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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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대기
1.1. 즉위 이전
1.2. 임진왜란
1.3. 즉위 시절의 불안정
1.4. 붕당 간의 균형을 망치다
1.5. 폐모살제
2. 정책
2.1. 대동법 시행과 반대
2.2. 전후 복구
2.3. 기록물 편찬과 보존 사업
2.4. 옥사
2.5. 궁궐병과 재정파탄
2.6. 등거리 외교
2.7. 폐위
3. 폐위 이후



1. 일대기[편집]



1.1. 즉위 이전[편집]


즉위 이전의 업적으로만 치면 조선 역대 세자들 중 손에 꼽히던 리즈 시절&중립 외교와 같이 일반 대중들에게 고평가받는 이유.[1]

광해군은 1575년에 선조와 훗날 잠시 공성왕후로 추존되었던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태어났다. 선조의 장남이자 광해군의 동복형으로는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많은데도 너무나 제멋대로에 포악한 성격의 인물이었기에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이렇듯 출생이나 인기 자체는 괜찮았으나, 실제 계승 이후에는 왕권이 불안한 왕이었다. 대외적인 상황도 안 좋았다. 당시 명나라만력제도 쟁국본에서 후계 문제로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었던 데다가, 선조가 아들들을 줄세우면서 판단이 자주 흔들렸다는 것이 계승에 있어 더 실질적인 문제였다. 조정의 여론은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광해군이 대세였으나, 그럼에도 선조는 재위 중기엔 계승 서열이 더 낮은 인빈 김씨 소생의 의안군과 신성군을 총애하여 세자감으로 눈여겨 보았고 말년에는 적자인 영창대군에 주목했다. 반면 종법상 가장 정통성이 강했던 임해군은 그 난폭한 행실 탓에 선조에게도 조정에서도 전혀 군왕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박시백 화백은 "선조가 광해군을 괴롭히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한 이유는, 임진왜란 중 도망치기만 한 자신과는 달리 광해군은 분조를 잘 이끌어 백성들과 신하들의 지지를 얻자, 그 점을 질투했기 때문이다"라는 설을 제시했다. 또 이 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애초에 광해군은 종법상으로 따져봐도 영창대군보다 우월한 위치였다.

아버지 선조처럼 광해군에게도 그가 왕자였던 시절에 부왕의 물음에 영특하게 답한 일화가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루는 선조가 여러 왕자들을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으뜸인 반찬이 무엇이냐?"며 묻기를,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2]을 댔으나 유독 광해군만은 조미료인 소금이라 답했다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광해군이 이르기를,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어서 선조가 왕자들에게 가장 아쉽게 여기는 점이 무엇이냐 묻자, 다른 왕자들의 답변과 달리 광해군은 생모가 일찍 죽은 것을 가장 아쉽게 여긴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선조가 갖가지 선물을 준비해 왕자들에게 가지고 싶은 물건을 가져가라고 하자 다른 왕자들은 앞다투어 보물들을 가져갔는데 광해군만 붓과 먹을 가져가서 선조가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일화를 전해들은 신료들은 일찌감치 광해군을 왕재로 주목했다고 한다.


1.2. 임진왜란[편집]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선조는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유능한 왕자를 세자로 삼아야겠다는 결단을 내려 둘째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당시 청년 시절의 광해군의 활약은 그에 대한 평가의 호오와 별개로 조선 왕조 역사상 그리 많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실천된 사례로써 뭇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시기였다.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조선의 창건자인 이성계와 그리고 같이 전쟁터에 나갔던 정종을 제외한다면, 외적과의 전면전에 직접 뛰어들어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국왕은 광해군이 유일하다. 농성을 포함한다면 인조도 해당되겠지만 이쪽은 삼남 쪽으로 도망치려다 갇혀서 농성했기 때문에 본의로 임한 것이 아니라서 경우가 좀 다르다.

떠넘겨지듯 종묘 사직을 떠맡게 된 광해군은 조정을 분할하여 분조를 이끌었으며, 왜군이 길을 막아 북쪽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분조를 남으로 이끌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항쟁을 지휘하여 높은 성과를 올렸다. 선조의 도주로[3]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고[4] 왕의 아들들을 (깽판을 쳤다지만) 왜군에게 넘기던 시절[5], 유일하게 왕실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일을 책임있게 그리고 꽤 성공적으로 임한 인물로 민심 수습과 사기 회복, 왕실 이미지 회복의 효과는 꽤 컸다.[6]그 때 광해군의 나이[7]나 상황[8]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로 책임 의식을 가지고 해낸 것이 놀라울 정도이며 이 때 대처는 한국사 통틀어 다른 전란기 왕들과 비교해봐도 꿇리지 않을 정도. 괜히 신하들과 명이 선조를 끌어내리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게 아니다.

전란이 계속되면서, 명이 광해군을 새로운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선조는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의심이 짙어졌다.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반란 사건으로 가뜩이나 의심이 많아진 선조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광해군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여러차례 양위 소동을 벌여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는 결국 광해군 대에 부담으로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인목왕후를 새로이 맞아들였는데 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적자인 동생이 태어나자 그렇지 않아도 껄끄러웠던 광해군은 처지가 더 곤란하게 되었다.[9] 부왕 선조와는 왜란을 거치며 이미 정적이 된 상태였지만[10] 영창대군은 아직 어려도 너무 어렸던 데다가 광해군이 공이 크고 흠이 없었기 때문에 전례를 고려하면 별 문제가 아닌 명의 책봉 문제를 끌어내 견제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유영경의 탁소북은 그런 선조에게 부화뇌동하여 광해군의 지위를 흔들려 했으나 대북, 서인, 남인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세자라서 기반이 정말 불안하진 않았다.


1.3. 즉위 시절의 불안정[편집]


선조는 병상에서까지 후계에 대한 확정을 미루다가 죽음이 임박해서야 "광해군을 왕위에 앉히고 왕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탁소북의 영수이자 권신이었던 류영경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위해 이 교지를 자신의 집에 몰래 감추어 계승을 교란시켰다. 이에 정비였던 인목왕후가 언문 교지를 통해 광해군의 후계를 인정하고서야 광해군이 즉위할 수 있었다.

선조의 광해군 견제에 이용된 영창대군 문제는 광해군의 의심병과 얽혀 옥사와 정파간 균형파괴로 이어졌다.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 세력은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광해군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려 했다. 기폭제가 된 것은 임해군을 시작으로 봉산 옥사, 김직재와 신경희의 옥, 계축 화옥 등 거듭 발각되는 역모 모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들은 대부분 과장, 허위성 고변이다. 대표적인 게 봉산 옥사.광해군은 이를 알면서도 왕권 확립을 위해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광해군은 조정과 재야, 당파를 막론하고 폭넓은 지지를 받고있었음에도 부왕 선조가 이몽학의 난 이후부터 보여준 극심한 노이로제를 보였다. 그 결과 왕권을 위협할만한 징후가 보이면 주저없이 친국을 통해 이를 가차없이 눌러 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이이첨 등 대북에 다대한 권력이 집중된다.[11]

선조의 사망에 허준과 광해군이 관여했다는 독살설 음모론을 미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열거해보면, 우선 선조가 의외로 건강했는데도 불구하고 돌연사했으며, 당시에 어의였던 허준이 광해군의 비호로 인하여 그에게 내려졌던 형벌이 귀양에서 그쳤다는 점, 심지어는 북인의 신하들도 허준에게 더한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내렸으나 광해군은 이를 모두 묵살했다는 점, 이후 광해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했다는 점들이다.

그러나 독살설과 관계없이 광해군이 허준에게 호의를 보일 만했던 점은 광해군이 왕자였을 때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와중에 자원하여 치료를 해주고 마침내 완쾌시킨 사람이 허준이었다는 것이다. 허준은 그 공로로 당상관에 오른 적도 있었는데, 실록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 치료에 대한 포상이 너무 과하다고 신하들이 따지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왕이 죽었다고 무조건 어의들을 때려잡듯이 벌을 주고 귀양을 보낸 것은 절대 아니다.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의 경우 거의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병사한 경우에도 형식적인 귀양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유배에도 급이 있어서(가령 자기 땅 많은 곳에 보낸다든지, 자원 부처라든지..), 누가 봐도 형식적인 귀양이라면 그냥 휴가보내듯 갔다가 돌아올수도 있다.[12] 따라서 음모론은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며, 오늘날 허준은 당대 조선의 민중을 구원한 위대한 의술가로 높이 평가된다. 게다가 이 음모론 자체도 인조반정 당시 인목대비의 주도로 광해군의 죄상에 포함시키려다가 바로 그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들이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여 빠진 부분이다. 말 그대로 "찹쌀 떡밥".[13] 애초에 이러한 독살설들은 대부분 심증에 불과하다.


1.4. 붕당 간의 균형을 망치다[편집]


위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광해군은 초기부터 선조인조의 실책에 버금가는 극심한 왕권 노이로제를 보여준다. 수많은 옥사들은 붕당간의 균형를 흔들어놓았고, 특히 대북이 인조 시절의 서인들에 맞먹는 패악을 부리게 된다. 특히, 대신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대북파의 힘이 너무 커져 광해군은 이이첨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윤선도의 상소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여러 옥사들을 주도하며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대북은 이후 각종 국가 기관들과 심지어 과거 시험까지 조작해가면서 권력을 다지게 되었고. 광해군 초기 실세 그룹이었던 소북파인 박승종과 유희분마저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광해군이 총애하였던 허균이 죽기 직전 할 말이 있다고 외쳤고 광해군 또한 허균의 말을 들어보려 하였으나 이이첨이 광해군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독단으로 허균을 처형하는 등 대북에게 왕권이 잠식되어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옥사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이귀와 김류 등 서인 세력들은 광해군의 잦은 옥사 때문에 피해를 입는 바람에 광해군에게 원한을 품어 잠재적 불만론자들이 되어버렸고 그들에 대한 경계를 거두고 오히려 권신인 이이첨 등 대북파로부터 권력을 거둬들이기 시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경계를 푼 결과는 거사 당일 날의 밀고마저 일축함으로써 인조반정이 성공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1.5. 폐모살제[편집]


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해 세운 명분 중의 하나가 소위 폐모살제라 불리는 친족에 대한 견제였다. 형인 임해군을 독살시키고, 조카인 능창군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보내 살해했으며,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하여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을 죽이도록 광해군이 직접 교사했다는 사료는 없다. 사실 실록에 등장하는 영창대군 살해 진상은 그 때 그 때 다 다르다. 또한 영창대군 사사에 연루된 인사들 중 영창대군 살해에 가담했던 정항 등 상당 수는 훗날 인조반정 공신들에 의해 복권된다. 어느 쪽이든 당시 정황상 심증으로 광해군이 그랬을 거라 취급하는 것이며, 또한 반정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처럼 몰아간 면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유배지의 현지 관리가 왕명과 무관하게 임의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이첨 등 대북 강경파의 소행이라는 견해가 있다.[14]

다만 영창대군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 부사 정항 등 의심자들에 대해 딱히 이렇다할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것이 광해군이 내심 이들의 행위를 두둔했다는 것이 근거로 꼽히기도 한다. 임해군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따른다'면서도 가족과 노비까지 혹독히 수사하면서 몰아붙였고[15], 처음 임해군이 병사했다고 보고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재조사 도중 노비가 "독약을 올렸다가 임해군이 먹지 않으니 목을 매어 죽였다"고 증언한[16] 대상인 이정표라는 인물은 임해군 사후 전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영창대군을 감시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런 미온적인 대응과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혹한 조치가 표면적으로 극형을 꺼린 광해군의 입장과는 앞뒤가 맞지 않다며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진짜 의중과 이면에 감춰진 진실은 본인과 연루자들 밖에 모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권을 뒤엎고 집권한 인조 자신조차 영창대군 살해 관련자(이정표, 정항)들에 대한 처벌 요청에는 시큰둥하다 못해 아예 화를 내면서 막았다.

