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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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성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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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 퓨처스리그 엠블럼.svg
2001 KBO 퓨처스 북부리그 다승왕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3번
김성현
(1989~1996)

황두성
(1997)


베이커
(1998)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52번
오봉옥
(1992~1994)

황두성
(1998)


이성훈
(1999~2001)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2번
이경복
(1989~1998)

황두성
(1999~2000)


김영배
(2001~2002)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41번
조웅천
(1991~2000)

황두성
(2001~2007)


팀 해체
{{{#fff [[우리 히어로즈|우리]]
/
[[서울 히어로즈|
서울]]
/
[[넥센 히어로즈|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35번}}}
팀 창단

황두성
(2008~2011)


이태양
(201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1번
김종화
(2010~2011)

황두성
(2012~2017)


정현욱
(2018~2021)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9번
정현욱
(2017)

황두성
(2018~2022)


결번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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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성
黃斗聖 | Hwang Doo-Sung

출생
1976년 11월 16일 (47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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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길동초 - 배명중 - 배명고 - 성균관대(중퇴)
포지션
포수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7년 2차 3라운드 (전체 20번,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7~1998)
해태 타이거즈 (1999~2000)
현대 유니콘스 (2001~2007)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2008~2011)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2군 트레이닝 코치 (2012)
삼성 라이온즈 잔류군 투수코치 (2013)
요미우리 자이언츠 연수코치 (2014)
삼성 라이온즈 2군 트레이닝 코치 (2015~2017)
삼성 라이온즈 1군 트레이닝 코치 (2018~2019)
삼성 라이온즈 1군 불펜코치 (2020~2021)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22)[1]
삼성 라이온즈 육성군 투수코치 (2022)[2]

1. 개요
2. 플레이 스타일
3. 선수 경력
3.1. 늦게 드러난 두각, 그리고 마당쇠로 뛴 5년
4. 지도자 경력
4.1. 2022년
5. 연도별 주요 성적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현대 유니콘스,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의 투수로 활약했던 선수이자 前 삼성 라이온즈 육성군 투수코치. 현역 시절 별명은 "황장군".

입단 당시에는 무명이었지만, 뒤늦게 전성기를 맞이해 묵직한 구위로 이름을 날렸다. 현대 유니콘스의 몰락 속에서 팀을 지켜 냈던 기둥이었으며, 팀에 대한 본인의 헌신이 컸다. 투수로서 가치가 부각된 2005년부터 시즌 내내 보직이 고정된 적이 없었다.


2. 플레이 스타일[편집]


구속에 비해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이 일품이었다. 포심을 던질 때 중지와 검지를 붙여 던졌으며, 덕분에 포심이 컷 패스트볼과 유사한 궤적을 그리는 경향이 있었다. 다만 제구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는 평. 스태미너도 좋아서 선발, 계투 가리지 않고 기용이 가능했다.


3. 선수 경력[편집]


성균관대학교 중퇴 후 1997년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3] 포수 출신이나 시력이 나빠 볼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어깨가 강해 당시 장호연 코치의 권유로 투수로 전향했다.[4] 하지만 1군 경기에 나가지 못하고 1998 시즌 후 해태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되었다.(황두성, 곽채진, 양준혁, 30억원임창용) 그런데 사실 황두성은 트레이드 카드가 아니었는데, 해태 타이거즈 실무자가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아 그 밥 잘먹는 투수"라고 해서 트레이드됐단다.[5] 사실 해태 타이거즈 실무자가 당시에 원했던 그 밥 잘 먹는다는 투수는 정현욱이었다고.[6]트레이드 당시 기사[7]

그 후 1999년에 처음으로 1군으로 올라오지만, 해태 타이거즈에서 이렇다 할 활약은 보이지 못한 채 2000 시즌을 마치고 방출당했다.해태 선수 시절 2001년 현대 유니콘스에 이적하지만, 당시 탄탄한 투수진에 밀려 2004년까지 2군 생활을 해야 했다.


