복귀


















강하


강하


강하


강하


















엔기 20년(920년) 12월 28일 강하


강하


강하


강하


















엔기 20년(920년) 12월 28일 강하


강하


조헤이 6년(936년) 강하


강하


















강하


강하


강하


강하


















강하


강하


강하


강하


















덴랴쿠 4년(950년) 강하


덴토쿠 4년(960년) 10월 2일 강하


강하


고호 4년(967년) 복귀


















조겐 2년(977년) 4월 17일 복귀


강하


강하


















조와(貞和) 5년(1016년) 강하


간닌 2년(1020년) 12월 26일 강하


만주 2년(1025년) 12월 29일 강하


겐에이 2년(1119년) 8월 14일 강하


















지쇼 4년(1180년) 강하


분에이 7년(1270년) 12월 20일 강하


고안 10년(1287년) 10월 4일 복귀


에이닌 2년(1294년) 강하


















분포 3년(1319년) 2월 18일 취득


가랴쿠 3년(1326년) 6월 13일 강하


겐토쿠 2년(1330년) 2월 11일 복귀


랴쿠오 원년(1338년) 8월 11일 강하


















분나 5년(1356년) 1월 6일 강하


게이초 10년(1605년) 강하


게이초 14년(1609년) 강하


간분 3년(1663년) 11월 강하


















간포 3년(1743년) 10월 27일 강하


분세이 9년(1826년) 강하


게이오 2년(1866년) 강하


메이지 21년(1888년) 6월 28일 복귀


















메이지 21년(1888년) 6월 28일 강하


메이지 23년(1890년) 12월 24일 강하


메이지 25년(1892년) 12월 26일 강하


메이지 26년(1893년) 11월 15일 강하


















메이지 32년(1899년) 9월 26일 강하


메이지 34년(1901년) 4월 6일 강하


메이지 34년(1901년) 11월 27일 강하


메이지 36년(1903년) 2월 6일 강하


















메이지 37년(1904년) 11월 14일 강하


메이지 39년(1906년) 10월 28일 강하


메이지 41년(1908년) 11월 8일 강하


메이지 43년(1910년) 7월 20일 강하


















메이지 44년(1911년) 4월 17일 강하


다이쇼 3년(1914년) 1월 21일 강하


다이쇼 4년(1915년) 4월 30일 강하


다이쇼 4년(1915년) 7월 20일 강하


















다이쇼 4년(1915년) 9월 3일 강하


다이쇼 7년(1918년) 5월 29일 강하


다이쇼 9년(1920년) 7월 24일 강하


다이쇼 9년(1920년) 11월 9일 강하


















다이쇼 12년(1923년) 12월 7일 강하


다이쇼 13년(1924년) 5월 3일 강하


다이쇼 13년(1924년) 12월 9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0월 27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2월 2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2월 7일 강하


다이쇼 15년(1926년) 12월 13일 강하


쇼와 3년(1928년) 7월 20일 강하


















쇼와 3년(1928년) 7월 20일 강하


쇼와 4년(1929년) 12월 24일 강하


쇼와 6년(1931년) 4월 4일 강하


쇼와 6년(1931년) 5월 12일 강하


















쇼와 8년(1933년) 1월 17일 강하


쇼와 9년(1934년) 3월 26일 강하


쇼와 10년(1935년) 1월 7일 강하


쇼와 11년(1936년) 4월 1일 강하


















쇼와 11년(1936년) 4월 1일 강하


쇼와 14년(1939년) 4월 2일 강하


쇼와 15년(1940년) 10월 25일 강하


쇼와 16년(1941년) 4월 15일 강하


















쇼와 16년(1941년) 11월 7일 강하


쇼와 17년(1942년) 10월 5일 강하


쇼와 18년(1943년) 6월 7일 강하


쇼와 18년(1943년) 12월 29일 강하


















쇼와 20년(1945년) 4월 22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강하


















쇼와 25년(1950년) 5월 20일 강하


쇼와 27년(1952년) 10월 10일 강하


쇼와 35년(1960년) 3월 10일 강하


쇼와 41년(1966년) 12월 28일 강하


















쇼와 58년(1983년) 10월 14일 강하


헤이세이 17년(2005년) 11월 15일 강하


헤이세이 26년(2014년) 10월 5일 강하


헤이세이 30년(2018년) 10월 29일 강하


















레이와 3년(2021년) 10월 26일 강하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자 왕공족화족 제도가 폐지되었다. 이로써 화족들은 지위를 잃고 모두 평민이 되었다. 당시 왕공족이라고 불리면서 준 황족 대우를 받고 있던 구 대한제국 황족 역시 평민으로 강하되었다. 이미 1930년대에 조선으로 돌아간 의친왕을 제외한 1947년 시점에 일본에 있다가 황적이탈된 거의 대다수의 왕공족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고생하였다고 한다.

