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에리 앙리/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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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1. 1999-00 시즌
4.2. 2000-01 시즌
4.3. 2001-02 시즌
4.4. 2002-03 시즌
4.5. 2003-04 시즌
4.6. 2004-05 시즌
4.7. 2005-06 시즌
4.8. 2006-07 시즌
6.1. 아스날 FC 2기 (임대)
6.2. 임대 이후



1. 개요[편집]


티에리 앙리의 클럽 경력을 다루는 문서.


2. AS 모나코 FC[편집]


1992년, 앙리는 클레르 퐁텐 축구 아카데미에 입단해서 두각을 나타냈고[1] 이듬해인 1993년 AS 모나코 유스팀에 들어갔다. 이때 모나코의 감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르센 벵거.[2]

앙리의 첫 프로 경기는 1994년 8월 31일 OGC 니스와의 경기. 다음달인 9월 17일에 벵거 감독이 해임되었지만 이후 감독들에게도 역시 신뢰를 받았다. 1996-97 시즌 모나코가 리그와 컵 더블을 하며 앙리 역시 커리어에서 첫 우승을 기록한다. 자국에서 열린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윙 포워드로 출전하여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에 기여한다.

1998년 월드컵의 우승 이후 1998-99 시즌 중반까지 다소 부진했고, 1999년 1월에 겨울 이적 시장에서 세리에 A의 명문 유벤투스로 향하게 된다.

앙리는 모나코에서 4시즌 반 동안 141경기에서 28골 37도움을 기록했다.


3. 유벤투스 FC[편집]


알레산드로 델피에로가 시즌 아웃을 당하며 리그에서 부진하던 유벤투스는 1,250만 유로라는 거금을 들여 앙리를 데려왔는데 망했어요. 앙리의 장점은 탁월한 돌파와 스피드였는데 유벤투스에서는 앙리의 스피드와 돌파력만 가지고 윙에 쳐박은 게 문제다. 모나코에서 데뷔할 때부터 앙리는 스트라이커로 데뷔했다.

이때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인물이 카를로 안첼로티였는데 루치아노 모지에게 앙리가 스트라이커 롤을 소화 할 수 있냐고 물어보고 모지가 그냥 윙만 뛸 줄 안다길래 판매에 찬성을 했다. 참고로 안첼로티가 가장 후회하는 게 이때 앙리를 스트라이커로 써보지도 않고 팔아버린 것이라고 했던것이었다.

유벤투스에서 앙리는 반 시즌 동안 16경기 3골이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팬들도 월드컵 거품이 껴있다고 비판을 가했고 앙리는 실의에 빠져있었다. 이 6개월이 앙리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유베도 끝내 리그에서 6등을 기록한다.

위기에 빠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은 프로 데뷔의 은사인 아르센 벵거였다. 레알 마드리드니콜라 아넬카를 보내며 2,000만 파운드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3]을 거머쥐고 있던 그는 의외로 세리에 A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윙어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4. 아스날 FC 1기[편집]


모나코에서 자신을 데뷔시켜준 아르센 벵거가 감독으로, 그리고 프랑스 국대 동료인 파트리크 비에라에마뉘엘 프티가 있어 아스날에서의 적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앙리를 가장 잘 서포트해줄 수 있는 데니스 베르캄프라는 테크니션도 있었다. 게다가 프리미어 리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스피디한 리그여서 앙리와 쿵짝이 잘 맞았다. 이러한 점들이 앙리의 성공 요소로 꼽힌다

앙리는 1999-00 시즌부터 2006-07 시즌까지 아스날에서 8시즌(1기)을 보냈는데 이 기간 중 득점왕을 4번이나 차지했다. 특히 2001-02 시즌부터 2005-06 시즌까지 5시즌 동안에는 2001-02, 2003-04, 2004-05, 2005-06까지 4시즌간 득점왕을 차지했고 2002-03 시즌도 1골 차이로 뤼트 판니스텔로이에게 득점왕 자리를 빼앗겼다. 그러나 이 시즌에는 리그 24골 20도움이라는 전무후무한 역대급 기록을 만들어냈다.[4] 아스날 1기는 앙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아스날도 앙리의 활약 속에 이 기간 동안 2번의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그 유명한 아스날의 무패 우승이 이뤄진 2003-04 시즌도 바로 이때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 앙리는 말 그대로 아스날의 왕이자 EPL의 왕으로 군림했으며, 특히 아스날에서의 기록은 언터처블 그 자체였다. 앙리가 아스날에서 기록한 총합 228골은 아스날 클럽 역사상 최다골이었다. 아스날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2012년 1월 10일 임대 확정 후 리그에서 1골, FA컵에서 1골을 추가하며 자기가 자기 기록을 경신했다.

