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예켈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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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나치 독일의 정치인이자 친위대 대장. <예켈른 방식>이라 불린 학살로 악명높은 전범이다.
2. 초기 행적[편집]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예켈른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14년에 독일제국군에 입대해 포병으로 근무했다. 중위로서 2급 철십자 훈장과 상이훈장을 수상한 그는 전쟁말기에는 비행조종사로서 훈련을 받기도 했다.
3. 나치당과 친위대 입대[편집]
1929년 10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예켈른은 1930년 3월 15일에 무장친위대에 입대했다. 1932년 7월부터 나치당의 국회의원을 지낸 예켈른은 1931년 9월부터 1933년 1월에 걸쳐 제 4 친위대 지구의 사령관으로 일했는데 1933년 1월부터 7월까지 친위대 남방집단의 사령관 및 브라운슈바이크 정치경찰직을 겸무했다. 친위대 중장으로 승진한 예켈른은 1933년 11월부터 7월까지 친위대 상급지구 북서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대장으로 승진해 1941년 6월까지 친위대 상급지구 서구 사령관 및 친위대 경찰고급지도자로도 일했다.
4.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해골사단 제 2 보병연대 사령관으로 종군하며 1941년 6월부터 동부전선에 파견되었다. 남러시아 친위대 및 경찰고급지도자로 임명된 예켈른은 9월 29일부터 9월 30일에 벌어진 키예프의 대학살에 관여해 실행에 옮겼다. 1941년 11월부터 독일의 패전까지 예켈른은 자신의 지배지구인 동부지역에서 아인자츠그루펜의 유대인 및 빨치산 살해활동을 감독하기도 했다.
5. 예켈른 방식[편집]
예켈른은 <예켈른 방식>이라 불린 조직적인 대량학살을 즐겼는데, 1941년 11월 30일부터 12월 8일에 걸쳐 룸블라 숲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당시 주민들을 500~1,000명 가량 나란히 배열시킨 후 10km 떨어진 남쪽의 처형장으로 이동하게 한 다음 희생자들의 옷과 금품을 뺏은 다음 나체가 된 포로를 총살하여 구덩이로 밀어넣었다. 룸블라의 학살당시 약 25,000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6. 전후 재판과 최후[편집]
1945년 1월부터 2월까지 제5 SS 산악군단장으로 일한 예켈른은 독일이 패하면서 소련군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1946년 1월 26일부터 2월 3일에 걸쳐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열린 소련의 군사법정은 2월 3일 사형을 선고한 후 선고 당일 바로 예켈른을 교수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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