동년 10월 14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압력을 받고 있던 황실 역시 조치를 취했는데,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미야케 11곳 및 방계 황족 51명을 황적이탈시켰다. 원래는 전쟁 범죄 의혹이 있는 황족들만 황적이탈시키려고 했으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자청해서 황적이탈를 하겠다고 하면서 다른 황족들도 모두 동참하길 바란다고 언론에 발표한 결과로 방계 황족들이 모두 황적이탈된 것이다. 덤으로 재산까지 싸그리 몰수했다. 대신 일부 황족들은 황적이탈 및 재산 몰수를 대가로 전범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 등 주기적으로 만나서 서로간의 교류·친선을 다지며 종종 현 황족들과도 접촉하고 있다고 한다.


3. 구 미야케[편집]




[ 펼치기 · 접기 ]

쇼와 22년(1947년) 10월 14일 신적강하한 미야케 11곳








  ╔═


═╦═


═╬═


═╦═


═╗  

































  ╚═


═══


═╗  






  ╔═


═╬═


═╦═


═╗  




















구황족 가계도 · 구 미야케





1947년 10월 14일 황적이탈한 미야케들을 구 미야케(舊宮家)라 하며, 총 11곳 가문이 있다. 이 중 6곳은 현재 적통이 단절됐다.

문장
궁가
현칭
창건
비고
파일:후시미노미야.png
후시미노미야
(伏見宮)
후시미 씨
(伏見氏)
1456년
세습친왕가
단절 예정
파일:external/dictionary.goo.ne.jp/105466.jpg
간인노미야
(閑院宮)
간인 씨
(閑院氏)
1718년
세습친왕가
적류 단절
파일:야마시나노미야.png
야마시나노미야
(山階宮)
야마시나 씨
(山階氏)
1864년
적류 단절
파일:기타시라카와노미야.jpg
기타시라카와노미야
(北白川宮)
기타시라카와 씨
(北白川氏)
1870년
적류 단절
파일:나시모토노미야 흑.png
나시모토노미야
(梨本宮)
나시모토 씨
(梨本氏)
1871년
적류 단절
파일:kuninomiyake.png
구니노미야
(久邇宮)
구니 씨
(久邇氏)
1875년

파일:가야노미야.png
가야노미야
(賀陽宮)
가요 씨
(賀陽氏)
1892년

파일:후시미노미야 나시모토노미야.png
히가시후시미노미야
(東伏見宮)
히가시후시미 씨
(東伏見氏)
1903년
적류 단절
파일:아사카노미야.jpg
아사카노미야
(朝香宮)
아사카 씨
(朝香氏)
1906년

파일:히가시쿠니노미야.png
히가시쿠니노미야
(東久邇宮)
히가시쿠니 씨
(東久邇氏)
1906년

파일:다케다노미야.jpg
다케다노미야
(竹田宮)
다케다 씨
(竹田氏)
1906년



4. 1947년 기준 가계도[편집]


쇼와 22년(1947년) 직전 기준






























  ╟─

















  ╟─





































  ╟─













































































































































































































































































































































































































  ╟─











































  ╟─

























































  ╟─










  ╟─












































































  ╟─



































































































  ╟─







































  ╟─
























  ╟─

































  ╟─



































































  ╟─




























































































































































  ╟─










































































  ╟─



































  ╟─

















  ╟─





























































































































































































































  ╟─















































































































































  ╟─


























































































































































































































































































  ╟─














































































































































































  ╟─










  ╟─










  ╟─






































































































































































































































































































































































(왕자)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하라다 미츠코




모리마사 왕비 이츠코


히로하시 노리코

































오다 아츠코




히로하시 다다미츠































데라오 우타코



오다 히데자네


모리히로 왕


노부히코 왕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모리히로 왕비 시게코 내친왕 (상단)


