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외교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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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긍정적 평가
2. 부정적 평가


1. 긍정적 평가[편집]


일본의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들어선 에도 막부조선과 선린 관계를 구축하길 원했다. 광해군은 즉위 이전부터 이미 그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쓰시마의 영주 소 요시토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결국 즉위 직후 남방을 안정시키고자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 기유약조(1609년, 광해군 1년)를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과의 관계 및 교역은 급속도로 호전되었고, 조선 왕조는 일본 에도 막부와 250여년에 걸친 평화를 영유하게 되었다. 조약 과정에서 조선은 국서(國書) 요구, 범능적(범죄인)의 압송, 포로와 피로인(被虜人)의 송환을 확약받는 등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 아울러 일본 측에게 왜란 이전보다 더 큰 제약을 가하게 되었다.

국방 정책에 있어서는 조총수 및 포병을 양성하고 후금에 밀정을 투입하여 정보를 수집했으며 진법 훈련이나 성곽 수축에도 진력했다. 이 정책은 선조 말엽부터 이어지던 국방 대책의 연속이자 확장이라 할 수도 있다. 선조는 왜란으로 의주에 피난갔을 무렵부터 여진족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간첩을 파견해서 '건주기도정기'라는 건주여진(뒷날 후금)의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광해군 역시 선조의 북방 대책을 계승하여 북방 방비를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선왕의 정책을 계승, 성공적으로 확장시켜 나간 것도 분명 그의 업적이라 할 만하다.

광해군은 신 무기의 도입도 적극 추진했다. 누르하치의 철기군의 위력에 주목한 그는 화포조총의 전력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기존의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전격 개편해 파진포라는 개량형 화포를 생산시켰다. 또한 전보다 더욱 무과 등용을 늘려 쓸만한 장교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광해군은 직접 전투 훈련과 방어 진지를 참관하며 현장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했다.

또한 정충신을 만포 첨사에 임명하기도 하며 직접 후금에 다녀오게 하여 후금의 상세한 정보들을 알아오게 하고, 또한 방비하게 하였으며 인조실록 2년 9월 1일의 내용에 따르면 5년, 6년간 남쪽의 병사들을 징발해서 배치하는 바람에 민심이 나빠지고 나라가 피폐해졌다고까지 언급한다. 인조 정권에서 광해군을 비판하는 식으로 언급한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과 인조 2년 3월 14일의 남이흥이 한 “금년에는 남방의 군사를 징발하지 않았으므로 변장(邊將)이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할 것입니다.”과 합쳐지고 광해군이 수도 없이 군사력을 강화시키라고 화약 무기를 준비하라고 명을 하기도 하며 이런 행동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 10년대로 인조실록 2년에 (광해군 대에) 5년, 6년간 병사들의 징발을 계속했다고 언급되는 것과 기간이 일치한다.

또한 명에 구원병을 보낸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자, 이후 그로 하여금 계속 연락을 취하게 하여 후금의 정탐에 활용했다. 이것을 근거로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강홍립 밀지설'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김응하 등 주요 장수들과 파병군의 절반이 사르허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을 보아[1] 서인의 밀지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다만 어떤 경위로든 강홍립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광해군이 후금의 실체를 파악하고 무익한 충돌을 막으려 한 정황은 분명해 보인다. 사르후 패배 이후로도 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명나라는 후금에 응전해 복수하길 원했으며 이를 위해 조선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광해군은 그 때마다 이를 번번이 회피한 것이다. 가령 후금에 대한 반격을 논의코자 명의 사신이 칙서를 들고 찾아올 때마다 광해군은 조선이 엮이지 않게끔 잘 구슬려 보냈으며, 심지어 명의 황제가 군사 조련에 쓰라며 막대한 을 하사할 때조차도 이를 몽땅 창고에 박아두고 기어이 쓰지 않았다. 그 자금에 손을 대는 순간 명에 재차 군사가 동원당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적어도 후대 인조 시기 모문룡 사건이 비화되기 전까지 주변국간 충돌의 빌미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에 관련된 광해군일기 중 이런 부분도 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3년 6월 1일

“적의 형세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병력과 인심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고상한 말과 큰 소리만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적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마구 짓밟는 날에 이들을 말

