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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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완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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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 KIA 타이거즈 등번호 26번
이대진
(1993~1999)

홍세완
(2000~2006)


장문석
(2007~2009)
KIA 타이거즈 등번호 13번
이기남
(2005~2006)

홍세완
(2007~2010)


김성계
(2011~2013)
KIA 타이거즈 등번호 91번
송승민
(2010)

홍세완
(2011)


윤민호
(2012)
KIA 타이거즈 등번호 70번
조범현
(2008~2011)

홍세완
(2012~2019)


진갑용
(2020~)
SK 와이번스 등번호 34번
안상현
(2019)

홍세완
(2020)


르위키
(2021~2021.6.4.)
SSG 랜더스 등번호 72번
이진영
(2020)

홍세완
(2021)


정경배
(2022~2023)
KIA 타이거즈 등번호 83번
백인수
(2021)

홍세완
(2022)


결번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
강성우
(2022)

홍세완
(2023~)


현역



KIA 타이거즈 No.77
홍세완
洪世完 | Hong Sewan

출생
1978년 1월 16일 (46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구로남초 - 서울경원중 - 장충고 - 성균관대[1]
포지션
유격수[2], 3루수[3], 지명타자[4]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2차 11라운드 (전체 86번, 해태)[5]
소속팀
해태-KIA 타이거즈 (2000~2010)
지도자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11~2012)
KIA 타이거즈 3군 타격코치 (2013)
KIA 타이거즈 1군 트레이닝·타격보조코치 (2013)[6]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13)[7]
KIA 타이거즈 1군 타격보조코치 (2014~2016)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17)
KIA 타이거즈 1군 타격보조코치 (2018~2019)[8]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19)[9]
SK 와이번스 PDA 수비코치 (2020)
SSG 랜더스 1군 타격보조코치 (2021)
KIA 타이거즈 2군 타격코치 (2022~2023)[10]
KIA 타이거즈 1군 타격보조코치 (2023~)[11]
응원가
현숙 - 정말로[12]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연도별 성적
5. 기타
6. 수상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KIA 타이거즈유격수. 現 KIA 타이거즈의 2군 타격코치.

2000년대 초에 떠오른 대형 유격수였으나, 부상으로 인해 너무 이른 나이에 지고 만 비운의 선수이기도 하다. 유격수 최초 100타점을 기록했으며, 후에 강정호가 달성할 때까지 유일무이한 기록이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9번타자. 2년차인 2001년 공석인 유격수에 일취월장한 타격을 바탕으로 주전으로 자리잡았고, 이후 거포 유격수로 발돋움하며 유격수 4번타자로 출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표적인 좌상바선수였다.[13]


2. 선수 경력[편집]



KIA 타이거즈 NO.13
홍세완(洪世完 / Hong Sewan )


파일:/image/020/2009/05/06/200905060200.jpg


장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해태 타이거즈에 2차 11순위 지명을 받은 후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1996학번)로 진학하여 2000년 입단했다. 2000년 신인시절때 당시 리그 정상급 마무리였던 진필중의 공을 그대로 받아쳐 깨끗한 안타를 쳐냈는데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하던 이효봉 SBS 스포츠 해설위원이 상당히 좋은 선수가 될것이라고 칭찬한 것은 물론, 칭찬에 인색한 김응용 감독마저 "저 녀석은 큰 인물이 될 거다"라고 칭찬했다.

입단 당시에는 3루수였지만, 3루 수비가 불안해서 당시 유격수였던 정성훈과 수비포지션을 맞바꿨다. 그러나 그게 서로 윈윈이 되어 오히려 유격수로는 안정적인 수비를 보이면서 KIA는 홍현우가 FA로 떠났지만 1루수 장성호-2루수 김종국-유격수 홍세완-3루수 정성훈의 포메이션을 구축하게 되었다. 유격수에 안착한 2001년부터 .293의 타율에 14홈런을 기록하면서 본격적으로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2003년에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유격수 100타점[14]을 달성할 정도로 공격형 유격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타순도 4번에 들어설 정도로 클러치 능력이 좋았으며, 그 시즌 KBO 골든글러브 획득.[15]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악명 높은 무등 야구장의 그라운드 상태와[16] 이에 따른 부상이었다. 애초에 183cm 85kg라는 대형 유격수는 수비부담이 쌓이면 장기적으로 유격수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운데, 홍세완 역시 이것을 피할 수 없었다. 만약 무등 야구장이 과거처럼 흙바닥 내야와 천연잔디 그라운드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홍세완의 유격수 커리어도 더 길어질 수 있었겠지만 야구에 만약이란 없기에.

