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학/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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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경력
2. KBO 리그 경력


1. 아마추어 경력[편집]


충암고 재학 시절 투수, 야수를 맡았다. 3학년인 1990년에는 대통령배, 황금사자기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충암고 졸업 후 1991년 고려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외야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고려대 재학 시절 국가대표 4번타자에 엄청난 강견으로 아마추어 최고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4학년 시절이던 1994년에는 동기 조경환, 1년 후배 조성민, 홍원기, 김종국, 2년 후배 진갑용, 손민한, 그리고 신입생이던 김동주와 함께 고려대 야구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서울 연고 팀 LG 트윈스OB 베어스 두 구단 모두 심재학을 1차 지명으로 뽑으려고 했으나 주사위 던지기 끝에 LG가 우선권을 획득하면서 심재학을 1차 지명했고, 계약금 2억 3000만원이라는 신인 역대 최고액에 입단한다.[1][2]


2. KBO 리그 경력[편집]



2.1. LG 트윈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1012000021367.jpg
(출처 : 포토로)

고려대학교 시절 강타자로 유명했고 신인 최고 대우를 받았다 보니 입단 당시부터 유력한 신인왕 후보이자 LG의 차세대 간판타자가 될 것으로 주목받았으나, 데뷔 첫 해인 1995 시즌 성적은 기대와는 다르게 썩 좋지 못했다. 1군 108경기에 출장해서 타율 0.230, 55안타, 4홈런, 18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중반 2군으로 강등되는 등 프로 무대에 적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3] 이 당시 타격폼이 워낙에 특이해 교정에 교정을 거듭했다고 한다.

아래에 서술할 투수 전향 해프닝 등 흔히 LG 시절 심재학이 기대치에 비해 부진했다고 하지만, 세부 성적을 들여다보면 결코 부진했다고 볼 수 없다. 일단 다음 해인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LG의 4번타자로 자리잡았고, 아마 시절 및 프로 입단 당시의 기대만큼은 못했지만, 1998년까지 두자릿수 홈런을 치며 활약하게 된다. 1996년에는 전해보다 기량이 일취월장하며 0.285에 18홈런, 72타점, OPS 0.863, wRC+ 150.2, WAR 4.30을 기록했다. 특이한건 18홈런 중 14홈런이 잠실구장에서 나왔다는 점. 타이론 우즈 이전 잠실에서 한 시즌에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로 이름을 올린다. 1997년에도 똑같은 0.285의 타율에 15홈런, 84타점으로 이승엽양준혁에 이어 타점 3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타팀의 중심타자들인 홍현우김기태보다 많은 갯수였다.[4] OPS도 0.818, wRC+도 129.8을 기록했다.

1998년에는 0.267, 11홈런, 70타점으로 전년도보다 성적이 다소 하락했다. 그래서 시즌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할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부상으로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빠진 강동우 대신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대체선수로 선발되었고,[5] 당시 대표팀 최고참이었다 보니 주장 완장을 차게 된다. 사실상 야구 드림팀 첫 주장을 심재학이 하게 된 셈. 대표팀이 금메달을 따내면서 선수 전원이 병역 특례를 받았고, 덕분에 기대하지 않았던 병역 특례를 받게 된다.

1998년의 부진 때문인지, 심재학의 강견을 눈여겨보던 LG의 천보성 감독과 정삼흠 투수코치는 1998 시즌 종료 후 심재학을 투수로 전향시켰다.[6][7]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418000039232.jpg
(출처 : 포토로)

당시 LG의 사령탑이던 천보성 감독은 투수가 필요하게 되자, 당시 투수코치인 정삼흠과 의논 끝에 중심타자 심재학을 좌완투수 심재학으로 전향시켰다.[8][9] 정삼흠 투수코치가 심재학에게 투수 전향을 권유할 때, 용병이 외야 한 자리를 차지하는게 대세[10]라는 근거를 들어 '계속 외야에서 뛸 경우 돌아올 것은 트레이드다!'라는 말로 투수전향을 강제한다.[11] 심재학의 회고담

강한 어깨 탓에 최고 구속은 145km/h를 찍었으나 제구가 전혀 되지 않았고, 아무래도 타자투수가 쓰는 근육이 다른 탓에 투구하는 내내 어깨 근육통에 시달렸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투수를 하는 내내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고. 결국 투수로 15경기(선발 10경기)에 등판해 3승 3패 ERA 6.33을 기록하며 투수로써는 완벽히 실패했고 결국 시즌 막판 타자로 다시 전향하게 되었다.

