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직상

덤프버전 :


파일:0cf51b38b3f9231a0b575ca032bc29e8c640bc734d39bbc533cdce8577ab8753.jpg

張稷相
일본식 이름: 張元稷相(하리모토 지키쇼)
1883년 3월 25일 ~ 1959년 4월 17일[1] (향년 76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제국의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기업인이다. 경상북도관찰사 장승원의 아들이자 장택상국무총리의 둘째 형이다. 본관은 인동(仁同)[2], 자는 치대(致隊)이다.[3]

2. 생애[편집]


1883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북삼면 오태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에서 경상북도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장승원(張承遠, 1852 ~ 1917. 9. 28)과 어머니 풍양 조씨[4]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중기의 사림파 학자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 ~ 1637)의 11대손으로, 할아버지 장석룡(張錫龍, 1823 ~ 1908. 10. 21)[5]은 1846년(헌종 12) 정시(庭試) 문과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해 공조판서(정2품)에 올랐고 아버지 장승원 또한 1885년(고종 22)에 증광시 문과에 병과 5위로 급제하고 경상북도 관찰사(종2품)를 지내는 등 당시의 이른바 문벌 가문이라 불릴만한 배경을 타고 났다.

8세 때 가숙(家塾)에 들어가 한글과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903년 경기전 참봉(종9품)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산릉도감(山陵都監) 감조관(監造官), 경상북도 신녕군수 등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신녕군수를 사임하고 고향인 인동군 북삼면 오태동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10월 다시 신녕군수가 되었다. 이후 1911년 비안군수, 1912년 하양군수,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선산군수 등을 역임했고 1916년 경상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지냈다가 1916년 3월 관직을 그만두었다.

1917년 7월 대구은행 취체역에 취임하였으며, 이어 선남은행(鮮南銀行) 취체역에 취임했다. 1919년 칠곡군 학교평의원, 1920년 4월에는 경일은행(慶一銀行) 전무취체역에 취임하였고, 왜관금융창고 감사 및 조합장, 대구창고주식회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24년 3월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에 선출되었다가 1925년 11월 대구상업회의소 회두(會頭:회장)에 선출되는 한편, 1920년부터 1927년까지 경상북도 평의회 의원, 대구부협의회원 등을 지내고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추대되어 광복 직전까지 역임했다.#

그 밖에 대구부공직자대회 회장, 조선공업협회 상담역 및 평의원, 동아인촌(東亞燐寸)주식회사 대표, 영흥탄광(永興炭礦)주식회사 발기인 및 감사, 조양무진(朝陽無盡)주식회사 대주주, 조선신탁(朝鮮信託)주식회사 이사, 대구상공은행(大邱商工銀行)주식회사 감사, 남선합동전기(南鮮合同電氣)주식회사 이사, 남선양조(南鮮釀造)주식회사 이사, 합자회사 친우(親友) 대표, 경북화물자동차(慶北貨物自動車)주식회사 이사, 경북산업(慶北産業)주식회사 이사,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 발기인 및 감사·남선수력전기(南鮮水力電氣)주식회사 이사를 지내는 등 지역 및 재계의 유력자로 활동했다.

또 1933년 대구의학전문학교(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이 설립될 때 1,500여 원을 기부하였고, 1926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 시에는 2,800원을, 1932년 조선나예방협회(현 한국한센복지협회) 창립 시에 1,100여 원 등을 비롯해 5,400여 원을 기부하였으며, 도로 부지, 학교 부지 등으로 8천평 이상의 토지를 조선총독부에 헌납했다.#

한편, 1938년부터는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발기인과 평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평의원과 사무국 경제부 경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1년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위원과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발기인 및 이사로 참여한 뒤, 1945년 대화동맹(大和同盟) 심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대례기념장, 1935년 시정 25주년 기념표창 등을 받았다.

8.15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경영하던 경북산업의 대표를 맡았으며, 그 밖에 대한생명 회장, 남선전기 사장, 남전와사공장(南電瓦斯工場)[6] 사장, 남선기공(南鮮機工) 사장, 조선전구제조(朝鮮電球製造) 사장 등을 지냈다.

1959년 4월 17일 경상북도 대구시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5 14:54:38에 나무위키 장직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음력 3월 10일.[2] 상장군 금용(金用)계 남산(南山)파 31세 상(相) 항렬. 인동 장씨 31세.[3] 인동장씨대동보 14권 남산파 1451쪽 참조.[4] 조준구(趙駿九)의 딸이다.[5] 초명 장용규(張龍逵). 1868년(고종 5) 종3품 예조참의로 재직 중에 장석룡(張錫龍)으로 개명했다.[6] 와사(瓦斯)는 가스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