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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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전근대
2.2. 일본 제국
2.3. 현대
3. 유사 사례 비교



1. 개요[편집]


만세일계(萬世一系 (ばんせいいっけい)는 일본 황실진무 덴노 이래 단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2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는 관념을 말한다.

오늘날 일본을 비롯한 주류 역사학계에선 일본 황실이 한 번도 단절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낮게 보지만,[1] 고대부터 일본 민중들은 '황실은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일본의 권력자들은 천황의 자리를 찬탈할 능력을 가졌더라도 명분상 큰 페널티를 안고 싶지 않아 직접 빼앗는 것은 꺼렸고, 황실 내부에서는 인세이, 귀족들은 간파쿠섭정, 무사들은 쇼군같은 직위를 통해 천황의 권력을 인수해 우회적으로 통치했다.[2]

근대에 이르러서는 메이지 유신을 거쳐 일본 민족주의국수주의 확립에 이용되어 현재의 만세일계 관념으로 발전했다. 만세일계라는 단어는 1867년이와쿠라 도모미가 처음 만든 용어이다.


2. 역사[편집]



2.1. 전근대[편집]


'만세일계'라는 단어는 메이지 유신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일본이 역성혁명이 없이 왕조가 이어졌다는 인식은 옛날부터 일본 안팎에 널리 퍼졌다. 고사기를 비롯하여 육국사가 그러한 관점에서 쓰인 역사서이다. '일본은 왕조가 바뀌지 않는 나라'라는 관점은 외국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것으로 보이는데, 송태종재상에게 반포했다는 칙어(勅語)를 통해 알 수 있다.

上聞其國王一姓傳繼臣下皆世官因歎息謂宰相曰「此島夷耳乃世祚遐久其臣亦繼襲不絶此蓋古之道也。中國自唐季之亂宇縣分裂梁周五代享歷尤促大臣世胄鮮能嗣續。朕雖德慚往聖常夙夜寅畏講求治本不敢暇逸建無窮之業垂可久之範亦以爲子孫之計使大臣之後世襲祿位此朕之心焉。」

이 그 나라임금이 하나의 성으로 이어지고[3]

신하 세습함을 들음에 지즐어 탄식하며 재상[4]에게 이르기를 "이들은 섬오랑캐일 뿐인데 도리어 임금의 자리가 세습됨이 아득히 오래고 그 신하도 또한 세습이 아니 끊기니 이는 아마도 옛날의 도로다. 중국당나라 끝의 부터 천하가 분열되고 후량후주를 비롯한 왕조가 존속한 기간이 더욱 잘아졌고 대신을 세습하는 후예도 이어짐이 드물었다. 짐이 비록 덕이 지난 성인에게 부끄럽지만 늘 밤낮으로 삼가 고마하며 다스림의 바탕을 살펴 구하며 조널이 아니 겨르로와 다함이 없는 업을 세워 오랠 수 있는 법을 드리우고 또한 자손의 계책으로 삼고자 하며 대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녹과 자리를 세습하게 하리니 이것이 짐의 마음이로다."

송사 Vol. 491』, 「열전 No. 250」, <외국 7>, 일본


송태종의 탄식은 후술한 키타바타케 치카후사의 역사관과 같다. 역사적 실체야 어떻든 야마토 왕조(정권)가 세워진지 얼마 안 된 송나라보다 더 오래되고 잦은 왕조 교체가 없는 건 참이니 송태종으로서는 야마토 왕조의 오랜 존속이 부러울 수밖에 없다.

천황이 권력을 완전히 잃은 가마쿠라 막부 이후에도 이러한 인식은 여전히 존재했다. 일본 남북조시대의 역사학자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는 자신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중국은 혼란의 나라다. 복희 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서른 여섯 왕조가 있었고 여러 필화와 수많은 동란이 일어나왔다. 단지 우리만큼은 천지가 비롯한 이래 황통이 불가침이다."라는 글귀를 남겼고,[5] 스페인에서 파견된 필리핀 총독 로드리고 데 비베로 이 아베루사(Rodrigo de Vivero y Aberruza) 역시 "일본인의 특이한 점은 2260년 동안 같은 왕가의 혈통이 이어져왔다는 것이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같았다. 조선시대 지식인이 남긴 글에서 만세일계를 다루는 구절이 그리 드물지 않으니 다음과 같다.

自開闢以來一姓相傳到今不易

개벽부터 하나의 성[6]

이 서로 전해 이제껏 아니 바꿨습니다.

간양록』, 강항(姜沆) 출처


自開闢以來一姓相傳到今不易

개벽부터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 이제껏 아니 바꾸다.

