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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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현대
2.1. 한국
2.1.1. 대한민국
2.1.2. 북한
2.2. 중국
2.2.1. 바이두 백과의 고조선 내용
2.2.2. 해당 관점의 문제점
3. 현대 이전
3.1. 한국
3.1.1. 고구려
3.1.2. 백제
3.1.3. 신라
3.1.4. 고려
3.1.5. 조선
3.2. 중국
3.2.1. 당나라
3.2.2. 당나라 이후



1. 개요[편집]


고조선의 역사귀속과 계승인식에 대한 문서.

2. 현대[편집]



2.1. 한국[편집]



2.1.1.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은 고조선을 한국사 최초의 국가로 규정하고 있으며, 한국사 역대 국가들 중 가장 오래된 국가인 고조선과 <단군신화>를 국가와 민족의 기원으로써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20세기 들어서 한국 민족주의의 핵심이 되기도 했으며, 민족 사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관련 유적과 사료가 별로 없고, 지역도 북한이랑 중국 요동인지라 특정 지역에서 계승의식을 내세우진 않는다. 한국에 남은 고조선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강화도 마니산에 참성단 및 북방식 고인돌이 존재한다.

기존에 있었던 한국 측 사료가 빈약하고, 문헌이 거의 없어서 사학계에서는 고고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는데 이것이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위/아래에 기록된 십이대영자 문화정가와자 문화를 고조선의 영향권과 관련짓는 시도는 21세기 한국고대사학계에서 고조선이 차지하는 시공간적 위치를 파악하는 데 있어 하나의 큰 이정표가 되고 있다.


2.1.2. 북한[편집]


북한은 1990년대 이후,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 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 그래서 북방 왕조의 시작인 고조선의 역사성을 중요시하여 단군릉을 개건하는 등 고조선에 대한 강한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고조선 시대의 유적 발굴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평양중심설'을 강조하며, '대동강 문명설'과 같은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으며, 단군릉을 역사적 고증없이 개건하는 등 김씨 정권의 정통성에 이용하고 있다. 북한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역사성과 그 지혜의 연원은 오래되었지만 노동당의 영도 밖에서 지배계층의 핍박을 벗어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선전을 위해 고조선과 단군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요령강상유적을 두고 왕과 같은 지배층이 노예를 함부로 죽이던 증거라고 서술한다.

북한의 교과서인 《조선력사》는 2000년대 이후에도 고조선은 노예 소유 국가이고, 노예 반란으로 멸망했다는 부정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8조법'이 특히 노예 소유를 정당화한다며 매우 나쁘게 본다. 왕에 대한 서술도 적다.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은 고조선과의 연관성도 직접 부인하며 '새조선'을 주장했다.


2.2. 중국[편집]


현대 중국은 역사왜곡과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고조선을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이 변강연구중심 홈페이지에 올린 논문은 연구가 완료된 27개 논문 가운데 18편으로 모두 요약본이다.장비붜(張碧波) 연구원은 '기자(箕子)와 기자조선'이라는 논문에서 "기자를 은(殷)대 갑골문자와 전진(前秦)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며 "그가 한반도에 최초의 지방정권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한국 학계에서는 기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논문들은 한결같이 고조선부터 발해까지의 역사가 일맥상통하는 한민족 역사가 아니라 고대 중국의 지방 민족정권역사로 중국 역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있던 근본적인 한계를 놓쳤는데 바로 고조선이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면 진나라의 '중국 최초 통일' 타이틀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진시황 영정은 오늘날 산동 지역에 위치한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통일을 선언했는데 고조선은 이때 멀쩡히 살아있었고 고조선이 멸망한 건 진시황이 죽고 100년이 넘게 지난 기원전 108년의 일이다. 즉, 고조선이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중국측의 논리대로면 중국이 최초로 통일을 이룩한 건 기원전 108년이라는 소린데 당연하겠지만 국제적으로나 중국 주류 사학계에서나 중국 최초 통일을 이룩했다고 인정하는 자는 고조선을 정복한 한무제가 아닌 그보다 100년 전의 인물인 진시황이다. 상술한 진시황의 행보를 생각하면 진시황은 고조선을 중원통일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며 이는 당시 중국인들은 고조선을 별개의 이민족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즉, 중국은 자국의 역사에 고조선을 억지로 포함시키려다 자신들의 근본 아이덴티티인 진시황의 통일마저 부정하는 아이러니에 놓이고 만것이다.

