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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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연구회
모테기파

형성
1987년 7월 4일
전신
목요 연구회
설립자
다케시타 노보루
회장
모테기 도시미쓰
주요 정치인
누카가 후쿠시로 (최고고문 / 일시 이탈)[1]
후나다 하지메 (부회장)
오쓰지 히데히사 (일시 이탈)[2]
오부치 유코
가토 가쓰노부
신도 요시타카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역사
2.1. 목요회로부터의 이탈
2.2. 다케시타 - 가네마루 시절
2.3. 오부치 시절
2.4. 하시모토 ~ 누카가 시절
2.5. 모테기 시절
3. 역대 회장 목록



1. 개요[편집]


헤이세이 연구회(平成研究会) 또는 모테기파(茂木派)는 일본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파벌이다. 현재 회장은 모테기 도시미쓰 현 자민당 간사장이다. 굉지회, 지공회, 유린회(다니가키 그룹), 수월회(이시바 그룹)와 함께 보수본류 파벌 중 하나이다.

직접적인 전신은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파벌인 목요회이고[3] 보다 근본적으로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파벌에서 유래했다.[4][5]

한 때 다나카 가쿠에이 시대 말기에서 가토의 난 발발 이전[6]까지 1980-90년대에 일본의 정치와 자민당을 대표했던 파벌로, 역사가 길고, 총리대신도 많이 배출하였다. 하지만, 90년대 초 파벌 인원 중 다수가 오자와 이치로하타 쓰토무, 오쿠다 게이와, 와타나베 고조를 따라 신생당과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 등으로 이탈하여 민주당 계열이 되었고, 복당한 인원들도 헤이세이 연구회가 아닌 지수회, 지공회 등 다른 파벌로 가버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우정 민영화를 명목으로 보수본류 인원들을 공천학살하면서 그 세가 크게 꺾였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로 총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2. 역사[편집]



2.1. 목요회로부터의 이탈[편집]


1970년대 초반부터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끄는 목요회(木曜クラブ)는 자민당 내부의 최대 파벌로,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비록 다나카 가쿠에이는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부패스캔들 때문에 자민당을 탈당했지만, 여전히 당외부에서 목요회를 움켜쥐고 막후에서 자민당과 일본정치를 움직여나갔다.[7] 이 시기에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신의 파벌지배력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확실한 후계자(2인자)를 키우지도 않았고, 목요회에서 총리가 나오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목요회에서 차세대 주자로 거론되고 있던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은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85년 이들은 스터디 그룹의 개념인 창정회(創政会)를 창설하면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독단적인 파벌운영에 반기를 꾀하게 된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창정회의 실체를 알게 되자 이들의 반란을 진압할려고 했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자연스레 정계에서 밀려나고 목요회는 다케시타가 장악하게 된다.

1986년, 목요회를 사실상 장악하게 된 다케시타 노보루는 자신이 만들었던 공부회인 창정회를 해산하고 세력확대를 꾀한다. 이후 1987년 5월 21일,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다케시타 노보루는 도쿄의 한 호텔에서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한 파티를 열었는데, 참가자만 13,000명 정도였고 매출로는 대략 20억엔을 찍는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특히, 목요회 소속 의원 중에는 128명이 참가하여 전체 파벌의 90% 정도가 전부 출석하는 등 목요회에 대한 세력장악력을 과시했다.#

이후 목요회내 그나마 남은 대립 세력이었던 니카이도 스스무의 니카이도그룹(二階堂グループ)과 총재후보 단일화 협의를 시도했으나 결렬되고, 다케시타 노보루는 신파별 결성을 결심하게 된다. 결국 1987년 7월 4일, 신파벌 경세회(経世会)[8]가 결성되면서, 해산 당시 의원 141명의 거대 파벌 목요회는 다케시타파 114명, 잔류파(니카이도그룹) 15명, 중립계의 12명으로 세 갈래로 분열되었다.


2.2. 다케시타 - 가네마루 시절[편집]


경세회의 결성 이후, 같은 해 10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지명으로 총리에 취임하면서 다케시타 노보루는 자민당의 확실한 주류로 올라서게 된다. 다케시타의 총리 취임후에 경세회의 회장은 가네마루 신이 맡게 되었다. 이 시절 경세회의 핵심 인원이었던 오부치 게이조, 가지야마 세이로쿠[9], 하시모토 류타로, 하타 쓰토무, 와타나베 고조, 오쿠다 게이와, 오자와 이치로의 7명을 가리켜 다케시타파 칠봉행(竹下派七奉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다케시타가 리크루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임했을때도 자민당 내 최대 파벌로 남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정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했었고 당시 이를 경세회의 지배라고 불렀다. 현재 파벌이름이 헤이세이 연구회로 바뀌었음에도 경세회로 자주 불리는데, 이때의 영향력이 워낙 컸고 이름이 바뀐뒤에도 이때 수준의 위상을 회복한 적이 없기 때문인 듯 하다.