375경기 228골 92도움



4.1. 1999-00 시즌[편집]


프리미어리그에서 여덟경기 연속으로 득점을 뽑아내지 못하는 등 이적 직후에는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5] 그냥 적응기였을 뿐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9월 초 사우샘프턴과의 아스날 역사 첫골을 시작으로 첫 시즌부터 20골을 넘게 득점했다.[6]

벵거는 유벤투스에서 윙 포워드로 뛰던 앙리에게 스트라이커의 임무를 주고 본격적으로 활용했다. 아스날의 패싱 축구와 공간침투는 피지컬보다는 스피드에 의존하는 앙리에게 안성 맞춤이었다. 시즌 초반 비난했던 팬들도 어느새 인정하고 앙리의 플레이에 감탄만 했으며 훗날 아스날을 이끌어가길 바라게 된다.

아스날에서 첫 시즌 리그에서만 31경기 17골 8도움을 기록했으며 전체 성적은 47경기에서 26골 11도움을 기록했다. 지난 유벤투스에서의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1999/00 시즌: 47경기(선발 37경기) 26골 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26
5
17
8
챔피언스 리그
4
0
4
1
0
유로파 리그
8
7
1
7
1
FA컵
2
2
0
0
0
EFL컵
2
2
0
1
0
합계
47
37
10
26
9


4.2. 2000-01 시즌[편집]


UEFA 유로 2000을 제패하고 개막된 아스날에서의 두 번째 시즌이며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동료들이 영입된다.

앙리와 함께 UEFA 유로 2000 우승의 주역인 실뱅 윌토르로베르 피레스가 아스날에 합류하면서 팀워크가 한단계 좋아졌다. 거기에 기존에 있던 데니스 베르캄프와의 호흡도 갈수록 좋아지면서 앙리는 팀 내 최다골을 기록했고 프리미어리그 득점 3위에 랭크된다. 두 시즌 연속 리그에서 17골을 기록했다.

다만 첫 시즌과 두 번째 시즌에 맨유의 기세가 너무 강할 때여서 아스날은 리그 우승 판도에서 잠시 밀려나있을 시기였기에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었다.[7] 실제로 맨유와의 리그 8R 홈경기에서 맨유를 상대로 처음으로 1골을 넣고 비겼지만,[8] 28R 원정에서는 1골을[9] 넣고도 1:6으로 학살당했다. 또한 본인도 첫 두 시즌은 득점왕과는 인연이 없었으며 이후에는 득점왕을 4번이나 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에서 발렌시아에게 패했다.

그래도 시즌을 통틀어 리그에서는 35경기 17골 9도움을 기록하는 등 총 55경기(4,069분)에 나와 22골 11도움을 찍는 좋은 활약을 했다. 또한 이 시즌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1년 UEFA 올해의 팀PFA 올해의 팀에 동시 선정되었다.

2000/01 시즌: 53경기(선발 38경기) 22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5
27
8
17
9
챔피언스 리그
14
8
6
4
2
FA컵
4
3
1
1
0
합계
53
38
15
22
11


4.3. 2001-02 시즌[편집]


아스날의 주장인 토니 애덤스가 은퇴하고 토트넘의 주장인 솔 캠벨이 자유계약으로 아스날로 온 시즌이다. 파트리크 비에라가 이때부터 주장직을 맡게 된다.

캠벨이 수비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아스날 역시 더 강해졌고 때맞춰 로베르 피레스가 적응을 끝마치고 엄청난 활약[10]을 보이며 앙리와 완벽한 호흡을 맞추었고 이는 아스날의 프리미어리그와 FA컵 더블을 기록으로 이어졌다. 비록 챔피언스리그에서 팀이 이기면 8강으로 가는 그룹 스테이지 마지막 경기에서 PK를 실축하며 탈락에 이바지했지만, 앙리는 맨유의 뤼트 판니스텔로이를 제치고 33경기 24골 6도움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7골을 넣으며 총 32골을 넣었다.[11] 또한 이 시즌의 활약을 바탕으로 2002년 UEFA 올해의 팀PFA 올해의 팀에 동시 선정되었다.