그리고 거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이 증살설, 굶어죽은 것, 양잿물을 먹여 죽게 했다는 등 일관되지 못하고 광해군 시대에는 병사설이 정설이었다가 인조 후 다양한 죽음설들이 돌며 광해군이 살해한 것으로 묘사되고 인조 측도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재조사는 없었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은 병사가 맞고 살해했다는 것은 누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광해군 대에 영창대군이 죽었을 때의 상소의 내용은 역적을 국법으로 죽여야 하는데 정항 놈이 제대로 관리를 안해서 국법으로 처벌을 내리기도 전에 죽어 종묘 사직을 욕되게 하였으니 정항에게 벌 주세요 정도로 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나 정항이 살해했다는 말은 인조나 서인 측에서도 단순히 소문일 뿐이라며 정항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았었고, 본래 인조 대에 편찬된 광해군일기의 중초본에 "정항이 영창대군에게 밥을 주지 않아 영창대군이 기력이 다해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17] 정항이 영창대군을 증살하였다" 등 일관되지 못한 내용에 인조 대의 영창대군의 비문에는 불을 피우지 않아 영창대군이 얼어죽게 만드려고 했다가 안 죽으니 양잿물을 먹여 죽였다고 되어있으며, 이 양잿물설은 인조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양잿물을 먹인 것은 정항이 아닌 이정표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덕형 등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신료들이 역적이라고 하는 영창대군을 어린 아이를 섬에 보내 중병에 걸려 죽게 한 자신의 책임이라며 영창대군을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한다.

영창대군이 죽기 며칠 전에도 중병에 걸렸다고도 하는 등의 내용이 있고 정항이 급한 서신이라며 보낸 서신도 있긴 하지만 정설은 없이 수많은 추측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으로 영창대군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반론이 있다. 이정포가 별장 홍유의에게 영창을 죽이자고 했지만 홍유의는 반대했고 교체되었다. 그리고 강화 부사 기협도 파직됐는데 그 이유는 "강화 수령으로 있을 때 역적 의를 비호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며, 음식 공급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는 게 이유였다.[18]

능창군의 경우는 '신경희의 옥'이라는 반역죄의 핵심 인물로 연루되어 즉결 처분해도 상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또한 이 죄목을 적용하면 광해군은 능창군의 형인 인조(능양군)과 그 아비인 정원군도 굴비처럼 엮어 숙청할 수 있었고, 결국 인조는 왕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다만 패륜 여부를 떠나서 신경희의 옥사 자체가 평소에 소명국과 친했던 신경희가 소명국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옥에 갇힌 소명국은 뜬금없이 신경희가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한 것이다. 둘의 대질에서 소명국의 말에 신경희는 우물쭈물했다고 하고 광해군은 이에 분노해 신경희를 엄하게 신문할 것을 명령하였다.

문제는 이 신경희가 바로 이이첨의 사람이었다는 것으로. 박승종은 이 말을 듣고 "과연 역적이 가까이에 있었다"고 외쳤다고 하며. 박승종이 이이첨을 잡으려고 침소봉대한 사건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전에 지나친 고문으로 신경희가 옥사해버리면서 흐지부지된 감이 있다. 정확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기도 전에 용의자가 죽어버렸으니 그걸 빌미로 마구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관련자들을 즉결 처분하는 건 실제로도 무리한 감이 있었다. 결국 이게 나비 효과를 만들게되었다. 능창군은 유배간 후 자살, 아버지 정원군은 그 충격으로 죽었고 이에 분노한 능양군이 복수를 다짐하였고 반정의 주역인 신경진은 신경희의 사촌 동생이었다.

폐모론 수용과 관련해서, 광해군 5년 당시 이위경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정조, 윤인 등을 비롯한 태학생 19명을 대동해 폐모소를 올리자 처음에 광해군은 그 주된 근거인 신덕왕후 및 이방석, 방번의 전례를 상고해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대사헌 이지완과 최유원이 이에 반하여 상소하자 "국모를 동요하니 그 죄가 윤리와 기강에 관계된다"며 이위경 등 20명 모두에게 정거(停擧)[19] 조치를 내렸다. 여기서 일단락 될 뻔했던 폐모론은 4년이 지난 광해군 9년 11월에 다시 유생들(박몽준, 한보길, 윤유겸 등등)의 빗발치는 상소로 불거져 의정부에서 논해졌는데, 당시 광해군일기 11월 ~ 12월자를 보면 온통 유생들의 폐모 상소 관련 내용이다. 결국 유생들의 상소 러시로 촉발된 폐모 정국 과정에서 조정은 허균, 이이첨 등 대북을 위시한 찬성파와 기자헌, 이원익, 이덕형 등의 반대파 두 패로 갈라졌고, 심지어 양사까지 나서서 폐모를 주청하는 등 몇 년을 끌다 광해군 11년 무렵에야 겨우 서궁에 안치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이런 와중에 선조 생전에 영창대군을 지켜달라는 말을 들은 여러 노신들이 김제남의 가족들과 함께 잡혀왔었는데 그 중 박동량이 서궁에서 왕에 대한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고변하였다. 그 내용은 대군 궁방의 사람들은 선왕께서 병환에 시달리게 된 이유를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에게 돌렸고 그리하여 수십여 명이 요망한 무당들과 함께 잇따라 유릉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것이다.

다만 사관은 그들이 저주한 게 의인왕후가 아닌 광해군의 어미인 공빈 김씨의 능에서 했다고 적고 있고 그마저도 임해군이 노비들을 동원해 막아서 실제 하진 못 했다고 적고 있다. 이 말로 인해 대비전의 궁녀들이 줄줄이 불려와 고문을 가해 새로운 증언이 나왔고 그 증언에 따라 선조의 능까지 파보았다. 하지만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역모에 휘말린 김제남은 6월 1일에 사사되었고 이즈음 궁중에서는 과거 작서의 변 때와 같은 유사한 일들이 많았다. 실록의 사관은 인목왕후의 어미 정씨의 소행이라 주장하였다. 결국 광해군일기 11년 1월 13일자에선 이를 조보에 내지 말라고 굳이 덮어두는 조치가 눈에 띈다.

광해군은 폐모론 주창자 중 정조, 윤인 등을 삭직했다가 복귀시켰고, 폐모론 반대 주창자 중 이원익은 한동안 유배 후 고향인 여주로 돌려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유배 당시 이원익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지금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머리를 맞대고 흉흉하게 하는 말이 ‘이로 인해 장차 대비에게까지 미칠 것이다.’고 합니다. 신은 그만 놀라서 간담이 철렁 내려앉아 자신도 모르게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어미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자간이란 그 명분이 지극히 크고 그 윤기가 지극히 중합니다. 성인은 인륜의 극치인데, 성명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만일 조정에 과연 이 논의가 없었다면 신이 경솔히 항간의 말을 믿고 사전에 시끄럽게 한 것이니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그러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겠습니다."


광해군은 이 말을 듣고 어디서 들었냐고 따졌고, 이원익은 그냥 걱정돼서 한 거라면서 남에게 들은 게 아니라고 답한다. 결국 이 일은 이원익의 유배로 마무리되었다.

이창록이라는 이는 7년 8월에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가 죽기도 하였다. 그 내용이 좀 과격하긴 했지만.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였으니 이 일을 어떻게 차마 하였는고. 내 어찌 착하지 못한 이를 임금으로 여기랴?"

실록에서는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야사에서는 그가 평소에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고 적고 있다. 다만 앞부분 형과 아우를 죽였다는 건 실록에서도 나온다. 다만 야사에서는 정인홍이 이를 고발했다. 하는데 정작 정인홍은 광해군과 만났을 때 이걸로 그 고을까지 벌 준 걸 좀 까는 뉘앙스의 말을 하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광해군은 폐모론에 대해 여론 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다. 세종의 공법 여론 조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여론 조사는 광해군일기에도 나오지만 <추안급국안>이라는 사료에 좀 더 자세히 나오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이 조사에 참가한 인원은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고 그 결과는 소수의 관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찬성 의견을 냈다.[20] 그러나 폐모론에 대한 인목왕후 폐비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찬성으로 나왔다지만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이첨이 자파 세력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 것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또 신료들 대부분이 찬성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폐모론에 반대한 서인 남인 원로 대신을 광해군이 다 쫓아내 대북 세력만 남은 상황에서 여론 조사를 했으니 당연히 찬성이 높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광해군 재위기에 터진 이런 저런 일들은 반정 세력의 좋은 명분이 되었음도 사실이며, 임해군 사사건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까지 얽혀 대중국 외교에 상당한 무리를 주게 되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예도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리긴 하지만, 여하간 유교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북을 제외한 붕당들의 반발이 있었다. 대북 내에서도 곽재우, 기자헌 유몽인 같은 이이첨 일파가 아닌 대북이나 유희분 박승종 남이공 같은 소북 공빈 김씨의 남동생으로 광해군의 외숙인 김예직마저 폐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광해군이 폐비하라고 정식으로 교서를 내린 일은 없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 인목대비는 폐비 취급을 당하긴 했으나 공식적으로 폐모가 된 것은 아니었다.[21]

하지만 폐모살제는 결국 광해군의 목을 조른 것이다. 서인, 남인, 대북파, 소북파, 친척까지 광해군에게 반대하고 나서는데 결국 광해군은 이를 단행했다. 비록 폐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설사 좋은 궁궐에 가두었다고 해도 결국 아들이 어머니를 강제로 묶어두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유교가 아니라 윤리적으로 큰 문제다. 특히 위에 서술 되었든 영창대군 죽음 이후에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비 이이첨 일당[22] 사람들이 폐비를 결사 반대하는 데 이를 유배와 숙청 등으로 이룬다. 그런데 이로 인해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 일부가 권력을 차지해 자신과 격렬하게 대립함에도 광해군은 이들을 숙청하지 못한다. 서인, 남인을 다시 끌어들이려면 대비의 유폐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광해군은 즉위한지 14년이 되고 나서야 겨우 서인, 남인들을 다시 포용하기 시작했다.[23] 광해군이 유폐를 단행한 것은 선조의 지나친 견제에 따른 불안감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대비 유폐는 광해군 스스로 좌초한 것이다. 후술될 박시백의 말처럼 선조에게 받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회복해 포용력 있게 나갔다면 대북의 일당 독재로 벌어진 빈 틈 없이 정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폐모살제는 단순 명분을 넘어 광해군 자신에게 목을 조르게 만들었다.