난중잡록』, 조경남(趙慶男) 출처


賴朝以後一姓相傳垂四五百年此卽賴朝貽厥之遠謨也。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뒤로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 사오백년을 드리웠으니 이는 곧 요리토모가 (일본 황실에) 끼친 먼 꾀로다.[7]

동사록』, 강홍중(姜弘重) 출처


自開闢以來一姓相傳始於周幽王到今不易

개벽부터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하니 주유왕에서 비롯하여 이제껏 아니 바뀌다.

동명해사록』, 김세렴(金世濂) 출처


自開闢以來一姓相傳到今不易

개벽부터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 이제껏 아니 바꾸다.

월봉해상록』, 정희득(鄭希得), 출처


日本天皇始立於周平王之世一姓相傳至今不絶

일본천황주평왕의 치세에서 처음 세워져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 이제껏 아니 끊기다.

지봉유설』, 이수광 출처


倭人雖曰島蠻立國幾三千餘載一姓相傳則其規模蓋可知也。

왜인은 비록 섬오랑캐라 말하지만 나라를 세운지 거의 삼천년이고 하나의 성이 서로 전해지니 곧 그 규모를 아마도 알 만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이규경(李圭景) 출처


起自周幽王十一年至今皇一百十二世一姓相承

주유왕 즉위 십일년부터[8]

일어나 금상까지 일백십이세가 하나의 성이 서로 이었다.

『부상록(扶桑錄)』, 남용익 출처


休誇一姓傳無缺

하나의 성이 전해짐이 아니 이지러졌다고 자랑하지 말지어라.

위와 같음


보다시피 만세일계란 말을 안 썼지 일본이 유사이래 하나의 왕조가 이어졌다는 생각은 조선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만세일계란 뜻으로 일성상전(一姓相傳)·일성상승(一姓相承)·일성전무결(一姓傳無缺)이라고 썼다. 가장 많이 쓰인 건 일성상전으로 이것이 만세일계보다 더욱 뿌리가 깊은 말이다.

2.2. 일본 제국[편집]


저들은 혈족끼리 혼인한 우두머리를 두고[9]

스스로 만세일계(萬世一系)라고 말하며 자랑하고 있거니와

『소앙집(素昻集)』, 조용은 출처


만세일계(萬世一系), 현인신이라는 황당한 그 피막을 찢고 나오지 않는 이상 그 땅에는 진실이 존재할 수 없고 지식인은 말라버린 샘터와도 같은 심장을 안고 있을 수 밖에 없다.

토지 Vol. 14』, 박경리, 312p, 열 여섯 째 줄 #


이렇게 전근대에 존재했던 관념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하고 근대적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크게 중시되어 현대의 만세일계 관념으로 변모하였다. 일본 제국대일본제국 헌법의 제1조에서 만세일계라는 용어를 기술하여 법적으로 강조하였다.

일본 제국은 만세일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불경한 비국민으로 몰아 철저하게 탄압했다. 천황의 신성성과 절대성, 만세일계는 국체(國體)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 공화제사회주의 혁명을 부정하는 근거로 널리 쓰였다.


2.3. 현대[편집]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대일본제국 헌법일본국 헌법으로 개정되는 과정에서 천황의 신성성과 만세일계에 대한 법적 규정은 전부 삭제되었다. 현대 일본 정부는 천황의 신성성이나 만세일계에 대해 아무런 공식 견해를 나타내지 않는다.

현대 일본의 주류 역사학자들은 만세일계가 사실이었을 가능성을 낮게 보며, 천황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만들어낸 관념으로 해석한다. 현재 학계의 주된 논쟁은 만세일계가 사실성 여부보다 천황의 가계가 언제 단절되고 언제 다른 가문으로 교체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1954년에 역사학자인 미즈노 유는 일본 황실이 2번 교체[10]되었으리라고 추정하여 제3왕조설을 주장했고 1967년에는 에가미 나미오가 기마민족국가에서 일본 황실의 조상이 대륙(만주)으로부터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에 도래하여 야마토를 세웠다는 기마민족 정복왕조설(기마민족설)을 주장하였다. 최근에는 케이타이 덴노 이전까지는 야마토에 왕권은 있어도 왕조는 없었다는 설이 대두되었으며, 아예 다이카 개신 전까지는 케이타이 덴노 직계[11]소가[12]가 서로 번갈아가면서 대왕 자리를 이어졌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물론 정황상의 근거만 존재할 뿐, 명확한 사료가 부재한 가설이기에 만세일계가 무조건적으로 틀렸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지만 그럼에도 주류학계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오늘날 만세일계의 역사적 신빙성은 회의적으로 평가되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 만세일계 관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가령 쇼와 덴노

日本の皇室は昔から国民の信頼によって万世一系を保っていたのであります。

일본의 황실은 예로부터 국민의 신뢰에 의해 만세일계를 유지해왔습니다.