그런데, 총리직을 맏는 동안 대행으로서 역할을 할 줄만 알았던 가네마루 신다케시타 노보루의 총리 퇴임 이후에도 회장직을 계속 유지하자 둘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다케시타 노보루의 후임 총리로 결정된 우노 소스케게이샤 스캔들로 참의원 선거에 참패해 사퇴하자, 후임으로 우노 지도부하에서 간사장을 맡아 선거유세에서 인기를 끌었던 경세회의 하시모토 류타로를 올리려 했지만, 오자와 이치로가 하시모토의 여성 스캔들 문제를 발견해 이를 단념시킨다. 결국 후임 총리에는 가이후 도시키가 결정되어 오자와 이치로가네마루 신의 지원 하에 최연소 간사장을 맡게 되고 하시모토 류타로대장대신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경세회내에서는 세력다툼이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두고 일룡전쟁(一龍戦争)[10]라 불렀다. 하시모토 류타로다케시타 노보루와 가까웠고, 오자와 이치로가네마루 신과 가까웠다. 그래서 이를 두고, 다케시타와 가네마루의 대리전이라 보는 시각도 존재했다,

1991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당 본부가 공인한 후보가 도쿄도련이 지원하던 후보에게 패하자 오자와 이치로는 간사장직을 사임했다. 그런데 가네마루 회장이 자민당 간사장을 퇴임한 오자와 이치로를 회장 대행에 맡겨 일본 정치의 막후 실세로 군림하게 되자 다케시타의 측근 정치인들의 반발을 샀다. 가이후 내각 때에는 중의원 해산 시도에 오자와와 경세회가 반대를 하여, 가이후 도시키 내각이 총사퇴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다케시타파의 지배력이 엄청났다. 이는 오자와의 적이 늘게된 계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시기까지 경세회는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 오자와 이치로 세 사람이 정부와 당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를 두고 세 사람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곤치쿠쇼(金竹小/こんちくしょう)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세회의 황금기도 사가와 규빈 사건에 책임을 지고 가네마루가 사퇴하면서 끝나게 된다. 경세회도 후임 회장 자리를 두고 오자와파와 반오자와파 두갈래로 나뉘게 된다. 다케시타파 칠봉행 중에서 오자와는 하타 쓰토무를 총리로 옹립한다는 조건으로 그를 끌어들였고, 이 조건이 오자와의 하타 회장 구상이다. 반면 반 오자와파는 오부치 게이조를 총리로 옹립하고자 했다.

파벌 내에서 계속 집회를 한 오자와파는, 다케시타와 가네마루의 지지를 얻고자 경세회 최고 간부회에 갔지만, 두 사람은 오자와에게 “아이같은 싸움은 그만둬라”, “오부치는 적이 적으니 오부치가 회장이 되어야 한다.”이라며 사실상 오부치 편을 들었다. 수적으로는 오자와 파가 더 많았음에도 최고 고문격인 두 사람이 해당 발언을 하자 간부회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돌연 기자회견자리에서 경세회 좌장격인 하라다 켄이 “회장감으론 오부치가 적절하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여론이 뒤집혔고, 1992년, 오부치는 반 강제적으로 경세회 차기 회장직에 취임한다.

오부치 취임 5시간 후,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 등 오자와파 인물들은 개혁 21 포럼을 창설하여 경세회에서 이탈한다. 이로써 당 최대 세력이었던 경세회는 각각 제 4대 파벌인 경세회와 제 5대 파벌인 하타•오자와파로 쪼그라든다.[11]


2.3. 오부치 시절[편집]


1993년 6월 하타·오자와파는 탈당 이후 신생당을 결성.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비자민 정권 을 수립했다.