훗날 스톡킹에 출연해서 1999년 투수 전향 당시 썰을 풀었는데, 당시 팀에 의해 강제적으로 당한 투수 전향으로 인해 정신과 상담까지 받았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꽤나 받았다고 한다.[12] 이에 심수창이 재미삼아 계속 투수 전향 이야기를 꺼내자 이제 그만 이야기하라며 더 이상 그때를 기억하기 싫다고 손사래치는 걸 봐서는 심재학의 투수 전향은 본인에게나 LG 구단에게나 모두 흑역사로 남은 셈이다.

그리고...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118000006868.jpg
(출처 : 포토로)

LG와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심재학은 시즌 후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결국 자신의 생일인 1999년 10월 18일에 투수 최원호를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됐다.[13][14] 상술했지만 이 당시 LG는 투수가 없어서 심재학을 투수로 전향시키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심재학의 투수 전향이 실패로 끝나자 심재학만큼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였던 최원호를 트레이드로 받아온 것. 아이러니하게도 둘 다 1차 지명자들끼리 맞트레이드된 셈이었는데, 심재학은 1996~97년에 날아다녔다. 또한 1995년 시즌을 앞두고 1차 지명으로 데려온 선수였다. 그리고 최원호는 1998년에 10승을 거두었으며, 1996년 1차 지명으로 데려온 선수였다. 둘 다 99년에 부진했으니, 다시 잘하겠지라는 생각으로 트레이드해 버렸다.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한 심재학은 다시 방망이를 잡으며 2000 시즌 0.265, 21홈런, 75타점을 기록하며 현대의 2번째 우승을 견인한다. 사실 이 시절 타율만 보면 초라해 보이지만, 선구안이 괜찮은 편이어서 출루율이 0.361로 타율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OPS 역시 0.847을 기록하였고, WAR도 3.06으로 괜찮은 성적을 냈다. 더군다나 시즌 초에는 2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할 만큼 불타오르기도 했었다. 당시 연속경기 안타 기록으로는 3위였고, 현재는 9위다.

결과적으로 심재학은 단 1년만 뛰다가 다시 트레이드되어 나갔지만 현대 입장에서는 정말로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준 영입이 되었다. 애매한 선수였던 최원호를 내보내는 트레이드 카드로 들어와 우익수 자리와 타선 보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좌익수 전준호-중견수 박재홍-우익수 심재학이라는 호화로운 외야진을 구성했다. 더군다나 2000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를 하며 잘 써먹었고 다시 한 번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심정수를 영입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나가는 순간까지 팀에 큰 기여를 한다. 그래서인지 한 시즌만 뛰다 갔음에도 심재학의 대한 과거 현대 팬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다. 한편 트레이드 상대인 최원호도 비록 부상으로 인한 이탈이 몇 차례 있었지만 향후 2000년대 중반까지 LG의 선발 한 축으로 활약하면서, LG 또한 나름의 이익을 본 트레이드가 되었다.


2.3. 두산 베어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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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선수협 사태로 구단에 미운 털이 박혔던 심정수의 보복성 트레이드 맞상대로 지목되어[15] 2001년 2월 9일[16] 두산 베어스트레이드됐다. 당연히 두산 팬들은 심정수를 왜 내보내냐며 분노하였고[17] 이는 조직적인 항의 운동으로까지 발전하며 공식 홈피 곰대가 1주일 폐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저 당시 두산 팬들에게 심죄악이라고 대차게 까인 건 덤.[18] 그리고 11년 후인 2012년 역사는 반복된다.[19]