2.2.1. 바이두 백과의 고조선 내용[편집]


다음 내용은 2010년대 기준 바이두 백과의 고조선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바이두 백과 고조선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 이전, 고대 한반도 북부의 초기 국가의 명칭이며, 주로 중국 역사에 기록된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2개 왕조는 제후국이자, 번속국이다. 이들 조선은 남한이나 북한의 역사에 속하지 않는, 중국 고대의 지방정권이다. 문화와 혈통 모두 남한이나 북한의 역사적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북한과 남한은 후세에 지어낸 전설에 나오는 단군조선이 고조선이라고 주장한다.
* 개요
고조선을 다루는 개념은, 기타 국가(타국)의 학자와 남•북한 학자들의 이해가 다르다. 기타 국가의 학자들의 주요 핵심 단어는 신사(信史: 기자, 위만 그리고 한사군) 생성 이전, 한반도 지역의 고대 문명이다. 그리고 북한과 한국이 말하는 고조선은 대부분 합쳐 부르길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이고, 기자조선의 존재는 승인하지 않는다. 13세기 말 고려 왕조 시기 《삼국유사》엔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말하고 있다. 근거로 《한서》<지리지>에 적힌 현만, 낙랑, 한무제 시기에 선립, 이름 조선, 예초(더러운 담비), 구려만이(구려 오랑캐) 등 이곳을 조선과 고려로 합쳐 불렀다. 고조선과 고구려 당시의 두 곳을 별개의 부족 군체로 설명하고 있다. 《후한서》 <고구려전>에 따르면, 고구려 남부와 조선은 상접해 있다. 고구려 당시 고조선을 영유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며, 고조선은 고구려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 전설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집필한 사서인 《삼국유사》와 이승휴가 집필한 《제왕운기》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제석환인'(환인 즉 제석, 제석천, 별도의 명칭으론 환인)의 얼자 환웅이 인류와 함께 생활하기를 원했다. 환인의 동의를 얻은 후, 환웅은 약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강림, 신시를 건립한다. 데리고 온 풍백, 우사, 운사 등을 제외하고도, 환웅은 법률과 불규, 그리고 강종 각양의 예술과 의학, 그리고 농업 기술을 인류에게 알려준다.
이를 근거로, 당시 산동(중국의 산동 지방) 중의 호랑이와 곰이 한 마리씩 와 환웅에게 인간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환웅은 그들에게 쑥과 마늘 20편을 건네주고, 100일 동안 이것을 먹으며 태양을 보지 말고 살라고 일러준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지만, 곰은 21일째 되는 날 여자로 변한다. 하지만 남편 될 사람을 구하지 못하여 웅녀는 신단수 아래에서 재차 환웅에게 자식을 달라고 기도한다. 환웅은 웅녀의 기도를 받아들여 웅녀를 처로 받아들인다. 후에 웅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단군 왕검이다. 단군은 신화 전설 중에 산신이 된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서,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전설을 북한과 한국 교과서에 적어두었다. 단군은 중국 역사 교과서를 근거로 하면, 단군조선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과 한국 학자들이 말하길, 단군조선 전설 중 조선 정권이 존재함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이를 들어 말하자면, Willian T. Sanders와 Barbara J. Price가 제안하는 4단계인 유단, 부락, 족장제(酋邦), 국가, 그리고 국가 형성에 필요한 두 개의 논술인 (1)혈연 관계의 국가 조직상 피지록 관계와 그 치환, (2)합법적 무력을 가짐 등 단군조선 문화는 부락 혹은 족장제 문화일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국가가 아니다. 일단 발전된 농업과 초보적인 수공예,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민족 문자가 없거니와 한자(汉字: 동시에 한자는 이미 발전이 성숙해져 있다.)의 사용 등이 있다. 그러나 중국 동북 지역의 출토도는 많은 수의 상, 은, 주 초기 시대 청동기와 아후(亚侯: 제후국), 기후아실(其侯亚矢), 연나라 제후국(匽侯 즉 연후燕侯) 등이 새겨져 있다.
북경 대학 동북아연구소 소장, 세계사연구소 소장, 원북대 역사계 부계 주임, 역사학자 송성유 교수가 소개한, "한국 역사가가 강조한 국사, 한국 역사가 가지는 5,000년에 대해, 고조선 건국 신화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가?"의 신화 중 천신 단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 산정의 신단수 아래에 건립한 하나의 신지 세계이며, 그(환웅)와 웅녀가 낳은 아이 단군, 즉 인간이 창건한 고조선, 조선의 시조 왕의 탄생이다. 1910년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중국에 망명하였고, 침략에 반항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웠으며, 그 역사학자들은 힘을 흡수하여 (합치며) 한국의 독립성을 강조, 후에 이르러 한국 역사계 중 민족 사학이 유파가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성립 이후, 민족 사학들은 한국 교단 사학의 3대 유파 중 하나가 된다. 또한 '환빠'라 불리는 비학자 민간 인사들, 신화 이야기를 좋아하고, 민간 전설과 평서 강의와 진실의 역사를 혼란에 빠뜨리게 되어, 사회 안에서 크게 유효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불교 용어 중 환인은 '제석환인'으로 약칭되어 '제석천'으로 이르며 그 때문에 제석환인은 약칭 '제석' 혹은 '석제' 등으로 불릴 수 있다. 환인은 즉 제석의 관념에서 나온 불교 사상이며, 원천은 《법화경》, 그 이야기는 《관불삼매해경》, 《화엄경》 등 불교 경전 중 자주 등장하는 우두 전환(소머리 괴물), 또한 등장하는(?) 천왕과 부인 등은 종교 용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에 의거하면 372년 전진이 보낸 견사(사신) 및 부도(사탑 혹은 승려)가 불상, 경문 등을 보냈다. 374년 승아도래(승려가 오다). 375년 소수림왕 때 소문사의 창립이 매우 순조롭다. 이불람사 역시 도달해 해동의 불법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불교는 372년부터 시작[1], 단군 왕검 신화는 적어도 4세기 이전엔 불가능했을 것이다.
* <단군 신화> 중 태백산에 대하여
고려 승려인 일연(1206년 ~ 1289년)의 《삼국유사》의 설명에 따르면 태백은 곧 소향산이라고 한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선 소향산, 부동 130리, 일명 태백산이라고 하며, 후세 학자 역시 대부분 태백산을 초기엔 소향산으로 생각했으나, 대략 18세기 말 조선인이 시작된 태백산을 백두산 혹은 장백산이라고 했다. 그 대표 인물인 안정복(1712년 ~ 1791년)의 《동사강목》 <태백산고>에서 신라 문인 최치원의 <상태사시중태>의 고구려의 남은 사람끼리 끼리끼리 모여 있여(残孽类聚), 북은 태백산 아래에서 국호를 발해라고 설명함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 사람이 해설하기를 태백산은 백두산 혹은 장백산, 그 후 줏대없는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다(附和者渐众) 현재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그르치고 있는데, 단군 신화의 태백산은 장백산과 동일함으로 오늘날의 중국 동북 시각에선 고조선은 중국의 강역(지배지)에 속한다.


