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나라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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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105대 천황
고나라 덴노
後奈良天皇


파일:270px-Emperor_Go-Nara.jpg

출생
1497년 1월 26일
야마시로국 교토 교토 어소
(現 교토부 교토시)
사망
1557년 9월 27일 (향년 60세)
야마시로국 교토 교토 어소
(現 교토부 교토시)
능묘
후카쿠사북릉(深草北陵(심초북릉)
재위기간
제105대 천황
1526년 6월 9일 ~ 1557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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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히토(知仁(지인)
부모
부황 고카시와바라 덴노
모후 부라쿠몬인
형제자매
6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요시토쿠몬인
자녀
3남 6녀
종교
불교
원호
고나라인(後奈良院(후내량원)
시호
고나라 덴노(後奈良天皇(후내량천황)
연호
다이에이(大永(대영, 1526년 ~ 1528년)
교로쿠(享祿(향록, 1528년 ~ 1532년)
덴분(天文(천문, 1532년 ~ 1555년)
고지(弘治(홍치, 1555년 ~ 1557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일본의 제105대 천황.

고카시와바라 덴노와 가쥬지 후지코(勸修寺藤子)의 아들로, 이름은 도모히토(知仁)였다. 아버지와 함께 일본 역사상 가장 빈곤한 천황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즉위식조차 할 돈이 없어 즉위 이후 10년이 지난 뒤에나 겨우 즉위식을 하는 등 많이 고생했다. 당시의 일본 황실은 이미 조부인 고츠치미카도 덴노 시절에 일어난 오닌의 난으로 교토가 개박살이 나서 그가 붕어한 이후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 시신이 몇 달씩이나 방치될 정도였고, 아버지인 고카시와바라 덴노는 궁핍함이 더 심해져서 즉위 21년차, 죽기 5년 전에야 즉위식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가난했다. 고나라 덴노 이후에도 덴노들의 초라함이 이어져서 아들 오기마치 덴노도 즉위한지 3년 후에야 모리 가문 등 몇몇 센고쿠 다이묘들의 도움으로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 보답으로 오기마치 덴노는 이들에게 관위를 하사했다. 물론 당시에는 관위가 유명무실해졌어도 가문의 격이라는 의미에서는 제법 값어치가 있었기에 이걸로 땜빵이 된 것이다. 에이로쿠의 변으로 황실의 권위는 더 바닥으로 치달았는데 그나마 오다 노부나가 덕분에 궁핍한 재정도, 권위도 좀 회복이 되었다. 이후 집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도 오기마치 덴노에게는 황금을 바치는 등 재정 지원을 해주면서 비로소 4대에 걸친 굴욕이 끝나게 되었다.


2. 생애[편집]


무로마치 막부 치하에서[1] 황실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즉위식을 치를 돈도 없어서 유력한 센고쿠 다이묘인 사가미국의 후호조씨(相模後北条氏)나 스오국의 오우치씨(周防大內氏), 스루가국의 이마가와씨(駿河今川氏) 등의 가문으로부터 헌금을 받아서 즉위한 지 10년 만에야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천황 자신도 자신의 어필(御筆)을 팔아서 황실 수입에 보탰다고 한다.[2]궁녀들이 매춘을 했으며[3], 동네 아이들이 천황을 무시하고 마구 돌을 던져, 그 돌에 맞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비단 고나라 덴노 뿐만 아니라, 센고쿠 시대천황이나 공가(구게) 등 귀족들의 삶은 이런 식이었다. 그나마 공가 출신자들은 알아서 장사에 뛰어들거나, 사무라이의 가신으로 들어가서 활약한다든지, 아니면 사무라이들에게 다도나, 시문, 예법 등을 가르치는, 현대로 치면 문화센터 강사로 활약하면서 생계를 잇기도 했다. 심지어 이치조 가문의 방계인 토사 이치조[4] 같은 일부 공가는 이렇게 재미를 보고는 아예 직접 칼을 잡고 사무라이가 되어

"나는 다이묘요."

라고 자칭한 자도 있었다고 한다(...)[5]. 하지만, 황족들과 고셋케(오섭가) 구성원들은 체면상 그럴 수 없어서 나무젓가락을 만들고, 서예를 해서 팔아다가 생계를 잇기도 했으며, 돈이 없어서 밥을 굶거나 다 떨어진 옷을 기워서 입기도 했다.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역사>편에서는 위의 불우한 황실의 모습을 에도 막부의 일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론 절대 아니다. 오히려 에도 막부 시기에는 황족과 공경들이 도쿠가와 쇼군 가문과 같은 고위 사무라이들과 사돈을 맺고 영지를 제공받는 등으로 상당한 권세를 누렸기 때문에 절대로 이렇게 불우하게 살지 않았다. 만약에 에도 막부 시기에 센고쿠 시대 마냥 애들이 지나가는 천황에게 돌을 던지며 무시했다면 그 아이들의 부모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6].


3. 기타[편집]


쇼기의 룰을 조금 바꾸어 현대 쇼기의 룰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오늘날의 쇼기는 일본의 고대 장기인 헤이안쇼쇼기(平安小将棋)에서 시작되었는데 각행, 비차가 없는 것만 빼면 대부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무로마치 시대에 또 다른 일본의 고대 장기인 헤이안다이쇼기(平安大将棋)에서 각행, 취상, 비차의 3개의 말이 들어왔는데, 15세기에 말이 줄어듦에 따라 생기는 무승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말의 재활용이 도입되었고, 고나라 덴노에 의해서 취상이 빠지면서 현대의 쇼기가 완성된 것이다. 생전에 허수아비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그래도 후세에 뭔가 족적은 남긴 셈이다.

추호(追号)인 '고나라'(後奈良)는 제51대 헤이제이 덴노의 별호인 '나라노미카도'(奈良帝)에서 따온 것이었다. 부황의 추호가 헤이제이 덴노의 부황 간무 덴노의 별호인 '카시와바라노미카도'(栢原帝)에서 따온 것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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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센고쿠 시대 초기에 일어난 메이오 정변 이후에는 무로마치 막부도 이미 힘을 거의 잃어버려서 사실상 끝장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2]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 폴 임이 저술한 잡학사전인 《책 속의 책》에 의하면, 나무젓가락 만드는 부업도 했다고 한다.[3] 전근대 일본에서는 궁녀들의 대부분이 귀족 출신이었다. 높아봐야 양인, 보통은 천민들을 궁녀로 선발했던 조선과는 전혀 달랐다.[4] 센고쿠 시대 다이묘들 중 하나인 이치죠 카네사다의 출신 가문이다.[5] 선술한 토사 이치조 가문은 토사 일대를 영지로 가지고 있어서 다이묘를 자칭할 기반이 있었고, 오다 노부나가의 출신 가문인 오다 가문은 본래 신토의 신관 가문 출신이라서 기반으로 삼을 막대한 부와 권위가 있었다.[6] 에도 막부의 역대 쇼군들 중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본의 국민 드라마인 <망나니 장군>에서는 메인 빌런이 공가 출신의 조정 대신이라는 설정이 있는데, 창작물의 사례이긴 하나 실제 전근대시대 일본 사회에서의 공가의 위상도 드라마에서처럼 쇼군이나 막부의 고위 관료들에게 이따금씩 한 마디할 정도는 되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