2001/02 시즌: 49경기(선발 46경기) 32골 8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3
31
2
24
5
챔피언스 리그
11
11
0
7
0
FA컵
5
4
1
1
3
합계
49
46
3
32
8


4.4. 2002-03 시즌[편집]


2002-03 시즌에도 아스날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한창 전성기가 왔던 나이라 아스날은 그야말로 뽕을 뽑았다. 특히 2002년 11월 16일 토트넘과의 경기에서 약 60m를 질주하며 넣은 골이 압권이였다.[12] 이렇게 팀의 주포로서 열심히 활약하며 아스날을 먹여살리나 리그에서 막판 뒷심으로 맨유에게 역전 우승을 당했고,[13] 앙리 본인도 뤼트 판니스텔로이에게 득점왕을 내주었다.

하지만 리그에서 37경기 24골 20도움으로 20-20을 달성하며 이전 시즌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였다.[14] 득점왕이 유력했으나 판니스텔로이가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페널티 킥으로 한 골을 추가하며 아쉽게 1골차로 득점 2위에 머물렀다.[15] 하지만 PFA 올해의 선수 및 FWA 올해의 선수는 모두 앙리가 차지한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총 7골을 넣었다. 도르트문트와 아인트호벤에게 3골을 넣으며 그룹 스테이지로 무난히 올라갔다. 그룹 스테이지 1차전 로마 원정에서 3골을 넣는 최고의 활약을 했지만 이후 4경기에서 침묵했고, 6차전 발렌시아 원정에서 1골을 넣었지만 져서 탈락했다.

여기다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32골 23도움으로 더욱 무지막지하다. 이 20-20은 앙리 이후 무려 16년 동안 나오지 않고 있다가, 2020년 7월 12일 리오넬 메시가 앙리를 이어 20-20 달성에 성공하였다.

이 시즌에서의 맹활약과 200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에서의 골든볼과 골든슈(득점왕) 동시 수상을 한 맹활약으로 UEFA 올해의 팀PFA 올해의 팀에 동시 선정되는 것과 함께 발롱도르FIFA 올해의 선수상에서도 2위를 차지한다.

2002/03 시즌: 55경기(선발 52경기) 32골 2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7
37
0
24
20
챔피언스 리그
12
12
0
7
3
FA컵
5
2
3
1
0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55
52
3
32
23


4.5. 2003-04 시즌[편집]


커뮤니티 실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골을 넣고도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시즌을 시작했지만 팀과 본인 모두 역대급으로 잘했고 이 시즌 리그에서의 아스날은 명실상부한 최고의 팀이었다. 본인은 공격포인트를 꾸준히 쌓았고 리그에서만 30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오르게 된다.[16] 아스날은 이런 앙리를 앞세워 26승 12무로 무패 우승을 달성했고 이때의 리그 우승은 앙리 본인과 현재까지 아스날의 마지막 PL 우승이다. 여기에 PFA 올해의 선수, PFA 팬 선정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등 리그 내 모든 개인상을 쓸어담은 것은 물론 유러피언 골든슈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거기에 2004년 UEFA 올해의 팀PFA 올해의 팀 선정은 덤이다. 하지만 정작 2004년 발롱도르는 리그 우승과 득점왕에 그쳐 앙리보다 부족한 활약을 보인 안드리 셰브첸코가 수상했고 앙리는 4위에 그쳤다. 거기에 FIFA 올해의 선수상도 무관이었던 호나우지뉴가 수상하고 앙리는 2위에 그치게 되면서 지금까지도 이 수상들은 큰 논란이 되고 있다.[17]

FA컵에서는 4강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했고, 챔피언스 리그는 8강에서 첼시에게 원정에서 비기고 홈에서 패하며 탈락했다. 이 시즌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총 3무 1패를 기록했는데 아스날 안티들은 무패이긴 해도 맨유에게 전적이 밀린다며 폄하한다.

시즌 기록은 리그에서는 37경기 30골 9도움, 총 51경기 39골 15도움.

2003/04 시즌: 51경기(선발 50경기) 39골 1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7
37
0
30
6
챔피언스 리그
10
10
0
5
7
FA컵
3
2
1
3
2
커뮤니티 실드
1
1
0
1
0
합계
51
50
1
39
15


4.6. 2004-05 시즌[편집]


아스날의 주장이었던 파트리크 비에라가 2004-05 시즌을 예기치 않게 출발하자 앙리는 잠시 동안 주장 완장을 달게 된다. 맨유와의 커뮤니티 실드에서 승리하며 좋은 출발을 한 앙리는 시즌 초부터 골을 적립했다.