2.2.2. 해당 관점의 문제점[편집]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들며, 고조선을 한국 역사와 분리되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우선 기자조선은 항목에도 있듯 고고학적으로 실체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단군 신화를 부정하더라도 고조선은 부왕, 준왕, 조선후, 조선왕, 대부례 등으로 대표되는 토착계 실제 왕조가 있었던 사실이 있다.

또한 고조선 지역에서 나오는 유물은 중국 지역에서 나오는 유물과도 차이를 보인다. 고조선 영역에선 아연이 많이 함유된 비파형 동검이 발견되는데, 이는 중국 지역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와 모양도 구성성분도 다르다.

고대 중국 사서들은 고조선을 중국과는 이질적인 존재이자 동쪽 오랑캐 즉 동이족의 일원으로 서술하고 있으므로 '지방정권설'을 주장하려면 이러한 고대 기록들을 전면 부정해야 한다. 또한 고조선은 중국 왕조들과 대립하던 흉노의 왼팔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온돌처럼 흉노와 문화적으로 겹치는 면도 있었다. 이는 중국계 지방정권으로 보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특징과 행보이다.

게다가 만일 고조선이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면 진시황은 어째서 천하통일의 대상에 고조선을 포함시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발생한다.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 등의 중국 지방정권처럼 고조선도 기자가 봉해진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면 진시황은 마땅히 고조선도 정벌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고, 고조선을 정벌하지 않은 진시황은 중국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천하통일은 그로부터 1백년 뒤의 인물인 한무제가 이룩하게 된다는 자기모순적 논리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국가적인 능력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 밖 수많은 문명들 또한 자체적인 문자가 없었음을 감안하면 황당한 주장이다.


3. 현대 이전[편집]



3.1. 한국[편집]


한국의 전통 놀이 문화 중 하나인 윷놀이의 기원설 중 하나가 '고조선 기원설'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고조선과 부여와의 친연성도 짙을 수 밖에 없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윷놀이 용어가 부여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3.1.1. 고구려[편집]


고구려인들이 생각한 그들의 기원에 대해 짚자면 건국설화에서 보이듯 고구려는 고조선과 동시기에 존재한 부여(정확히는 졸본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나오긴 하나 나중에는 본인들 스스로를 천손, 즉 독자적인 하늘-해모수의 자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여에 대한 계승의식이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건국신화에서 부여 왕가는 천손인 고구려의 시조를 질투하고 탄압하는 등 적대적으로 나오고, 실제 역사에서도 고구려는 부여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수많은 전쟁을 벌이다가 부여가 모용선비족에게 박살나자 그 틈을 타 완전히 정복했다. 이를 볼 때 고구려는 부여를 부모국이라기 보단 적대적인 친척 국가 정도로 여겼을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관련 기록조차 드문 고조선에 대해서는 계승의식은 물론이고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불분명하다. 사족으로 북한 측에서는 고구려가 고조선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북한의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일 뿐 실제로 고구려인들이 고조선에 대해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북한에서는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북방왕조의 연결고리를 강조하는데 고조선과 고구려가 따로 노는 것보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후계 국가인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가르치는 편이 그림도 예쁘고 본인들의 정통성 강화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 허나 북한의 이러한 고대사 왜곡에 가까운 정치적 주장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2]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고조선의 연관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옛 기록에 고구려에서 후술할 '기자신'(箕子神)를 모셨다고 했으며, 고분 벽화에 호랑이로 추정되는 동물을 그려놓기도 했고, 해모수가 유화부인을 만난 곳이 웅심산(熊心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이 남긴 묘지명에서는 스스로를 '부여인'이라고 칭한 사례보다 '삼한인', '조선인'이라고 칭한 사례가 더 많다. # 여기에 더해 백제가 고구려를 욕할 때 '박적'(狛賊)이라고 표현한 사례를 언어학적으로 해석하여 ''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3]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종교 항목 참고. 시간이 흐를수록 고구려인의 정체성은 대략 부여인(夫餘人), 맥(貊)인/예맥(濊貊)인에서 삼한인(三韓人), 조선인(朝鮮人)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공은 이름은 자(慈)이고 자(字)는 지첩(智捷)으로 조선인이다.