2. 정책[편집]



2.1. 대동법 시행과 반대[편집]


광해군 즉위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로 경기선혜법으로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하지만, 광해군 본인은 이 법의 시행 건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개인적으론 부정적이었고 일찍이 시도나 성공 전례가 없었으므로 이 법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겠냐며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범 실시 지역인 경기권 밖으로 선혜법을 확대하자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분명히 했다.

광해군이 대동법 최초 시행자는 맞다. 하지만 확산 과정에서 하지만 과거에는 신하들이 반대하는 대동법을 광해군이 주도했다 잘못 알려졌으나 이정철 교수의 대동법 연구가 공개된 이후 이런 주장은 쏙 들어갔다. 오히려 광해군은 대동법에 미적거리고 반대했다. 대동법은 인조 대에 시험 적용을 거쳐 미비했던 점을 파악하고 행정에 필요한 인력과 자료를 확보하는 과정을 거친다음 효종 때부터 자리잡는다.

자세한 건 대동법/광해군 시기 참고.


2.2. 전후 복구[편집]


호적과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복원했으며 동의보감을 발간했다. 또 창덕궁 등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또 임진왜란 과정에서 한양이 생각보다 방어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일찍부터 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지관 이의신의 견해에 따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요지인 파주의 교하로 천도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정으로 실각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외에 광해군 시기 적상산성과 남한산성 석성 개축, 북방 성벽 강화, 강화도에 진지 구축, 수군 훈련 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다만 광해군 대부터 인조 대까지 반란과 호란으로 소실된 기록이 많아 구체적으로 얼마의 병사들이 전방에 배치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실한 편이다.

반정 세력은 집권 후 궁궐 공사를 중지하는 제스쳐를 내보여 민심을 사려 했다. 물론 이괄의 난과 호란으로 인조 대에도 공사를 하긴 했지만 인조 대의 그것은 광해군 지지자들의 물타기와 달리 광해군 대의 그것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2.3. 기록물 편찬과 보존 사업[편집]


일반적으로 광해군은 동의보감의 편찬과 완성을 후원했던 것으로 특히 유명하나, 그 외에도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재간 및 보급했다.

조선왕조실록과 관련해서는 재위 2년차에 무주군의 적상산성을 수리하면서 적상산 사고를 새로 설치한 것이 유명하다. 그는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줄곧 새로운 외침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특히 후금의 침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훗날 호란 때의 실제 침공 루트까지도 거의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기존 사고의 불안성을 보완할 새로운 실록 사고 건축을 명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괄의 난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마니산, 춘추관 사고에 보존되어 있던 사료들 태반이 소실됨으로써 이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참고로 적상산 사고본은 정묘호란 당시 그곳을 지키던 승려 상훈이 재빨리 인근 굴 속으로 숨김으로써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고, 현종 때 소실된 실록들을 보완했던 작업에서는 적상산 사고본이 주된 참고 사료가 되었다.


2.4. 옥사[편집]


광해군 4년(1612년) 2월 13일, 역모 보고가 들어온다. 장소는 황해도 봉산으로 그 장본인은 김제세로 공문서를 위조해 군역을 피하려 하였다가 엉터리로 만들었기에 '위조한 흔적이 현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서' 그를 붙잡아 추궁하였는데 그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나온다. "평산의 대장이 군내에서 반역을 일으키고자 우리 형제로 하여금 허실을 염탐하게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 김제세가 대장이라고 고한 김백함은 바로 붙잡혀왔고 이름이 나오는대로 굴비 엮이듯 줄줄이 들어왔으며. 광해군은 이를 직접 심문(친국)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사건이 이상해져갔다. 일단 맨 처음 황해 병사 유공량의 장계에서도 그런 부분이 나오는데 이런 내용이다. "그의 꾸며대는 말이 괴이하여 다시 국문을 가한즉 말이 혼란하여 믿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17일, 황해 감사 윤훤과 병사 유공량은 각기 장계를 올리면서 공초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고 보고하였다.

"그자는 이미 어보와 인장을 위조하고 체포된 뒤 틀림없이 사형이 될 것임을 스스로 알고는 평소에 일면식이라도 있고 조금이라도 원한이 있는 사람은 다수 끌어대어 묻는 대로 대답하는 말들이 마치 미리 외워놓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니 또 무어라 끌어댈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중략) 앞뒤로 말을 바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풍병이 들었거나 정신나간 사람은 아닌 듯한데, 형제가 같은 말로 공초를 하였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 윤훤


"역적이 끌어대는 숫자가 점점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며 민간에서는 소요하여 뜻밖의 변란이 이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도 있겠기에, 신의 어리석은 염려도 아울러 장계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중략) 심문하여 전일의 공초를 가지고 힐문하니 대개 앞뒤가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모든 역모를 꾀한 사실을 마치 심상한 보통 이야기 하듯 하고 두서 없고 혼란한 말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 유공량


현장에서 이들을 심문한 병사와 감사가 거짓을 말했다고 본 것이었고 이 일을 듣고 이덕형이 급히 들어왔는데 그 역시 죄인들이 다 잡혔으니 더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말하지만 광해군은 그럴 생각이 없어 매일마다 친국했다, 붙잡혀 온 이들이 부정하면 곧바로 압슬형을 행하였고 그렇게 죄인들은 압슬형을 당하면 이런저런 이름을 댔다가 다시 부정했고, 또 압슬형이 시작되면 다른 이름들을 끌어내는 식으로. 여기서 나온 이름이 그냥 아무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가 원한이 있는 이였을 수도 있었지만 참 많은 사람들이 또 끌려오게 되었다. 대장이라는 김백함은 2월 22일에 다른 이들과 함께 거열형에 처해지는데 이 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라가 나에게 속았다!" 이런 것을 근거로 박승종 등은 계축 옥사 때 적당히 하라는 쪽으로 광해군에게 말하지만, 광해군은 이렇게 답한다. "역적을 국문할 때에는 엄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다 보면 국맥을 실제로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옥사가 확대되는 가운데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봉산 군수 신율의 지인 유팽석도 끌어온다. 그는 황혁, 정경세 등의 대신부터 정인홍까지 끌어들였고 여기에 류영경의 자식들까지 끌어들였다. 원수 사이인 정인홍과 류영경이 같이 같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정인홍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붙잡았고, 황혁은 죽고 정경세는 파직되었다. 실록의 사관 평에서는 이게 신율이 꾸민 것으로 적고 있다. 지인인 유팽석을 희생시켜 자기의 원수였던 황혁과 정경세를 숙청하려 했다는 거였다. 애초에 신율에 대한 평은 좋지 않았다.[24] 고문으로 더 큰 범죄를 만든다는 식으로. 옥사에는 죽은 이들의 처첩과 어린아이들까지 연루되었다. 보통 이들은 관비로 가지 고문을 하진 않지만, 광해군은 이러한 과정에 개입하였다. 9월이 되어서야 이 모든 게 끝이 난다. 이른바 봉산옥사로 이로 인해 100여 가문이 멸문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지인과 허위 역모를 꾸민다음 그 지인을 고발해버린 일이 벌어지는데 안위라는 자로 임해군이 잡힐 때 수문장이었던 김위를 본받은 것이었다. 김위는 임해군이 무기를 들고 갔다는 걸 고발했고, 원래라면 수문장이 막지 않은 것이므로 벌을 받아야 하지만 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일을 본받은 것이다. 안위는 거짓 고변을 하더라도 상을 받으려고 음모를 꾸며놓고는 같이 꾸민 이 또한 고발하였다. 그렇게 같이 의논해놓고 역모의 대상이 된 조극신, 그의 아비는 이 모든 것을 꾸민 일이라 자백하라고 하였고 조극신은 이를 모두 자백했지만 광해군은 조극신은 유배보내놓고 안위는 집으로 보내주었고. 거짓이라 해도 알리기만 하면 아무 죄를 묻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나중에 폐모론이 일때 장령이던 배대유는 "김덕룡이란 자는 간음하다 붙들리자 고변했고 김언춘은 도둑질하다 붙들리자 모역을 했다고 칭했습니다." 라며 깠다.[25] 사실 상식적으로도 광해군이 잘못한 것인데 역모죄라는 게 걸려서 사실로 드러나면 집안 망치는 것이라서 역모를 무고로 고변하면 거의 다 죽이게 되어있다. 하지만 안위의 사례를 보면 자기가 먼저 저질러놓고 남을 끌어들여 그 남을 망쳐놓았다. 누가봐도 안위가 잘못한 것이고 설령 광해군이 안위를 보호하고 싶다 해도 처벌하는 척쯤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것도 안했으니 앞서 지적대로 고변이 면책 방법이 될 수밖에

2.5. 궁궐병과 재정파탄[편집]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조차 과오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어물쩍 넘어가는 광해군의 가장 큰 실책. 인조 측의 영향인지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이 군사력에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도 징발을 했다는 기록 등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정작 인조 2년에 바로 광해군 시대 때 5년, 6년간이나 군사 징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이 가능하며 동시에 광해군일기에서도 궁궐을 수도 없이 지으면서도 죄다 변경에 군사를 밀어넣어서 도성 내에 군사가 3,000명 이하로 떨어질 지경이 되어 업무를 수행할 수도 없어 호위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도성 내의 군사들까지 죄다 변경에 투입하는 짓을 제발 좀 그만하라고 만류하는 내용이 있다. 궁궐병과 군사력 강화병이 이중으로 발동되었으니 백성들의 고난은 알만한 수준.