3.1. 늦게 드러난 두각, 그리고 마당쇠로 뛴 5년[편집]



파일:external/cphoto.asiae.co.kr/2011121410271458553_1.jpg


2005년, 우리나라 나이로 30세가 된 황두성은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심정수박진만이 FA 자격을 얻은 후 함께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하며 현대의 전력은 무너져 가고 있었고, 에이스 정민태와 클로저 조용준 또한 부상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피칭 내용을 보여주는 등 투수진도 그야말로 부실해진[8] 상태였다. 황두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1군에서 자리를 잡아 마당쇠로 뛰면서 4월 24일 LG전에서 데뷔 첫 승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2005년 기록은 60경기에 등판해 128⅔이닝 ERA 3.29, 11승 9패, 137탈삼진, WAR 3.46.[9]

2005 시즌의 맹활약으로 인해 2006 시즌에는 주전 마무리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전년도에 무리한 탓인지 개막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를 박준수에게 넘겼고[10], 한화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1이닝 2보크라는 프로야구 역사상 포스트시즌 3번밖에 없는 진기록을 세우는 등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6 시즌 최종 기록은 47경기 71⅓이닝으로 전년도에 비하면 이닝 수가 줄었지만 그래도 중간계투 치고는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2007 시즌에는 미키 캘러웨이[11]의 이탈로 투수진이 다 무너진 상황에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나오는 믿을맨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시즌 성적은 46경기 139⅔이닝, 7승 9패 1세이브 3홀드 ERA 4.45. 여기에 탈삼진 142개를 잡아내면서 삼진 3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다만 보직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등판해서인지 전반기에 비해 후반기에는 부진하였고, 평균자책점이 4점대로 올라가며 시즌을 마쳤다. WHIP가 1.23으로 낮으므로 수비의 도움을 못 받았을 가능성도 높다.


파일:attachment/황두성41.jpg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된 뒤 팀이 히어로즈로 바뀐 후로도 투수진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08년 황-장-마 트리오 결성시 장원삼마일영과 같이 황두성도 처음엔 풀타임 선발이었고, 평균자책점 순위에 올랐으나, 이광환 감독의 지시로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되었고[12] 그 후 다카쓰 신고[13] 오면서 다시 선발로 보직을 변경 하였다. 2008 시즌 최종 성적은 34경기 104⅓이닝 6승 8패 8세이브 1홀드. 시즌 후 1억 3000만원에 연봉 계약을 맺으며 데뷔 첫 억대 연봉을 받아보게 되었다.

사실상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고 볼 수 있는 2009년에는 주전 마무리로서 9세이브를 기록[14]하다가 후반기에는 선발로 보직을 바꿔서 시즌 남은 기간 동안 2점대 방어율로 1선발급 투구를 보여주었다. 고정된 선발로 뛰었다면 전성기 동안 10승 투수로서 개인 기록이 화려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항상 팀이 필요한 자리라면 자진해서 그때마다 보직을 변경하였다. 2009 시즌 최종 성적은 40경기 92⅓이닝 8승 3패 9세이브로 팀 투수진의 버팀목 역할을 함과 동시에 고참으로써 팀을 이끌어 가는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이게 황두성이 1군에서 선수로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현승[15]장원삼[16]이 모두 팔려가 신진선수들로만 구성된 2010년 넥센 히어로즈 투수진의 핵심으로 부상할 것을 기대했으나 스프링캠프 도중 어깨에 이상을 보여 귀국했고, 2010 시즌 내내 2군에 머무르며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어깨 쪽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고, 이로 인해 구위가 급격히 떨어져 올라오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투수 전향이 늦었던 데다, 우리 나이로 30살에야 전성기가 찾아왔고, 그 후 어떠한 관리도 받지 못하고 5년 연속 70이닝 이상 던지는 등 전천후로 굴려지면서 혹사당한 후유증이 제대로 나타난 셈이다.