그러나 심재학은 두산에서 대폭발하며 2001년 1군 117게임에 출장해 .344 .473 .599 24홈런 88타점 WAR 6.41 wRC+ 179.5라는 어마무시한 성적으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20][21][22] 더군다나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맹활약했는데, 3차전에서는 2루에서 3루로 주루 도중, 김한수의 송구를 머리에 맞았지만,[23] 고통을 참고 홈까지 달려 득점 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6차전에서는 8회 말 희생플라이로 결승 타점을 올리면서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매듭지었고, 개인 통산 2번째 우승반지이자 2년 연속으로 우승반지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타이론 우즈가 워낙 맹활약을 해서 한국시리즈 MVP에는 실패했으나 심재학도 나름 시리즈 MVP급 활약을 했다. 이 해의 활약답게 2001 시즌 외야수 부문 KBO 골든글러브도 획득.

하지만 2002년 0.245, 15홈런, 57타점에 그치며 전년도에 비해 타율이 1할이나 떨어지는 등 부진했고,[24] 한 술 더떠 2003년에는 0.236, 5홈런, 27타점이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들었다. 첫 해 심재학이 미친 활약을 보여주며 양측 모두가 만족할 만한 전형적인 윈-윈 트레이드로 심정수-심재학 트레이드는 남게 될 줄 알았으나, 심정수는 해가 갈수록 리그 최강의 타자로서 현대 유니콘스 왕조 건설에 결정적 역할을 한 선봉장이나 다름 없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심정수는 트레이드 후 2년 된 2003년, 53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리그 최고의 홈런타자로 군림했다. 처음에는 꽤 좋았으나 가면 갈 수록 떨어지는 이른바 결과적으로 두산 베어스의 완패 트레이드로 남고 말았던 시절이다.


2.4.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파일:200806191334472227_1.jpg

2003 시즌 종료 후 두산 베어스는 리빌딩을 목적으로 심재학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고, 중심 타선 보강을 노리던 KIA 타이거즈와 심재학 ↔ 황윤성 + 박진철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25] KIA로 이적한 심재학은 2004 시즌 128게임에 나와 타율 0.281 22홈런 81타점 OPS 0.940을 기록하며 팀의 4강행에 큰 힘을 보탠다. 부상으로 신음하던 홍세완, FA 계약 후 먹튀짓에 가까운 활약을 하던 마해영과 부상에 시달리고 태업 의혹이 있었던 박재홍의 몫까지 활약하며 시즌 종료 후 3년 총액 18억 원에 FA 계약을 한다.[26] 트레이드 상대인 박진철이 인대 파열로 바로 은퇴하고, 황윤성이 잊혀진 것을 생각하면 KIA의 승리로 보였다.