또 악소배(惡少輩)를 시켜 백성들의 소와 말을 빼앗아 자재를 운반하게 하고, 개경 근처의 각 군(郡)에서 장정을 징발해 벌목한 후 목재를 강물로 떠내려 보냈다. 이로 인해 인마(人馬)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주(州)·군(郡)이 소란하니 농민들은 아예 농사를 작파해버렸다. 당시 개경 백성들에 사이에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 궁전의 주춧돌 밑에 묻으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집집마다 놀란 나머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는 사람이 많았다. 악소배들은 이 틈을 타서 겁탈과 도둑질을 자행했다.

왕은 완공이 지연되자 노하여 김선장과 박양연 등에게,

“만약 10월까지 완공하지 못하면 반드시 중형을 받게 될 것이고 또 하사했던 물품과 공사 비용도 추징할 것이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김선장 등이 밤낮으로 쉼없이 공사를 독촉하면서,

“재상으로부터 권무(權務)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재를 실어 나르되, 기한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베 5백 필을 징수하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낸다.” 는 방을 붙이니 자재를 실은 수레가 길을 메웠다. 신궁(新宮)의 처마와 문을 모두 놋쇠와 구리로 장식하면서, 백관으로부터 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분부해 두 사람당 오종포(五綜布) 1필 씩을 주고 놋쇠와 구리(鍮銅) 2근씩을 징수하니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했다.

또 각 도(道)로부터 구리와 철을 거두어 세 발 달린 솥과 발이 없는 큰솥 및 가마솥을 만들어 신궁에 들여 놓았으므로 민간의 농기구는 아예 남아나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왕은 공사가 지연되는 것에 노해서 몸소 김선장·박양연·민환에게 장형을 내리니 민가와 사원의 재목·기와·주춧돌·섬돌이 모두 뜯겨져 나갔다. 그 궁실의 구조는 왕의 거소와 사뭇 달랐다.


고려 말 암군의 대명사인 충혜왕도 궁궐을 짓는답시고[26]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덕분에 농업 국가에서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하는 현상(작파)이 발생했다!

광해 114권, 9년(1617년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4월 18일(임자) 4번째 기사

호조가 궁궐의 건축으로 인한 재정의 부족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정에 이미 궁궐을 짓는 큰 역사가 있으니 백성들이 포목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그러니 만약 달리 조치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전결에 따라 포목을 거두는 것을 정지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세입(稅入)이 1년의 쓰임새를 다 대지 못하여서 10월등(十月等)의 반록(頒菉)과 다음해 정월등(正月等)의 반록은 매년 계속해서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부득이 계청해서 경기와 공홍도의 전세(田稅)를 미리 끌어다가 썼습니다.


광해 155권, 12년(1620년 경신 / 명 만력(萬曆) 48년) 8월 7일(임자) 3번째 기사

공명첩을 만들지 않은 해조의 색낭청을 추고하게 하다

“방추(防秋)할 시기가 이미 다가왔는데, 공명첩(空名帖)을 아직도 만들어 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해조의 색낭청을 추고하라.”


공명첩[27]을 발행 안 했다고 조사한다니 고금에 토목 공사를 자주 벌였던 임금 치고 말로가 좋은 경우는 드문데 광해군은 역대에서 유례가 없을만큼 새로 짓고, 꾸미는데 열심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불타버린 종묘의 중건을 마쳤고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 중건 사업을 재개하여 1611년 완성하고 창덕궁으로 옮겼다. 중건 뒤엔 다시 창경궁을 중수했고 정원군[28]의 사저가 있던 자리에 왕기가 있다는 풍문을 이유로 돈의문 안에 경덕궁[29]을 짓고, 풍수에 따라 또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며 인경궁을 짓고 북학 자리에는 자수궁을 짓는 등, 궁궐을 짓고 또 지었다.

임진왜란 때 궁궐들이 다 불탔으니 원래 있던 궁궐을 짓는다면 신하들도 반대하기 힘들었겠지만 광해군은 그런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선조때 이미 창덕궁 공사가 시작되어 거처할 궁궐을 확보했는데도 새로운 궁궐들을 대규모로 건설했다. 인경궁은 아예 옛 정궁 경복궁 10배 크기였다. 또한 인경궁과 자수궁은 청기와를 사용했는데 이 청기와 재조의 주 재료가 화약의 원료인 염초다. 앞의 선조나 후대의 인조 시기는 말할것도 광해군 대에도 화약이 크게 부족했다는걸 고려하면 국방에 신경을 썼지만 그러면서도 궁궐을 짓는데 너무 과도한 힘을 소비하여 군사력 강화까지 합쳐져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되졌다.

심지어 궁궐병 못지 않게 변경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도 정신병적인 집착을 보이는데 당장 광해군일기에서 광해군 14년대를 보면 훈련 도감에서 도성 내의 군사가 3,000명도 채 안되고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들이 너무 힘들어하는데 이 상태에서 또 변경으로 보내면 궁성을 호위할 병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광해군을 만류하는 내용이 있다.[30]자신을 호위할 병력까지도 전쟁 대비랍시고 변경에 보내 배치시키는 것인데 이게 왕권 강화를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짓인지도 의문이 들 정도. 궁궐을 짓는 이유가 왕권 강화라고 하지만 정작 하는 행동을 보면 왕권 강화와는 거리가 먼 행동들만 하고 있다.

또한 이 때에서 7개월 전 훗날의 청태종이 되는 홍타이지가 병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보고를 받았던 광해군은 홍타이지에게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누르하치의 장남인 따이샨[31]의 행방을 찾으라고 정충신에게 다급히 명하기도 했고 홍타이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성 내의 호위를 거의 포기하면서까지 저렇게 닥치는대로 병력을 모아다가 보내던 것은 홍타이지가 병권을 잡은 것을 경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궁궐을 짓고 나서의 행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즉위 초에 이미 창덕궁 중건을 마쳤는데도 그곳에 계속 거처하지 않고 수시로 '좁고 불편한' 정릉 행궁(덕수궁)으로 옮겨가서 거처했다. 반대를 뿌리치고 경덕궁을 중건한 다음에도 그랬다.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광해군의 이런 행동은 세자 시절 겪은 전쟁 후유증[32]이 주된 원인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을 통해 '죽고, 다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굶어죽고, 병에 걸리고, 사람이 사람을 먹고, 강간을 목도'하면서 사람들은 운수에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미신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적극으로 나서 싸웠던 세자였으니 당연히 이런 것에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운수에 집착이 심했고 술사들을 가까이 했다.

광해군은 일찍이 이의신에게 '창덕궁은 두 번이나 큰 일을 치러서 머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의신은 "고금의 제왕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란들은 궁궐의 길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속히 옮길 곳은 점쳐야 합니다"고 했다. 광해군은 이후에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다. 이의신의 주장에 신료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광해군은 이의신의 주장에 동조했다. 광해군 7년 5월 23일, 머물고 있던 창덕궁 대조전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대조전은 유암불편하여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창경궁으로 옮기고 싶다'고 한 것이다. 두 궁궐을 수리하라고 지시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그리고 이건 수리에 그치지 않고 새 궁궐을 짓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는 욕구도 역시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부왕 선조의 권위가 무너지는 걸 직접 보았다. 평양에서는 군민들이 북상하려던 선조 일행을 막고 시위를 벌였다. 숙천에서는 선조의 행방을 알려주려고 벽에다가 낙서를 해놓은 백성도 있었다. 그렇게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국왕으로서 권위를 구겼다. 명군 지휘관들한테도 수모를 당했다. 선조는 명군의 최고 지휘관인 병부 시랑 송응창이나 이여송은 물론, 연대장 급 정도인 장교들과도 맞절을 했다. 선조 실록에는 선조를 면담했던 명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처소보다 국왕의 거처가 누추해서 송구스럽다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33]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당시 궁궐 공사에 따른 부가세까지 얹은 것. 그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파병 요구를 해왔다. "전쟁과 토목 공사를 병행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 없다"는 상식적인 지적이 당시 신료들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궁궐 공사에 계속 집착했다. 일부 지방관들은 잘 협조하지 않아 자재 수습과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 특별 어사들을 지방에 파견했다. 조도와 독운별장이다.

광해군은 궁궐 공사 재원 마련을 위해 전국에 영건 도감 소속 조도사를 내려보내 면포를 걷었다. 영건 도감 자체가 왕의 지대한 비호 아래 부패, 권력 기구화하여 정해진 수량[34]에다 방납가를 적용, 최대 100배까지 징수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던 것이다. 지방에 내려간 조도사들은 어명을 내세워 마구잡이로 징색과 횡포를 벌였다. 한가지 예로, 서자 출신인 김충보는 광해군 15년 1월, "경주 부윤 김존경이 궁궐 영건을 못마땅해하고 자신한테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울로 소환하여 옥에 가두라 상소했다. 조도사가 종2품의 "고간을 잡아넣어야한다"고 직보한 것. 그런데도 광해군은 "조도사가 취한 건 별비(別備)지 백성들에게 취한게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지방 수령들의 탄원을 무시하고 조도사들의 수탈을 지원했다(!).

한명기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이런 것들이 인조반정의 빌미의 싹을 텼을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내정면에서, 광해군의 나라는 그야말로 망국 직전의 아노미였다.