[
談鋒
]
로 막아낼 수 있겠는가. 붓
[
筆翰
]
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널리 조정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무슨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대개 중국 사람들이 비록 귀순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란 천리에 퍼지고 듣고 보는 이가 매우 많은데 하필이면 이 길을 통해서 나오겠는가. 하물며 중국의 사신은 이웃 나라에 편지나 가지고 오가는 사람이 아니다. 이후로 글의 격식을 고치고 만포(滿浦)를 경유하여 나오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유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도록 하고 뒤에 절대로 중국 사람들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파견되어 나온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자세하게 답장을 보내되, 다만 강홍립 등의 서장(書狀)만을 받아서 올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오중고(吳仲庫) 등에게는 말하기를 ‘이 적의 세력이 크다. 옛날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임금들 중에는 역시 자신을 낮추어 후한 예를 차리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 적이 어찌 이러한 의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나라는 이미 요양을 상실하여 중국에 조공하는 길이 끊어졌으며 군대는 보잘것없이 약하니 임시로 둘러대는 말로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른바 ‘조서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면 몰래 베끼도록 하고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종묘 사직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경들은 다시 더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여 좋은 방법으로 잘 처리할 것을 〈비변사에 말하도록 하라.〉”


또한 명에게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염탐이라고 말하면서 후금과 사신 교환을 하던 것도 있고 정충신이 이로인해 후금의 막대한 정보들을 가져와 보고하기도 했다. 다만, 이는 선조의 기조를 유일하게 이어받은 부분이 군사외교 뿐이란 점도 있다.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난다.

“이 적들이 요동성에 들어가 버티고 있으므로 중국의 장관들이 차례로 적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 지방의 인재들 2백여 명이 원 경략(袁經略)을 결박하여 넘겨 주었다고 한다. 비록 30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나온다 하더라도 이는 모두 일찍이 오랑캐를 경험하지 못한 군사들이다. 영솔하는 대장들이 과연 이목(李牧)이나 이정(李靖)과 같은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들의 갑옷과 무기가 파손되어 형편이 없다고 한다. 멀리에서 온 군사들이 어떻게 정예롭고 건장하겠는가.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리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 일을 망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차관을 만포(滿浦)로 옮겨가게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과연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받아들이겠는가. 대체로 이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니 다시 더 의논해서 잘 처리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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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외교 정책은 개인만의 정책이 아닌 아버지 선조의 정책을 계승해나간 것이다.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 교수는 저서 '임진왜란한중관계' 등을 통해 이런 입장을 펼쳤다. 인조 대에도 이런 외교 정책은 어느 수준 이상 이어졌다.

명에 대한 사대주의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유생들은 이 상황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또한,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 등이 있던 대북이 열렬하게 광해군의 현상 유지론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는 인목 대비 문제로 윤리적 논란에 휘말린 것에 대해 관심을 돌려보겠다는 포석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나마 소북 중 영의정 박승종 정도만이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 역시 이이첨이 싫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는 광해군이 얼마나 국내 정치를 망쳐놓고, 똑똑한 신하들을 조정에서 내쫓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일설에는 1622년 거의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는데도 후금의 지도자를 ''으로 호칭하는[2] 국서를 보냈는데, 저 국서를 보낸지 1년 2개월만에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저 국서가 인조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하는 주장도 있다. 광해군의 지지자들도 친명배금 문제로 광해군의 통제를 벗어났고, 조정에서 광해군의 편이 사라지는 사태가 벌어진다.[3]

사실 광해군의 조정은 서인들보다 무식하고 위험했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심지어 서인들도 집권 후 숭명 배금을 주장했으나, 비변사 내부에선 광해군의 기조가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다. 대신에 인조는 문제였는데 왕이 되고 집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대외적으론 친명배금을 표방했으며 이에 따라 후금과의 외교를 아예 단절한 것은 치명적이었다.[4] 더불어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역적이 되는 이괄한테 북방의 강병을 맡기지 않아서 병력이 온전했을 거라는 점~~ 그 병력 자체가 공사 중단하고 보충한 민력으로 삼남에서 징발까지 해서 들려준 병력이다. 궁궐 5개 올리다 내정 파탄나면 기동군은 어떻게 만드는데?