<고자 묘지명>(高慈墓誌銘)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


그 처음으로, 조선 귀족으로 크게도(아름답게도) 왕을 칭하는 것을 버리고 훈로(獯虜:오랑캐)를 죽여 베어버려 위대한 당나라를 도왔구나.

<고진 묘지명>(高震墓誌銘)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


군(君)의 휘(諱)는 남산(男産)이니 요동(遼東) 조선인이다.

<천남산 묘지명>(泉男産墓誌銘)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


공(公)은 이름이 융(隆)이고 자(字)도 융(隆)으로 백제 진조인(辰朝人)[4]

이다.

<부여융 묘지명>(扶餘隆墓誌銘)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


기자조선과 관련해서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당서》에 고구려인이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

고구려는 영성신, 태양신, 가한신, 기자신을 섬긴다.

구당서》 中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고구려는 영성신, 태양신, 기자신, 가한신 등에 제사를 지낸다.

신당서》 中


기자조선에 대해서는 아래 기록 외에 중국이나 한국의 사서에서 또 다른 기록이 보이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영성신, 태양신, 가한신 등 고구려 내에서 숭배된 여러 신들 중 하나 쯤의 비중으로 보여 딱히 기자조선에 대한 계승의식이 있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만일 다른 증거 없이 여기서 '기자신'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고구려에게 고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계승의식이 있었다고 한다면, 마찬가지 논리로 고구려가 가한신(可汗神)에 대해서도 제사지냈으니 유연, 북위, 돌궐 등에 대한 계승의식을 가졌다고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둘을 연결하려는 시각이 없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5] 굳이 무리하게 고구려가 고조선에 대한 계승의식을 지녔었다고 설명하려 하지는 않는 편이다.

