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랴비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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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8대 제3근위소총군단장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랴비셰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Ря́бышев
Dmitry Ivanovich Ryabyshev

출생
1894년 2월 11일[1]
러시아 제국 콜로톱카 농장
(現 러시아 남부 연방관구 로스토프주 치믈랸스키구)
사망
1985년 11월 18일 (향년 91세)
소련 러시아 SFSR 로스토프나도누
(現 러시아 남부 연방관구 로스토프주 로스토프나도누)
묘소
로스토프나도누 북부 묘지
재임기간
제4대 제3근위군 사령관
1944년 2월 ~ 3월
제8대 제3근위소총군단장
1944년 4월 ~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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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소련의 군인이다.


2. 생애[편집]


콜로톱카의 한 농장에 살던 카자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2.1. 제1차 세계 대전[편집]


1915년 7월부터 러시아 제국 육군 돈 카자크 제2연대 소속으로 북서부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에 있다 적군에 합류해 10월 혁명에 참전했다.


2.2. 러시아 내전[편집]


1918년 6월부터 적군 제1연대에서 소대장을 역임했다. 이후 제4기병여단장, 제16기병사단장으로 임명됐다. 랴비셰프는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탁월한 지휘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한 뒤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주요 전투를 지휘하는 동안 다섯 번의 부상을 입었다. 세묜 부됸니, 세묜 티모셴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비롯한 최전방 사령관들의 작전 구상을 직접 돕기도 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편집]



2.3.1. 독소전쟁[편집]


제8기계화군단장으로 남서부전선에 투입돼 브로디 근처에서 나치 독일 육군의 침략에 맞섰다. 전차 전력에서 큰 손실을 입었지만 나치 독일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고 아군의 후퇴 시간을 늘린 덕분에 랴비셰프의 활약이 고평가됐다. 1941년 8월 26일, 남부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뒤 드네프르 강 전투에서 승리했다.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가 승인하지 않은 전투들도 큰 공을 세운 랴비셰프가 담당했다.

1941년 9월 29일, 돈바스-로스토프 공방전이 시작되자마자 나치 독일 육군의 제1기갑군이 랴비셰프의 방어선을 돌파해버려 랴비셰프는 해임과 동시에 10월 10일 이오시프 스탈린라브렌티 베리야 앞에서 직접 패배의 원인을 설명하고 전선 복귀를 부탁했다. 곧 제57독립군 사령관으로 임명돼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냈지만 이전의 피해가 훨씬 컸기 때문인지 스탈린은 더 이상 랴비셰프를 믿지 않았다. 1942년 2월 말, 랴비셰프는 전투 도중 발진티푸스 때문에 입원했다. 1942년 3월에 퇴원한 뒤 보로네시-보로실로프그라드 공방전을 치르다 1942년 7월 남서부전선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랴비셰프는 작전통제권을 상실했다. 이에 스탈린과 게오르기 말렌코프에게 탄원서를 보냈지만 랴비셰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후방 부대만 지휘하게 됐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괜찮은 공을 세운 덕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획득할 뻔했으나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는 레닌훈장으로 대체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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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력 기준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