광해군이 말년에 "후금이 성을 치지 않고 한성으로 바로 내려올 경우를 방비해야 한다"라고 말한 점 박시백도 그렇고 이걸 뭐 대단한 선견지명이라고 강조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당연히 누구나 다 이런 생각은 했다. 그에 대한 방책으로 만든 전략기동군을 이괄이 잡아먹고, 보병 위주 조선군 전력으로는 평원에서 청군과 회전을 벌여서 이기기기 쉽지않았을 뿐 이다. 청과 대등하게 야전을 벌인 벙력은 명에도 원숭환 부대 밖에 없었다. 병자호란 시기 청은 우수한 단위부대 전투력을 믿고 군사를 소규모로 쪼개서 각자 기동시켰다. 동선역-토산 전투의 양상을 살펴보며 첫날 마푸타가 이끄는 300기의 기병이 지나가고, 다음날 1천 가량의 기병이 도달했다. 인조의 지시를 받아 남하하던 김자점은 그 뒤에 오던 도르곤과 호우거의 군대에게 토산에서 뒤를 얻어맞았다. 병자호란의 진행 양상은 단순하게 성은 지나가면 그만이니 나가서 싸워야 한다 수준이 아니었다.

후금과 아예 외교 단절을 하여 정보를 얻는 것이 느렸던 인조와 달리 강홍립에게 편지도 받는 등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정충신 등에게 후금 내부를 흔들려는 공작을 펼치라 명하기도 했다. 또한 광해군은 군사 훈련의 부분에서는 인조와는 달리 관심이 많았고[5] 그로 인해 북방의 경계선에는 상당한 방어 병력이 모이기도 했으며 결정적으로 인조와는 달리 모문룡에게 무력하게 끌려다닐 상황은 되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반조선파라는 사실을 진작에 파악하고 따이샨을 지원해서 홍타이지의 대항마로 세우고 둘을 이간시켜 서로 싸움에 빠져 내분을 일으키게 하려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홍타이지에게 뇌물을 보내서 친조선파로 포섭을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며 홍타이지를 미리 경계하며 주목하고 있었다.[6] 실제로 홍타이지가 후계자가 되었을 때 광해군 본인도 전쟁의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며 도성 내 군사들까지 상당수를 북방으로 보낼 정도로 방비에 철저했었다.[7]

또한 광해군이 해놓은 방비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괄의 난 1달 직후 정충신이 한 평가에 따르면 광해군이 준비해놓은 후금에 대한 방비의 절반만 되어도 후금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충신이 이렇게 평가할 정도로 후금에 대한 방비는 견고했었던 것.[8]

그도 그럴게 당시 청나라는 군수품과 식량도 보급할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있었다. 그 정도로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상황이라 언제 멸망해도 모르는 상황이라서, 가장 빠르게 식량을 수급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선을 침략한건데 당연히 전력이 명군 침략 당시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다. 즉, 보급로 차단을 잘했어도 한양 점령은 못막았을지 언정 최소한 강화도로 대피한 뒤, 인조는 잘 살고 나머지 청군을 식량을 전부 막아두고 말려죽이는 방법이 가능했다. 심지어 광해군 때 절반만 되었으면 홍타이지는 아예 침략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9]

물론 인조도 바보가 아니라서, 인조가 남한산성에 대피만 빨리 했어도 거꾸로 청나라가 멸망위기에 몰렸을 것이다. 국가 전체 규모로 본다면, 오히려 내정을 싸그리 날려먹고 현실주의자 신하들을 없애버리고 스스로 조정에서 고립된 광해군과는 달리, 인조는 농업과 병력기반에 있어서는 청나라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조선 북부 이하로는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의 규모의 군사규모를 만들어놓았다. 문제는 1. 싸움조차 할 의지가 없는 김자점한테 북방의 정예군을 맡겨서 실질적으론 지방군들만 싸운 점, 2. 청나라가 언제 쳐들어올지 밀정을 파견하지 않아서 급히 대피를 하느라 남한산성에 식량이 없었던 점이다. 사실 인조 때에도 인조가 집중한 산업재건 덕분에 광해군 말기보단 각 지방들이 멀쩡했으므로 인조의 군사정책으로도 첩보만 잘 했다면 삼전도의 굴욕은 없거나 청나라가 도리어 멸망 위기였을 것이다. 둘의 장점을 반반씩 섞었다면.

적어도 후금의 침략 부분은 막을 수 있었다. 물론 후금의 홍타이지는 쳐들어왔겠으나 대규모로 오진 않았을 것이다.[10]


2. 부정적 평가[편집]


광해군의 외교 능력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홍타이지누르하치와 달리 조선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당시 후금이 조선 침략을 통해 물자를 확보해야만 하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중립 외교도 오래가지 못하고 후금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친명배금 정책이 아니더라도 조선후금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았다. 약소국의 대외 정책이 강대국의 대외 정책을 결정짓는 독립 변수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과대 평가나 오만이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전쟁을 방지한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으며, 독립 변수는 후금이 봉착한 체제 위기, 그리고 누르하치홍타이지의 대외 정책 성향 차이였다.