특이사항으로는 고려~조선시대와는 달리 기자에 대해 유교식 제사를 지낸 것 또한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자가 유교의 성인이기는 하지만 유교적 정통 제사인 '정사'는 아니고, '음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사는 종묘제례나 문묘제례 같은 유교적 예법에 따른 제사이고, 음사는 중국식 예법을 벗어난 제사를 말하며, 중국 측에서 보기에는 예법에 근거했다고 보기에 무언가 결격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각의 문제를 제하고 보면 고구려가 기자에 대해서 무언가 독특한 제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평양이라는 지역 연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대 한국사학계는 '기자동래설'을 부정하고 있는데, 부정설 중 하나가 바로 고대 한국어로 '왕'을 뜻하는 길지를 중국 측에서 오인했다는 설이다. 만약 그렇다면 고구려의 기자 숭배는 신격화된 고조선의 왕족 숭배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있었다 해도 다신숭배 자체는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진 부분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고조선 계승의식에 대한 확실한 뒷받침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이 '조선왕'으로 책봉된 것, 소고구려가 '고려조선'이라고 불린 것, <연남산 묘지명>에서 연남산을 '요동조선인'이라 지칭했던 것 등을 보면 중국 측에서야 옛 한사군 일대를 정복한 뒤 아예 낙랑군의 영역에 천도까지 해 중심지로 삼았던 고구려인들을 자신들의 기록 및 인식에 근거해 고조선인과 연결점이 있는 부류로 보았던 건 사실인 듯 하고, 고구려 지식계층의 경우 고조선에 대한 인식 자체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게 떨어지는데, 당장 고구려는 고조선에 대해 구전 및 기록 등을 통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개연성이 명백한 한사군의 유민 및 지식인층을 대거 흡수하였고, 이외에도 중국측의 기록으로도 고구려의 지식계층은 중국 서적에 대한 탐독 및 연구가 활발하여 한학에 대해 박학다식함은 물론이고 한반도의 오래된 역사에 대한 기록이 있는 삼국지 등의 역사서 또한 활발히 공부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그런 지식을 체계적으로 보급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인 태학이 설치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 와중에 변방도 아니고 자신들의 수도에 위치한데다 그 동아시아의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이었던 한나라와도 나름 한판 떠봤던 주요 국가에 대한 인지가 없었다는 건 그야말로 고조선이 한무제에 의해 기록말살형을 당했던 게 아닌 이상 합리적이지 않다.[6] 반면 상기한대로 정부 차원에서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계승인식을 보인 바는 없는데, 사실 고구려 왕가 자체도 고조선과는 관련이 없는 계보로 시작했고, 건국 때도 딱히 계승과 같은 기치를 든 적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미천왕이 한사군을 정복한 때도 이미 위만 왕가가 소멸하고 그 지배층이 낙랑군의 일원으로 흡수된지도 몇백 년이나 지난 뒤였음을 고려해보면, 직접적인 계승을 표방하기에는 당대의 옛 고조선 영토의 주민들에게조차도 그러한 명분이 그렇게 와닿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흡수된 고조선의 옛 중심지, 즉 낙랑-대방군 일대는 내내 고구려 최대의 인구중심지이자 선진문물의 집산지였고, 끝내는 고구려의 수도권까지 되었기 때문에 일단 정복된 뒤에는 그 출신자들도 신흥귀족 계층으로서 정관계 및 학계에서 활발히 활약하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 남북조시대침투왕조가 북중국을 지배한 뒤 호한혼합이 일어나며 이민족 지배층도 원래 정체성을 버리고 아예 중화라 자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영국 잉글랜드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뒤 노르만화되었다가 존 왕 때 프랑스 영토를 완전히 잃고 에드워드 1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현지의 영향을 받아 다시 앵글로색슨화되며 일종의 혼합이 일어났던 것처럼 왕가와 중앙귀족들부터가 고조선-한사군 문물의 많은 영향을 받게 된 고구려 또한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을 개연성이 높고, 종합해보면 세계사적으로도 보편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정복지의 옛 국가들에 대한 간접적인 계승인식 정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고조선, 부여, 고구려는 모두 소뼈를 이용한 우제점법을 사용했다. 기사에 따르면 《삼국지》 <동이전>이 인용한 AD 2세기경에 작성된 《위략》에서는 당초 알려져 있었던 '무천'이 동예에서 행해지던 풍습이라는 상식과 다르게 고조선에서도 널리 행해졌다고 기록했으며, 《삼국지》가 편찬되었을 때 이 내용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즉 우제점 또한 고조선의 풍습이었다는 것이다. 고조선-부여 관계 항목에 이와 관련된 내용 및 고조선-고구려의 관계에 관한 연구결과가 더 서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간략하게는 선입견과는 다르게 고구려의 유물이나 문화요소에서는 초기부터 부여보다는 고조선적 요소가 더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한편 고려말~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해모수와 단군이 동일 신격으로 여겨지기도 하면서 동명성왕은 단군의 아들(후예)이라는 인식이 발생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역대 군주들을 배향한 팔전숭령전에 단군과 동명성왕이 같이 모셔진 건 그러한 인식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7] 물론 이때쯤이면 한반도의 모든 국가는 고조선의 후예라는 인식이 생긴 뒤였으니 고구려만이 고조선의 계승국이라 보고 그렇게 한 건 아니었다.


3.1.2. 백제[편집]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는 왕성을 부여씨로 하고, 한때 국명으로 남부여를 사용하는 등 본인들을 고구려보단 오히려 부여의 후계국가로 여기며 부여에 대한 계승의식을 뚜렷하게 보였으나 고조선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서 백제의 상국이었다가 백제의 공격으로 멸망한 마한이 전근대시대에는 바로 위만에게 쫓겨 남하한 고조선 준왕의 나라라는 것으로 알려져있었고,[8] 이것이 마한정통론의 근거가 되어 《동사강목》 등 조선시대의 사서에 실리기도 했지만, 사실 고고학상으로 고조선 왕가의 직계후예로 드러난 건마국이 온조왕 대까지 유지되었는지도 불분명하고, 유지되었다고 쳐도 백제는 마한의 구성국들을 멸하고 그 땅과 백성을 차지했을 뿐 고조선이나 준왕에 대한 어떠한 계승의식도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것들과 별개로 백제 또한 마한연맹의 일부로서 시작했으니 적어도 마한에 대해서는 당연히 계승의식이 있었다. 관련기록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간 임성태자의 후손인 오오우치(大內)씨의 가전기록에서 등장한 '백제국 마한황제 제왕(百濟國 馬韓皇帝 齊王)'[9]이란 칭호가 있다. 그러나 이는 백제가 마한이란 '연맹체'의 맹주가 되었다는 인식이었지, 고조선 및 그를 이은 건마국의 계승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한은 단일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맹주의 자리는 굳이 백제가 아니라도 직전의 맹주였던 목지국은 물론이고 이후의 신흥강자였던 침미다례 또한 백제에 대항해 자처한 바 있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볼 때 일단 마한 자체가 고조선 유민들의 대거 남하에 따른 충격으로 인해 형성된 것은 명백하고, 또한 백제 측에서도 건마국 일대를 정복한 뒤 그 옛 지배층은 여전히 어느 정도 그 일대의 지배권을 누리도록 나름대로 대접해주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10] 거기에 더해 무왕(백제)이 왕권 강화를 위해 건마국이 위치했던 금마저(익산)를 부수도로 삼고 아예 천도를 하려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영토 및 국가구조가 한성시대에 비해 크게 변화했던 사비시대에 들어서는 옛 건마국 지배층 출신들이 본격적으로 중앙귀족으로 편입되긴 했던 걸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백제부흥운동기의 기록으로 답본춘초(答㶱春初)라는 인물이 '백제국 조선왕 준'의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다.[11] 답본춘초는 백제 멸망 당시 관등이 2품 달솔(達率)로 병법에 능한 인물이었으며, 부흥운동이 실패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토국(長門國)에서 축성에 힘쓴 공로로 종6위하 대산하(大山下)의 관등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친족으로 보이는 답본양춘(答本陽春)이라는 인물도 기록되어 있는데 답본양춘은 답본춘초의 가까운 친족으로 추정된다. 이 두 명은 삼국시대의 모든 인물들 중, 그것도 당대의 기록상으로도 명백히 고조선 왕족의 후손으로 기록된 유이한 인물들에 해당한다. 이러한 기록이 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적어도 건마국 지배층의 후손들 중에는 자신들이 고조선 왕가의 후손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집단이 삼국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존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혈통과 가문 자체가 매우 중요했던 시대상 백제측에서도 당연히 그걸 인지하고 있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만 갖고 계승의식을 주장하기에는 달리 생각해봐도 당장 왕가부터가 그쪽 계열이 아니며 심지어 고조선의 구지(舊地)가 완벽하게 고구려에 점유되고 있던 상황에서 머나먼 옛날에 멸망한(그것도 위만 왕가에 찬탈당했던) 왕가의 후손들이 자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나라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는 데에는 당연히 무리가 많다.[12]