2011년에는 스프링캠프도 완주하고 시범경기에도 좋은 컨디션으로 등판하며 부상을 극복하고 다시 재기할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나, 시범경기 막판 다시 어깨에 탈이 나면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하며 시즌을 마쳤고, 시즌 종료 후 박준수 등 11명의 선수와 함께 넥센 히어로즈에서 방출되었다. 부상 부위가 투수 입장에서는 가장 치명적인 부분인 어깨였던 데다가 막판에는 무릎 연골에도 부상을 입었고, 구위와 구속이 떨어진 뒤 도무지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방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당시 나이는 불과 35세로, 황두성과 동갑내기들인 이승엽, 임창용, 박정진, 홍성흔 등이 40대까지 롱런했던 걸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되었다. 만약 풀타임 선발투수로 고정되거나 전문 마무리로 고정되어 관리받았더라면 어쨌을지 모르는 일.


4. 지도자 경력[편집]


방출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2011년 12월 13일, 친정 팀인 삼성 라이온즈가 그에게 코치 제의를 했고, 이를 수락하면서 2군 트레이닝 코치로 선임되었다.# 코치 선임 후 인터뷰에 따르면 비록 나이에 비해 은퇴가 빨랐다 보니 시원섭섭하지만, 그래도 잘 풀려서 만족해한다고.

2014년 3월부터 8월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이후 삼성 라이온즈에서 2군 트레이닝 코치, 잔류군 투수코치 등 다양한 보직을 맡다가, 2020년부터 정현욱 코치가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면서 공석이 된 1군 불펜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4.1. 2022년[편집]


2022년부터 정현욱이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을 이동하자 대신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메인 투수코치 승격 후 그에 대한 평가는 급격히 나빠졌다. 전년도에 비해 팀 투수진이 박살나버린 데다 좋지 않은 투수교체 타이밍으로 인해 팬들에게 욕만 먹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특히 7월 들어 투수진의 집단 부진과 투수교체 문제로 매우 크게 비판받고 있다. 한 주에 14-2-13-17-11점씩 투수들이 실점하자 엄청나게 까이고 있다.

문제점이 무엇이냐면, 이미 패색이 짙어진 상태에서 자꾸 의미없는 필승조를 올려버려 체력만 갉아먹고 타격감 절정인 상대팀에게 얻어맞으며 자신감을 위축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체력고갈로 중요한 상황에서 필승조를 올려놓고도 또 두드려맞는 최악의 결과만이 남고 있다. 이러면 추격조의 존재 이유가 없다. 일단 메인 투수코치가 정현욱이던 시절만 해도 급한대로 좌완 이승현 한 명만 혹사시키는 정도로 끝냈다. 그러나 황두성 코치는 모든 불펜이 혹사당하는, 역할분담의 기본이 없는 플레이를 행하고 있는 것.

결국 7월 9일 SSG전을 기점으로 10경기 104실점을 기록하여 89삼성의 기록인 10경기 102실점을 넘어섰다.

결국 다음날 코치 개편을 통해 권오원 불펜코치와 함께 1군에서 말소되어 육성군으로 내려갔다. 반대급부로 정현욱 코치와 권오준 코치가 1군으로 올라와 각각 투수코치, 불펜코치를 맡는다.

시즌 후 코칭스태프 개편 과정에서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으며 삼성을 떠났다. 2022 시즌 성적하락에 책임이 있는데다 기존 정현욱도 불펜 운영에서는 비판을 받았는데 더 최악의 불펜운영으로 삼성이 13연패 동안 100실점 이상하는 그야말로 총체난국적인 상황을 보여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것으로 보인다.