그러나 FA 계약 후 2005 시즌에는 부상에 시달리며 부진, 1군 94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치며 0.254, 12홈런, 39타점을 기록했다. 2005년 4월 30일 대구 삼성[27]에서는 신용운을 울리는 수비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2006~2007 시즌에는 부상에 허덕이며[28] 1군 56게임과 25게임에만 출장했으며, 결국 2008년에는 개막전에서 단 1타석에만 들어서고 2군으로 내려간 후 안재만과 함께 6월에 웨이버 공시되었다. 웨이버 공시된 후 그는 KIA 구단에 지도자 연수 요청을 하면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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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면 심재학을 LG에 빼앗긴 OB는 심재학의 고교 동기이자 건국대 우완투수 송재용을 1차 지명으로 입단시켰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부상에 시달리다가 2년만에 방출되면서 실패로 끝났다. 그래도 나중에 심재학을 트레이드로 영입해 2001년 우승을 해낸 것이 두산에게는 위안이 되었다.[2] 서울 연고 구단이던 LG와 OB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연고지역 선수를 대상으로 1차 지명을 할 때 주사위를 굴려 숫자가 더 많이 나온 팀이 우선권을 갖는 방식으로 신인 지명을 해왔다. 하지만 이 주사위 드래프트는 매번 LG가 승리하였고, 그렇게 OB가 LG에게 빼앗긴 선수는 김동수, 임선동, 이상훈, 심재학, 이병규. 그나마 주사위 드래프트가 폐지되기 직전인 1998년 신인 지명에서 김동주를 뽑으며 OB가 이득을 본 적도 있다.[3] 하지만 표본이 조금 적어서 그렇지 세부 스탯을 살펴보면 출루율은 무려 0.376, OPS도 0.732를 기록하면서 2할 초반대 타율에 비해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볼넷:삼진 비율도 52:42로 좋은 볼삼비를 보였으며 wRC+도 121.8을 기록하는 등 생산성 면에서는 결코 실패했다고 볼 수 없다.[4] 이승엽과 양준혁은 1997년 당시 팀 타격 WAR 역대 1위의 타선의 일원이었고 최익성이 리드오프로 출루하면 쓸어담는 구조였다. 이승엽과 양준혁이 못해도 뒤에 신동주, 김한수, 정경배, 김태균이 타점을 먹다보니 타점 20위 안에 삼성 타자만 7명이었다. 홍현우는 97년도에 하필이면 빵횽이 세운 30-30에 고무되어 3할 30-30을 달성한 어떤 신 때문에 도리어 홍현우는 타점 손해를 많이 봤다.(...) 김기태의 경우 쌍방울 특유의 리드오프 부족 문제 때문에 홈런수에 비해 유독 타점 운이 없는 편이다.[5] 강동우는 이 부상으로 병역 면제를 받아 군 문제를 해결하긴 했다.[6] 현재 시점에서 보면 출루율을 무시한 무식한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때 당시에는 다 그랬다. 그 메이저리그도 타율, 승리 등 투승타타가 주였고 세이버는 구단 운영에 쓰이지도 않던 시절이다. 빌리 빈이 출루율을 머니볼의 핵심 요소로 삼은 이유도 출루율이 저평가된 스탯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개념이 없던 과거의 일을 현재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역사의 상대성을 무시하는 것이다.[7] 물론 출루율의 가치를 완전히 제로로 놓고 보더라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 맞다. 심재학은 단순히 눈으로만 야구하는 선수가 아니라, 잠실에서도 통할 정도의 장타력이 인증된 강견의 외야수로 이미 4년간 주전급으로 활약한 전적이 있는 자원이었다. 그리고 단순 보직 전향이 아닌 투수가 야수로 전환하거나 야수가 투수로 전환하는 경우는 해당 선수가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유망주가 정신적 문제나 부상 후유증으로 끝내 해당 포지션에서 재기하는데 실패하거나 외국인 선수의 도입으로 본인의 자리를 뺏긴 경우 또는 본인이 주로 보는 야수 포지션에서 1군 레귤러급이 되지 못한 채로 나이가 들어가는 경우일 뿐 직전시즌까지 3년 연속 잠실 두자릿수 홈런을 친 주전급 외야수가 기대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올린다는 이유 하나로 기존의 전력적 가치를 포기하고 투수로 돌리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8] 심재학은 충암고등학교 시절 투수로도 활동한 경험이 있지만, 고려대학교 진학 이후에는 줄곧 타자로 출장해 왔다. 