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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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명
2. 독살설이 제기되는 조선의 임금이나 세자들


1. 설명[편집]


조선 왕들의 죽음 가운데 그 죽음에 의문과 의혹이 있는 경우에 제기된다.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음모론 중 하나다. 조선왕조사는 유난히 왕과 신하들과의 이야기가 사초로 많이 남아 있고, 타 왕조와 다르게 군신간의 밀월관계가 깊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인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왕이 폐위되었다고 하더라도 목숨은 유배지에서 자연사할 때까지 살려 두었던 조선이어서, 아예 대놓고 왕이 살해당하던 고려시대 무신정권과는 분위기가 크게 다르다.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영조의 세자였던 효장세자,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 등 왕 뿐만 아니라 단명한 세자들에 대해서도 독살설이 제기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독살설 중 상당수는 당대에 왕의 죽음을 아쉬워하거나, 백성들의 공분을 사는 신료에 대한 원망에서 나오거나, 아예 아마추어 역사가들이 왜곡하거나 과대해석한 경우가 많다. 일례로 단종이나 고종, 경종(조선), 소현세자처럼 당시에도 독살설이 널리 퍼져 있거나 유력한 정황 증거가 있어 오늘날에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경우도 있는 반면에 많은 논란을 일으킨 정조 독살설이나 송시열효종, 현종 독살 배후설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독살설이지만 정설로 인정될 근거는 부족하고 도리어 독살이 아니라는 증거가 계속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정조의 경우 전체는 아니지만 이 독살설은 노론 음모론과도 상당히 겹치는데, 세도 정치를 실시한 장본인은 노론 벽파가 아니라 정조의 편에 섰던 시파였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나마 정작 정조를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심환지 등 벽파 인사들의 경우에도 정조 어찰첩 등이 발굴되자 실제로는 정조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더더욱 근거를 잃게 되었다.

독살설 부정론 쪽에서는 당시의 낙후된 의료기술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중병이나 오진, 의료사고 등을 모두 독살로 몰아간다는 견해도 있다. 임진왜란 이전인 조선 전기의 인물들은 독살설이 더욱 성립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는데, 당시 조선에는 그렇게 강력한 인공 독극물이 드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장 죽으라고 보낸 사약마저도 체질에 따라 제대로 듣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엄연히 15~19세기 수준 문명인데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볼 수만도 없다. 게다가 천연 독극물도 얼마든지 비방으로 쓸 수 있고, 그보다 훨씬 전에도 동아시아에서 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은 많다. 이웃인 중국에서도 역대 왕조에서 독살에 대한 기록은 여럿이다.

소현세자의 경우는 당시 사관들조차도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봤고, 한때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를 경계한 인조가 독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한의학적 관점에서 소현세자의 평소 건강 상태와 시술내용을 조명한 반박론이 강력하게 제기되면서 지금도 독살설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해당 시대 연구자는 없다.

어쨌든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에 와서는 다시 조사해 본들 남아있는 분석 근거들이 적다는 한계도 있어서 명확한 결론을 내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다. 현대에 이 독살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왕릉을 발굴해서 시신을 부검하는 것이며,[1] 특히 조선 전기에는 주로 석회를 사용한 회곽묘를 사용했기 때문에 시신이 미라 형태로 잘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왕릉 자체의 발굴도 전주 이씨 종약원에서 허락하지 않는 상황인데 시신의 부검을 허락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해당 설을 제기하는 주요 학자로는 이덕일 등이 있으며, 관련 서적으로 <누가 왕을 죽였는가(1998, 이덕일 저)>[2] 등이 있다.

2. 독살설이 제기되는 조선의 임금이나 세자들[편집]


학계에서도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경우는 ★ 표시.

