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로카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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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바로크시기 최후를 장식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당대의 바이올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선배 안토니오 비발디를 뛰어넘는 폭넓은 독주 바이올린 기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는 클래식덕후들도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넘길 만큼 저조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파가니니가 등장하기 이전에 유럽음악 최고의 비르투오조적인 연주 테크닉을 소유하고 있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바이올린 실력뿐만 아니라 삶의 행적도 여러 측면에서 후배인 파가니니와 닮아 있다.
2. 생애[편집]
밀라노 인근의 베르가모에서 출생했다. 베르가모 시절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10대 초반의 나이에 베르가모의 산타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교회 소속의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한 것을 보면 일찌감치 바이올린에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음악가로 성공하기 위해 16세가 되었을 때(1711년) 로마로 건너와서 안토니오 몬타노니(Antonio Maria Montanari)와 같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사사했고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기악곡 작곡가로 명성이 높았던 아르칸젤로 코렐리에게도 음악을 배웠다.[1] 1714년경 로카텔리는 스승중 한명이었던 주세페 발렌티니(Giuseppe Valentini)의 주선으로 로마의 카에타니공(Prince Michelangelo I Caetani)의 궁정음악가가 되었으며 이후 음악적 능력을 인정받아 당시 로마의 추기경이었던 피에트로 오토보니(Cardinal Pietro Ottoboni)와 후에 추기경이 되는 카밀로 치보(Camillo Cybo) 등 로마 명사들의 후원을 받았다. 1721년 로카텔리는 자신의 첫 작품집인 12개의 콘체르토 그로소(XII Concerti grossi, Op. 1)를 카밀로 치보에게 헌정했다.[2]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이 높아진 로카텔리는 1723년부터 약 5년간 이탈리아 반도와 신성 로마 제국 각지로 일종의 연주여행을 다녔다. 그가 작곡가이자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는데, 초월적인 기교를 가진 연주자로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져서 1727년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각 선제후들을 알현하고 그들을 위한 연주회를 가졌다. 그의 바이올린 기교가 넘치는 작품집도 주로 이 연주여행을 다니던 시기에 출판됐다.
연주여행이 끝난 1729년에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암스테르담에 정착했으며 이후 평생 암스테르담에서 살았다. 암스테르담 시절에는 연주회나 작곡은 많이 하지 않고 주로 돈 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돈을 벌었다. 또 바이올린이나 바이올린 현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 시기 주요 작품으로 1744년에 출판된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집 op. 8, 죽기 2년전인 1762년에 출판된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집 op.9가 있으며 1764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암스테르담 시절의 로카텔리는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으며 장서가이자 그림 수집가로도 유명했는데 과학/신학/철학/음악/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수집했으며 그가 수집한 책과 그림 상당수는 현재 기준으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3. 작품 성향[편집]
로카텔리의 전성기는 한참 연주여행을 다녔던 1723~1728년의 5년동안이었으며 현존하는 그의 중요 작품은 대체로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3] 짧은 전성기를 보낸 후에는 음악활동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크 시기의 다른 유명 작곡가들처럼 다작을 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6곡이나 12곡으로 구성된 협주곡집이나 소나타집을 많이 편찬했다. 현재 그의 작품집은 Op.1에서 Op.9까지 확인된다. 다만 로카텔리 역시 다른 바로크 작곡가들처럼 적잖은 작품들이 유실되었고 아직도 음악학자들이 잊혀진 악보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로카텔리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선배 비발디가 바이올린 분야에서 확립한 기교적 성향을 극대화시켰다는 점이다. 로카텔리는 동시대의 주제페 타르티니와 함께 바로크 후기의 대표적인 기교파 연주자/작곡가로 손꼽히고 있는데, 타르티니가 선율과 서정적인 표현에 주력했다면 로카텔리는 말 그대로 연주기교를 극한의 경지까지 이끌었다. 그의 바이올린 연주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작품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음악학자들은 로카텔리의 바이올린 기교를 파가니니와 비교 분석할 정도.
하지만 암스테르담에 정착한 이후에 작곡된 로카텔리의 작품들은 이전처럼 독주 바이올린의 기교가 돋보이지 않고 상대적으로 무난하다. 이 시기 로카텔리는 자신의 바이올린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문 연주자들을 길러내는 대신 초절기교를 가르칠 필요가 없는 부유한 아마추어 음악 애호가들만 제자로 받아들였다. 또한 공개 연주회도 거의 개최하지 않았고 작곡을 할 때도 과거처럼 초절기교로 떡칠을 하지 않고 비교적 평이한 작법을 추구했다.[4]
후술될 바이올린의 기법 Op.3과 암스테르담 시절에 출판된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집 Op.8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이런 차이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5]
사실 음악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로카텔리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기 어렵다. 로카텔리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분명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고 종종 인상적인 패시지도 등장하지만 사실상 그게 전부이다. 그의 작품의 작곡 기법 자체는 매우 단순하고 구성적인 묘미가 많지 않으며 독창성도 부족하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타르티니의 경우 나름 바로크 다음 세대인 고전파의 영향이 느껴지는 반면 로카텔리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작법으로 일관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음악을 처음 접할 때는 바로크 시기에 이런 초절기교를 요구하는 곡이 있었다는 것에 신기해 하지만 좀더 듣다 보면 단조롭고 천편일률적인 음악 스타일에 금방 식상하게 된다.
다만 음악성과 별도로 로카텔리를 비롯한 바로크 시기의 거장 연주자들이 악기의 연주기술과 표현력의 확장에 큰 역할을 했으며 고전파 시기 이후 협주곡에 카덴차가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작품목록은 다음과 같다. 기타 작품번호가 붙지 않은 작품이 몇개 더 있다.
