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 소재지는 신리이다. 1914년 개성군 상남면과 하남면이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남서쪽으로 한강에 접하며, 서쪽으로 예성강을 건너 연백군을 바라본다. 창릉리에는 고려의 추존왕인 세조 왕륭의 왕릉인 창릉이 있으며, 창릉리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소속 리: 신(新)·군은(軍隱)·창릉(昌陵)·후석(候石)·율응(栗鷹)·조제(照濟)·옥산(玉山)·장산(狀山)·수우(修隅)
북면(北面)
면 소재지는 여현리이다. 1914년 개성군 강남면과 북서면이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광복 후 면 남부지역이 남한지역이었으나, 6.25 전쟁 후 북한지역이 되었다. 서쪽에 예성강이 흐른다. 여현리의 려현역은 38선 바로 북쪽에 있어서 한때 남북 간의 창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여현리에 종유동굴이 있다. 소속 리: 여현(礪峴)·일삼소(一三所)·이소(二所)·용현(龍峴)·가토미(加土尾)·식포(食浦)
서면(西面)
면 소재지는 광정리이다. 서쪽으로 예성강이 흐른다. 개성리 산162 소재 백송은 천연기념물 81호이나, 미수복지역에 있음을 사유로 해제되었다. 강리에 개풍향교가 있었다. 연산리의 서쪽 끝, 예성강변에는 고려시대 무역항이었던 벽란도(碧瀾渡)가 있다. 벽란도는 예성강 바로 건너편에 있는 황해도연백군 해월면 벽란리 이름의 기원이다. 소속 리: 광정(光井)·연산(蓮山)·강(江)·개성(開城)[3]
개성시/역사 문서 참조. 삼국시대의 개성이 바로 이 곳이며, 고려의 도읍 이래 현 개성시내는 원래 '송악'이라 불리는 별개의 고을이었다.
·전포(錢浦)
영남면(嶺南面)
면 소재지는 용흥리이다. 1914년 개성군 영남면이 동부면을 흡수하여 형성되었다. 개성 시가지 북쪽에 있다. 용흥리에 복원된 영통사가 있다. 또한 영남면에는 고려시대에 현화사가 있었다. 전쟁 전 38선으로 분단되면서 개풍군 본토와는 개성시를 사이에 두고 월경지가 되어버렸고 남한에서는 임시로 장단군 진서면에 편입하여 관리했었다. 소속 리: 용흥(龍興)·소릉(昭陵)·반정(伴程)·심천(深川)·현화(玄化)·대원(大院)
영북면(嶺北面)
면 소재지는 길수리이다. 개풍군의 북쪽 끝에 있는 면으로 황해도 금천군, 경기도 장단군과 경계를 이룬다. 제석산, 천마산, 월양산, 국사봉 등 주로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길상리 천마산에 대흥산성이 있으며, 부근에 박연폭포와 관음사가 있다. 소속 리: 길수(吉水)·길상(吉祥)·고덕(古德)·월고(月古)
청교면(靑郊面)
면 소재지는 양릉리이다. 개성의 바로 남쪽 교외이므로 왕릉과 유적이 많다. 이 중 고려 20대 국왕 신종의 왕릉인 양릉과 고려 16대 국왕 예종의 왕릉인 유릉은 소속 법정리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소설가 박완서의 출신지. 소속 리: 양릉(陽陵)·탄동(炭洞)·배야(排也)·유릉(裕陵)·광답(廣畓)·묵송(墨松)
토성면(土城面)
면 소재지는 토성리이다. 1914년 개성군 중서면이 서부면을 흡수하여 형성되었고, 1938년 토성면으로 개칭되었다. 토성리는 토성역의 소재지로, 북한 치하에서 개풍군의 중심지가 되었다(개풍읍). 개성의 서쪽 교외이므로 왕릉과 유적지가 산재하는데, 여릉리에 고려시대에는 국청사가 있었고, 현재 고려 태조 왕건의 릉인 현릉(顯陵), 공민왕의 현릉(玄陵),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이 소재한다. 소속 리: 토성(土城)·여릉(麗陵)·곡령(鵠嶺)·연하(煙霞)
의 두 고을이었다가, 조선세종 때 통폐합되면서 해풍의 '풍'과 덕수의 '덕'을 따서 명명되었다.[5]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고을이 많은데 고봉과 덕양을 합한 고양시, 의창과 회원을 합한 창원시, 용구와 처인을 합한 용인시, 무풍과 주계를 합한 무주군, 영강과 백령을 합한 강령군 등이 있다.