- 1977년(쇼와 52년) 기자회견에서


라고 언급했다. 만세일계의 사실성 여부를 떠나 송태종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듯 그러한 관념 자체는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전통관념으로서 이미 자리잡았다.

한국에선 천황이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없는 허수아비(상징적인 꼭두각시 또는 허울뿐인 상징적 존재)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도 대부분 기간 동안 그랬던 건 사실이지만 고대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 전기에는 천황의 권력과 권위가 드높았는데, 이 시절의 일본은 같은 시기 신라발해처럼 임금이 실권이 있고 율령제가 작동하는 고대국가였다. 그러다 후지와라 씨가 섭관 정치로 권력을 잡으면서 슬슬 천황가의 권위는 강해지되 권력은 약해졌다. 그리고 실권은 후지와라에서 쇼군에게 넘어가고, 천황가는 고다이고 덴노 때 잠깐 저항했다가 패배했다. 이런 이중적인 정치가 장기화되고 천황이 점차 허수아비로 남게 되자, 오히려 천황가가 그 긴 시간동안 이어질 수 있었다. 실권이 없지만 권위가 높으니 교체할 필요도, 교체할 수도 없었다. 전근대 일본에서 천황가에 대해 '신벌(神罰)을 내릴 수 있는 두려운 귀신 비스무리한 무언가'로 취급하는 풍조도 있었다. 몇몇은 아예 현대까지 그 믿음이 내려오는데, 대표적으로 스토쿠 덴노가 있다.

일본회의, 신사본청 등의 일본 기성 극우파나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 5ch를 위시한 넷 우익 계열 신 극우파 등은 지금도 만세일계를 자칭 공인된 역사적 사실로 인식한다.

혈통적인 의미는 아니더라도 일본에서 천황제는 2천 년 동안 계승되어 온 일본의 상징이라는 전통적인 의미가 다른 입헌군주제 국가보다 더욱 강하다. 일본회의 등이 황위의 남계상속에 굳이 집착하는 것도 황가의 규율(전통)을 바꿀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보통 서양의 입헌군주제 국가들은 국왕의 가문이 바뀌어도 합법적이기만 하면 그러려니 했고, 양성평등의 대두로 인해서 왕위계승법을 수정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 입장에서 일본의 천황제는 계승법을 수정하면 더 이상 2천 년간 계승된 그 '천황'이 아니게 된다.[13]

3. 유사 사례 비교[편집]