Op.1 – 12개의 합주 협주곡 (1721)
Op.2 – 12개의 플루트 소나타(1732)
Op.3 – 12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의 기법>> (1733)
Op.4 – 6개의 합주협주곡(1735)
Op.5 – 6 개의 트리오 소나타(1736) : 바이올린 2대(또는 플루트 2대)와 통주저음
Op.6 – 12개의 바이올린 소나타(1737)
Op.7 – 6개의 바이올린 2대, 비올라와 통주저음을 위한 협주곡(1741)
Op.8 – 6개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4개의 트리오 소나타 (1744) : 1~6은 바이올린과 통주 저음, 7~10은 바이올린 2대와 통주저음
Op.9 – 6개의 협주곡 (1762) : 출판되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고 악보는 유실됨.
로카텔리의 기교적인 작품 중에서도 최종보스급으로 손꼽히는 작품집이 있는데 바로 《바이올린의 기법》(L'arte del Violino) Op.3이다. 이 바이올린의 기법은 로카텔리의 음악 중에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작품집이므로 이하 항목에 서술한다.
3.1. 협주곡집 《바이올린의 기법》[편집]
12 Concertos for Solo Violin, Strings, and Basso Continuo, 《L'arte del Violino》, Op.3 (12 violin concertos with 24 Capriccios ad lib)
이 골때리는 협주곡집은 요리보고 조리봐도 알수없는 특이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협주곡집 Op.3 은 총 12곡의 협주곡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협주곡들의 내용적 구성은 다음과 같다.
- 1악장 : 빠름 - 현악 합주(Tutti) + 솔로(Solo) ▶ 2~4분 동안의 솔로 바이올린 카프리치오 카덴차 ▶ 현악 합주(Tutti)
- 2악장 : 느림 - 현악 합주(Tutti) + 솔로(Solo) ▶ 솔로 바이올린 카덴차[8] ▶ 현악 합주(Tutti)
- 3악장 : 빠름 - 현악 합주(Tutti) + 솔로(Solo) ▶ 2~4분 동안의 솔로 바이올린 카프리치오 카덴차 ▶ 현악 합주(Tutti)
즉, 이 협주곡집에 존재하는 바이올린 카프리치오는 1곡당 2개에다 총 12곡이니까 24개가 나온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가히 초절기교 수준으로 어렵다. 카프리치오가 아닌 일반 솔로 파트도 끔찍하게 어렵다. 실제로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바로크 시대 바이올린 곡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9]
사실, 따지고 보면 내용상 별 특별하달 것도 없다. 곡의 해석이나 묘사를 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무슨 전위적인 시도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다양한 화음들이 바로크 특유의 악풍을 따라 변화해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화음들이 대략 1~4옥타브 정도로 넓은 범위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최소 16분음표 이상[10] 으로 밀집시킨 채, 자신의 왼손 손가락들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갈듯 말듯한 상황에서 극도로 빠르게 연주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냥 테크니컬하게 어렵다. 그리고 솔로 바이올린이 혼자 겁나게 빠른 속도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동안, 현악 합주를 맡은 동료 주자들은 최소한의 지속저음(통주저음) 반주도 끊어버린 채 모두가 솔로를 지켜보고 있다.
그 중의 압권이 바로 마지막 No.12 "화성의 미궁" 으로, 위 영상에서 보듯이
무엇보다도 웃기는 사실은 바로 이 곡의 첨언. 로카텔리는 "화성의 미궁" 1악장 카프리치오 시작점에다 "facilus aditus, difficilis exitus" 라고 붙여 놓았다. 번역하면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화성의 미궁" 1악장 카프리치오의 음표들을 풀어놓으면 대략 이런 모양이 된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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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코렐리는 1711년 로카텔리가 로마에 왔을 당시에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1713년 1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에게 배운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작곡가 코렐리의 제자라는 타이틀은 이후 그가 운신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2] 참고로 이 작품집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됐는데 당시에는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들이 유럽 출판계를 꽉 잡고 있었다. 비발디도 자신의 작품집 대부분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했을 정도.[3] 오늘날 바로크 시대가 클래식 음악 위상에서 바흐 헨델 빼면 쩌리들로 취급되는 시대처럼 여겨지는 것도, 그 당시 난다 긴다 하던 괴물들이 한꺼번에 역사 속에서 잊혔기 때문인 것도 있다. 시대적 한계는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도 환경이 허락하는 한 어떻게든 예술세계를 넓히기 위해 분투했고 탐구했으며 실험했는데, 오늘날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없던 셈 취급당하게 된 건 어찌 보면 아쉬운 부분이다.[4] 여러 모로 로카텔리는 파가니니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연주 여행으로 명성과 부를 얻었다는 점, 당시 기준으로 초월적인 기교를 구사하는 작품을 남겼다는 점, 제자를 키우지 않고 자신의 독보적인 연주기술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했던 점 등등.[5] 다만 어디까지나 젊은 시절의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이 작품들도 기교적으로 그렇게 만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다. 한편으로 이 시기의 작품은 기교성이 약해진 대신 나름 주제를 변화시키고 전개시키는 등 음악성은 좀더 향상되었다.[6] 02:25부터 시작[7] 13:30부터 시작[8] 이 부분은 카프리치오로 쳐주지는 않는다.[9] "... the most difficult violin display passages of all Baroque literature."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10] 템포가 워낙에 빠른데다 게다가 세계구급 굇수들은 아래와 같이 4분음표를 여섯으로 쪼개는 기행을 보이기도 하는데, 1초 당 음표를 계산하면 16개에서 20개가 넘어가는 실로 답이 없는 수치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