광덕면(光德面)
면 소재지는 고척리이다. 1914년 풍덕군 서면과 군중면의 일부가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남서쪽으로 한강을 건너 강화도를 바라본다. 과거 경천사가 중련리에 소재해 있었고 경천사 10층 석탑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소속 리: 고척(高尺)·중련(中連)·광덕(光德)·황강(黃江)·사분(寺盆)
대성면(大聖面)
면 소재지는 풍덕리이다. 1914년 풍덕군 군내면과 군중면의 일부가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구 해풍현 및 풍덕군의 중심지로, 남서쪽으로 한강을 건너 강화도와 마주한다. 남동부에 백마산(191m)을 중심으로 구릉지가 있으나 대부분 평지다. 소속 리: 풍덕(豊德)·대성(大聖)·삼달(三達)·고도(古都)·산귀(山歸)·지내(池內)·구읍(舊邑)·신죽(新竹)
상도면(上道面)
면 소재지는 풍천리이다. 1914년 풍덕군 군북면이 상도면으로 개칭되었다. 구릉이 기복되는 지대로, 왕릉은 아니지만 풍천리에 조선 태조의 첫 부인이자 정종, 태종의 모후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齊陵)이 있다. 소속 리: 풍천(楓川)·삼인(三仁)·상도(上道)·양사(羊司)·연동(蓮洞)·대릉(大陵)
임한면(臨漢面)
면 소재지는 월암리이다. 1914년 풍덕군 남면이 임한면으로 개칭되었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면의 이름 역시 두 강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동쪽은 임진강을 건너 파주를 바라보며, 남쪽은 한강을 건너 김포반도를 바라본다. 대체로 평야지대이고 인삼과 배추가 많이 나서 6.25 전쟁 이전 대한민국 통치시절에는 여기서 생산되는 농작물을 서울로 많이 반출했다고 한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정곶리(림한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땅으로, 서울시청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38km[6]
서울시청에서 동두천시청, 가평군 대성리역, 용인시 에버랜드, 인천광역시 송도국제도시 및 영종도 등과의 직선거리와 비슷하다.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 및 자유로성동IC 구간에서 임진강 건너 보이는 땅이 바로 이 곳이며, '곶'이라는 이름답게 서울 쪽을 향해 삐죽 튀어나와 있다. 월암리에 민제의 묘가 있다. 1951년 7월 국군 1사단과 해병대가 개풍군 일부를 점령했으나 곧이어 북한군의 대공세에 포위되어 한강하구가 자연방어선이 되었고, 이후 휴전 협상으로 중부/동부 전선과 달리 유엔군이 공세를 가하기 어렵게 되어 결국 이북 땅이 되고 말았다. 소속 리: 월암(月巖)·사동(仕洞)·채련(採蓮)·가정(佳井)·정곶(丁串)·유천(柳川)·상조강(上祖江)·하조강(下祖江)
중면(中面)
면 소재지는 대룡리이다. 옛 덕수현의 소재지. 임한면과 마찬가지로 동쪽으로 임진강을 건너 파주시 탄현면과 접하며, 임진강을 사이에 둔 둘 사이의 최단거리는 불과 650m에 불과하다. 동강리 극히 일부는 휴전선 이남 지역이지만 법정리로 등록되어 있지는 않다.#[7]
댓글에는 개풍군이 아주 조금 수복되었다고 적혀있지만 사실 분단 직후부터 원래 남한 땅이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나머지 개풍 지역은 다 뺏기고 남아있는 게 동강리 극일부라고 볼 수 있다(...).
소속 리: 대룡(大龍)·식현(食峴)·덕수(德水)·송산(松山)·천덕(天德)·창내(倉內)·동강(東江)
흥교면(興敎面)
면 소재지는 영정리이다. 1914년 풍덕군 군남면과 동면이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남서쪽으로 한강을 건너 강화도를 바라본다. 흥교리에 조선 정종의 능인 후릉(厚陵)이 있다. 소속 리: 영정(領井)·흥교(興敎)·궁천(宮川)·사곡(仕谷)·지현(芝峴)·조문(照門)·흥천(興天)
면 소재지는 봉동리이다. 1930년 개성군 동면(고두산·대조족·발송·백전리)과 진봉면(봉동·도평·지금·흥왕리)이 합병되어 형성되었으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에는 동면이 개성군, 진봉면이 풍덕군 지역이었다. 서울·장단 방면에서 개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런 입지조건 때문에 현재 개성공단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봉동리와 지금리에 경의선봉동역과 판문역이 있으며, 흥왕리에 흥왕사터가 있다. 해발 200m인 덕물산(德物山)에는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다.[8]
덕물산은 중부지역 무당들의 제일가는 성지였다. "택리지" 등에 의하면 사당 곁에 침실을 꾸며서 민간의 처녀를 뽑아 신령의 '아내'가 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나, 조선 말기에는 사라졌다.
소속 리: 봉동(鳳東)·고두산(高頭山)·대조족(大鳥足)·도평(都平)·발송(鉢松)·백전(白田)·지금(芝金)·흥왕(興旺)
[1] 38선 이남의 북면 일부 지역은 토성면에, 영남면 일부 지역은 장단군 진서면에 편입시켰다.[2] 북위 37.76°[3]개성시/역사 문서 참조. 삼국시대의 개성이 바로 이 곳이며, 고려의 도읍 이래 현 개성시내는 원래 '송악'이라 불리는 별개의 고을이었다.[4]덕수 이씨의 '덕수'가 이곳을 말한다.[5]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고을이 많은데 고봉과 덕양을 합한 고양시, 의창과 회원을 합한 창원시, 용구와 처인을 합한 용인시, 무풍과 주계를 합한 무주군, 영강과 백령을 합한 강령군 등이 있다.[6] 서울시청에서 동두천시청, 가평군대성리역, 용인시에버랜드, 인천광역시송도국제도시 및 영종도 등과의 직선거리와 비슷하다.[7] 댓글에는 개풍군이 아주 조금 수복되었다고 적혀있지만 사실 분단 직후부터 원래 남한 땅이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나머지 개풍 지역은 다 뺏기고 남아있는 게 동강리 극일부라고 볼 수 있다(...).[8] 덕물산은 중부지역 무당들의 제일가는 성지였다. "택리지" 등에 의하면 사당 곁에 침실을 꾸며서 민간의 처녀를 뽑아 신령의 '아내'가 되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나, 조선 말기에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