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레이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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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안드레예비치 레이테르[한]
Макс Андреевич Рейтер
Maks Andreyevich Reyter


파일:막스 레이테르 상장.jpg

출생명
막시스 레이터스 (Maksis Reiters)[한]
출생
1886년 4월 24일[1]
러시아 제국 쿠를란트
(現 라트비아 공화국 쿠르제메)
사망
1950년 4월 6일 (향년 63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06년 ~ 1918년
소비에트 지상군
1919년 ~ 1950년
최종 계급
대령 (러시아 제국 육군)
상장 (소비에트 지상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주요 서훈
레닌훈장
수보로프 훈장 1등급
적기훈장 (4회)




1. 개요[편집]


소련 육군군인.


2. 생애[편집]


부유한 라트비아인 농민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2.1.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제1시베리아 소총사단에서 전투를 치렀다. 1917년 9월, 발진티푸스에 걸려 리보니아에서 치료를 받게 됐다. 그러다 1918년 2월 독일 제국군에 생포돼 1919년 2월까지 포로로 잡혀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귀국하게 됐다.


2.2. 러시아 내전[편집]


1919년 3월 노농적군에 입대했다. 비쳅스크 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1920년 여름, 폴란드 전선에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낸 덕에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해 두 번째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


2.3. 대숙청[편집]


1938년 12월부터 노농적군에서 제명됐으나 처벌 없이 감시를 받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1939년 6월 제명 명령이 취소되자 1940년 1월부터 북캅카스 군관구 군사교육 기관의 부교수로 임명됐다.


2.4. 독소전쟁[편집]


1941년 10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군이 밀리자 제108전차사단, 제194보병사단을 지휘하게 됐다. 레이테르는 나치 독일 육군의 제47차량화군단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브랸스크 전선의 주요 거점을 포위하는 데에 성공했다. 공적을 인정받아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됐으나 부상이 심각해 치료를 받느라 직책을 포기했다. 이후 1942년 2월부터 서부전선 군관구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보로네시-카스토넨스키 공세에서 보다 뛰어난 전술을 펼쳐 승리를 쟁취했으나, 당시 레이테르는 추가 병력을 기다리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하루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부하려고 했다. 다행히 레이테르의 의견 덕분에 이기긴 했지만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결국 레이테르는 소비에트 연방 영웅은커녕 예비군 사령관으로 좌천됐다.


2.5. 전후[편집]


1946년 1월부터 1950년 1월까지 소총 및 전술 전투 교리 개선 책임자로 활동 후 해임됐다. 3개월 뒤에 사망하고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동료 레오니트 미하일로비치 산달로프 상장이 레이테르의 회고록을 대신 작성했다.


3. 진급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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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A B 한국어: 라이터[1] 그레고리력 기준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