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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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062861> 의장1 ||
||<width=20%>
초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width=20%>
제2대

미즈노
렌타로 ||<width=20%>
제3대

아리요시
주이치 ||<width=20%>
제4대

시모오카
주지 ||<width=20%>
제5대

유아사
구라헤이 ||
||
제6대

이케가미
시로 ||
제7대

고다마
히데오 ||
제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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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노리 ||
제9대

오노
로쿠이치로 ||
제10대

다나카
다케오 ||
||
제11대

엔도
류사쿠 ||
||<-5><bgcolor=#062861> 부의장 ||
||
초대

김윤식 ||
제2대

이완용 ||
제3대

박영효 ||
제4대

민병석 ||
제5대

윤덕영 ||
||
제6대

이진호 ||
제7대

박중양 ||
||<-5>
[ 1910 ]
고문
고영희권중현민상호박제순송병준
이근상이근택이완용이재곤이지용
이하영임선준장석주조중응조희연
조민희한창수
찬의
강경희권봉수김만수김사묵김영한
남규희민상호박경양박승봉박제빈
박중양염중모유맹유정수윤치오
이건춘이겸제이재정이준상정인흥
조영희조희문한창수홍승목홍종억
부찬의
고원식구희서권태환김교성김낙헌
김명규김명수김준용김필희김한규
김한목나수연민건식민원식박제환
박희양서상훈서회보성하국송지헌
송헌빈신우선신태유어윤적엄태영
오재풍오제영윤치오이도익이만규
이봉로이원용이항직정동식정병조
정진홍조병건조재영조제환조원성
최상돈한동이허진홍우철홍운표
홍재하

[ 1920 ]
고문
고희경권중현민병석민영기박영효
송병준이하영윤덕영이윤용
부찬의
김현수
칙임 참의
김영진김영한김한목남규희민상호
민영찬민형식박승봉박이양박기양
박상준박승봉박의병박제빈박중양
백인기상호서상훈신석린신응희
어윤적엄준원염중모유맹유성준
유정수유혁로이건춘이겸제정진홍
조민희조진태조영희조희문한상룡
한진창
주임 참의
강병옥고원훈권태환김갑순김교성
김기태김명규김명준김상설김상섭
김연상김영무김정태김준용김창한
김필희김현수나수연노창안박경석
민건식민영은박기동박기순박봉주
박이양박제환박종렬박흥규박희양
방인혁서병조선우순송종헌송지헌
신석우신태유신창휴심준택심환진
안병길양재홍오재풍오태환원덕상
유기호유빈겸유익환유흥세윤치소
이강원이근우이기승이도익이동우
이만규이병렬이병학이택규이택현
이항직이흥재이희덕장대익장도
장상철장응상장직상장인원전석영
정동식정란교정병조정순현정재학
정태균정호봉조병건천장욱최석하
피성호한영원한상봉한창동허명훈
홍성연현은
참의
구연수김윤정김춘희김한목김희작
남규희민병석박기순원응상윤갑병
윤정현장헌식정건유현기봉

[ 1930 ]
고문
민병석윤덕영이윤용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서규김영진
김윤정남궁영민상호박두영박상준
박영철박용구박중양서상훈신석린
어담엄준원염중모유정수유진순
유혁로윤갑병이겸제이범익이진호
장헌식정교원조경하조성근조희문
주영환최린한규복한상룡한진창
홍종국
주임 참의
강동희강번고일청김경진김기수
김기홍김도현김두찬김병규김사연
김상설김상형김상회김신석김영택
김정석김정호김종흡김진수김창수
김한규김한목김한승남백우노영환
문종구민병덕박기석박종렬박보양
박봉진박철희박희옥방의석방태영
서병조서병주석명선선우순성원경
손재하손조봉송지헌신희련안종철
오세호오태환원덕상유승흠유태설
이경식이교식이근수이근우이기찬
이기승이동우이명구이방협이승우
이병렬이선호이은우이종섭이충건
이진호이택규이희덕이희적인창환
장대익장석원장직상장헌근정관조
정란교정대현정석모정석용정해붕
조병상주영환지희열최남선최양호
최연국최윤최윤주최준집최지환
최창조하준석한영원현준호현헌
홍치업황종국
참의
강필성김병원김성규김제하박상준
어윤적유만겸유성준진희규홍정철