후미코 여왕































나루히코 왕비 도시코 내친왕


모로마사 왕






































아와타 아키츠네






































도시히코 왕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나베시마 기쿠코




























츠노다 스가코




야스히코 왕비 노부코 내친왕



나베시마 나오야스





























이치조 준코





다카히코 왕


후쿠코 여왕




















나카무라 소마



이치조 다다카






다카히코 왕비 지카코


도모히코 왕


























고가 세이엔





오토와 다다히코


미노코 여왕


























오타니 도모코





오규 기요코




























후루야마 지에




오타니 고쇼







오규 요시타츠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 왕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미치히사 왕






















곤도 가즈오







나가히사 왕비 사치코


하츠코 여왕























호리우치 노부코


고마츠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다치바나 미네코





























아키히토 친왕비 요리코






다치바나 다네카츠































요시히사 친왕비 도미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루히사 왕


히가시조노 사와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나루히사 왕비 후사코 내친왕



히가시조노 모토후미






























야마우치 미츠코 (이혼)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 왕


도쿠가와 다에코























사루바시 사치코



츠네히사 왕비 마사코 내친왕



도쿠가와 구니사다
































간로지 미츠코


다케다노미야 츠네요시 왕


츠네타다 왕

























간로지 오사나가



츠네요시 왕비 미츠코


모토코 여왕




























호시나 다케코


사노 아야코


노리코 여왕




























호시나 마사아키




사노 츠네미츠


츠네하루 왕






























고토코 여왕



































노부히사 왕

































이와나미 이나코


아리마 사다코




































아리마 요리야스




































고마츠 데루히사



































후타라 히로코

































우키야마 이쿠무




후타라 요시노리































사루바시 가네


후타라 요시유키































마에나미 사카에


우에노 마사오


































아키노미야





































나루노미야





































가초노미야 히로츠네 친왕


가초노미야 히로아츠 친왕

































히로츠네 친왕비 이쿠코




































분슈 여왕




































기무라 시무코


무라쿠모 니치에이

































이타미 요시코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토나리 친왕






















마츠다이라 다카코


아츠히토 왕

































마츠다이라 다다노리


안도 유키코


































안도 노부아키

































다메노미야


구로다 시게코
































기요스 이에노리



구로다 나가미치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스에코 여왕































고토히토 친왕비 지에코


간인노미야 하루히토 왕

































요리히토 친왕비 가네코



하루히토 왕비 나오코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


히로코 여왕

































야마우치 야에코 (이혼)


가초 하나코

































마치노미야




가초 히로노부











5. 복귀 주장[편집]