1619년 결국 원정군을 파병했는데도 궁궐 공사는 이어졌다. 원정군에게 필요한 군량과 군수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또 다른 조도사가 삼남에 파견됐다. 영건 비용 + 원정을 위한 증세 조처가 더 해진 것! 또다시 궁궐 영건을 중단하라는 요구들이 나왔다. 하지만 광해군은 꿈쩍도 안 했다. 원정군이 후금군에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경덕궁의 공사는 광해군 12년 11월경에 거의 끝났다. 하지만 인경궁 공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무렵 호남 등지에는 심각한 기근이 생겨 농민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이였다. 파견된 조도사들 사이에서도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예로 호남에 파견됐던 조도사 이창정은 농민들의 참상을 목도했다. 그래서 죄책감을 크게 느꼈다한다. 심지어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도둑질하는 신하이고 하루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루의 죄악을 더할 뿐." 조도사조차 이런 죄책감을 느꼈다. 당시 서인과 남인들은 쫓겨났다. 대북파도 광해군한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창정 같은 실무 관료들은 광해군의 권력에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조차 자신들을 '도둑질하는 신하'라고 했다. 한명기 교수는 여기서 '광해군 정권을 몰락을 예고'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인경궁의 건설을 끝내지도 못하고 인조반정을 맞았다.[35] 한명기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광해군이 왕권 강화 차원에서 집착했던 궁궐 영건 사업이 농민들을 병들게 하고 광해군 자신을 몰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36]

사실 형편을 도외시한 궁궐 공사 자체는 조선 왕조 기간 동안 가끔 있었다. 예로 태종은 재위 초기에 흉년 중에도 궁궐 공사를 감행할 정도였고 반대하는 대간들을 투옥시킬 정도로 강압적이었고, 성종도 흉년 중 세자궁 공사를 감행하였고, 문정왕후는 사찰 건립 공사로 재정과 민생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선조는 재위 말기 왜란으로 피폐한 상황에도 고려치 않고 창덕궁 중건 공사를 강행하여 대간들의 지탄을 받을 정도였다. 조선 말기인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도 경복궁 중건을 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쟁으로 나라가 완전히 피폐해진 상황에서 광해군 정도로 토목 공사를 집중시키진 않았다.

광해군이 처음에 말한 대로 경운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짓고 말았으면 임진년 이전처럼 3궁 체제를 복구한 것이니 그렇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더 크게 궁궐 공사를 벌리고 심지어 교하 천도까지 생각했었으니 가히 "궁궐병"이라고 할만 했다. (그나마도 죄다 풍수가,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 결정한 것이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재정이 회복되지 않았고 심지어 한 궁궐이 다 지어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황기와와 청기와로 지붕을 덮도록 지시하는 등의 조치는 위에서 언급한 PTSD가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다른 시기에 비해서도 분명 과한 감이 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광해군의 지나친 궁궐 공사와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해군 12년 여름을 기점으로 농민 경제는 확실하게 붕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이 무렵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아예 백성들은 공정하고 관대하게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지방관이 탄핵받거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경우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그의 연임 운동을 펼치기까지 했다.

광해군 14년 (1622년) 10월 전라도 나주 백성들이 목사 유석증의 유임을 위해 쌀 1,000석을 바치거나 함평 백성들이 현감 이홍망의 재부임을 위해 쌀 300석을 바친 것이 그 사례로 유석증은 임지에서 근신하면서 잘 다스렸고, 이홍망도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기록한 사관은 "백성들의 마음이 무척 감동적이다"면서 감탄하고 있다 목사와 현감의 공정 가격이 각각 쌀 1000석 · 300석이라면, 백성들이 돈을 바치고 그들의 수령을 스스로 구입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관련기사

여담으로 광해군의 이 궁궐 많이 짓는 일은 후금까지 소문이 나 유명했다. 누르하치는 조선 통사 박경룡(朴景龍)에게 "듣건대 너희 나라에 궁궐을 많이 짓는다고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묻기도 했다.

이 당시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광해 44권, 3년(1611년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8월 8일(을해) 1번째 기사

호조 판서 황신이 재정의 고갈을 아뢰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대비할 것을 청하다

호조 판서 황신(黃愼)이 아뢰기를,

“신이 얼마 전의 계사에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어 보니 ‘구임(久任)시켜 성취를 책임지운다.’는 뜻으로 유시하셨기에, 신은 진실로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죽을 곳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나름대로 생각건대, 임명을 받은 이래 벌써 3년이 되었는데도 재주와 국량이 부족하고 일을 처리함이 생소한 까닭에 제대로 조획(措劃)하여 구원(久遠)한 규모를 마련해내지 못하고, 전후로 힘을 들인 바라고는 소소하게 보철(補綴)하여 목전의 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정도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는 국가의 재정이 점차 탕갈되어 관아에 저축해 둔 것이 없고 해관(該官)은 실직(失職)한 채 단지 허명(虛名)만 남았습니다. 이미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지 못한 데다, 또 지출을 헤아려 거둬들이지도 못하므로, 비유하자면 원천이 없는 물이 당장 말라 버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이미 말라 버린 것이야 어련하겠습니까. 진실로 지금 당장 변통을 하여 국가의 큰 규모를 세우지 아니하면, 몇 년 가지 않아서 공사(公私)간에 모두 바닥이 나서 제아무리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또한 능히 그 뒤를 선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삼가 우려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어, 감히 구구한 견해를 하나하나 별지에 적어 아룁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만일 가능하다고 하거든, 근거없는 논의에 흔들리지 마시고 착실하게 시행하소서. 그렇게 해주시면 신이 비록 재직하다가 말라 죽더라도 조금도 한스러워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고서 신으로 하여금 그저 남의 뒤만 따라 오락가락하면서 의례적으로 책임만 때우도록 하신다면, 이는 실로 신이 평소 원하던 바가 아니고, 후일에 누적된 폐단이 더욱 고질화되어 대세가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경우, 하는 일 없이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그르친 죄가 반드시 돌아갈 데가 있을 것이니 신은 삼가 안타깝습니다.”

하니 왕이 따랐다.【황신은 대체로 양전제(量田制)의 운용을 변통하고자 한 것인데, 후에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광해군 3년에 경제를 담당하는 호조 판서 황신이 국가 재정이 파탄났음을 알리고,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시급함을 광해군에게 강조한다. 황신은 대동법 시행을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광해군의 반대로 실패.

광해 111권, 9년(1617년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3일(기사) 6번째 기사

호조에서 재정이 탕진되 선혜청의 방법으로 운영하기를 청하다

호조가 아뢰기를, 【호조 참의 장세철(張世哲)의 상소를 지난 병진년 4월 4일에 특별 전교를 인하여 입계하였었는데, 정사년 1월 3일에 비로소 내리면서 점련(粘連)하여 비변사에 계하해서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판하(判下)하였다.】

“영의정은 의논드리기를 ‘나라의 재정이 이때보다 더 심하게 탕진된 적이 없는데, 선혜청이 이미 성과가 있었으니, 이 상소의 내용 역시 선혜청과 마찬가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만약 혹시라도 자질구레하게 방해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 가서 처리해도 됩니다. 다만 지금은 대신이 혹 외방에 있기도 하고 혹 정고(呈告) 중에 있기도 한데, 이와 같이 크게 경장(更張)하는 일은 수의(收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널리 조정의 의견을 거두어서 결정하소서. 삼가 상께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정창연은 병으로 인해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우선은 대신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려서 널리 의논을 모아 처리하라.” 하였다.


광해 114권, 9년(1617년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4월 18일(임자) 4번째 기사

호조가 궁궐의 건축으로 인한 재정의 부족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정에 이미 궁궐을 짓는 큰 역사가 있으니 백성들이 포목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그러니 만약 달리 조치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전결에 따라 포목을 거두는 것을 정지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세입(稅入)이 1년의 쓰임새를 다 대지 못하여서 10월등(十月等)의 반록(頒菉)과 다음해 정월등(正月等)의 반록은 매년 계속해서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부득이 계청해서 경기와 공홍도의 전세(田稅)를 미리 끌어다가 썼습니다.

금년에는 신들이 이에 대해 미리 염려하여, 애써 수합한 여러 가지의 작미(作米)와 작목(作木)을 이미 받아들인 것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통계내어 보니, 금년부터 내년까지 쓸 잡차하(雜上下)와 녹봉으로 반급(頒給)할 것을 제외하고도 상수(常數) 외에서 나온 나머지가 마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서 포목 5백 동과 쌀 1만 석을 선수 도감으로 이송(移送)해서 조금이나마 보태어 써서 백성들의 힘을 늦추어 주고, 그 이외에 부족한 숫자에 대해서는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126권, 10년(1618년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4월 3일(임진) 6번째 기사

호조에서 신설한 관원의 녹봉을 지급하는 일로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근일 병조가 부장(部將) 10인을 원록체아(原祿遞兒)로 더 차출하고는 비교해 보아서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移文)하였으며, 또 무신 겸선전관 30인을 체아직으로 더 차출했는데 부사과(副司果) 2인, 부사정(副司正) 5인, 부사맹(副司猛) 8인, 부사용(副司勇) 15인으로 계하(啓下) 받아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하였습니다. 또 병조의 관문(關文)을 보건대, 그 안에 ‘별장(別將)과 위장(衛將)은 모두 정원 외에 남아도는 관원을 신설한 것이므로 현재 남아 있는 녹체아로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사과와 부사정으로 각각 10인, 부사맹 20인을 균등하게 부록(付祿)하는 체아직으로 더 차출하고 가위장(假衛將) 이하 다관(多官)은 돌아가며 부록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런에 요즘 으레 녹봉을 지급하는 규정을 보건대, 통산 1년 사등(四等)의 녹봉이 미두(米豆)로 도합 1천 7백여 석입니다. 현재 국가 재정이 고갈될 대로 고갈되었다는 것을 상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녹봉을 나눠줄 시기가 이미 박두했는데, 정박한 세선(稅船)은 한 척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양호(兩湖)의 세선이 4월이 되었는 데도 강에 도착하지 않은 때가 언제 있기나 했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양호에서 세금으로 미두를 전혀 거두지 못했다고도 하고 유민(流民)이 길에 깔려 봄 초에 납부해야 할 미곡도 지금까지 반이나 넘게 납부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다고도 합니다. 여기에 다시 겨울과 봄의 빗물 때문에 봄 보리도 갈지 못한 채 보리와 밀이 시들어 버리고 말았으니 앞으로 참혹한 광경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경비를 철저히 절감해서 줄이는 것은 있어도 늘리는 것은 없도록 해야만 그런대로 지탱해 갈 수가 있는데, 지금 졸지에 1백 명에 가까운 관원들을 더 두고는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라 하고 있습니다. 정례적으로 나누어주어야 할 녹봉도 넉넉하지 못한데 더구나 이렇게 천만 뜻밖에 더 설치한 인원에 대한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들이 감히 구구하게 비용을 아까워하는 유사(有司)의 행태를 융통성 없이 지키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바짝 마른 나무에서 물을 찾듯이 어찌해 볼 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금방 실시했다 금방 그만둘 성격의 것이 아니고 형세상 오래도록 시행될 것이 분명한데 혹 그만한 액수만큼 더 백성에게 부과하든가 아니면 양전(量田)하는 정사를 급히 행하여 세입(歲入)을 증가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을 지은 뒤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 129권, 10년(1618년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6월 21일(무인) 7번째 기사

호조에서 징병 군사들의 군량 조치 문제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비국의 계사를 인하여, 징병된 군사들이 머지않아 올라올 테니 군량을 조치해두라고 분호조 당상 및 각도 감사에게 이미 하유하였습니다.

