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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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쇄국 정책을 추진하던 흥선대원군과 반목·대립하였고, 김홍집 등과 함께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2. 생애[편집]
1814년 조선에서 태어났다. 영의정 이항복의 9대손, 이조판서 이계조의 아들이다. 헌종 7년에 문과 급제하였다. 이유원은 이조참의를 거쳐, 전라도관찰사, 성균관대사성에서 승정원등을 거치다가 고종때 함경도관찰사가 되고, 곧 좌의정이 되었다. 1873년, 이유원은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 시절, 호조참판 최익현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추진하였다. 1875년, 주청사로 청나라로 갔다가, 인천의 개항을 요구하였다. 또한 이유원은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는 폐단이 없지 않다고 고종에게 고하였고, 이로 인해 수구파의 큰 반발을 얻었다. 1881년 만언척사소로 인해 사직하였다. 1882년에는 전권대신으로서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본래 이유원은 이수영이라는 외아들이 있었으는데 모 판서의 딸과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아 악성 종기로 인해 후사없이 죽고 말았다. 이에 같은 문중의 판서 이주영의 둘째 아들을 죽은 이수영의 양자로 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들어온 양자는 효심이 깊어 이수영의 부인, 즉 양어머니의 잠자리 시중을 들곤 했는데 서로 또래이다 보니 결국 연애로 변해 불륜까지 저지르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불륜사실을 이유원에게 고하고 처분을 기다렸다. 이에 놀란 이유원은 은밀히 상소를 올려 과부며느리와 그 양아들을 가문에서 끊어버렸고, 이유승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으니 그가 이석영이다.[2]
당대 어마어마한 갑부로,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사는 곳인 양주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오르내렸다'는 말이 전할 정도이다.[3] 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양자 이석영은 이를 처분하여 형제들인 이회영, 이시영 등과 함께 만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사용하였다.
3.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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