이외에도 개로왕대에 장무(張茂)가 대방태수(帶方太守)에 임명되어 있었던 기록과 동성왕대에 양무(楊茂)가 조선태수(朝鮮太守)로 임명되어 있었다가 490년에 새 조선태수로 장새(張塞)가, 대방태수로 고달(高達)이 임명된 기록이 있다.[13] 이 경우 백제측에서 정말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옛 조선, 대방 일대를 통치하는 태수직을 준 것이 아니라 그냥 명예직을 준 것에 불과한데, 이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자주 파견되었던 것이나 특히 장새가 중국어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통해 보통 이들은 한사군이 고구려에 멸망당하며 백제에 정착하게 된 중국계 백제인이었던 것으로 본다. 즉 한사군 가문 출신의 인물들이기에 연고지와 관련된 명예관직을 주고 대중국 외교관의 임무를 수행하게 한 것이다. 종합하여 볼 때 백제측에서도 고조선에 관한 것들에 대해 인지는 하고 있었고, 또한 옛 고조선 왕가의 후손들이 자국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걸로 보이나, 그렇다고 계승권을 주장하거나 한다기에는 당장 그 영토도 점유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도 무리수에다 그다지 명분도 실리도 필요도 없었다고 본 것으로 보인다.

3.1.3. 신라[편집]


신라도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드물지만,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건국신화에서 고조선 유민과의 연관성이 직접적으로 기록된 삼국 중 유일한 국가다. 건국신화에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6촌(=6부)의 주민들이 고조선에서 남하한 유민들이었다고 《삼국사기》에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박혁거세 문서 참고. 그리고 고조선과 신라의 연관성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는데, 경상도 지역에서 혈구(血溝)[14]가 여러 줄인 동검, 동모(銅矛)의 고리 등 고조선이 있었던 평안도 지역의 영향을 받은 원삼국시대 유물이 출토된 것에서 양국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국가'로서의 고조선에 대한 계승관계에 대해서는 딱히 명백한 인식을 드러낸 바가 없다. 다른 관련 기록으로는 남북국시대인 9세기경 당현종이 '큰 현인'(大賢)의 가르침이 신라에 미쳤다는 말과 함께 보낸 국서가 있는데, 이 '큰 현인'은 기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최치원이 당나라에 쓴 <양위표>(讓位表)에서도 기자의 팔조법을 이어받았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 시기의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모두 통합해 해동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또 한학도 매우 발전한 상태였으므로 지식인층의 경우 상기한 고구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 서적에서 기록한 한반도의 오래된 역사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에 따라 한반도의 모든 역사를 계승했다는 정통성에 관한 의사를 나타내는 데에 그런 지식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15]


3.1.4. 고려[편집]


고려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고, 고조선에 대해서는 궁궐 내에 조선궁을 두기도 했지만 서경 일대를 제외하면 그저 과거의 국가라는 점 정도의 인식이 고작이었는데,[16] 12세기 이후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면서 백제신라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자 ,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몽골 침입 이후 의미가 부각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이용했다.

한반도 최고의 국가라는 명분 외에도 고조선 세력권인 북방과 준왕이 왕위를 찬탈당한 이후 내려가 장악했다는 남방을 포괄할 수 있는 국가로 고조선이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숙종 이후 평양에 기자 사당이 세워졌고,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지내는 삼성사가 존재했다.