각도의 군사를 점검하여 보낼 때에는 으레 초면(初面) 고을의 점고를 받게 되는데, 가령 공홍도(公洪道)는 직산(稷山)에서, 전라도는 여산(礪山)과 익산(益山)에서 점고를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전라도의 군대는 은진(恩津)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공홍도의 군대는 수원(水原)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경상도의 군대는 영동(嶺東)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해(平海)에서 급료를 주거나 공홍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황연도(黃延道)의 군대는 양덕(陽德)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안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강원도의 군대는 고산(高山)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는 것으로, 을사년에 크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이미 이렇게 예가 굳어졌으니, 이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평안도 군대의 경우 역시 그때 가서 변경에 도착하면 급료를 주어야 할 듯합니다. 다만 원수가 군대를 모아 조련시키는 곳의 경우는 꼭 일정한 규정에 구애받을 필요없이 분호조로 하여금 원수의 분부를 받아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이 많이 들어간 뒤에는 조금이라도 허비되는 폐단이 없도록 방량관(放糧官)이 지급하는 규정을 두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분조(分曹)가 알아서 처치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방량관은 윤수겸(尹守謙)으로 하여금 도내의 강명(剛明)한 문관이나 경관(京官)인 문음(文蔭) 중에서 엄선하여 자벽(自辟)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대체로 각도가 똑같이 재정이 고갈되었는데 그야말로 옛 곡식이 다 떨어지고 새 곡식은 아직 익지 않은 날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마련해 낼 대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을 수령들도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니 그 누가 기꺼이 없는 가운데에서 그래도 마련해내어 국가의 급한 수요를 충당하려 하겠습니까. 지나는 길에서 급료로 줄 양식마저도 부족하다고 하소연할 걱정이 없지 않은데, 본조에서 미리 분조를 내어 제때에 내려보내기로 한 것은 대체로 이 때문입니다.

평안도의 군량을 계속 조달할 계책을 생각하노라면 더욱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도내의 원곡(元穀) 가운데 미곡(米穀)의 숫자가 본래 적다고는 하나 그래도 추수 때 적곡(糴穀)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만분의 일이나마 지탱해 나가겠지만 지금 묘가 자라기만 할 뿐 아직 익지도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사신들이 바삐 오가고 장사(將士)의 왕래가 끊임없게 되면 계속 접대하기 어렵게 되어 하졸(下卒)이 놀라 흩어질텐데 이렇게 관가(官家)가 먼저 엉망이 된 뒤에는 설령 원곡이 있다 하더라도 수습하기가 지극히 어렵게 될 것입니다. 전일 안응형(安應亨)의 장계 가운데 ‘정확하게 어느 곳에 얼마나 양식이 비축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윤수겸은 어떻게 조치했는지의 형세를 점검하여 현재 어느 정도나 되는지 치계해야 마땅한 데도 지금까지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조의 생각에, 군대가 요양(遼陽)으로 들어갈 경우 신속히 수송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중국 조정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면 혹 은(銀)으로 미곡 값을 환산해 무역해야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미곡 값이 얼마인지 그리고 중국 조정에서 양식을 지급해 줄지의 여부를 재자관 일행으로 하여금 세밀히 알아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경략의 자문 내용을 듣건대 ‘한 달 가량의 양식을 아울러 마련하고 진병할 날짜를 기다리라.’ 하였고, 또 ‘불과 2백 리, 3백 리 정도 떨어진 지역에서 몇 길로 나누어 일제히 공격할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따라서 도로를 이미 예측하기 어려울 뿐더러 우리로 하여금 양식을 싸들고 오도록 하는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것이니, 군대가 갈 때 군량도 따라가는 문제를 아울러 미리 헤아려 생각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변경에 머물러 주둔할 때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고, 진병한 뒤에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며, 도내 원곡 숫자 안에서 가식미(可食米)를 덜어내고 지급할 예정인 것은 얼마이고, 장사에게 주어야 할 급료는 얼마이며, 군병에게 지급할 양은 얼마이고, 말먹이 콩으로 들어갈 양은 얼마인지 모두 계산하여 미리 아룀으로써 처치할 근거를 마련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병화(兵禍)를 입게 되면 1년, 2년 사이에 끝날 수는 없을 듯한데 그럴 경우 군량을 계속 조달할 걱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쪽 백성들이 만약 하루 아침에 모조리 결딴이 나버린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라서 오늘날의 계책 가운데에서도 서쪽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폐해를 덜 받도록 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급무라 할 것이니, 대관(大官) 이하로부터 모두에 대한 접대 비용을 가능한 한 줄여 간소하게 하고 그릇 수를 정할 것이며, 군관 이하에 대해서는 전에 군사를 일으켰던 때의 예에 의거하여 산료(散料)를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 한 조목에 대해서는 비국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고, 상기 각 조항의 일들을 모두 분조 당상 및 각도 관찰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 대 조선은 연이은 두 차례 왜란의 영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기 전결 상태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 재정은 이러한 상황을 뚜렷이 보여준다. 호조 판서 황신에 따르면 국가의 세입은 전쟁 전에 비해 2/10, 3/10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지출은 어느덧 전쟁 전의 규모를 회복하고 있었다. 한 해에 받아들이는 공물로는 당년의 용도를 지탱하기에 크게 부족했다. 또 임진왜란 이전 삼남 지역의 총 전결수 113만 결은 계묘양전(선조 36년, 1603년)에서 29만 결로 줄었다가, 갑술양전(인조 12년, 1634년)에서야 89만 5,000여 결로 회복되었다. 광해군 대에 중앙 전부가 운용한 전결의 규모는 전쟁 전의 26%, 갑술양전의 32% 수준에 불과했다.

광해군 시기는 피폐된 국가 운영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차분히 제도적 재정비에 힘써야 할 때였다. 하지만 수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이것들 대부분은 중앙 정부의 대규모 재정 수요를 직접적으로 발생시켰다. 5개, 6개에 이르는 궁궐 공사가 한 예다. 선조 40년(1607년)에 시작해서 광해군 대에 완료된 창덕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덕궁, 경운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공사가 진행되었다. 역대 조선 왕조 전체를 살펴도, 이렇듯 짦은 기간에 궁궐 공사가 집중된 때가 없었다. 공사비는 대부분 전결에 부과하는 결미, 결포로 충당되었다.[37]

2.6. 등거리 외교[편집]


  • 이 문서에서는 광해군 시기 외교 정책을 다룬다.


2.6.1. 광해군/외교적 평가[편집]




2.7. 폐위[편집]


광해군은 재위 초부터 서자라는 불안정한 위치와 수시로 후계자 선정을 번복하는 부왕 선조의 견제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자연히 자신을 지지해주는 남명 학파(조식의 문하) 인사들과 친교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이 훗날 북인(대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다만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실세는 대북이 아니라 소북이였고 여기에 대북과 서인 남인이 공존하는 체제였으나 광해군의 잦은 옥사로인해 광해군이 정인홍과 이이첨 같은 대북 인물들에게 힘을 몰아주게 되자 이 때문에 이이첨 일파의 독주를 불러오게 되었고 자연히 권력 핵심에서 멀어진 서인과 남인, 소북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광해군의 끝없는 옥사는 광해군의 불안감이 너무 컸다는 걸로 설명이 된다. 물론 옥사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긴 했다. 류영경과 임해군은 모든 당파가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충성 경쟁을 했다. 하지만 강해진 왕권으로 광해군은 대북만을 키워주면서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부왕 선조만 해도 정여립의 난을 이용해 동인들을 대거 숙청했지만, 곧바로 서인의 정철도 세자책봉 촉구 건의를 빌미로 숙청하면서 동서 양당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자신의 위신을 보전했다. 반면 광해군은 이걸 하지 못함으로써 피해자들의 분노는 대북은 물론 그 자신에게로 향하고 말았다. 실제로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그 동안의 옥사에 연루돼서 겨우 벗어나거나 유배된 상태였고. 계속되는 옥사에 그들 자신의 목숨부터 걱정해야 했고, 이는 당하느니 먼저 치자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는 반정의 가장 근본적인 단초가 된다.#

물론 부왕인 선조 때에도 중기 이후 서인, 동인이 번갈아가면서 권력을 독식하긴 했으나 기축옥사와 같은 대규모 옥사 및 견제를 통해 대대적인 물갈이가 종종 이뤄져 정권 재창출을 꾀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광해군 집권 15년간은 꾸준히 대북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물론 대북 영수급의 거물인 정인홍조차 성균관 유생들의 반발을 제압하지 못할 만큼 당시 붕당도 나름대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기는 했다. 그런데 광해군 중기부터 이이첨이 실세로 부상하여 권력을 휘두르면서 변두리로 밀려난 서인이 잦은 옥사와 친국으로 생존 위기 의식까지 느낄 정도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은 광해군조차도 더 좌시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광해군 집권 후반기에는 대북을 견제하며 국정을 주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서인 일부 세력은 권력 회복을 위해 반정을 획책했으며 끝내 이를 막을 수는 없게되어 소북이 방관하고, 남인이 방조하였으며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을 당하게 된다.

이이첨에 대한 광해군의 불안은 다음 대목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반정 당시 변장하여 안국신에 집에 머무를 때 안국신의 처에게 건넸던 말.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


광해군 15년, 이귀, 김류, 최명길을 위시한 서인들의 반정 계획은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고, 심지어 발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귀는 대질 심문까지 주장하며 교묘하게 반정과 무관한 척 연기를 벌였고 광해군의 의심을 (잠시나마) 거둘 수 있었다. 여기에는 김자점에게 매수된 상궁 김개시의 조언도 한 몫 했다. 훈련대장 이흥립이 내통해 있었던 것도 반란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정은 발각되었기에 더욱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결행되었다.[38] 어쨌든 급작스런 변고에 궁을 탈출한 광해군은 의관인 안국신의 집에 상주로 변장한 차림으로 피신해 있다가 의원 정남수의 밀고로 발견되어 끌려나왔다(실록의 기록). 혹은 한강 나루터에서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다. 폐위 직후 도성의 남녀들이 왕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담장과 지붕에 올라가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은 욕하기를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거두어 들인 금은은 어느곳에 두고 이 길을 가는가라며 조롱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파란만장한 즉위 과정 때문에 점쟁이와 지관, 운명을 신봉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그 수많은 시도 가운데 일부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조반정의 요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반정 세력이 주장한 명분들 이면에 인조가 반정을 주도하게 된 계기가 그러한데, 왕기가 있다는 이유로 정원군의 가택을 몰수하였으며 이는 정원군의 아들이자 능양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로 유배당해 죽은 사건까지 겹쳐져 인조로 하여금 정권 찬탈의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 (참고로 민담에 따르면 광해군이 가족 계획을 위해 만든 부적들도 있는데, 낙태에 효험이 있다는 명성이 드높아 심지어 구한말까지도 고가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아무튼 붙잡힌 광해군은 곧장 서인으로 강등당해 부인,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이이첨 등 당대 권신들은 모조리 참수당함으로써 반정은 성공리에 끝났다. 이 때 왕족으로서 반정을 주도한 능양군이 비어있는 왕좌를 접수하니 그가 바로 삼전도의 치욕으로 유명한 인조다.