일본 황실의 후계자 대책으로서 구황족을 황족으로 복귀시키자는 주장이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 1947년 황적이탈일본 정부일본인들의 동의 없이, 미군정이 강압적으로 한 조치이자 행정처분이다. 세습친왕가 제도는 1400년경에 시작되어 1947년 미군정이 폐기하기 전까지 540년 가량 일본 황실전통이었다. 즉 '강압'에 의한 것과 '비교적' 현대까지는 황실 일원이었던 만큼 명분이 있다.
  • 구황족들은 여전히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 등의 활동 및 인척관계로 직계황족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 법친왕(法親王)[1]이나 황적이탈했던 황족이 황족의 부족 문제로 복권한 일은 이미 전례가 있다. 각각 59대 우다 덴노의 예와 88대 고사가 덴노의 예. 첨언하자면 이는 막부쇼군에서도 사례가 있었다.
  • 일본/출산율을 고려하면, 히사히토 친왕 단일 직황족 유지보다는 4궁가 이상의 친왕가를 지킬 때 지금과 같은 남계 단절의 걱정을 덜 수 있다. 또한 황족의 단절에 이미 황적이탈한 구황가가 복권해 대를 잇는 것은 이미 과거부터 있던 일이다. 즉, 주로 전통적으로 이미 있어 오고 있던 일이기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러한 주장은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에서도 내는 의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역시 반론은 있다.[2]
  • 직계 여성을 제치고 방계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황위를 계승하는 것은 명백히 가부장적이며, 현대 일본국 헌법과 국민 감정상 부합하지 않는다.[3]
  • 구황족이 복권한 전례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당시 황실전범과 같은 법률이 없던 먼 옛날의 일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 구황족들이 황적이탈하기 직전인 1947년부터 적용된 현행 황실전범 15조에는 "여자가 황족과 결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존 황족 이외의 자를 새로 황족으로 할 수 없다."는 제한규정을 담았다. 따라서 황실전범을 뜯어고쳐야만 이들의 복권이 가능하다.[4][5]
  • 황실의 규모가 비대해지면 그만큼 의미없이 세금을 낭비한다. 또한 갑자기 황족이 된 이들이 국민으로부터 신망을 확보할지도 불투명하다.[6] 그렇다고 이들을 화족 신분의 부활로 대체할 수도 없는 게, 이미 1947년에 신분제가 폐지되어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을 제외한 모든 귀족들의 직위를 박탈한 판국에 또다시 화족을 부활시킨다는 건 전근대 신분제 사회로 회귀하자는 말과 똑같고, 이미 민주주의와 사민평등이 정착된 21세기 일본에서 국민정서에도 어긋나는 전근대적 발상이라는 반대에 부딪힐 게 뻔하기 때문이다.
  • 민간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과연 황족의 품위를 지킬지 의문이다.[7]
  • 과거 황적에서 이탈했다가 복권한 뒤 즉위한 천황들은 가장 먼 항렬이 천황의 5세손이던 반면, 현 구황족은 모두 20세손을 넘어가는 궁가들이다.[8]
  • 복귀 뒤 즉위해도 이번에는, 그들도 현재 직계 황족들처럼 일본국민과 언론의 압박을 받으면서 과연 아들을 낳아 후세를 이을 수 있을지가 또 불투명해진다. 사실 전례가 있는 황족들도 대부분 이런 식으로 다시 대가 끊겨 다른 궁가로 넘어간 때가 상당히 많다.
  • 일부일처제가 유지되는 이상, 세습친왕가도 단절될 위험이 있다. 구황족 가문 중 아들이 없어 단절된 가문이 절반 가까이 된다. 안정적인 황위 계승자 확보를 위해서 좋은 방법이 아니다.[9]

구황족 본인들은 여성 천황제 자체에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구황족 복귀에 가장 큰 소리를 내고 있는 다케다 가문의 발언들은 사실상 현 구황족들 의견의 대변이었다고 한다. 특히 논란이 불거지던 2000년대 초반, 구황족들이 당시 여성 천황 허락을 주장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만세일계의 전통을 단절시키려는, 암살당해 마땅한 정치가!!"라고 날린 비난도 이들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보여준다. 즉 구황족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황족으로 여기고, 언제든지 황족의 위치에 복귀할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사실 구황족들은 강하된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현 황족과의 다방면에서 교류를 하고 있는 이유도, 일본 황실조차도 이들을 여전히 황족에 준하는 집단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이들의 사고 방식을 보면 "현 황실조차도 우리들을 버리지 않고 황족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뭔데 우리가 다시 황족 지위로 올라가는 걸 반대하냐"라는 식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 적었듯 일본 내부에서도 구황족들의 황족 복귀에 대해서 찬성과 반론이 너무나도 팽팽한 상황[10]이라 현실은 뭐라고 쉽게 말하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 황족에게도 계승권을 인정해, 여성 천황을 승인하든, 구황족을 정식으로 황족으로 복귀시키든, 대책이 있어야 한다. 양쪽 중 하나는 채택되어야 한다는 것. 안 그러면 히사히토가 자라서 단 혼자서 노력을 해서 남성 자손을 포함한 적어도 2명 이상의 자녀들을 반드시 낳기를 기원해야 하지만, 그건 일본 전문가 등도 주장하듯이 상당히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코무로 케이마코 공주의 결혼소동 이후 일본에서는 "구황족 가문의 아들이 공주와 결혼하게 하는 방식으로 제한적인 숫자의 구황족들이 현 황족으로 들어가는 방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나루히토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부마 후보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게 구황족 집안들 중에서 현 황족과 가까운 히가시쿠니 가문이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대대적인 국민들의 저항을 받게 될 구황족들의 전면 등장보다는, 현 여성 황족과의 결혼을 통한 우회적인 방식으로의 구황족들의 황족 복귀가 그나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도 구황족 대변인 역할을 하는 다케다 가문의 극우 활동가조차도, 여성 덴노 및 여성 미야케 창설에는 반대하지만, 현 여성 황족과 구황족 남성간의 결혼에 대해서는 적극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구황족들도 자신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황족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6. 근황[편집]