때문에 단순히 어깨가 좋고, 한때 투수를 해 봤다는 이유로 프로에서 투수로 전업하는 것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9] 본래 심재학의 투수 전향은 전임 이광환 감독도 추진했던 일이다. 이를 앞장서서 반대한 사람은 당시 수석코치를 맡고 있었던 천보성... 이를 두고 벌어진 이광환 vs 천보성의 갈등은 이광환 감독이 중도 퇴임한 여러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코치 시절에 반대했던 천보성이 정작 감독이 되고나서 다시 추진하는 어색한 광경이 벌어진 셈.[10] 이 시기에 주니어 펠릭스가 재계약에 성공했다. 그리고 마이클 앤더슨이 LG와 재계약에 실패한 후 쌍방울 레이더스로 떠나면서, 마무리가 공석이었다.[11] 그러나 투수로 전향한 그 시즌을 마치고 트레이드된다(...).[12] 당연하겠지만 이 때 투수 전향으로 인해 사실상 99년 한 시즌을 날린 셈이 됐고, 심재학 개인적으로도 통산 성적에 영향이 간 데다 입단 동기들에 비해 FA까지 1년 밀렸으니 충분히 손해를 봤다고 할 만하다.[13] 본인은 LG와 사이가 틀어지고 결국 트레이드까지 됐지만, 막상 트레이드 통보를 받은 뒤로는 상당히 울었다고 하며 최악의 생일날이었다고 밝혔다.[14] 여담이지만 비슷한 시기 김용달 코치도 LG와 재계약에 실패한 뒤 현대 타격코치로 건너왔다.[15] 사실 심재학도 당시 선수협에서 현대 총무를 맡았는데 구단에서 탈퇴를 종용했으나 심재학이 거부를 하면서 트레이드 상대로 지목되었다고 한다.[16] 날짜를 보면 짐작 되겠지만 스프링캠프 도중이었다. 거기다 현대와 연봉협상을 하지 못해서 우승은 현대에서 하고 연봉협상은 두산에서 하는 일이 벌어졌다.[17] 심정수는 2000년 당시, LG 마무리인 장문석을 탈탈 털고서 플레이오프에서 한국시리즈로 두산을 보냈기에 더욱 분노했다. 더군다나,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한몫 했었고...[18] 이 때문에 심정수는 정들었던 두산을 떠난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 심재학 역시 두산 팬들의 여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정수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 고민을 했다고 한다.[19] 그리고 오재일은 2016년 25홈런을 치면서 심재학의 2001 시즌 기록을 깨버린다.[20] 타율을 제외한 출루율, 장타율은 이전에도 굉장히 좋았는데 타율이 폭발적으로 높아지자 자연스레 출루율, 장타율도 폭발적으로 상승한 것이다.[21] WAR만 보면 7.89를 기록한 펠릭스 호세에 이은 리그 전체 2위, 국내 선수로는 1위였다. 정규리그 MVP였던 이승엽(5.52)보다도 높았다.[22] 당연하지만 트레이드 당시 비난을 했던 팬들도 심재학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23] 그리고 공은 이상한 곳으로 튀어 버렸고, 심재학이 득점 주자가 되었다.[24] 그래도 이 해 출루율은 타율에 대비해 1할이 높은 0.361을 기록하면서 선구안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 시즌이었다. WAR도 2.5 가까이 나왔다.[25] 베이스볼 투나잇 프리뷰톡에서 밝힌 이야기과 이후 스톡킹에 의하면, 트레이드 될 당시에 아내를 붙잡고 울었는데, 결혼하고 집을 산 지 3개월 만에 트레이드가 됐다고 한다. 후일 스톡킹에서 이 얘기가 나와 더 자세한 뒷이야기가 공개되었는데, 신혼집을 구입하고 인테리어까지 거금을 들여서 잘 꾸며놨는데 얼마 안 있어 트레이드를 통보받았다고 한다. 광주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심재학은 혼자 광주에 내려가려고 했으나, 아내가 이에 반대하면서 같이 내려가야 한다고 주장해 광주에 집을 또 샀다고 한다. 비게 된 서울 신혼집은 전세를 줬는데, 세입자가 집 상태를 보고 굉장히 감사해 했다고 밝혔다.[26] 이후 스톡킹 제1화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마이너스 옵션이 6억원으로 실제 받은 돈은 3년간 12억.[27] 어린 시절의 원태인이 시구를 한 경기[28] 2006년 6월 30일 타격 훈련 중 공에 얼굴을 맞아 코뼈 골절을 당해 3개월을 쉬었고, 2007년 스프링캠프 도중 손목 유구골 골절로 귀국해 수술을 받았다. 본인에 의하면 이 때 손목 쪽에 완전히 통증이 가라앉는데 거의 1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29] 2022년 스톡킹에 출연해서 밝힌 바로는 원래 우리 히어로즈가 입단 제안을 했고 당시 감독이던 이광환도 본인을 원하며 계약 직전까지 갔는데 막판에 틀어지면서 계약 자체가 무산됐고, 그 사이 선수로 등록할 수 있었던 기한이 마감되는 바람에 원치 않게 은퇴했다고 밝혔다. 그나마 시즌 종료 이후 히어로즈가 코치 제안을 해줬기 때문에 지도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