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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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오르간을 위한 코랄 전주곡,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Christ lag in Todes Banden).
라틴어 칸타타, 《오 감미로운 예수》.
독일 뤼베크 출신의 바로크 음악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 뤼베크의 성 마리아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재직했으며 디트리히 북스테후데가 그의 후임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다. 그의 음악은 최근까지도 거의 잊혀져 있었으나 21세기 이후 잊혀진 음악 발굴 분위기에 힘입어 그가 작곡한 오르간곡이나 칸타타도 점점 많이 연주되고 있다. 한국에는 아직까지도 잘 알려지 있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음악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신성 로마 제국 령 자유도시인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대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불과 18살에 홀슈타인-고트로프 공국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으며, 몇 년 후에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 요한 마테존의 개선문의 기초에 따르면, 툰더가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저명한 오르가니스트인 지롤라모 프레스코발디에게 사사했다고 하는데,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
1641년 27세의 나이에 뤼베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고 1647년에는 교회의 행정과 재무 등 전반적인 사항을 감독하는 베르크마이스터 직을 맡았다고 한다.
1667년 11월 5일 죽을 때까지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지냈으며, 후임자는 그의 딸과 결혼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3. 업적[편집]
뭐니뭐니해도 툰더의 가장 큰 업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성 마리아 교회 밤에 열렸던 연주회, 아벤트무지크(Abendmusik)를 창설한 것. 게다가 연주자의 실력이라던가 곡이 후대의 연주회[2] 에 비해 꿇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료[3] 였던 것. 이 음악회는 후임자 북스테후데의 지휘로 더욱 유명해졌으며 1810년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오르간 음악부분에서 툰더는 북독일만의 화려한 작곡기법이 코랄 전주곡과 얼마나 잘 어우러지는지 보여주었다. 코랄 전주곡 시작의 빠른 패시지와, 이중 페달까지도 사용하였다. 자유곡에서는 전주곡 뒷부분에 푸가를 집어넣으면서 후에 '전주곡과 푸가'라 불리는 장르의 표본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오르간 작품 양식과 테크닉들은 사위였던 북스테후데에 의해 더욱 발전된다.
또한 이탈리아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모델을 기반으로 독일의 얀 피터르존 스벨링크와 샤이데만(H.Scheidemann)의 전통을 결합함으로써 독일 바로크 음악을 발전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4. 툰더의 작품[편집]
툰더의 작품은 그리 많이 남아있는 편이 아닌데[4] , 50곡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장르도 그렇게 많지 않다. 칸타타, 시편, 라틴어 음악 그리고 오르간곡이 전부. 하지만 적은 곡이지만 코랄 칸타타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그의 작곡법은 북스테후데나 다른 독일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성악곡 대부분은 음악가 구스타프 뒤벤의 필사본 모음집이 들어있고, 오르간곡 대부분은 필사가 하인리히 발처 베데만(Heinrich Baltzer Wedemann)의 필사본이 남아있다.
4.1. 칸타타[편집]
4.2. 시편[편집]
4.3. 기타 성악곡[편집]
4.4. 코랄 전주곡[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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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곡가 요한 아돌프 하세의 증조할아버지[2] 예를 들어 텔레만이 창설하고 바흐가 지휘한 것으로 유명한 콜레기움 무지쿰.[3] 당장 텔레만이 개최했던 오라토리오나 칸타타 연주회도 입장권을 지불해야 했다. 당연히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4] 툰더가 곡을 적게 남겼다기 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작품이 많이 소실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5] 타브의 시초.[6] 여기서 비올이라는 것은 비올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바이올린족 악기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항목에서는 남아있는 바로크 시대의 필사본에 씌인 악기 지정을 우선으로 했다. 보통 5 비올이라 쓰인 것은 실제로는 2 바이올린, 2 비올라, 비올로네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7] 3번째 비올라 또는 바순[8] 오르간 파트보만 남아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