피터 C. 퍼듀(Peter C. Perdue) 교수의 『중국의 서진: 청의 중앙 유라시아 정복사(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는 당시 후금의 조선 공격에서 경제적인 이유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준다. 1621년 이후 후금의 만주족과 한족 사이에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불평등한 대우을 받은 한인들이 식량 공급에서도 심각한 위협을 느끼자 폭동의 가능성을 보였다. 1621년에서 162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먹을 곡식이 없었던 한인들은 식량을 은닉했고, 만주족은 그것을 빼앗으면서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경제적 압박 아래서 만주족의 착취가 이어지자 1623년, 1625년 연이어 한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1627년에 이르면 후금의 경제는 재앙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한계에 달한 인구를 부양할 방법이 없었다. 군사를 보급할 수도 없었고, 1627년의 곡물값은 4년 전에 비해 무려 여덞 배 폭등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생겼으며 곡식 창고는 비어버리고,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할 수 없었다.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이 당시 만주족 정권은 정권 붕괴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약탈은 후금 입장에선 아주 매력적인 옵션이었으며, 따라서 적어도 정묘호란은 후금 체제 내적 문제로 사실상 필연적이었다는 주장이다.

또 광해군은 명나라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천조국이라 스스로 망하지 않으면 답이 없는 규모였고, 반대로 청나라는 문앞에서 서성거리는 강도떼에 불과했다. 몇몇 사학자들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명나라의 선양질에 꽁해있던 선조의 임진왜란 직후 외교 정책을 이어받은 걸로 보고 있다. 물론 중립 외교임은 확실하지만 선조부터 인조까지 외교 정책은 실상 달라진 게 없다는 의견도 있다.[11]

오히려 광해군 정권의 구성원들은 세 임금의 정권 중 가장 친명파였고, 이건 광해군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12] 광해군은 조선 왕조에서 단기간내 옥사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신하를 숙청했고 이 과정에서 선조가 만들어놨던 인재 풀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강경 북인 친명파들만 조정에 득세하게 된 것. 이때 항복한 강홍립을 통해서 후금과 내통하려고 해보려고 했으나, 홍타이지는 그냥 협박용으로만 사용해서 이득은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13] 하지만 정충신을 통한 파견 등으로 얻어낸 제일 큰 성과는 후금의 군사 배치와 내부 사정을 소상하게 알아내 후금에 관한 막대한 정보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파병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선조는 임진왜란 직후 여진족 야인들이나 잔존 왜구 집결지를 불태우면서 책임을 안 잡히도록 일본과 명나라와 후금을 넘나드는 외교를 했다. 이 상황에서 광해군은 중립 외교가 의미없게 대규모 군사 파병을 했다. 한마디로, 중립 외교는 실효성이 없었다는 의견이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광해군의 파병을 두고두고 외교 명분으로 써먹으며 압박을 가했다. 실제로는 홍타이지의 외교 정책에 조선을 언젠가 처야한다는 인식만 남겼을 뿐이라는 것이다.[14] 사실 선조 시절에 왜란 이후 여진족들을 초기 진압한다고 보냈다가 실패해서 사실상 친 조선파 여진족들에 대한 지배권과 6진을 포기하는 상황이 되었다.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선조는 왜란 이후 6진 쪽 여진 흘라운 우디거가 방패막이를 하던 친조선 여진 추장들을 흡수하고 조선을 침략하자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대패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여진족은 6진 쪽 여진들을 흡수한 후 사실상 지배하다시피 커졌고 똑같이 성장하고 있던 누르하치가 훗날 여진족을 통일한다.