3. 폐위 이후[편집]


광해군은 처음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나 호란 즈음에 청에서 광해군 폐위를 명분으로 내정을 흔들어보려는 공작 시도가 있자[39], 유배지를 제주도로 옮겼다. 광해군은 결국 제주도 생활 4년 4개월만에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허나 수명으로 보면 조선 역대 국왕 중 네 번째로 장수한 임금이다.[40]

이처럼 장수했던 이유로 일부 신하들이 그를 사사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으나, 이원익 등 광해군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중신들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고, 인조 본인도 선왕을 죽이는 것은 선례[41]가 없다는 판단 하에 거부함으로써 무산된다. 이후 그의 심복들이 여러번 역모에 걸려들어 처형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광해군이 복위와 연루된 것이었다. 심지어 북인인 유효립을 비롯한 일부 심복은 광해군의 친필 편지를 보유하기도 했고, 실패로 돌아가자 광해군은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 풀고 울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인조도 할아버지 선조와 삼촌 광해군처럼 왕위에 대해 극심한 노이로제를 보이게 되었으며, 결국 인조 자신도 애먼 삼촌 인성군을 역모 혐의로 엮어 죽이는 짓을 저지르게 된다. (인성군은 사후에 무고함이 인정되어 다시 복권되었다.)[42]

이럼에도 광해군 자신이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이미 그의 세력에 대해 거의 씨를 말렸을 뿐더러, 유교의 예법으로도 '폭군을 내치는 법은 있어도 주륙하는 예는 없다' 는 것이었고 인륜을 기치로 든 인조 정권이 광해군을 죽일 경우 명분이 꺾일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하지만 민회빈 강씨를 보면 말년엔 인륜을 버렸나보다. 게다가 연이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무능 인증까지 한 상황에서 동정을 받는 광해군을 죽인다는 것은 한마디로 지지 기반까지 무너뜨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인목왕후가 "광해군의 목을 배고 살을 씹겠다."란 말을 했을 때도 이들은 계속 반대했다. 인목왕후(혹은 그녀의 나인)가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를 보면 인목왕후가 얼마나 편집증적으로 광해군을 저주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43]

사실 명에게 큰 지지조차 받지 못한 반정이었다는 점도 그의 사사를 꺼리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명나라 조정에서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 국왕은 충순한데 왜 폐위시켰냐?" 라는 반응을 보냈다.[44] 반정 이후 책봉을 받으러간 사신들은 배를 타고[45] 도착한 산동에서 등주 자사에게 "임금을 시해한 짐승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시원하게 바가지로 퍼먹고 북경으로 가는 것도 방해받았다. 또한 당시 명 황제는 "왜군 3000명을 동원해 조선 왕을 쫓아내고 능양군이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있어서 조선 사신단은 이를 해명하는데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 결과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22개월동안 책봉을 받지 못했다.[46] 결국 인조 정권은 예전 임해군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명 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대량으로 썼으며 이 과정에서 가도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47] 인조가 명에 바친 뇌물의 양은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바친 은의 총량을 능가했다.[48] 그리고 모문룡은 책봉을 도운 것을 인조 정권의 아킬레스 건 삼아서 갖은 행패를 부려댔다.

인조 15년(1637년). 인조는 왕위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감지하고 왕권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광해군을 죽이지는 않고 다시 제주도로 보내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데서 끝냈다. 이후 제주도로 이주된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가시 울타리 안에 위리 안치되었고, 감시하는 군인과 계집종들에게 영감[爺爺][49]이라 불리는 수모를 받았지만,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유난히 광해군에게 버릇없이 구는 계집종이 있어서 참다 못한 광해군이 질책을 한마디 하였다. 그러자 그 계집종은 광해군에게 되레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는데,[50] 광해군은 모든 것을 달관한 듯, 아니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감시하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광해군을 하방에 두는 등의 모욕적 처사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 시점에서 이미 인생 무상을 느끼고 달관했던 것일지도. 그러한 성품은 그가 유배지에서도 천수를 누리는데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해당 유배처는 현재 제주시 중앙로의 국민은행 중앙점 자리로 비정되며 현재 그곳에 광해군 적소 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제주도로 가기 직전 광해군이 남긴 시가 전해지고 있다. 인조 실록 42권의 인조 19년 7월 10일 1번째 광해군 사망 기사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해가 강화도 교동에서 제주도로 옮겨 갈 때에 시를 짓기를
風吹飛雨過城頭 / 풍취비우과성두
(바람 불고 비 날림에 성머리를 지나네)
瘴氣薰陰百尺樓 / 장기훈음백척루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滄海怒濤來薄暮 / 창해노도래박모
(푸른 바다에 파도 사나운데 땅거미가 내리고)
碧山愁色 帶淸秋 / 벽동수색 대청추
(푸른 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 띠었네)
歸心厭見王孫草 / 귀심염견왕손초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客夢頻驚 帝子洲 / 객몽빈경 제자주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주에 깨이누나)
故國存亡消息斷 / 고국존망소식단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烟波江上臥孤舟 / 인파강상와고주
(안개 낀 강 위의 외딴 배에 누웠노라)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비감에 젖었다.

다만 위의 시는 그가 제주도로 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지은 것은 아니다. 보안을 위해 교동도에서 이송하기 전부터 이송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이동 과정에서는 배에 장막을 둘러쳐서 향하는 장소를 알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도착한 후에야 이원로의 말을 통해 새 유배지가 제주도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광해군은 매우 당혹해하며 "어째서 이런 곳에! 도대체 어째서!"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참고로 당시 제주도는 말 그대로 오지였다.

이후 제주목사였던 이시방(반정 공신 이귀의 아들)이 광해군의 신변을 맡았으며, 결국 광해군이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애석해하면서 만류를 뿌리치고 손수 염습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제주도에서는 음력 7월 1일을 광해우(光海雨) 내리는 날이라고 부른다. 광해군의 숨이 끊어지던 날 맑은 하늘에 갑자기 비 구름이 몰려와 비를 흩뿌린 것에서 유래한다고 하며[51], 이후 음력 7월 1일마다 돌연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생겼다.

연산군과 대조적으로 유배지에서 보낸 여생이 재위 기간보다 더 길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52] 그래서인지 천수를 누린 것으로 보며 연산군처럼 독살당했다는 음모론은 잘 나오지 않는다. 다만 노년 들어 제주도로 이송된 뒤엔 척박한 환경 탓에 급속도로 몸이 쇠해져 얼마 살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의 나이가 제주도로 이송될 당시에 이미 60이 넘었고 왕의 자리라는 게 원래 건강을 해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미 이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광해군은 죽기 직전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근처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다만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무덤 바로 곁이 아니라 그 아래 위치에 자신의 비였던 문성군부인과 합장되었는데 문제는 광해군의 묘 위치가 풍수지리적으로 워낙 좋지 못해서 유언이 날조된 것 혹은 유언을 악용한 것이 아닌가 보는 시각도 있다.

선대 왕이자 같은 폭군으로 폐위되어 축출된 연산군과 함께 종묘 신위에도 제외되어 종묘에까지도 모셔지지 못한 임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인조와 그 후손들이 왕위에 올랐기에 복권이 불가능해서다. 이전까지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도 마찬가지였던 입장이었으나 숙종에 의해 단종으로 추존 복위되어 종묘 신위에 뒤늦게 포함됨으로써 빠졌다.