1947년 황적이탈로 강등당한 구황족들. 편의상 이들 가문 가운데 남계 남성 후손이 남아 있는 가문을 빨간색으로 강조했고, 남계로 단절된 가문은 취소선 처리.

현재 가야·구니·아사카·히가시쿠니·다케다에 후계자가 있지만, 이들도 히가시쿠니를 빼면 대부분 간신히 혈통을 유지하는 상황이다. 4대 독자인 아사카는 물론이고, 구니도 젊은 구황족이 1명. 가야에 후계자가 2명. 다케다에 3명. 히가시쿠니에 후손들이 많지만 성을 바꿨거나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떠나거나, 황적이탈 후에 태어나서 실제로는 히가시쿠니 노부히코(東久邇信彦)[11]의 자제들만 가문을 이을 만하다. 만약 구황족 복귀가 본격화한다면 이들에게 세습친왕가의 지위를 내릴 가능성이 높다. 사실 덴노 집안이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결정적 이유는 황적이탈을 한 이나 그런 이의 후손에게 계승권을 부정해서다. 일본대한민국 민법에 규정된 성씨불변의 원칙이 없고 세습친왕가가 아니면 자동 황적이탈이라서 조선처럼 선제의 칠종질(七從姪 - 17촌 조카)이 뒤를 잇는 일은 없다.

일본 황실의 황족 남성 부족은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었다. 직황족만 따지면 이미 메이지 덴노의 조부인 닌코 덴노 이래로 매우 아슬아슬한 계승을 이어 왔다. 가장 가까운 간인노미야는 1842년에 나루히토(愛仁)대로 적통이 끊기고 후시미노미야의 방계에서 양자를 들였고[12], 메이지 시대에 메이지 덴노 다음으로 혈통적으로 가까웠던 레이겐 덴노 혈통의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有栖川宮熾仁)[13]가 계승서열 1위이던 시기(1867년 2월 13일 ~ 1879년 8월 30일)가 있었을 정도로 황족 부족 문제는 고질적이었다.[14] 다만 당시에는 후시미노미야 계통 구황족들이 건재했고, 이후 다이쇼 덴노가 4명의 아들을 남기고 쇼와 덴노가 2명,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3명의 아들을 남기면서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아키히토의 즉위 당시만 해도 아래 세대의 남성 황족은 5명이나 남아 있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황족 부족 문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재 어떻게든 남성 혈통을 찾으려 해도 가까운 남계 혈통은 레이겐 덴노 이후의 후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즉 어떻게 어떻게 발굴해도 현재 황족과 가장 가까운 남계 혈통이 직황족의 20촌 안팎이다. 게다가 히가시야마 덴노의 후손으로 한정하면 그 20촌 안팎이라는 혈통은 타카츠카사 가문으로 입양 간 자들의 후손이다.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으로 방계를 포함해도 남성 황손 부족은 매우 심각하다.[15]

2018년 여름 이후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인하여 현 상황의 타개책들 중 하나로 현 여성 황족이 구황족의 자손과 결혼하는 방안이 그나마 현 황실전범을 상대적으로 덜 훼손하는 방안이 아니냐는 주장에 근거하여, 구황족에 대한 관심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일본 언론들이 이들 집안들을 추적해 본 결과 카야, 히가시쿠니, 타케다에 50대 미만 미혼 남성이 합쳐서 9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게 확인되었고 이 중 히가시쿠니 집안이 5명, 카야 및 타케다가 각각 2명씩 총 4명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히가시쿠니 집안의 미혼 남성들은 히사히토와 비슷한 나잇대이며 가야노미야는 20대 초중반, 타케다노미야는 30~40대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 보면 각 집안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 우선 히가시쿠니 집안은 자손들이 너무 어린 나머지 현 여성 황족들과의 곧바로 결혼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나마 2018년 기준으로 성인 이상의 나이대라 현 여성 황족과 결혼이 가능한 카야와 타케다의 경우, 카야는 20대 초중반이라 안정된 직장을 갖지 못했다는 점, 다케다의 경우, 후손들이 극우성향을 보여 아키히토나루히토가 가지고 있는 왕족관과는 대비된다는 점이 단점이다.