특히 홍세완은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2003년 이후 100경기 이상 출장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부상에 매년 시달렸다. 2002년에는 고막 파열, 2004년 이후로는 대형 내야수의 혹사테크인 무릎부상→재활→재발의 무한 루프를 타며 기아 내야진의 붕괴를 야기했다.[17] 04년과 05년은 확실히 준수한 타격성적을 올렸으나[18] 부상으로 인해 100경기도 뛰지 못하고 시즌 아웃이 됐으며, 06년은 부상의 여파로 멘도사라인에 걸칠 정도의 최악의 시즌을 보낸다. 2007년에 재활을 마치고 유격수로 복귀,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역전 만루홈런을 때리는 등 활약하다가, 또 다시 큰 무릎부상을 입어 시즌 아웃. 2008년은 아예 한 경기도 뛰지 못할 정도로 부상에 시달렸다. 2009년부터는 무릎 부상 여파 때문인지 주로 지명타자로 뛰었으며 6월에 최희섭이 한참 부진할 땐 1루수로 들어가기도 했다. 팀이 12년만에 KBO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어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나 싶더니, 이번에는 손목 부상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개막을 며칠 앞두고 엔트리에서 제외, 최경환과 교체되었다. 결국 누적된 부상과 수술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2010 시즌을 마지막으로 코치직을 제의받고 결국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되었다.

야수로서 스타일을 보자면 전형적인 대형 유격수의 플레이스타일 그 자체. 수비 능력은 그럭저럭 평범한 유격수 수준이지만 뛰어난 펀치력과 클러치 능력을 바탕으로한 공격력으로 상쇄하는 케이스이다. 유격수로서 수비범위는 평범하지만 나쁘지 않은 어깨를 살려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공은 잘 처리하는 스타일. 즉 잡을 수 있는 공은 잡고 잡을 수 없는 공은 잡지 않는다는 것. 덕분에 수비율로 박진만을 제친 적도 있다.[19]


3. 지도자 경력[편집]



3.1. KIA 타이거즈 1기 시절[편집]



파일:tigers_co_kr_20171016_131852.jpg


은퇴 후 2011년부터 2군 타격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12년 시즌 이후 잠시 김용달 타격코치 부임 이전까지 1군 타격코치도 겸하였다. 2013 시즌부터 3군 타격코치로 보직 이동. 타격 코칭 실력에 있어서는 이건열보다는 훨씬 낫다는 평.

2013 시즌 중간에 곽현희 코치와 자리를 바꾸어 1군 트레이닝 코치로 보직을 이동했다. 트레이닝과 동시에 김용달 타격코치의 보조 코치를 겸한다. 이후 8월 17일 코치진 대개편으로 김용달 코치가 말소된 뒤 잔여 시즌은 1군 타격코치를 맡았다.

2017 시즌에는 2군 타격코치로 보직을 이동했다.

2018 시즌에는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와 쇼다 코우조 타격코치의 보조역할인 타격보조코치 역할을 맡게 되었다.

2019 시즌에도 계속 1군 타격보조코치로 있다가 5월 17일 김기태 감독이 사퇴하고 새롭게 들어선 박흥식 감독대행 체제에서 정성훈과 함께 1군 타격코치를 맡는다. 대신 기존 타격코치였던 쇼다 코우조 코치가 잔류군으로 이동.

2019 시즌 이후 코칭스태프 개편 과정에서 재계약에 실패, 20년 동안 있었던 타이거즈를 떠나게 되었다. 문제는 10월 말에 단행된 차기 시즌 코칭스태프 인선과 동시에 짤려서 구인구직이 힘든 상황이라는 것. 실제로 함평에서 훈련 지도를 하던 중 통보를 받아 옷을 갈아입고 떠났다고 한다.


3.2. SK 와이번스/SSG 랜더스 시절[편집]


그러다 2020 시즌부터 SK 와이번스의 부름을 받고 새로 신설한 유망주 집중 코칭을 담당하는 PDA 수비코치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로써 타이거즈 유니폼 외 타 팀의 유니폼을 처음으로 입어보게 되었다.

2021 시즌부터 1군 타격보조코치로 보직을 옮겼다. 그러나 2021 시즌 종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고 팀을 떠났다.


3.3. KIA 타이거즈 2기 시절[편집]


SSG 랜더스를 나온 후 김종국[20] 신임 감독 체제로 출발한 친정팀 KIA 타이거즈로 2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보직은 2군 타격코치.

