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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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명
金佐明

출생
1616년 12월 27일
(음력 광해군 8년 11월 19일)
사망
1671년 4월 17일 (향년 54세)
(음력 현종 12년 3월 9일)[1]
봉호
증(贈)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2]
시호
충숙(忠肅)
본관
청풍 김씨

일정(一正)

귀계(歸溪)
부모
부친 - 김육
모친 - 해평 윤씨 윤급(尹汲)의 딸[3]
부인
평산 신씨 신지강(申止康, 1617 ~ 1667)[4]
자녀
딸 - 김계희(金啓喜, 1632 ~ ?)
아들 - 김석주

1. 개요
2. 관료 생활
3. 서인과의 갈등과 예송논쟁
4. 생애 후반
5. 사후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관.


2. 관료 생활[편집]


1616년김육과 윤급(尹汲)의 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4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급제한 지 2년 뒤인 1646년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효종대동법을 실시하려 하자, 자진해서 책임자가 되었다. 1662년 공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고, 부친 김육송시열[5]의 제안에 따라 전라도에서도 대동법을 시행했다.


3. 서인과의 갈등과 예송논쟁[편집]


1차 예송논쟁서인의 편을 들지않고 중립적 위치에 있다가 남인의 편을 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서인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4. 생애 후반[편집]


1668년(현종 9)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서인과의 관계가 악화된 탓에 외척이라는 이유로 탄핵당해 직무 한 번 못 보고 5일 만에 물러났다. 같은 이유로 품계는 생전에 이미 보국숭록대부로 정1품이 되었고 정승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나 관직은 2품을 떠돌아 공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를 거쳐 결국 원래의 관직인 병조판서로 되돌아갔다.

1671년(현종 12) 사망했다. 당시엔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김좌명 역시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 당시엔 김좌명과 같은 명문가 인사들까지 줄줄이 죽어나갈 정도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5. 사후[편집]


제일 오래, 그리고 사망할 때도 있었던 관직인 병조판서가 김좌명의 대표 경력으로, 이러한 병조 관련 경력은 아들 김석주가 물려받았다.

2차 예송논쟁의 여파로 숙종 즉위 초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던 상황에서, 1차 예송논쟁 당시 남인을 거든 덕에 1676년(숙종 2)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나중에 아들 김석주가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몰아내고 보사공신이 되면서 추증되어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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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는나이 56세.[2] 보사공신 1등 김석주의 부모 명목.[3] 윤두수의 6대손.[4] 정숙옹주의 4녀.[5] 송시열의 스승 김집대동법에 반대하긴 했지만, 송시열은 어느 정도 찬성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