7. 계보[편집]


  • 순수 부계 기준


7.1. 스코 덴노 ~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편집]


스코 덴노 - 고하나조노 덴노[16]

대수만 표시된 경우 후시미노미야 당주대수

북3. 스코 덴노
1대 요시히토
2대 하루히토
3대 & 추존. 고스코 덴노
102. 고하나조노 덴노
4대 사다츠네

4대 사다츠네 - 20대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102. 고하나조노 덴노
4대 사다츠네
103. 고츠치미카도 덴노
5대 구니타카
104. 고카시와바라 덴노
6대 사다아츠
105. 고나라 덴노
7대 구니츠케
106. 오기마치 덴노
8대 사다야스
9대 구니노부
추존. 요코 덴노
10대 사다키요
107. 고요제이 덴노
11대 구니나리
13대 사다유키
12대 구니미치
108. 고미즈노오 덴노
14대 구니나가
112. 레이겐 덴노
15대 사다타케
113. 히가시야마 덴노
16대 구니타다
18대 구니요리
114. 나카미카도 덴노
1대 나오히토[A]
19대 사다유키
115. 사쿠라마치 덴노
2대 & 추존. 교코 덴노[A]
20대 구니이에
116.모모조노 덴노
119. 고카쿠 덴노[17]
17대 사다모치[18]


7.2. 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친왕 이후[편집]


구니이에의 후손이 아닌 사람과 구니이에의 후손 중 황적이탈한 사람과 후손은 제외

구니이에의 증손까지

2대 & 추존. 교코 덴노[A]
119. 고카쿠 덴노
120. 닌코 덴노
121. 고메이 덴노
20대 구니이에
1대 아키라[B]
2대 키쿠마로[B]
3대 타케히코[B]
1대 아사히코[C]
1대 구니노리[D]
2대 츠네노리[D]
2대 구니요시[C]
3대 아사아키라[C]
3대 모리마사[E]
1대 야스히코[F]
2대 타카히코[F]
1대 나루히코[G]
모리히로[G]
21대 사다노리
2대 요시히사[H]
1대 츠네히사[I]
2대 츠네요시[I]
3대 나루히사[H]
4대 나가히사[H]
1대 히로츠네[J]
2대 히로아츠[J]
22대 사다나루
23대 & 3대 히로야스[J]
히로요시
4대 히로타다[J]
6대 고토히토[A]
7대 하루히토[A]
1대 요리히토[K]

구니이에의 증손부터[19]