  • 문종: 공식적 사인은 종기. 사실 문약하다는 이미지랑 달리 이전엔 건강한 몸이었지만, 세자로 책봉되고 세자였던 시절에도 이미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한다. 특히 부왕 세종의 장례를 삼년상으로 치르다가 건강이 악화된 게 대표적이다.
  • 단종★: 비공식적으로 사약을 내린 뒤 은폐했다는 설, 단종이 사약을 거부하자 목을 졸라 죽였다는 설, 단종 본인이 스스로 숙부가 내린 사약을 마실 수 없다면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는 설, 시종을 시켜 목을 맨 다음 줄을 당겨 목을 조르도록 지시 했다는 설[3] 등 다양한 설들이 있다. 일단 세조에 의해 (사실상) 죽임을 당했다는 건 기정사실인 상황이고, 독살이냐 교살이냐와 같은 살해 방법을 둔 논란은 그렇게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 예종: 공식적 사인은 족질. 사실 예종은 이전에도 족질에 자주 시달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족질이 봉와직염이었다면 급작스런 패혈증으로 숨졌을 가능성이 높다.
  • 연산군: 국왕이나 세자였을 때가 아니라 폐위된 후 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을 때 의혹이 제기되었다.[4]
  • 인종: 워낙 어릴 때부터 약골이어서 왕위에 오른지 몇개월만에 병에 걸렸고, 이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지지만, 계모 문정왕후에 의해 독살당하였다는 민간 설화가 있다.
  • 선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왕이 찹쌀밥을 먹다가[5] 갑자기 위독해져[6] 죽었다고 나와 있고, 광해군일기에서는 광해군허준을 사면해준 것을 두고[7] 사관이 그의 죄는 사역해도 가하다고 기록한 게 있는데,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도 이 썰은 안 믿었다.[8]
  • 소현세자★: 실록의 묘사만 봤을 때는 굉장히 수상한 정황이 많다고 여겨졌지만, 한의학계에서는 어의들의 오진 내지는 당시 의학으로 잡아낼 수 없는 중병으로 보고 부정하며, 승정원일기와 심양일기로 소현세자의 잦은 병치레와 진료 과정을 상세히 조사할 수 있게 된[9] 사학자들도 이제는 많이 다루지 않는다. 다만, 그 승정원일기심양일기도 결국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병이 무엇인지를 확정짓지 못하는 점, 몸상태가 점차 나빠진 것이 아닌 순식간에 악화된 점, 시체를 확인한 종친 부인이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시체 같았다고 이야기 한 점 등 명쾌하게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상당히 많기에 독살설이 아직 남아있는 사례다.[10]
  • 효종: 종기를 침으로 터뜨렸다가 침이 동맥까지 터뜨려 과다출혈로 이어진 의료사고가 사인이다.
  • 현종: 효종/현종 부자는 조선시대에도 그런 풍문이 전혀 없었는데, 이덕일이 억지로 엮어놓은 사례들이다.
  • 경종★: 서로 궁합이 상극인 게장과 감을 동시에 먹어 탈이 나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일단 영조가 게장과 감을 같이 올린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이것이 실제로 영조가 경종을 죽이고자 올린 것인지, 또한 경종이 그로 인해 사망한 게 맞는지는 논쟁의 영역이다. 당대에도 이인좌의 난의 명분이 되었고, 현재에도 학계의 다수설은 아니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외에도 삼수의 옥과 관련해서 경종 즉위 초에 독살 시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훗날 영조조차도 경종 독살 및 반역 모의가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할 정도.
  • 효장세자★: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진짜로 효장세자를 독살하려 한 궁녀가 있었다고 나온다. 위에 언급된 경종 독살설과 관련되어 경종의 왕비 중 하나인 선의왕후가 독살의 배후로, 경종 살해에 대한 복수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 정조
  • 문효세자
  • 효명세자
  • 고종★: 고종의 경우는 자국인인 조선인이 아니라 외국인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이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이 뒤틀려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로 말이다. 승하 이후 죽은 시신의 모습 3일 만에 완전히 부패하여 이가 빠지고 살점이 떨어졌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독약으로 자주 사용된 비상의 비소 성분으로 사망 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윤치호 일기에도 이런 고종 독살설의 긍정론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 있다. 한편 이 '독살설'과는 별개로, 실패로 끝난 명백한 독살 시도도 있었다. 김홍륙 항목 참조.

이 중에서 인종, 경종, 정조, 고종 독살설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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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국의 유사 사례를 찾아보자면, 2008년에 광서제의 유골과 모발, 수의에 대한 법의학적 감식을 실시해 치사량의 비소를 검출하여 광서제의 사인이 비소 중독으로 특정되면서 광서제의 사망 원인이 독살로 판명된 사례가 있다. 어차피 광서제의 능이 이미 도굴된 적이 있었던데다 중국은 청 황실의 영향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큰 반발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2] 2005년 <조선 왕 독살사건>으로 복간됨.[3] 야사에 의하면 갑자기 시종 하나가 오더니 단종의 목을 졸라 죽인 뒤 단종의 완전히 죽었음을 확인한 뒤 한양에 가면 왕이 자기한테 벼슬을 줄 것이라고 김칫국을 마시면서 올라가던 도중에 갑자기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4]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연산군이 아프다는 얘기가 거의 다 죽을 무렵에 올라온 것을 두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5] 또다른 설로는 왕이 약밥을 좋아하는 것을 악용해 그 밥에 독을 넣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인조실록에는 김개시가 선조가 먹을 약밥에 독을 풀어놓았다는 이야기가 기재돼 있다.[6] 사실 원래부터 지병이 있었다.[7] 당시 허준은 선조가 죽은 것에 대한 문책으로 벌을 받았다. 본래 왕이 죽으면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들은 도의상의 책임을 지고 파직하거나 사직해서 귀가하고, 얼마 가지 않아 복귀하는 게 보편적인 관례였다.[8] 이게 무슨 의미를 지니냐면 사관의 말대로라면 허준과 광해군이 선조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는 얘기인데, 정작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의 명분은 폐모살제로, 선조를 독살했다는 것은 폐모살제보다 아득히 뛰어넘는 최고의 명분이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했다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도 이것은 아니올시다였다는 말이 된다.[9] 단,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 1차 사료들은 세자가 약간의 병증이라도 호소하면 어의들이 달라붙어 질병을 처방한 진료기록이라는 점. 이 기록은 날씨 기록과 서연을 했는지의 여부 다음으로 많다. 이렇게 수년간 쌓인 병원 기록만 한꺼번에, 그것도 디테일한 기록을 가감이나 수정없이 그대로 가져와 쭉 붙여서 나열해 놓으면 어떤 멀쩡한 사람도 병약하고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로 보이는 법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가까운 곳에 그 사례가 존재하는데, 바로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다. 동궁일기에서 나오는 인조의 병증 치료기록들만 모아봐도 인조 역시 갈 날이 멀지 않은 사람처럼 묘사되기 때문.[10] 그럼에도 학계가 대체적으로 병사라고 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부담이 적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