호소카와·하타내각과 비자민 정권이 단기간에 붕괴, 무라야마 내각이 세워짐으로써 자민당이 여당으로 복귀하자, 오부치파도 점차 세력을 회복했다. 1995년 총재선에서 다케시타는 파벌 간부 하시모토 류타로 의 옹립을 결정. 총재 취임 후 1996년 1월 무라야마 내각 퇴진을 받고 후임 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그동안 당내 파벌 해소 운동이나 소파벌 전락으로 사무소 유지비가 엄격해지면서 다나카파때부터 입주하던 사방회관에서 경세회 간판을 내렸고, 그 후, 헤이세이 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파벌 출신인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 시대에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에 진력한 적도 있어 방위 문제나 오키나와 문제에 강한 파벌로 알려져 있다.

1998년 7월 참의원 의원 선거에서 패배하자 다케시타는 즉시 총리 총재직을 하시모토에서 파벌 회장인 오부치로 교체하도록 지시했다. 후계 회장에게는 와타누키 타미스케가 취임했다. 이 결정을 불복으로, 카지야마 세이로쿠[12]는 파벌을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총재선에 출마. 다케시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출마시켜 3개의 골목 형태를 취했고, 그때까지 '일치 결속·상자 도시락'이라 불리는 오부치파가 처음으로 깨끗함을 보였다. 이 무렵부터, 파벌의 아킬레스건으로 오부치파의 후계자가 부재하는 것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장래를 이어야 할 젊은이의 대부분이 오자와와 하타 등과 함께 자민당을 탈당했기 때문이다.


2.4. 하시모토 ~ 누카가 시절[편집]


2000년에 오부치, 다케시타가 잇달아 사망. 7월 와타누키가 중의원 의장으로 취임하고 파벌을 이탈했기 때문에 하시모토가 후임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파벌의 실권을 잡고 있던 것은 노나카 히로무아오키 미키오였다.

하시모토는, 2001년 4월, 모리 총재의 후임을 선택하는 총재선에 출마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대패했다. 다나카파 이후 '일치 결속·상자 도시락'이라 불리는 철의 단결을 자랑했지만 고이즈미 정권 성립 이후 총재 후보가 부재한 채로 구심력이 떨어졌다. 또 각각 전쟁 이후의 원념을 안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는 '저항세력'으로 자리매김해 눈의 적이 되었고, 고이즈미 정권에서는 2003년 9월까지 하시모토파는 당 집행부에서 벗어났다. 하시모토 분파 미키 행정부(과거의 다나카 분파 시대가 당 지도부에 임명될 수 없었던 1974년 ~ 1976년 )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하시모토 분파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증거였다.

2003년 총재선에 있어서, 반고이즈미의 급선봉이었던 노나카가 독자 후보의 옹립을 주장했지만, 아오키 미키오와 무라오카 카네조가 고이즈미 지지를 표명했기 때문에 노나카는 완전히 고립. 총재선 속에 노나카는 이를 이유로 의원은퇴를 표명하는 사태가 되었다. 파내 에서는 사사가와 가미 · 쿠마시로 아키히코 등 여러 회원이 공공연히 출마 의욕을 나타내는 등 크게 혼란했지만, 최종적으로 후지이 타카오 를 옹립. 파내의 지지를 제대로 얻을 수 없는 가운데 후지이는 낙선해 고이즈미가 재선되었다. 그 후의 고이즈미 정권하의 당 임원 인사에서는 2003년 9월부터 2004년 9월까지 누카가 후쿠시로가 정조 회장으로, 2004년 9월부터 2006년 9월까지 규마 후미오가 총무 회장에 기용되어 오랜만에 당3역 포스트를 얻었다.

2004년에 일치연암 헌금사건이 부상하고, 노나카 히로무와 아오키 미키오가 만나는 형태로 하시모토 류타로가 1억엔의 수표 를 받아, 정치 수지 보고서에 어둠 헌금으로서 처리하고 있던 의혹이 부상(이 의혹으로는 무라오카 카네조 전 관방장관이 재택 기소되어 유죄). 2004년 7월 30일, 하시모토는 책임을 지는 형태로 회장을 사임. 파로부터도 이탈해, 2005년 의 중원 해산으로 정계를 은퇴했다(그 다음해에 사망).

게다가 우정국회 에서의 일본우정 민영화 법안의 대응을 둘러싸고 2005년의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법안 반대자들이 낙선하여 당내 제 1파벌의 자리를 뺐겼다.

회장 부재의 상태가 계속되었지만, 제3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이 성립한 4일 후인 2005년 11월 4일, 회장에 쓰시마 유지가 취임. 2003년 9월 총재선 이후 파내에서 이어지고 있는 중원과 참원의 웅덩이 해소가 큰 과제였다. 또, 중의원 간부의 대부분이, 1993년 이후의 정계 재편 속에서 복당한 인원들(대부분이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신진당, 자유당 출신이다.)과 민주당 출신(하토야마 쿠니오 등)이었다.

