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예프레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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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5대 자바이칼 군관구 사령관
미하일 그리고리예비치 예프레모프
Михаи́л Григо́рьевич Ефре́мов
Mikhail Grigorievich Yefremov

출생
1897년 2월 27일[1]
러시아 제국 타루사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칼루가주 타루사 )
사망
1942년 4월 19일 (향년 45세)
소련 러시아 SFSR 스몰렌스크주 뱌젬스키구 자리
재임기간
제5대 자바이칼 군관구 사령관
1937년 11월 28일 ~ 1938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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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아버지 그리고리 예멜랴노비치 예프레모프[1]
어머니 알렉산드라 루키니치나 예프레모바[2]
형제자매
5명, 누나 1명
배우자
엘리자베타 바실리예브나 예프레모바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15년 ~ 1917년
노농적군
1918년 ~ 1942년
최종 계급
소위 (러시아 제국 육군)
중장 (노농적군)[3]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주요 서훈
노농적군 20주년 기념 메달
노력적기훈장
러시아 연방 영웅 (사후 추서)
레닌훈장
적기훈장 (2회)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기타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 소련 육군군인.


2. 생애[편집]


빈곤한 노동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노동자로 근무했다.


2.1. 러시아 내전[편집]


믿음직한 지휘관으로 평가받았으나 부하들의 투항으로 어렵게 탈출한 뒤 모스크바의 공장에서 일했다. 이후 10월 혁명에 참여했다.


2.2. 전후[편집]


1927년 군사 고문으로서 중국에 출장을 가던 도중 바실리 블류헤르를 만났다. 그의 추천으로 이후 1928년 7월부터 제18소총사단장으로 임명됐으며 1933년 적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2].


2.3. 대숙청[편집]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앞에서도 떳떳하게 밝힐 수 있소. 나는 내전 당시 조국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무찌르기 위해 목숨을 바쳤소. 내 결백함이 밝혀지면 다른 동지들도 석방시켜 주시오. 나의 음모론은 모두 거짓으로 밝혀질 것이오.

예프레모프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1938년에 갑자기 모스크바 호텔에 수용된 뒤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함께 NKVD에 의해 가택연금됐다. 고문과 심문이 2개월 정도 이어지자, 러시아 내전 당시 함께 복무했던 군인들이 탄원서를 여러 장 제출한 덕분에 스탈린과의 면담 후 석방됐다.


2.4. 독소전쟁[편집]


제21군 사령관으로서 드니프로 강 쪽으로 접근한 나치 독일 육군 부대를 저지했다. 이후 중앙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돼 남서부전선을 위협하는 부대의 후방을 타격했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도 성과를 꽤 냈으나, 진격 명령을 거부하고 후퇴하는 사령관을 사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41년 10월 27일 서부전선 군사위원회에 의해 해임됐다. 복직 당시 제33군 사령관으로서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제5군과 함께 치열한 공방전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1941년 12월 1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가 모스크바 남서쪽으로부터 25km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모스크바 공격을 시도했다. 당시 보크는 상당히 많은 전차를 동원해 예프레모프는 제18소총여단 직할 제136, 140독립전차대대를 창설했으며, 게오르기 주코프가 예프레모프에게 보크의 부대를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내 주코프가 예프레모프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3]

하지만 1942년 초까지 진행된 르제프-뱌즈마 작전 당시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주코프의 태도가 역변했다. 이후 예프레모프의 제50군이 근처 부대와 협력하기 위한 진격로를 개척하는 데에도 실패하자 철수를 결정했다. 키로프까지 뚫어야 할 적군이 너무 많다는 예프레모프 때문에 주코프가 직접 스탈린에게 연락했으나, 스탈린은 무조건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예프레모프가 진격을 망설이자 주코프는 제9근위소총사단을 예프레모프의 부대와 통합시켰다. 덕분에 예프레모프는 진격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치열한 전투 때문에 식량, 탄약이 부족해지자 예프레모프도 지쳤다. 최고사령본부는 예프레모프의 노력을 높게 평가해 그를 후방 부대로 빼주기 위해 비행기를 보냈으나, 예프레모프는 탑승을 거부하고 전사한 병사들의 소지품만 싣고 비행기를 떠나보냈다.


3. 사망[편집]


1942년 4월 13일 저녁부터 제33군은 사령부와의 연락이 두절됐다. 나치 독일 육군의 매복 때문에 예프레모프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 결국 참호에 몸을 숨기던 예프레모프는 총기로 자살했다. 나치 독일이 그의 시신을 슬로보드카 마을에 매장한 뒤 장례식을 치렀으며,[4] 나치 독일 육군 제12군단 제268보병사단이 사망 장소를 지도에 기록했다.[5] 전쟁이 끝나자 소련 육군 병사들이 들것으로 그의 시신을 소련 영토로 옮겨 재매장했으나 지역 주민들에 의해 훼손됐다.

1952년 9월 28일, 예프레모프의 유해는 뱌즈마의 캐서린 묘지에 재매장됐다. 1996년 12월 31일, 보리스 옐친의 법령에 따라 러시아 연방 영웅으로 등극했다.


4. 기타[편집]


  • 예프레모프는 왼손잡이였는데 총상은 오른쪽 관자놀이에 있었다. 아마 왼손의 부상 때문으로 추정.
  • 진작에 증원군을 보내지 못한 주코프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나치 독일 육군을 과소평가한 잘못을 뉘우쳤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예프레모프에게 충분한 병력이 있었기 때문에 주코프의 잘못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 포로가 될 위기에 처했단 점에서 안드레이 블라소프와 비교된다. 물론 블라소프는 나치 부역자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될 처지는 아니지만.
  • 소련 육군 전선 사령관 중 유일한 러시아 연방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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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기준 3월 11일[2] 이 학교는 이후 프룬제 군사대학으로 개명됐다.[3]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예프레모프는 핀란드 공화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스키 대대 2개도 창설했다고 한다.[4] 발터 모델이 직접 예를 갖춰 거행했다. 야전병원에도 폭격을 가하던 당시 상황으로선 이례적인 일.[5] 이 기록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현재까지 소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