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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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기
文明琦


파일:애국옹.png

창씨명
후미아키 기이치로
文明琦一郞

운암(雲巖)
본관
남평 문씨[1]
출생
1878년 6월 18일
평안도 안주목
(현 평안남도 안주군)
사망
1968년 10월 6일[2] (향년 90세)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오포리
별명
애국옹(愛國翁), 야만기(野蠻琦), 헌납병 환자
직업
기업인, 상인, 중추원 참의, 관료
경력
경상북도 도평의회 의원
민선 도평의회 의원
관선 도평의회 의원
경북도회의원 광제회 대표
조선국방비행헌납회 회장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황도선양회 회장
가족관계
배우자 밀양 박씨[3] 외 1명
슬하 5남 7녀
딸 문신자
손자 문태준, 손녀 문정인[4]

1. 개요
2. 생애
2.1. 친일 행적
2.2. 애국옹과 야만기
2.3. 해방 이후
3. 여담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기업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태준 전 보건사회부장관이 그의 손자이다.


2. 생애[편집]


1878년 6월 18일 평안도 안주목(현 평안남도 안주시)에서 아버지 문승환(文承喚, ? ~ ?. 2. 4)과 어머니 곡산 강씨(谷山 康氏)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1892년 경상도 영덕현(현 경상북도 영덕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생선장수로 살았으며, 1907년 제지 공장을 운영하며 제지업, 수산업에 뛰어들었다. 1910년대부터는 일제 관헌과 결탁해 일제지업을 위주로 한 사업가로 활동했고, 이 과정에서 1912년 만주와 화북을 다녀온 뒤 한문양행을 설립하였다. 1920년대부터는 광산업에 종사하며 브로커가 되었고, 1932년에는 영덕 금은광산을 인수하는 등 경북 일대에서 큰 부를 축적한 자본가로 살았다.


2.1. 친일 행적[편집]



파일:문명기(애국옹).jpg



파일:문명기 비행기2.jpg


파일:문명기호.jpg

문명기가 헌납한 문명기호의 모습.[5]
그가 일제로부터 괜히 '애국옹'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것이 아니었다. 1935년 문명기는 해군과 육군에 비행기를 각각 1대씩 헌납하는 비용으로 10만원의 국방헌금을 조선총독부에 기부하였다. 그 이후에도 비행기 헌납 운동을 주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2만원, 4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이에 감탄한 일제는 이를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그가 헌납한 비행기에 문명기호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명명식까지 거행하였다.[6] 그렇게 그는 애국옹이 되었다. 그 후 문명기는 재단법인 광제회를 설립하고 일본군을 위문하는 행적도 보인다. 또 그는 일제가 자신을 알아주는 걸 느끼자 좀 더 노골적으로 국방기 100대를 기증하겠다며 이에 결의를 하거나 "1군 1대의 국방기를 헌납하자"라는 소리를 떠들어대고 자살 폭격을 옹호하며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창설하는 등의 한층 더 강도가 쌔진 친일 활동에 앞장선다. 그리고 강연회에 참석하여 침략 전쟁을 지원할 것을 요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거액의 헌금 기부도 잊지 않고 실천하였다. 이런 활동을 통해 1941년 4월 21일부터 1945년 8월까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기도 했다.


2.2. 애국옹과 야만기[편집]



파일:가미다나 문명기.png

가미다나(神棚) 앞에 무릎꿇은 문명기.
이에 질리지 않고 의용단 모집 활동을 한다거나 헌함운동을 전개하고 1943년에는 구리광산을 3개나 기부하기도 한다. 같은 해에 문명기는 친일단체 '황도선양회' 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족했는지 그는 '가미다나(神棚)'라는 소형 신사를 집집마다 걸자는 '가미다나 가가비치 운동'을 주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공로로 그에게 '가미다나 독점 판매권'을 주기도 하였다. 이쯤되자 문명기는 같은 민족들에게 야만기 혹은 헌납병 환자라 불리며 까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밖에도 광신도적인 악질 친일파로서의 면모를 숨기지 않았는데, 전투에서 육탄 돌격으로 사망한 일본군 3인에 대하여 "금후의 전쟁은 비행기 시대로서 육탄비행사가 필요하다.", "나는 유사시 헌납한 비행기에 탑승하여 육탄비행사가 되어 적진에 뛰어들어 황군에 순사할 용기가 있다." 등의 발언을 하였다고 알려진다. 심지어 자신의 저서인 <소지일격>을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에 대해 이렇게 평하였다.

"이는 동양을 동양인의 손에 의해 지키는 것이 아시아민족이 행복하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며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한 일본의 위대함이다."

소지일격(所志一檄)


그는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수준이 아닌 일본 제국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자였던 것이다.수지타산 때문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점이 더 무섭다


2.3. 해방 이후[편집]


8.15 광복 이후인 1949년 1월 24일 영덕군에 있는 자택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돼 기소되었으나 고령임을 핑계로 보석을 신청하였고, 곧 보석으로 풀려났다. 문명기는 90세까지 장수했으며 1968년 10월 6일에 사망하였다고 알려진다. 묘는 영덕군 강구면 오포리 뒷산에 있으며, 묘비문은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유공자노산 이은상이 썼다고 한다.

세상에 나서 자기 힘으로 성공하기란 어려운 일이요 또 장수하며 어진 행적을 끼치기는 더 어려운데 그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여 스스로 보람찬 생애를 누린 이

1969년 8월 15일 묘비문


그의 사후 세워진 1969년 8월 15일 묘비에는 이러한 문구가 쓰여있다.다른 의미로 참 보람차게 살았다...


3. 여담[편집]


그의 악행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파 705인 명단에 선정되었으며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다.

프로필에 나와 있듯이 문명기의 손녀는 채명신의 아내이다. 즉 채명신의 처조부. 이 때문에 채명신 부부는 친일파 연구의 거두인 임종국을 직접 찾아와서 사실 확인을 요청하였고, 임종국이 내민 증거 자료를 확인한 뒤 이를 인정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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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질공파-첨지공파 27세. 족보명은 문기섭(文基燮).[2] 음력 8월 15일.[3] 박학래(朴鶴來)의 딸이다.[4] 채명신 장군의 아내.[5] 오른쪽 사진은 '보국(報國)-73 문명기호(文明琦號)'의 모습이다.[6] 이 자리에는 해군 대신의 대리가 참석하고 비행기 6대가 축하비행을 하는 등의 온갖 기념을 다했다고 기록 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