고려시대 만월대 내 별궁 중 하나를 조선궁(朝鮮宮)이라 명명했다.

문종의 왕자 왕도(王燾)가 조선후에 봉해졌다.

고려 역사상 최고의 권신이었던 이자겸은 조선국공(朝鮮國公)에 봉해졌고, 그 부인은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에 봉해졌다.

고려는 한국사의 과거 국가와 전국의 지역명으로 제후명과 만월대 내 별궁명을 선택했는데 '조선'을 그 명칭 중 하나로 선택함으로서 고조선을 한국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3.1.5. 조선[편집]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새로 개창하면서 고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로 국명을 조선이라 정했다. 이후 고조선에 대한 의미 부각도 더욱더 강해져 이전보다 고조선을 자세히 기록한 역사서의 편찬 및 제사 의식으로 한동안 고조선이 부각되었다. 특히 평양부의 경우, 고조선의 도읍이라는 상징때문에 살인이나 반역에 준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도 '부'로서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유지하는 전례없는 특혜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기자단군, 동명왕을 한 곳에서 모시는 제사를 평양부에서 지냈지만, 위만은 찬탈자로 취급하여 제사를 지내주지 않았다. 한편 단군을 평양부에 배향하면서 삼성사는 잠시 훼철되었으나 성종 대에 삼성사가 복원되었다. 이곳을 계승한 곳이 바로 현재 지리산의 삼성궁이다. 한편 양반 사이에서는 《기자 8조법》에도 노비제가 있다고 하여 노비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썼다. 이외에 유학이 당대 트렌드였던만큼 《8조법》 중 전하지 않는 다섯 가지는 분명히 오륜일 것이라는 억측을 하기도 했다.

조선 초에 나타난 《삼성당사적》에 따르면 9세기 초반에 세워졌다는 패엽사와의 갈등이 그려져 있어 연대를 그만큼 소급할 수 있겠으나 신빙성은 의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면서 한반도 전체의 숭배 대상이 될 수 있는 대상으로 한국사 최고(最古)의 국가인 조선에 대한 계승 의식을 확산시켰다.

조선 후기에는 소중화 의식 및 자국 의식이 높아지면서, 단군기자에 대한 연구 및 추숭 작업이 활발해졌다. 16세기부터는 아예 기자조선시대의 계보도가 작성되는 등 존숭을 위한 일종의 역사 왜곡이 행해지기도 했고, 17세기 후반부터는 단군조선 또한 <본기>[17]에 포함되는 등 권별, 허목, 홍만종 등에 의해 역사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3.2. 중국[편집]



3.2.1. 당나라[편집]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에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당으로부터 '조선왕'(朝鮮王)에 봉해졌다. 한편 연남생은 당나라에 의해 '현도군공'(玄菟郡公)에 봉해졌는데 현도군한나라의 지방정부였던 한사군 중 하나였다. 단군고려시대여몽전쟁기나 가야지 부각되며 그것도 한반도 내에서만 해당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당나라가 자신들이 멸망시키고 정복한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책봉명을 단군조선을 의식해 조선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을 고려해 보면 《상서대전》이나 《사기》에 이미 '기자동래설'이 나왔으므로, 조선왕의 '조선'은 주나라 천자로부터 책봉된 기자를 의식해 기자조선이란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구당서》 <현종본기>의 태산 봉선의식에 조회하러 온 내신 번국에 '고려 조선왕'이 있는데 소고구려 왕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연남산 묘지명>에는 연남산이 '요동조선인'(遼東朝鮮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3.2.2. 당나라 이후[편집]