2022시즌 종료 이후에는 평가가 올타임급으로 많이 떨어졌다.역대 최악의 단장, 역대 최악의 선수, 역대 최악의 투코 데리고 7등 한 것도 기적이다 정말 그러나 정현욱의 평가가 더 낮아지며 삼성은 근 2년간 이상군급 투코가 두 명이나 부임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17] 차라리 김태한이 명 투수코치였다는 평. 황두성이 안현호였다면, 정현욱은 홍준학이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7
삼성
1군 기록 없음
199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해태
4
8⅓
0
0
0
-
3.24
7
0
8
3
4
3
1.56
2000
3
3⅔
0
0
0
0
7.36
5
0
8
3
3
3
3.27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현대
1
1
0
0
0
0
0.00
2
0
0
0
0
0
2.00
2002
4
6
0
0
0
0
3.00
4
1
3
4
2
2
1.17
2003
1
3
0
0
0
0
3.00
3
0
3
3
1
1
2.00
2004
3
5⅓
0
0
0
0
13.50
12
2
2
7
9
8
2.63
2005
60
128⅔
11
9
1
7
3.29
(4위)
106
15
47
137
(3위)
53
47
1.14
2006
47
71⅓
4
4
0
5
3.91
55
7
44
76
35
31
1.33
2007
46
139⅔
7
9
1
3
4.45
121
13
52
142
(3위)
76
69
1.2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8
우리-서울-넥센
34
104⅓
6
8
8
1
4.05
88
10
47
77
50
47
1.28
2009
40
92⅓
8
3
9
0
3.51
76
10
37
79
37
36
1.20
2010
1군 기록 없음
2011
KBO 통산
(11시즌)
243
563⅔
36
33
19
16
3.94
479
58
251
531
270
247
1.26


6. 여담[편집]


  • 쌍둥이 형이 있으며, 가끔 동생의 경기를 보러 온 덕분에 경기장 관중석에 가끔 황두성이 앉아 있는 줄 알고 착각했던 팬들도 있었다.


  •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포츠투데이와의 인터뷰가 올라왔는데, 황두성의 팬이라면 한번 읽어볼 만하다. 한편 인터뷰를 통해 김시진 감독과 넥센 히어로즈 구단에 대해 서운함을 보였는데, 방출 통보도 전화 한 통으로 마무리했고, 거기에 작은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방출 통보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넥센 2군이 사용하고 있던 강진 베이스볼 파크의 열악한 환경 및 시설 등에 대해 아쉽다는 말을 했다.[18]

  • 상술했듯이 2007년 마지막 시즌이던 현대 유니콘스[19]의 마지막 세이브 투수이기도 하다.

  •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한 조용훈이 썰을 풀었다. 조용훈과 황두성이 원정숙소 룸메이트였는데 황두성의 선발 등판 1일전 밤 술에 만취한 조용훈이 객실 문을 세게 두드리고 TV에 소변을 보는 등 사고를 치자 황두성이 "너 내가 등판한 경기 말아먹으면 죽는다"는 말에 조용훈이 2이닝 삼자범퇴로 막았다고.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A팀에 승선한 경력은 적지만[20], 의외로 국가대표 지역 예선이나 야구 월드컵 등이 열리면 거의 항상 발탁되었다. 특히 對 대만전의 활약으로 인해 대만의 악몽이라고 불린 적도 있다. 2007년 야구 월드컵에서 대만을 7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며 승리했다.관련 기사[21]

  • 강속구 투수가 되기 위해 원포인트 강의를 구술했는데, 사회인 야구에서는 꽤 인기있는 지침서인 듯하다. 원포인트 레슨.