[1] 하지만 전쟁영웅으로서 광해군의 이미지는 이후 거의 부적격에 가까운 광해군의 실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원흉이다. 왕으로서의 광해군과 세자으로서의 광해군은 거의 다른 인물로서 평가해도 무방할 정도로 딴판이다.[2] 참고로 다른 왕자들의 답변을 보면 의안군은 떡, 신성군은 꿀, 순화군은 고기와 같은 지극히 평법한 대답을 했다 한다. 공교롭게도 이 일화 속 왕자들은 대부분 말로가 비극적이었는데, 의안군과 신성군은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일찍 요절했고, 순화군은 앞의 두 형들과 달리 인간성 자체도 막장인지라 줄기찬 탄핵에 따른 유배와 연금 생활 끝에 역시 제 명줄에 못 죽었다.[3] 물론 파천 자체는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요동으로 가려한게 문제지만....[4] 다만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5] 다만 함경도는 원래 여러 차별로 민심이 안좋았던데다가 국경인 등의 순왜들이 부추긴 탓도 있으며 그 함경도 마저 왜군과 순왜들의 횡포로 나중에 의병이 일어난다.[6] 실제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기 전에도 의병은 일어나고 있었지만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면서 의병은 활발해졌다.[7] 그때 당시 기준으로 치자면 성인이긴 했지만 결코 분조를 지휘할 정도의 연륜도, 경험이 많을 나이도, 상황도 아니었다. 현대와 성인의 나이 기준이 현저히 다르다고는 해도 이때 광해군이 지금 기준으로도 겨우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였다고 생각하면...[8] 전란 때문에 갑작스레 세자 책봉, 부왕은 어려운 일 맡겨놓고 튐.[9] 흥미로운 것은 새어머니인 인목왕후의 나이가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다는 사실이다.[10]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떠난 직후인 선조 25년 6월 17일의 실록에서의 기록에 의하면 정철과 류성룡이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간 다음 소식이 통하지 않으면 어찌되겠냐며 선조에게 하야를 촉구하려는 내용이 있다.[11] 부왕 선조가 기축옥사 당시 정철을 내세워 동인을 제거하면서도 류성룡, 이산해 등 동인의 영수는 지켜주었고, 옥사 후에는 반대로 이용 가치가 떨어진 정철을 숙청하면서도 목숨은 살려주는 등 능수능란하게 양쪽 파벌을 쥐락펴락하며 특정 세력에 의한 권력 집중을 막고 본인이 정국을 주도한 것과는 확실히 비교된다. 명백히 선조보다 하수였다.[12] 물론 정조 사망시 추궁 끝에 맞아 죽은 강명길과 같은 예외 및 극단적인 경우는 있다.[13] 정확히는 반정 직후 서인 세력들이 인목대비를 찾아가 광해군의 처사를 결정했는데, 그때 인목대비가 광해군이 간접적으로 선조를 디스하는 정인홍의 상소 등으로 쇠약해진 선조를 홧병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인목대비는 당시 극도의 흥분 상태로 말이 아니었다. 인목대비의 궁녀, 또는 인목대비 본인이 썼다고 추정되는 계축일기에도 선조가 와병 중 정인홍이 쓴 과격한 상소를 보고 몸이 상해 승하했다는 뉘앙스로 써있다.[14] 선조 후기에 북인은 여러 갈래로 쪼개져서 대북은 광해군을, 소북 중 탁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실제로 권신 류영경이 영창대군을 선조의 후계로 앉히려 노골적으로 왕위 계승을 교란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대북은 영창대군에 대한 경계가 상당했다.[15] 그러나 임해군은 실제로 말종이었던 인물이었다. 내키는 대로 살인조차 가볍게 여겼던 인물이었던지라 그에 대한 뭇 여론 자체가 정말 좋지 않았다.[16] 단, 조선 시대식 재조사에서는 위의 분들의 심사와 어긋나는 결과가 나오는 일이 별로 없게 마련이다. 죽을 정도로 패서라도 의도한 결과를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17] 중초본 때만 있고,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었다고 한다.[18] 다른 케이스인 단종의 경우 금부 도사 왕방연으로 하여금 사약을 전달하게 했는데 왕방연이 사약을 갖고 오는 것을 안 단종이 그 전에 스스로 목을 맸다는 게 정설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전에도 수차례 사약이 갔는데 수행역을 맡은 이들이 차마 따를 수 없어 줄줄이 자결했다고도 한다. 이후에도 세조는 노골적으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으며, 이 때문에 동강에 그대로 내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엄홍도가 몰래 수습해 장례했고 이후 숙종 대 들어서야 능이 정비되었다.[19] 과거 응시 자격 박탈. 사실상 관직에 빨간줄을 긋는 것.[20] 어떤 사람은 이것이 공신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왕권 정치 시절에서 왕위와 관련된 민감한 문제를 백성들이 언급할 수 있을리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1] 보통 유폐라는 설명만으로는 저 서궁이라는 궁궐이 도성 변두리에 있는 초라한 전각 비슷한 이미지로 느껴지기 쉬운데, 사실 이 서궁 건물은 본디 경운궁이라 하여 저래봬도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궁궐들을 신축하기 전(선조 후기)까지 조선의 정궁에 해당했으며, 지금은 덕수궁이라고 불리는 상당히 대규모의 궁이다. 즉 광해군이 궁궐을 신축하지 않았으면 서궁이 아니라 그대로 계속 정궁으로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22] 이이첨 일당을 제외한 대북까지도 극렬히 반대하고 소북, 서인, 남인 모두가 반대하던 것[23] 이런 것이 가능해진 것은 더 이상 옥사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면서도 이이첨이 옥사를 일으키거나 인목대비를 살해하지 못하도록 박승종이 가솔들까지 이끌고 필사적으로 막은 덕분.[24] 남이 지은 글로 과거에 급제했으며 바늘 도둑도 소 도둑으로 둔갑시키곤 하는 인간이었다. 위에 나온 김제세가 엄청난 고변을 한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제법 큰걸 (거짓이든 진실이든) 실토해야 고생은 덜하기 때문 신율은 봉산옥사 전만 해도 군수였다가 봉산옥사 이후 봉군되고 판서급까지 올랐지만 광해군 5년 급사한다. 하도 인망이 없고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질러서 그런지 사관은 양서(황해,평안)의 사람들 중에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 없었고 흉악한 짓을 한 업보라고 여겼다고 썼다.[25] 여기에 선왕(선조)계서도 역적을 많이 다스렸지만 법은 준엄하게 써서 친국이 여러날 지속되지도 않았고 무고죄는 반드시 엄하게 다스렸다고 하여 선조와 비교하기까지 했다.[26] 물론 이 궁궐은 단순 거주용이 아닌, 상업용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27]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매관 매직 수단.[28] 광해군의 이복 동생, 인조의 아버지[29] 후에 영조경희궁이라 했는데, 공교롭게도 정원군이 후에 추숭될 때 "경덕"이란 시호가 있어서 이를 피해 이름을 새로 지은 것이었다. 광해군이 능창군을 죽이지 않고, 경덕궁 등의 궁궐 공사를 하지 않았다면 인조반정도 없었을지 모르고, 또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정원군이 팔자에도 없는 추숭왕이 되지도 못했을 테고, 그럼 "경덕"이란 이름을 받을 일도, 후에 영조가 그 이름을 피할 일도 없었을 테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30] 인조는 이 탓인지 광해군과는 정반대로 도성 내의 군사를 기르는데 주력했고, 또 이괄의 난까지 합쳐지자 광해군과는 달리 변경에 군사를 배치하려는 일을 정묘호란 직전까지 심하게 꺼렸으며 군사 훈련 역시 막았다.[31] 실록에는 귀영개로 나오고 사실 차남이지만 장남인 추잉이 죽었기에 차남인 그가 적장자였다. 또한 반조선파인 홍타이지와는 달리 그는 친조선파였고 그렇기에 주목했다.[32] 의학적으로 PTSD라 표현하는 그것.[33] 한명기, 광해군, 142쪽 ~ 146쪽[34] 1개도에서 50필 ~ 100필 가량[35] 한명기, 광해군, 149쪽 ~154쪽[36] 한명기, 광해군, 154쪽[37]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38] 당시 반란의 주도자 중 하나였던 김류는 실패 가능성이 커지자 거사 참여를 미루는 등 홀로 내빼려던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39] 실제로 정묘호란의 명분은 "광해군의 복수"였다. 강홍립을 같이 파견하기도 했다.[40] 1위는 영조(83세), 2위는 태조(74세), 3위는 고종(68세).[41] 세조 때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보냈으나 그 전에 단종이 눈치채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는 설도 있고, 다른 전설에서는 자살을 주저하는 단종을 종이 대신 죽였다고도 전한다.[42] 사실 인성군의 경우에도 당시 법으로 보면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당시로는 왕족이면 개입하지 않아도 역모에 이름이 올라도 죽어야 했는데 인성군은 이미 여러번 올라 있었다. 심지어 이전에 일어난 역모 사건에서는 자금까지 전달해준 정황까지 드러나기도 했다.[43] 인목왕후 입장에서는 무난하게 광해군에게 정권을 주었고, 뚜렷한 반목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기 아버지인 김제남과 아들을 죽이고, 서궁에 유폐시킨데다 정명공주까지 서인으로 강등시켰으니 원한이 안 맺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물론 이전에 치부에 열심이었다거나 영창대군의 옷을 세자처럼 입혔다는 등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적은 있지만 적어도 선조가 전위나 섭정의 명을 내렸을때부터 폐모론이 일기까지 한번도 광해군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적이 없었다. 이정도면 그냥 광해군이 자폭스위치를 누른 셈) 그리고 광해군 몰락의 단초가 궁궐병과 인목왕후의 유폐라는 점에서 인목왕후의 저주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복수를 성공하게 만든 사람은 인조지만.[44] 옛날의 전례를 복기해서 연산군이 폐위됐을 때를 살펴보자면 반응이 좀 달랐는데 우선 명나라에 연산군이 폐위당한 게 아니라 아들을 잃고 정신병이 생겨서 동생에게 선위하고 놀고 먹는 중이라고 보고를 해서 명나라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긴 반정이 아니었고 명나라는 정보력이 시망이었는지 아님 워낙 막장 짓한 연산군 폐위한걸 굳이 물고넘어질 이유가 없어서인지 연산이 죽은지 30년이 넘도록 연산군 잘 지내냐?란 소리나 했다.[45] 광해군 말엽에 후금이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으면서 명나라로 통하는 만주의 육로가 차단되서 해로밖에 길이 없었다.[46] 명나라의 유교 윤리에 충실한 동림당 계열은 책봉에 반대했지만 환관 세력의 결탁한 조정의 현실파들이 은혜를 베풀면 보답할 것이라는 현실론으로 결국엔 책봉한다. 물론 정작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광해군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한데다 군사력도 재건하지 못하여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47] 정확히 말하면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문룡에게 은을 빌려온 것이다. 당시 모문룡은 조선 - 명 - 만주간의 교역 중심지에 걸터앉아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것. 일설로는 이 때 약 은 10만냥에 달하는 사신 접대 비용 및 뇌물 중 모문룡에게 은 8만냥을 빌려왔고, 이는 나중에 인삼 등으로 갚았다는 설도 있다.[48] 여기서 명지대 한명기 교수는 <병자호란 다시읽기>에서 애초에 허울 뿐인 반정 명분도 쇠퇴했다고 평가한다. 사실 조선이 청에게 쉽게 굴복한 것도 실상은 이 과정에서 명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상한데다 명나라 스스로가 막장 상황을 거듭하면서 재조지은을 외쳤던 이들조차도 하나 둘 등을 돌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광해군 때와 달리 인조 때에 이르면 오히려 주화파가 더 늘어났으니까. 의외로 이이첨을 비롯해서 대북 정권은 매우 강경한 주전론자들이었다. 주화론자야 해봐야 소북의 박승종과 서인 출신들 정도가 고작이었다. 단 인조때도 대신들은 주화론자로 대체되었지만 대간은 여전히 주전론자였다. 물론 이후의 전개를 보면 차라리 대북의 주전론자가 싸그리 갈려간게 나았다.[49] 당상관에 대한 경칭으로서의 '영감'이 아니라 진짜 요즘 뉘앙스로서의 '영감'으로 번역한 것이다.[50] "영감이 이전에 임금 자리에 있을 때 무엇이 부족해 아랫사람들에게 음식까지 부탁해 김치판서, 잡채참판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게 했소? 영감이 임금의 자리를 잃은 건 자업자득이지만 우리는 무슨 죄로 이 가시덩굴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이오?"[51] 제주도 민요해설(성문사)에 의하면 관련 민요 가사까지 있다. 발췌하자면 ‘칠월도 초하루는 대왕이 돌아가신 날, 볕이 쨍쨍한데도 비가 내리고 있다.’[52] 연산군은 폐위당한지 1년도 안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