[ 1940 ]
고문
김윤정박중양윤치호이범익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김관현김명준김사연김연수
김영배김영진김우영김윤정김태석
김화준박두영박상준서상훈신석린
안종철원덕상유만겸유진순이겸제
이경식이계한이병길이원보장직상
장헌식정교원정란교정연기진학문
최린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권중식김경진김동준김병욱
김부원김사연김신석김원근김재환
김태집노준영민재기박지근박창하
박필병방의석서병조손창식송문화
신현구양재창원병희위정학이경식
이기찬이승우이신용이영찬이익화
이종덕임창수장용관장윤식장준영
장직상전덕룡조병상조상옥차남진
최윤최승렬최정묵최준집한익교
한정석현준호황종국
참의
김하섭문명기이승구

||
||<-5> 1. 중추원 의장은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다.
†. 재직 중 사망.
||



박상준
朴相駿
파일:친일파 박상준.png
이름박상준 (朴相駿)
朴澤相駿
출생1877년 (고종 14) 3월
평안도 성천
(현 평안남도 성천군)
사망1945년 9월 2일 (향년 68세)[1]
직업관료, 계몽운동가, 교육인
본관밀양 박씨
종교유교 (성리학)
국적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제강점기 조선
약력강원도지사, 함경북도지사
황해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일본 귀족원 의원
비고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2.1. 조선/대한제국 시기
2.2. 식민지기
2.3. 미군정 시기
3. 출처



1. 개요[편집]


조선대한제국, 식민지 조선의 관료.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식민지기 당시 일제 식민지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8·9·11·13·1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있으며,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2. 생애[편집]



2.1. 조선/대한제국 시기[편집]


평안도 성천에서 출생해 어릴 때 한학을 공부하다가 1898년 에안주전보사 견습생이 되었다. 구한말에는 한성전보학당에서 수학하고 금성전보사 주사, 은산전보사 가설위원 등 전보사업업무를 보았다.

1907년에 고향 성천군에 설립된 사립 동명학교의 교감 겸 교사가 되었다. 그는 교사로 있으면서 1908년 4월에 태극학회의 성천지회를 설치하고 회장이 되었다. 그는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교육과 식산흥업을 통한 실력양성을 추진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태극학회를 '해외만리에서 독립의 정신으로 4000년 국혼(國魂)을 보지하고 문명한 학술의 연구를 주의로 한 단체'로 인정하고, 학회의 힘의 반사력이 국내에까지 미치어 '봄잠을 곤히 자고 있는 동포들을 깨우고 감동'시키고 있으므로 지회를 설치한다고 하였다. 그는 유교 개혁의 필요성과, 나라의 진보와 민력의 성장을 위한 선각자의 자존·자중을 강조하였다.

1908년 말에는 평남 강동군수을 거쳐 1910년에는 평남 순천군수가 되었다. 당시 많은 군수들이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에 앞장서서 교육을 장려하고 식산흥업을 발달시키고자 하였고 박상준도 그러한 역할을 하였다.


2.2. 식민지기[편집]


1910년 한일합방 이후로도 박상준은 평남 순천군수에 유임되었다. 그리고 1917년 11월 평원군수를 역임하였다. 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자 평남지방 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지냈고, 1919년 11월 다시 평남 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921년 2월 평안남도 참여관이 되었고, 1926년 8월 강원도지사로 승진하였다. 1927년 5월 함경북도지사를 지냈고, 1928년 3월부터 1929년까지 황해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일제측 자료는 박상준에 대해 ‘충실한 관리로 산업상태에 통달하고 또한 재정금융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1939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한일합방 직후 그는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3.1 운동 당시 그는 '민심의 수무선도(綏撫善導)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조선 독립이 불가능함을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은 거칠게 말하자면 "조선은 오랫동안 사대주의에 물들어 자주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나약하니 독립 못하고, 독립해봐야 스스로의 난맥상을 이겨나갈 수 없다. 차라리 일본 식민지로 있는 게 더 나을 것이다"였다. 또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문화통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보이며 "태산을 메워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용고기(龍肉)를 바라다가시간을 낭비하는 가공적 몽상보다는 몇십 전의 적은 돈으로 쉽게 돼지고기를구입하여 당장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실제의 이익을 취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는데, "헛된 꿈과도 같은 독립을 좇기보다 현 체제 안에서 조선인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며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37년 시국강연반에서 전국을 나누어 담당하여 관제 시국 강연을 하고 있을 때, 경상남도에서 친일 연설을 했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차례로 참여했다. 또한 1939년 경학원 대제학에 임명되어 유교의 친일화에도 앞장섰다. 1941년에는 일본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주관했고, 3년 후이는 친일 유림 단체인 조선유도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5년 4월 3일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2.3. 미군정 시기[편집]


광복 후 1945년 9월 2일에 사망했다. 향년 68세.

3. 출처[편집]


[1] 박시백의 친일파 열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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