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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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편집]
제163대 교황.
당시 교황 선출을 놓고 로마의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귀족 가문인 프란지파니 가문과 피에를레오니 가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프란지파니 가문은 스칸나베키를 지지하고 있었고, 피에를레오니 가문은 테오발도 부카페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칸나베키가 교황으로 선출될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자, 위기감을 느낀 피에를레오니 가문은 다급히 부카페치를 교황 첼레스티노 2세[1] 로 옹립해 먼저 선수를 쳤고, 이에 반발한 프란지파니 가문과 교황청 추기경들로 말미암아 결국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이렇게 교황 선출 과정에 난항을 겪었으나 피에를레오니 가문에게 등 떠밀리다시피 교황이 된 부카페치는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아 즉위 하루만에 퇴위했고, 스칸나베키가 호노리오 2세로 선출되어 즉위함으로써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호노리오 2세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쇄신 정책을 펼쳤는데, 전임 교황 갈리스토 2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가 맺은 보름스 협약을 통해 교회가 얻어낸 특권들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이를 더욱 확장하는 데에 주력했다. 교황은 뿐만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계승을 놓고 내전이 벌어지자 누가 정통성이 있는 황제인지를 판가름하는 결정권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호노리오 2세는 전통적인 수도회인 베네딕도회를 불신했던 반면 아우구스티노회나 시토회와 같은 당시 신생 수도회들에게는 우호적이었다. 이에 교황은 베네딕도회가 자리잡은 몬테카시노 수도원, 클뤼니 대수도원 등을 통제했다. 또한 교황은 1128년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성전 기사단을 공식 허가했다.
이렇게 호노리오 2세가 추진한 교회 내부의 정책은 당시 시대 흐름에 맞게 탁월하게 수행했으나, 대외적인 외교 정책에 관해서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교황은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루제루 2세가 이탈리아 남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에 실패하였으며,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6세가 프랑스 교회에 간섭하는 행위도 막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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