그러나 이렇게 사르후 전투 파병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결국 이 전투로 인해서 조선군 수만명이 싸그리 갈리는 군사적 실책이었다는 점은 부정하지 못한다. 그놈의 강홍립 밀지설을 믿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현대의 연구 결과로는 저 밀지설 자체가 마땅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물론 명군이 정말로 한심한 전력과 전략으로 상대한 탓도 있지만 광해군이 정말로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면 그런 무능한 명나라를 믿고 조선의 정예군인 1만 3천 병력을 무턱대고 사지로 몰아넣기보단 진짜 밀지라도 보내서 명군이 망하기 전에 전력이라도 보전했거나 후금에게 잘 보이는 행위라도 취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정예 병력을 말아먹고 그 이후에야 중립 외교를 한다고 나선 것보다야 그나마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이 당장 명나라의 병크는 지휘부가 여러 명이라는 문제로 인한 것이었고, 특히 시작부터 두송의 돌발행동이라는 상식을 뛰어넘은 일을 시작으로 마림이라는 유능한 명나라 측 장수로 인해 누르하치의 계획이 간파되어 고전할 때 마림을 질투한 반종안이라는 희대의 찌질이 트롤러가 구경만 하면서 방관하는게 아니라 마림을 지원했다면 사르후 전투는 누르하치의 패배로 끝났을 것이었다. 전쟁 도중에 아군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아군을 도울 생각은 안하고 구경만 하고 방관하는 상식을 뛰어넘은 일이 벌어질 것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장 후금군은 2만 1천명, 명군은 조선군까지 포함시에 10만 이상으로 5배에 달하는 숫자를 지녔었고, 전쟁 도중에도 명군 장수들의 병크와 사실상 배신행위가 아니었다면 누르하치에게 승산은 없었으며 후반부에는 날씨까지 기적적으로 누르하치를 도왔다.[15]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대규모 공사를 하는 엄청난 모순을 일으켰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그리고 중앙군 병력도 매우 부족했다. 홍타이지를 경계하느라 죄다 북방에 군사를 보내며 자신을 호위할 군사를 극도로 줄인 탓에 인조반정이 성공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이고, 인조 대와 광해군 대의 도성 내 군사의 숫자가 4배 이상의 차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또 훈련 대장이던 이흥립이 박승종과 연줄에도 불구하고 박승종과 광해군을 배신하고 인조에게 합류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또 이흥립의 경우는 1년 후 이괄의 난 때 이괄에게 투항했다가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자결한 인물이다. 배신의 달인...

게다가 위에 등거리 외교 긍정편에 광해군이 명의 황제가 군사 조련에 쓰라며 막대한 은을 하사할 때조차도 이를 몽땅 창고에 박아두고 기어이 쓰지 않았다고 서술했다고 써 있는데,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은 만력제가 유가족들에게 주라고 준 은 1만냥을 착복해 용보, 겸금, 주옥, 사라, 능단이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을 사라고 한 기록이 존재한다. 문제는 저기 있는 물품들은 염초나, 포, 쌀 등 같이 군사적, 생활적으로 중요한 것들이 아닌 보석과 비단 등으로 모두 왕실에서 사용하는 것들이다

지금 중국 황제가 내려준 은 1만 냥을 내림에 호조 참판과 색낭청이 받아가지고 갔다. 허술하게 하지 말고 십분 단단히 보관하라.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을 우선 값을 주고 일일이 서계하라. 그 가운데 용보(龍補)·겸금(兼金)·주옥(珠玉)·사라(紗羅)·능단(綾緞)은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이니, 먼저 내어 팔지 말도록 하는 일을 십분 상세히 살펴 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76권, 광해 14년 4월 27일 임진 7번째 기사