동호계의 후손인 요나라의 경우, 고조선(기자)의 팔조금법을 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거란족들도 존재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요나라의 거란족은 고조선의 예맥족과 별개의 종족이었으며, 후에 요나라가 예맥(고구려)의 정체성을 계승한 발해 등을 멸망시키고 요동을 차지한 것을 생각하면 자기 역사 과장하기 + 지역적 정통성 만들기 수준으로 선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숙신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18] 청나라의 누르하치도 조선을 회유할 때 잠깐 고조선을 언급하기도 했다.#[19] 다만 청나라 고종 건륭제 시대에 지어진 《만주원류고》에서는 고조선을 고구려와 함께 만주-요동사에서 홀대하는 편이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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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국가적으로 공인된 건 이때지만, 불교 자체는 이전부터 민간에 전파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 단군릉, 동명왕릉을 섣불리 비정한다던지, 동수묘일 확률이 높은 안악 3호분을 멋대로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의 능으로 판단하거나 진파리 무덤을 온달과 평강공주묘로 못박아버리는 등 심각한 우려가 있다. 이는 남한으로 치면 확정적인 증거없이 정황상 추측으로 황남대총을 내물왕릉, 천마총을 지증왕릉, 석촌동 3호분을 근초고왕릉으로 못박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황남대총, 천마총, 석촌동 3호분은 근거라도 꽤 탄탄하지 안악 3호분의 경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완전 근거없는 갖다붙이기식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남한이었으면 이미 이름이 안악 3호분이 아닌 동수묘로 개명되어 있었을 것이다.[3] 일본서기에는 아예 狛에 '코마'라는 훈이 달려있다.[4] <부여융 묘지명>에서 백제 부여씨 왕실을 하손(河孫: 하백의 후손)이라고 하여 백제가 고구려와 매우 친밀했음을 전해주고 있으며, 또 부여융이 '진조인'(辰朝人)이라고 하여 백제인들이 마한의 진국(辰國) 계승의식을 가졌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한국금석문)[5] <단군신화>, 혹은 <단군신화>의 원형이 가한이 지배하던 돌궐의 텡그리 신앙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6] 당장 백제 관련 기록에서도 고조선과 관련 지은 벼슬을 준 기록이 존재하는데 아예 그 땅과 주민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구려측에서 모르고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7] 함께 모셔질 수 있는 건 신하를 제외하고는 오직 같은 왕가의 군주들뿐이었고, 그래서 같은 고조선의 군주로 여겨졌음에도 기자는 숭인전에 따로 모셔졌다. 위만은 찬탈자로 취급되어 아예 모셔지지 않았다.[8] 당연히 마한은 어떤 한 나라가 아니었으니 어떤 마한 소국과 백제가 투닥거린 것이 마한 그 자체로 소급되어 기록된 것이지만, 전근대에는 교차검증이나 고고학과의 비교 없이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준왕이 남하해 세운 마한을 온조왕이 멸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9] 즉 백제국의 마한황제인 제왕(齊王). 성왕(백제) 혹은 위덕왕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10] 백제가 건마국을 몰락시킨 듯한 서술이라 추가 설명을 쓰자면 건마국은 백제가 부흥하기도 전에 이미 맹주의 자리를 목지국에 빼앗길 정도로 몰락해 있었고, 백제는 맹주국이었던 목지국을 정복하는 데는 애를 먹었으나 이미 몰락한 건마국의 경우는 큰 저항 없이 정복되었다. 그래서 별다른 저항이 없었기에 오히려 기득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11] 조선왕이 백제에 종속된 제후왕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백제는 실제로 제후왕 제도를 운용하긴 했으나 조선왕이란 작위는 확인된 바 없다.[12] 백제는 시스템상 제후왕을 봉하기도 했으니 만약 백제가 평양 일대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면 '조선왕'이란 작위를 주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그런 경우는 일어나지 않았다.[13] 같이 양무는 광릉태수(廣陵太守)로 임명된다.[14] 혈조(血漕)라고도 하며, 영어로는 풀러(Fuller)라고 한다. 사전상으로는 "찔렀을 때 피가 빠져나오도록 칼 따위의 무기에 만든 홈"(혈구)이나 단순히 "칼날에 낸 흠."(혈조) 정도로 설명하고, 심상적으로도 이쪽에 피가 뭍은 것이 눈에 띄기 쉬웠겠으나, 실제로는 부피 대비 무게를 줄이거나 구조 강도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특히 청동기시대나 초기 철기시대에 꽤 널리 보이는 구조이며, 야금학이 발전하면서 재료의 강도가 충분해진 이후에는 구조적으로 강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써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다만, 무게 경감은 충분히 장점이 될 수 있었으므로, 세이버 등의 근대 도검에서까지도 종종 사용되었다. 개중에는 3~5개나 파놓은 유물도 있을 정도.[15] 관련된 인식으로 발해의 국호에 관한 것이 있는데, 신라와 당나라 모두 발해가 공식국호로써 겨우겨우 멸망시킨 '고려'를 칭하는 걸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지만, 당나라의 경우 결국 고구려의 좀 먼 이칭에 가까웠던 발해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그에 비해 신라의 경우 당나라도 인정한 발해라는 국호까진 어찌하지 못했지만 이후로도 아예 '속말말갈'의 후예로 취급하며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통합되었음을 명백히 하였다.[16] 다만 후고구려를 세운 고구려계 호족들이 조선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인식 자체는 존재했을 수도 있다.[17] <세가>가 아니라 <본기>인 것은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화이기도 했다[18] 다만 만주 지역이 한반도보다도 세력의 이동과 유입이 잦아서 복잡하긴 하다.[19] 참고로 누르하치는 한문을 알아서 《삼국지》도 읽었다고 하는 걸로 봐서 고조선도 책을 보고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20] 만주족들은 자신들의 정통성과 역사성 과장을 위해 엄연히 만주 이남의 국가였던 백제와 신라, 마한, 진한, 변한 등을 자기 역사에 스리슬쩍 연관지어 놓을 정도였으나, 고조선과 고구려(고려)는 자신들과 구분하거나 홀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고조선과 고구려를 만주사에 포함할 경우 만주족 중심의 만주 지역 역사를 써내려가기 어렵기 때문인 듯도 하다. 조선(고조선)과 고려(고구려)는 당대 자신들의 제후국인 조선이 바로 떠오르는(=서열이 뒤집힐 수 있는) 위험성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