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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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기타




1. 개요[편집]


崇靈殿

전 왕조의 시조들을 제사하기 위한 조선의 팔전 중 하나. 북한 평양시에 있는, 단군동명성왕을 합쳐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단군과 동명왕을 같이 모시다 보니 단군사라고도 불리고 동명왕사라고도 불렸다.

현재 북한에서의 행정구역은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이며, 북한 국보문화유물 제6호다.


2. 역사[편집]


고려 숙종 7년 10월, 기자의 사당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충숙왕 12년(1325년)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조선 태종 대에 기자전 혹 기자사당[1]을 다시 지어 기자를 남향하고 단군을 서향해 같이 모셨다.

세종실록 7년(1425년) 9월 25일자 기사에 실린 사온서주부(司醞署注簿) 정척(鄭陟)의 상소문에 따르면 그동안 단군은 기자 사당에 곁가지로 대충 배향되어 있는 처지였다. 기자의 신위가 높은 자리인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의 신위가 낮은 자리인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도록 모셔져 있었다. 또 기자에는 제전(祭田)[2]이 있어 한 달에 두 번씩[3] 제사를 드린 반면, 단군은 그런 것도 없어서 한 해에 두 번씩[4] 제사를 드리고 있다며 단군을 모시는 사당을 따로 만들도록 건의했다.

이에 세종 11년(1429년)에 기자 사당 남쪽에 정전(正殿)과 동, 서 행랑(行廊)을 지어 사당을 따로 세웠다[5]. 또 사당에 단군 뿐 아니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합사했다[6]. 고려시대에 동명왕은 중화현 용산의 동명왕묘[7]와 평양 인리방의 동명성제사[8] 두 곳에서 제사지냈다. 이중 인리방의 동명성제사가 없어지고 단군과 합사된 것이다.

세조 2년(1456년)에 기자, 단군과 동명왕의 사당을 수리하고, 4년 뒤에 본인이 몸소 평안도를 순행하면서 친히 이 곳에서 제사를 거행했다. 이때 조선시조 단군지위(朝鮮始祖 檀君之位), 고구려시조 동명왕지위(高句麗始祖 東明王之位)라고 위판을 다시 만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소실됐지만 광해군 9년(1617년)에 재건했다.

숙종은 직접 제사를 지낸 후 단군묘시(檀君廟詩)를 지어 바쳤다.

영조 원년(1724년)에 숭령전으로 승격됐다.

순조 4년(1804년)에 평양부에 불이 나서 숭인전과 함께 불탄 적 있다. 순조 25년(1825년)에는 그 해가 동명왕이 고구려를 세운 해라고 해서 그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승지를 보내서 숭령전에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9]

1868년 고종은 경복궁이 중건되자 "금년은 단군께서 나라를 세우신 무진년이라 하늘의 뜻이다"라며 제사를 지내고 이후 해마다 축문을 올렸다.


3. 기타[편집]


  • 숭령전의 제사 등급은 중사(中祀) 급으로 매해 봄과 가을마다 제사지냈다.

  •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특히 국가적 차원에서 단군을 민족의 시조신으로 봉안했기에 숭령전에 모신 단군과 동명왕 둘 중 단군이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 원래 단군은 황해도 신천군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 조선 태종 대에 평양으로 옮겨진 것이다. 단종 즉위년(1452년)에 경창부윤 이선제가 올린 상소에서는 "지금 황해도에 창궐하는 있는 역병은 삼성사에 멀쩡하게 잘 모셔져 있던 단군의 신령을 함부로 평양으로 옮겨가 버렸기 때문이다."라는 당시 황해도 아전 및 주민들의 발언이 소개되고 있다. 이선제도 '단군이 평양에 있다가 구월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된 지가 오래 전의 일인데 이제 와서 평양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겠느냐'며 삼성사를 복구하자고 주장했다.[출처]

  • 현재는 정전과 외삼문이 남아있다. 정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동쪽에 동명성왕, 서쪽에 단군 위판을 안치했다. 특이점은 사당 건물은 보통 정면으로 보이는 칸수를 홀수로 짓는데 숭령전의 경우는 짝수로 지었다는 것.[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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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해군 때 숭인전(崇仁殿)으로 승격됐다. 북한에서 국보문화유물 제5호다.[2] 제사 비용 마련을 위해 지급된 토지.[3] 매달 초하루와 보름.[4] 매년 봄 초와 가을 초.[5]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조 기록.[6] 동쪽에 동명왕을, 서쪽에 단군의 신위를 두고 둘 다 남향했다.[7] 화반석으로 만든 능묘가 있었고, 대한제국 때 동명왕릉으로 개칭됐다.[8] 고려시대의 신사(무교)다.[9] 그런데 순조 25년은 간지로 을유년이고 동명성왕의 즉위는 갑신년이라 1년 차이가 난다.[출처] A B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 북한의 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