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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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외척. 신정왕후 조씨의 숙부이며 헌종의 외종조부이자 국구 조만영의 동생이다.
2. 졸기[편집]
영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졸(卒)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정량(貞亮)한 용자(容姿)와 신밀(愼密)한 규모(規模)로써 일에 임해서는 조심하며 두려워하고 집에 있어서는 검소하고 절약하였으며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 일을 잊음이 종시토록 간절하였으니, 내가 보고 듣는 바로는 이와 같은 대신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문학의 유창(流暢)함과 재유(才猷)의 숙달(熟達)됨은 오늘날 찾아보려 해도 어디서 구해 오겠는가? 근래에 신절(愼節)이 걱정되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갑자기 이렇게까지 될 줄은 헤아리지도 못하였다. 오직 과매(寡昧)한 나는 성취할 길이 없어졌고 백성과 나라 일을 생각해 보면 실로 망연할 따름이다. 졸(卒)한 영의정의 집에 동원 부기(東園副器) 한 벌을 보내 주고, 성복일(成服日)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할 것이며, 녹봉은 3년을 기한하여 그대로 지급하고, 예장(禮葬) 등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참작하여 거행케 하라.”
하였다. 조인영은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아우이니, 집안은 효우(孝友)로 전해 왔고 몸소 검약을 실천하여 언행(言行)과 조리(操履)가 가히 5척의 어린 임금을 부탁하고 큰 일을 맡길 만하였다. 순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헌종을 보도(輔導)하느라 8년을 궁중에서 지냈는데, 전일(專一)한 충심(忠心)은 임금을 받들고 백성을 보살핌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을 잊음을 살림살이로 여겼다. 일을 헤아리고 이치를 보는 데에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모든 일을 설계하여 펼치고 시행함에 있어 조야(朝野)가 믿고 중히 여겼음이 마치 시귀(蓍龜)[3]
와 같았다. 문학과 사장(詞章)에 있어서도 세상의 종장(宗匠)이 되었는데, 육경(六經)에 근저(根柢)를 두고 백가(百家)를 섭렵(涉獵)하여 문단의 맹주(盟主)로 지냄이 10여 년이나 되었고, 관각(館閣)에 있으면서 제고(制誥)로 지은 글은 거의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었다.철종 2권, 1년(1850년 경술 / 청 도광(道光) 30년) 12월 6일(계해) 1번째 기사
3. 대중매체[편집]
- Victoria 3에서는 조선의 군부 지도자로 등장한다. 노련한 정치 수완가, 잔인함 특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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