121. 고메이 덴노
122. 메이지 덴노
123. 다이쇼 덴노
124. 쇼와 덴노
125. 아키히토
126. 나루히토
2대 츠네노리[D]
3대 구니나가[D]
4대 하루노리[D]
아키노리[D]
5대 마사노리[D]
장남[D]
차남[D]
3대 아사아키라[C]
4대 구니아키[C]
장남[C]
차남[C]
아사다케[C]
아사토시[C]
장남[C]
2대 타카히코[F]
3대 토모히코[F]
아키히코[F]
모리히로[G]
2대 노부히코[G]
3대 유키히코[G]
장남[G]
미부 모토히로[20]
나오히코[G]
테루히코 [G]
장남[G]
무츠히코[G]
장남[G]
2대 츠네요시[I]
3대 츠네타다[I]
4대 츠네타카[I]
4대 나가히사[H]
5대 미치히사[H]
히로요시
24대 히로아키
[1] 태자 이외의 황자들 가운데 불교에 귀의한 이에게 주는 칭호.[2] 여기에는 넣지 않았지만 여계계승 인정과 마찬가지도 돈 먹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구황족이라고 돈이 들어가지 않고, 여계라고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3] 그나마 가까운 방계라면 모를까 이들은 이미 500년도 전에 갈라진 집안이다.[4] 물론 여계 계승도 피장파장이긴 하다.[5] 구 황실전범 증보 6조에도 "황족에서 신적(臣籍)으로 편입된 자는 다시 황족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이 담겨 있어서, 이것도 황실전범을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논리도 생긴다.[6] 전술한 다케다 일가는 황적이탈 이후 일부 후예들이 캬바레나 매춘 시설을 이용하다가 발각된 적이 있으며, 2015년에는 그 후예의 하나인 다케다 츠네아키(竹田恒昭)가 대마초 소지 및 투약 혐의로 체포된 일이나 현 3대 당주에 있어서 막내동생인 다케다 츠네카즈(竹田恒和)는 2020 도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뇌물 혐의로 2019년 자진 사임하였으며 그의 장남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는 극우 혐한으로서 구황족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증폭시킨 집안이다.[7] 일본 황실은 그 어떤 왕가보다도 엄격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8] 이는 아키히토 천황이 간인 방계인 반면 구황족들은 세습친왕가인 후시미계라서 그렇다. 조선은 왕실의 대가 끊기자 인조의 10세손, 즉 철종과 17촌 이상 넘는 촌수를 거스르고 이 왕위를 계승한 사례가 있었다. 프랑스앙리 4세루이 9세의 10세손이었다. 살리카법을 채택한 왕가에서는 이렇게 대가 끊겨서 먼 친척이 계승할 때가 종종 있다.[9] 하지만 이는 여계 계승도 마찬가지이다.[10] 민간인이 된 지도 벌써 76년이나 지났다. 그래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구황족들은 '황족'이 아니라 그저 '조금 특이한 집안내력을 가진 사람' 정도로나 취급된다. 이러한 구황족들이 갑자기 자기네 혈통 운운하면서 "우리도 현 황족들과 동급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구황족들에게도 막대한 세금이 투입된다면 어느 누구가 동의하겠는가? 이것이 대체적인 반대론자의 주장이다.[11] 아키히토 덴노의 첫째 누나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장남(첫째).[12] 이 때문에 정통성이 떨어져서 1947년 황적이탈 당시에도 계승 서열이 최하위였다.[13] 레이겐 덴노의 5대손으로, 메이지 덴노의 12촌 할아버지뻘이다.[14] 이런 탓에 아리스가와노미야는 다루히토의 이복동생 다케히토(威仁)가 원래 황적이탈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주직을 계승하는 것을 메이지 덴노가 허락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아리스가와노미야도 후계자이던 다케히토의 요절로 단절되어야 했다.[15] 이쪽에서 일부 우익들이나 주장하는 개념이 황별섭가의 복원이다. 일본의 고셋케(오섭가) 중 일부는 도중에 단절되고 황족들이 양자로 들어가 이를 이은 가문들이 있는데, 이 중 타카츠카사 스케히라의 혈통은 700년 전 분가한 후시미노미야 계통보다 가까운 300년 전 분가한 혈통이다.(고카쿠 덴노의 숙부.) 다만 이쪽도 직계는 단절되고 쿠죠가에서 양자가 들어간 지 오래고, 토쿠다이지, 야마모토, 스미토모, 무로마치 등 방계 혈통만 남아 있는 데다가, 그 외 다른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혈통인지라 히사히토 탄생 이후 이 개념은 거의 죽은 개념이다.[16] 덴노는 나루히토의 직계만 작성, 역대 덴노의 계보는 일본/역대 천황 참조[A] A B C D E 간인노미야[17] 모모조노 덴노의 아들인 고모모조노 덴노의 아들로 입적[18] 나이로는 전임인 구니타다와 후임인 구니요리의 조카뻘이지만 항렬로는 현손이다.[B] A B C 야마시나노미야[C] A B C D E F G H I J 구니노미야[D] A B C D E F G H I 가야노미야[E] 나시모토노미야[F] A B C D E 아사카노미야[G] A B C D E F G H I J K 히가시쿠니노미야[H] A B C D E 기타시라카와노미야[I] A B C D E 다케다노미야[J] A B C D 가초노미야[K] 히가시후시미노미야[19] 위에서 후손을 남기지 못한 사람은 제외[20] 후손 생략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15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15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139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문서의 r 판{{{#!wiki style="display: inline; display: none;"
, 번 문단}}} (이전 역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06 22:36:55에 나무위키 구황족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