  • 상술했듯이 시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는 안경을 쓰고 다니는데, 이미지가 확 달라지는 타입이다.
파일:external/cphoto.asiae.co.kr/2011120708031751536_3.jpg


7. 관련 문서[편집]


[1] ~7월 9일[2] 7월 10일~[3] 사실 가장 가고 싶었던 팀은 OB 베어스였다고 한다. 이유는 배명고등학교 선배인 김동주.[4] 실제로 경기할 때 외에는 안경을 끼고 다닌다.[5] '키 크고 공 빠른 놈'이라고 말했다는 소문도 있다. 조용훈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밥 잘 먹긴 한다고.[6] 해태 측에서는 받아 보니 정현욱이 아니여서 무르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미 유니폼도 준비된 데다가 입단식도 이미 끝내서 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7] 이 두 사람은 2020년 삼성 1군의 불펜코치와 투수코치로 재회한다.[8] 정민태는 2004년 이후 부상 및 노쇠화가 겹치며 2005~2006년 2년은 부상으로 날려먹었고, 조용준의 경우 2005년까지 1군 주전 마무리였다가 어깨 부상으로 2006년부터 1군에서 자취를 감췄고, 설상가상으로 부상 재발 및 불성실한 재활 태도까지 겹치며 4년 동안 1군에 올라오지 못한다.[9] 이게 얼마나 심각한 혹사냐면, 이 중 선발 등판은 겨우 5경기에 불과했고, 나머지 55경기는 모두 중간계투로 등판하였다. 거기에 무려 128⅔이닝을 소화했는데, 2005 시즌은 126경기 체제였다 보니 사실상 불펜투수로 뛰면서 규정이닝을 채웠다. 은근 묻히는 사실이지만 지금으로 치면 거의 살려조KILL 라인급 혹사를 당한 셈.[10] 이 해 황두성을 대신해 마무리를 맡은 박승민은 사이드암 투수 로서 KBO 리그 잠수함 투수 중 한 시즌 최다 세이브인 38개를 만들었다. 98년 임창용의 34개의 4개를 더 쌓아 올린 것[11] 시즌 중반에 팔꿈치 부상으로 퇴출 되었다.[12] 당시 이광환 감독은 황두성이 자진해서 마무리를 맡았다고 하여 그렇게 알려져 있었으나, 은퇴 후 이광환 감독의 일방적인 지시였다고 밝혔다.[13] 근데, 히어로즈 소속 당시 타자들이 물빠따여서 등판한 횟수가 얼마 없었지만 방어율이 거의 0에 가까운 수준이었다.[14] 당시 타고투저라 팀내 마무리들이 죄다 삽질을 해서 결국, 최종적인 마무리는 이보근이 차지했다.[15] 2009년에는 팀 내 최다 13승[16] 2008년에는 팀 내 최다 12승[17] 굳이 따지자면 황두성은 이상군, 정현욱 투톱 다음가는 올타임 3위권이라는 말이 많다. 물론 올타임 3위권이라고 해서 평가가 낮지 않은 건 아니다. 당장 메이저리그에서도 올타임 1위 루스, 2위 메이스 다음가는 수준인 3위 선수들이라고 해도 배리 본즈(성적만 놓고 보면), 타이 콥 등 매우 위대한 선수들이기 때문이다.[18] 실제로 히어로즈 2군이 잠시 사용했던 강진 베이스볼 파크는 야구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시설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했다. 강진 베이스볼 파크가 얼마나 열악했는지, 그리고 당시 히어로즈 2군 수난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양 히어로즈 문서에 나와 있다.[19] 이후 현대 유니콘스는 해체되고 이를 대체할 팀으로 히어로즈가 창단 된다.[20]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승선하였으나, 막판에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며 임태훈으로 교체되었다. 여담으로 임태훈은 이때까지만 해도 전 구단에서 호감이 있던 선수였[21] 대만 대표팀은 야구 월드컵 직후에 개최될 2008 베이징 올림픽 예선전에 출전할 최정예팀을 출전시켰고, 반면 대한민국은 야구 월드컵 출전팀을 구성할 때 늘 그랬듯이 프로야구 1군 포스트시즌 탈락팀 선수 + 2군 선수 유망주 + 상무, 경찰 선수 + 대학 야구 선수로 구성한 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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