그러다가 2023 시즌 초반부터 팀 타격 부진 여파로 인해 4월 18일부로 1군 타격보조코치로 콜업됐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사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해태-KIA
49
171
.240
41
6
0
5
21
24
2
17
.363
.307
2001
133
451
.293
132
24
1
14
72
60
8
46
.443
.354
2002
111
401
.257
103
21
0
12
69
43
7
36
.399
.315
2003
129
487
.290
141
26
1
22
100
75
7
48
.483
.347
2004
96
342
.295
101
20
1
15
51
57
8
56
.491
.389
2005
90
345
.284
98
15
1
9
46
45
7
38
.412
.353
2006
66
214
.206
44
6
0
1
17
14
0
23
.248
.280
2007
59
199
.261
52
7
0
7
27
22
0
24
.402
.338
2008
1군 기록 없음
2009
74
218
.261
57
8
0
5
27
26
2
35
.367
.362
2010
10
25
.200
5
1
0
0
1
0
0
2
.240
.259
KBO 통산
(10시즌)
817
2853
.271
774
134
4
90
431
366
41
325
.416
.342


5. 기타[편집]


  • 대표적인 별명으로는 홍대리. 2001년부터 공격형 유격수로 자리를 잡으면서 2003년에 포텐을 터트리자 당대 상당히 유행했던 회사원만화가의 만화인 홍대리의 이름을 따와 붙인 별명이었다. 이 시즌 활약 이후 풀타임을 뛴 시즌이 없다보니[21] 연봉이 거의 오르지 않아 현재는 만년 대리 신세. 2009년 연봉도 아직 6,000만원. 경기에서 안타를 치면 홍과장으로 진급하는 듯. 홍아들이란 별명도 있었는데 김성한 전 KIA 감독이 전폭적으로 그를 지지하여 중심타선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는 병살을 많이 친다고 홍병살.[22]

  • 김상현의 혼삿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한참 홍세완이 주전 유격수로 뛰던 2002년, 김상현의 부인이 홍세완과 친구 사이였는데 홍세완을 응원하러 갔다가 경기 후 만나서 식사를 할 때 홍세완이 룸메이트 후배라고 같이 데려온 선수가 김상현(…). 결국 그 이후 둘은 서로 눈이 맞아서 결혼했다. 그리고 본인은 김종국의 열렬한 팬과 결혼...




6. 수상[편집]


수상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2003)


7. 관련 문서[편집]



[1] 체육학과 (1996학번)[2] 통산 817경기 출전해서 그 중 627경기를 유격수로 나왔으며 부상 전인 00시즌부터 07시즌까지 대부분을 유격수로서 나왔다.[3] 05시즌에 유격수 못지 않게 3루수로도 출전했다.[4] 부상 이후인 09시즌 대부분을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다만 극심한 부진으로 이듬해인 10시즌 주로 2군에 있게 되고 시즌 후 방출된다.[5] 성균관대 체육학과(1996학번) 진학 후 2000년 입단.[6] ~8월 16일[7] 8월 17일~[8] ~5월 16일[9] 5월 17일~[10] ~4월 17일[11] 4월 18일~[12] 안타를 쳐주세요 홍세완~ 안타를 쳐주세요 홍세완~ 안타안타안타안타 홍세완~ 안타안타안타안타 홍세완~[13] 보통 좌타자들이 좌투수에게 약하고 우타자들은 좌투수에게 강한 편인데, 홍세완은 특이하게도 우타자임에도 좌투수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같은 팀 출신 김상현도 마찬가지.[14] 유격수로 홈런왕을 차지했던 장종훈도, 30-30을 기록하며 날아다녔던 이종범유격수 시절엔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며, 11년이 지나서야 강정호가 두번째로 이름을 올린다.[15] 그 해 박진만도 만만치 않은 성적에 우승 프리미엄까지 있었으나 역시나 리그 출범 사상 첫 유격수 100타점이라는 기록의 상징성이 많이 작용하였다.[16] 무등 야구장인조잔디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당시 야구장에 깔려 있던 카페트형 인조잔디는 홍세완을 비롯해 여러 선수들의 커리어를 줄이고 부상을 야기하는 원흉이 됐다. 오죽하면 홍세완처럼 무릎 부상에 시달렸던 박진만도 선수 말년 흙바닥 내야와 천연잔디가 깔린 구장에서 뛰고 싶어서 고향팀 SK 와이번스로 이적을 결심했을 정도.[17] 이 때문에 심각한 어깨부상을 입어 송구가 약해진 김종국이나 수비가 미흡했던 손지환유격수 땜빵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게다가 그 시즌 이후부터 KIA는 부진을 거듭하며 엘롯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18] 특히 04년의 경우 15홈런에 9할에 달하는 OPS, wRC+ 136을 기록하며 쾌조의 시즌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19] 그러나 가히 엄청난 수비범위를 보여준 이종범 전성기를 기억하고 있던 당시 KIA 팬들은 홍세완의 수비에 불만이 많았다.[20] 공교롭게도 현역 시절 키스톤 콤비를 맞춘 적 있다.[21] 04시즌의 경우 부상이 발목을 잡아서 타격 비율지표는 오히려 전해보다 올랐으나 5타석이 모자라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22] 하지만 실제로 병살을 그리 많이 치는 선수는 아니다. 2005년에 팀 부진과 맞물려 출장 경기 대비 병살타수가 많아 부각된 면이 많기 때문. 더구나 진짜 병살을 많이 치던 홍씨 선수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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