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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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應熙
1858년 11월 2일 ~ 1928년 2월 12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후기, 대한제국의 무신이며 일제강점기친일반민족행위자다. 얼마나 친일행위가 심했는지 사람들도 말을 나눠보기 전까진 원래 조선 사람이었다는 걸 알지 못했다고 한다.

2. 생애[편집]


그는 박영효의 심복이었으며 1884년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정난교, 서재필, 이규완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망명 생활 동안 박영효를 열심히 경호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귀국하였고 1895년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등과 함께 명성황후의 암살을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그의 동료였던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우범선, 이두황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귀국해서 육군 참령으로 복위되어 군대해산을 지휘했고, 11월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908년 4월 대동학회 평의원, 5월 대한학회 찬성회 발기인, 6월 대한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달 내부대신 송병준의 추천으로 전라남도관찰사 겸 전라남도 재판소 판사에 제수되었다.

관찰사로 재임하며 1909년 8월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각 지역을 순시하면서 의병운동을 절멸하는데 앞장섰다. 1910년 5월 광주농림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한일합방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조선 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었다.

이후 3.1 운동 때 황해도지사로서 경고문을 작성하였고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총독부에 건의한다. 황해도 각지에 3.1 운동 참가자를 색출하는 자제단을 조직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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