[1] 원정군 1만 3천명은 명의 반복되는 요구에 따라 대부분 조총병 편제로 이루어졌는데 사르허 전투 당시 앞서가던 명군은 후금 기병대에 포위 섬멸 당하고 뒤이어 가던 조선군은 대 기병전을 위해 언덕에서 야전 축성을 하려고 했으나 그전에 청군이 양쪽에서 들이닥쳤다. 때마침 불어닥친 모래 바람으로 시계마저 최악인 상태에서 맨몸으로 기병 돌격을 받은 조선군 좌영, 우영의 조총병들은 괴멸되었고 핵심 지휘관들도 모두 전사했다. 이미 명군의 홀대와 시원찮은 보급으로 사기가 떨어져있던 강홍립의 중군은 결국 투항했다. 이 당시 강홍립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일부러 투항했다고 보기는 힘들다.[2] 이는 사실상 후금의 위상을 국가적으로 인정하겠다는 소리다.[3] 결국 광해군이 자기 말을 잘 듣는 간신들만 앉혀놓은 결과로 인한 자업인자득인데, 광해군이 밀어준 신하들이 명분에만 집착하는 전형적인 꼴통이라서 광해군의 장기말로서 정치싸움에선 광해군의 복수심을 채워주긴 했으나, 진정으로 국가적 지혜를 발휘해야할 때는 광해군의 최대 지지자들이 꼴통답게 광해군이 그나마 지혜를 보인 외교 분야를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4] 광해군은 모든 신하들이 반대했음언도 불구하고 일년에 두 번 이상 사신 교환을 하며 후금과의 외교를 유지했다. 그 결과로 광해군은 자기편한테서도 버려졌지만, 그건 위에서 설명한대로 광해군 자신이 무능한 꼴통 선비들을 조정에 앉힌 자업자득이다.[5] 인조와 광해군이 정반대인 것이 인조는 군사 훈련을 금하고 자신을 호위하는 병력들만 크게 늘렸지만, 광해군은 자신을 호위할 병력들까지도 죄다 변경에 보내면서 군사 훈련을 시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이는 가뜩이나 자기편에서도 미움받았던 광해군의 입장에선 도성 사람들이 죄다 욕하는 미친 짓이었으므로 긍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6] 광해군일기 13년 8월 28일, 그리고 13년 9월 2일에 정충신을 시켜하는 홍타이지 포섭 계획 및 따이샨과의 이간 계획이 명나라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첩보 활동으로만 알려지게 하려는 명령도 내렸다.[7] 이 때문에 인조가 광해군이 준비해둔 이 군세를 보고 자신만만해하며 후금을 향해 무력압박을 놓기도 했다. 그 후에 이괄의 난 크리...[8] 이것은 광해군일기에도 나오지만 그만큼 홍타이지를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경계했음을 보여준다.[9] 3만의 군대를 정묘호란에서 겨우 냈었는데 그 군대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리스크도 너무 컸기에 홍타이지는 조선 북방선이 아작난 이야기에도 망설였고, 정묘호란은 장기적으로는 성과를 봤어도 단기적으로 큰 성과를 보지 못했었다.[10] 단 이럴 경우 이것이 업적으로 크게 인식될지는 미지수. 광해군 때 막았다면 후금이 알아서 자멸했다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크기에 실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은 진정한 중립외교와 국방력 증강의 기반은 광해군이나 인조 따위가 아니라, 선조의 임진왜란 이후 17년이나 되는 재부흥 정책 덕분이나, 광해군은 최소한 선조의 정책 중에서 군사 쪽은 큰 이견없이 이어받았다. 광해군이 선조 시절의 다른 장점도 이어받았으면 쫓겨나지도 않고 국력도 성장했겠지만 넘어가자.[11] 다만 이후 왕인 인조도 실질적으로는 본인의 반정 명분과는 별개로 광해군의 외교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교 노선을 걸었다고 한다. 가령 한명기 교수의 역사 평설 병자호란이라는 책에 따르면 분명 인조의 반정 명분부터가 친명배금이었지만 최명길도 심지어 광해군조차도 명을 위대한 나라로, 청을 비천한 오랑캐 국가로 보았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반정 명분으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 노선에 대한 비판을 들고 나왔던 인조 정권은 결국 조선 내부의 어수선한 상황 등이 겹쳐서 본인의 속마음(아마도 친명배금)과는 별개로 청에게 강경책을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인조 정권은 입으로만 친명배금을 외쳤지 실제로는 청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는 등 광해군 시절의 그것과는 별로 다르지 않은 외교 정책을 실시했다고 한다. 사실 오히려 친명배금의 입장을 더 적극적으로 내세운 것은 광해군 시절로 조정의 대북파들 모두가 대청 강경파였고 명의 요구에 따라 광해군은 조선군을 파견, 청군과 전투를 벌였다. #[12] 물론 후대의 인조 역시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한 만큼 친명에 더욱 얽매이는 결과를 낳아버렸다.[13] 그러나 강홍립을 통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 외에도, 당장 정충신을 파견해서 홍타이지의 회유 시도를 하면서 동시에 따이샨과 싸움을 붙이려고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후금 내의 정보들과 군사 배치 등을 자세히 손쉽게 얻어낸 것이 큰 이득이었다. 광해군도 홍타이지를 크게 경계해 회유하려고 하면서도 전쟁 가능성을 높다고 생각했기에 홍타이지를 전문적으로 마크하며 홍타이지에게 광적인 경계심을 보이며 사실상 최대 숙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14] 그러나 선조 때와 광해군 때가 상황이 다른 것도 염두해야 한다. 선조 때 경우는 명이 직접 대놓고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고 광해군 때 경우에는 요청을 받은데다가 신하들과 백성들도 원군을 보내는게 맞다는 주장이 많았고 이때 광해군의 위치 등도 생각한다면 즉, 선조처럼 했다거나 선조라면 안보낼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15] 당장 사르후 전투 이후 광해군이 펼친 외치 방식과 인조의 이도저도 아닌 방식의 차이는 은근히 크다. 애초 광해군은 친하게 지내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첩보를 캐내고 약점을 분석하며 그에 맞는 대비를 펼친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