  • 카페 왕조 - 일본 황실보다는 역사가 짧지만 10세기[14]부터 19세기[15]까지 부계를 통해 단절 없이 프랑스 왕위를 세습해온 왕조이다.[16] 프랑스에서 왕정이 폐지된 지금도 스페인보르본 왕조라는 방계 왕조가 왕위를 세습하고 있다. 해당 가문은 이사벨 2세 여왕을 통한 모계혈통 계승이 이뤄졌지만 이사벨 2세의 남편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는 그녀의 친사촌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부계혈통상 카페 왕조의 일원이다.[17]
  • 사보이아 왕조 - 일본 황실보다는 역사가 짧지만 11세기 움베르토 1세부터 20세기까지 부계를 통해 단절 없이 이어진 이탈리아의 왕조[18]이며, 이탈리아에서 왕정이 폐지된 지 수십 년이 지난 21세기에도 부계혈통을 통한 명목상의 계승권은 이어지고 있다.
  • 솔로몬 왕조 - 솔로몬시바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리크 1세의 후손이라 주장한 에티오피아의 왕조이다. 그 주장을 그대로 따르면 기원전에 건국된 악숨 왕국 시절부터 수천 년을 이어왔다 할 수 있고, 에티오피아 제국 시절에는 그게 에티오피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운 역사관이었다. 그러나 악숨 왕실과 솔로몬 왕조의 혈연관계를 증명할 물적 증거가 딱히 없는데다, 10세기에 악숨이 망하고 13세기에 솔로몬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300여년의 공백[19]이 있었기에 설득력은 별로 없다.[20]
  • 호엔촐레른 왕조 - 일본 황실보다는 역사가 짧지만 11세기 부르크하르트부터 20세기까지 부계혈통으로 단절 없이 이어진 독일루마니아의 왕조이며[21], 해당 국가들의 군주제가 폐지되고[22] 수십 년이 지난 21세기에도 부계혈통을 통한 명목상의 계승권은 이어지고 있다.
  • 연성공 - 군주는 아니지만 공자의 후손이 대대로 세습해온 작위이다. 유교한나라 때 중국을 지배하는 이념이 된 이후부터, 중국 역대 왕조는 공자 가문에 작위를 하사했는데, 중화민국 수립 이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라는 공직으로 바껴서 지금까지 대만에서 세습되고 있다. 공자 시대부터 2,50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국에서 수십 개의 나라가 세워졌다 망하기를 반복했던 반면, 공자 가문은 지금도 부계 혈통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1] 물론 기록이 적은 고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그 이후로 왕조 교체가 없었던것은 역사적 사실이다.[2] 한편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다보니 이에 대해서 들은 송태종은 이를 듣고 저들은 섬오랑캐에 불과하지만 옛날의 도를 가지고 있다고 한탄하였다.[3] 일본 황실은 성이 없으나 성은 부계로만 이어지는 게 국룰이므로 성이 셋인 게 애비셋이란 뜻으로 쓰이듯 부계혈통의 대유로 보면 된다.[4] 983년의 일인데 이때 재상은 평장사고 조보(趙普)에서 송기(宋琪)로 경질되었다.[5] 송나라도 야마토 왕조처럼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송태종과 달리 일본이 왕조가 아니 바뀌었으니 중국보다 우월하다는 자랑이 묻어나지만 역사관은 같다.[6] 여기서도 성씨=부계혈통이다.[7] 쇼군권신이 되어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굳이 찬탈할 흥미를 못 느끼게 해서 왕조가 유지되었다는 거다.[8] 이때는 기원전 771년인데 일본서기에서 진무 덴노가 창업한 해는 역산하면 기원전 660년이다.[9] 이때쯤이면 천황종친족내혼을 한다고 해도 촌수가 매우 멀기에 동성동본 금혼이 폐지된 현재로서는 천황이 촌수가 먼 황족과 혼인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조용은은 성균관 유생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10] 스진 덴노 ~ 진구 황후(제1왕조), 오진 덴노 ~ 부레츠 덴노(제2왕조), 케이타이 덴노 ~ 현재(제3왕조).[11] 제2왕조의 여계 후손.[12] 도래인 계통으로 제1왕조의 여계 후손.[13] 1867년, 메이지 덴노 즉위 이후 구 황실전범에서조차 "황위는 직계 황실 남성 중 장자가 이어받는다."고 대문짝만하게 명문화했기 때문에 추후 남은 남성 중에 히사히토만 있는 상황에서 양자라는 제도를 이어서라도 직계를 이을 것이 자명한 수순이다.[14] 혈통 자체는 8세기 말~9세기 초에 카롤루스 대제를 보좌했던 에스바이 백작 로베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카페 왕조라는 명칭은 987년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위그 카페에서 유래했다.[15]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축출된 루이필리프가 카페 왕조 혈통의 마지막 프랑스 군주다.[16]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등은 어디까지나 영지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리는 것일 뿐, 부계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위그 카페라는 하나의 조상이 나오는데, 실제로 루이 16세단두대에서 처형될 때 불린 이름은 '루이 드 부르봉'이 아니라 '루이 카페'였다.[17] 다만, 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의 장녀인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가 즉위한다면 그녀의 다음 대부터는 부계혈통상 카페 왕조가 아니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만약 레오노르가 이사벨 2세처럼 카페 왕조 부계 남성과 결혼한다면 부계혈통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현재 유럽 왕족들은 다른 왕족이나 귀족들보다는 평민과 결혼하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다.[18] 사보이아 백국 - 사보이아 공국 - 사르데냐 왕국 - 이탈리아 왕국 순서로 계승되었기에, 백작가에서 공작가를 거쳐 왕가로까지 신분이 상승한 가문이기도 하다.[19] 그 기간 동안 에티오피아에는 구디트 여왕, 자그위 왕조 등이 있었다.[20] 여담이지만 태국의 근대화를 주도한 라마 5세도 오히려 수코타이 왕조부터 700년 내내 단일왕통으로 이어왔다는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수코타이 왕조와 짜끄리 왕조 사이에는 아유타야 왕조라는 나라가 있었고 그 아유타야가 멸망한 뒤 잠시 톤부리 왕조가 들어섰다가 이를 무너뜨린게 짜끄리 왕조인지라 그런 윤색이 먹히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21] 다만 가문 내에서 독일 황제프로이센 군주를 배출한 분가는 일개 성주 가문이었다가 14세기 말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차지했기에 왕조로서의 역사는 조선왕조보다도 짧고, 루마니아 왕위를 차지한 분가는 왕조로서의 역사가 수십년에 불과하다. 반면 진짜 부르크하르트 시대부터 단절 없이 이어진 호엔촐레른 본가는 19세기에 이미 영지를 상실했다.[22] 독일 11월 혁명, 루마니아 공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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