원래 경세회 분열과 그 후의 거짓말쟁이 해산에 있어서, 후나다 하지메 · 하토야마 쿠니오 등의 장래를 담당할 것으로 보인 의원이 이당 내지 파벌 이탈해(그 후 대부분이 복당했지만, 하토야마 쿠니오는 재차 자민당을 이당, 후나다 하지메는 도치기현 제1구에서 낙선했다), "NYKK"의 한명이라고 한 나카무라 기시로(현재는 입헌 민주당 소속)가 제네콘 부패 사건 으로 실각하는 등, 인재가 부족한 가운데 차기 총재 후보는 후지이 타카오, 누카가 후쿠시로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지이 타카오는 우정 해산때 낙선했고, 이 때문에 마지막까지 남은 누카가 후쿠시로 를 총리 총재 후보로 키워 가는 방향이라고 하는 견해가 강해졌지만, 아오키 미키오가 총재선 때마다 누카가 옹립에 찬동하지 않는 등, 자타 모두 인정하는 총리 총재 후보란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하토야마 구니오는 파벌 복귀 후에도 아소 다로의 맹우로 활동해 파벌로서의 통일된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게다가 우정 반역으로 탈당했다 복당한 의원의 대부분이 타파벌로 이적하거나 무파벌이 되어 파벌을 돌볼 간부가 부재했다.

2.5. 모테기 시절[편집]


다케시타 와타루 전 회장이 2021년 9월 17일 사망한 이후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이 회장직을 대리하는 구조로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을 치렀다.

자민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이후 11월 11일, 파벌 회의를 통해 모테기 간사장을 그대로 후임 회장으로 선임하기로 중지를 모았다. 같은달 25일 회파 총회에서 모테기 간사장이 정식 회장으로 취임했다.

3. 역대 회장 목록[편집]


대수
이름
파벌 호칭
임기
1
다케시타 노보루
다케시타파
1987년
2
가네마루 신
1987년 ~ 1992년
3
오부치 게이조
오부치파
1992년 ~ 1998년
4
와타누키 다미스케
1998년 ~ 2000년
5
하시모토 류타로
하시모토파
2000년 ~ 2004년
공석 (2004~2005년)
6
쓰시마 유우지
쓰시마파
2005년 ~ 2009년
7
누카가 후쿠시로
누카가파
2009년 ~ 2018년
8
다케시타 와타루
다케시타파
2018년 ~ 2021년
9
모테기 도시미쓰
모테기파
2021년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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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의원 의장 취임으로 일시 이탈.[2] 참의원 의장 취임으로 일시 이탈.[3] 다나카 가쿠에이의 목요회의 2인자였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경세회라는 파벌을 차려 나간 뒤 목요회를 흡수했다.[4] 계보대로 이어간다면 보수본류의 직계 중 한 갈래다. (요시다파->사토파->다나카파->다케시타파->오부치파->하시모토파->다케시타파->모테기파)[5] 보수본류의 또 다른 직계는 굉지회다. 요시다 시게루의 정치적 제자이자 사토 에이사쿠의 동기이자 라이벌인 이케다 하야토부터 시작해서 현재 일본 총리인 기시다 후미오까지 내려온다. 이 쪽은 창설된 1957년 이래 한 번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6] 다케시타 노보루가네마루 신이 은퇴하고, 1990년대 초에 발생한 자민당 분당 사태가 벌어졌을 때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를 포함한 파벌 내 주류 인사들이 몇몇 이탈하긴 했으나, 55년 체제 붕괴 이후에도 하시모토 류타로오부치 게이조를 총리대신으로 배출해내며 사실상 가토의 난이 발발하고 보수방류의 세이와 정책연구회가 세를 불려갈 때까지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7] 이 시기 다나카 가쿠에의 별명이 '어둠의 쇼군'이었다[8] 중국 고전의 경세제민에서 뜻을 빌렸다.[9] (구) 이바라키현 제2구를 지역구로 하고 있었으며, 39 ~ 40대 총선까지 지역구에서 대경했던 의원이 오하타 아키히로이다.[10] 각자의 이름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의 이치(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의 류(龍)이다.[11] 이때 칠봉행 중 타케시타 계열이었던 오부치, 카지야마, 하시모토는 경세회에 잔류했고, 오쿠다, 와타나베는 하타, 오자와를 따라간다.[12] 가지야마 히로시의 이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