리그에서 32경기 25골 14도움을 기록하며 2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모든 대회에서 31골을 넣으면서, 골든 부트를 수상했다. 또한 PFA 올해의 팀에도 선정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FA컵 결승전에서는 이전에 당한 부상으로 뛰지 못했다.[18] 그래도 팀은 승부차기 끝에 우승하였고, 이는 앙리 본인 커리어의 3번째 FA컵 우승이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리그 3차전부터 4경기 연속골로 16강 진출에 기여했는데 16강 1차전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 1:3으로 패한 터라, 홈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었지만 대회에서 탈락했다.

2004/05 시즌: 42경기(선발 41경기) 30골 1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2
31
1
25
14
챔피언스 리그
8
8
0
5
0
FA컵
1
1
0
0
1
커뮤니티 실드
1
1
0
0
0
합계
42
41
1
30
15


4.7. 2005-06 시즌[편집]


아스날의 옛 홈구장 하이버리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주장이었던 파트리크 비에라가 유벤투스로 떠나면서 앙리가 새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첼시와의 커뮤니티 실드에서 1:2로 패배하며 시즌을 시작한 앙리는 2005년 10월 17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프라하 원정경기에서 역전골을 터트리며 이안 라이트를 제치고 아스날 소속 185번째 골을 터뜨리면서 아스날 역사상 최다득점자가 된다.

2006년 2월 1일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에서는 골을 터뜨리며 아스날의 전설 클리프 바스틴의 기존 기록을 깨고 리그 151골을 기록하면서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리그에서 32경기 27골 8도움으로 3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19] 팀은 전술의 중심인 비에라가 이적하면서 많이 약해졌고 마지막 경기에서야 겨우 4위를 할 수 있었다. 하이버리 경기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인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 위건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승리를 거두었으며, 팀을 리그 4위로 마무리지으면서 챔스권 진입에 안착시켰다. 이 경기에서 마지막 PK골을 넣고 잔디에 키스하며 자신의 전성기와 함께한 하이버리 경기장에 작별을 고했다. FA컵은 4라운드 볼턴 원더러스 원정에서 패하며 탈락.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유벤투스, 레알 마드리드 같은 강호들을 차례로 꺾으며 결승에 진출한다. 특히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진을 농락하며 기록한 골은 진정 끝판왕의 포스. FC 바르셀로나와의 결승에서는 옌스 레만이 18분 만에 퇴장당하면서 수적 열세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솔 캠벨이 선취골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지만 끝내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앙리는 프리킥 상황에서 솔 켐벨의 선취골을 어시스트했지만 빅토르 발데스와의 두차례 일대일 기회를 놓치는 등 아쉬운 경기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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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이어를 놓치고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메달을 받고 내려가는 앙리.

이 시즌의 활약과 직후 이어진 2006 독일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이후 2006년 FIFPro 월드 XIUEFA 올해의 팀에 공격수로 뽑힌다. 거기에 PFA 올해의 팀에도 6년 연속으로 선정된다. 한편, 시즌 후 아스날에서 무관으로 인해 바르셀로나가 2천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제안했지만 아스날의 구단주가 거절했다는 등의 많은 이적설이 떠돌았으나, 앙리는 4년 재계약을 맺고 아스날에 남는다.

2005/06 시즌: 45경기(선발 42경기) 33골 1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2
30
2
27
8
챔피언스 리그
11
10
1
5
2
EFL컵
1
1
0
1
0
합계
45
42
3
33
10


4.8. 2006-07 시즌[편집]


앙리가 최고 선수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큰 힘이었던 동료들은 구장 이전 정책으로 구단이 긴축재정에 들어감에 따라 어쩔수 없이 하나둘 정리되고 있었다.

비에이라와 에두는 이미 떠났고 베르캄프는 하이버리 경기장과 함께 은퇴했고[20] 피레스는 비야레알로 갔다. 주전경쟁에서 밀려난 솔 캠벨은 포츠머스로, 애슐리 콜은 첼시로 떠났다. 기대를 많이 받던 호세 레예스도 프리미어리그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며 임대형식으로 스페인으로 떠난다. 프레드릭 융베리는 예전같지 않았다.[21] 팀은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주축으로 미래를 기약하고 있었다. 베르캄프와 피레스 등과 환상의 궁합을 보이던 앙리는 젊은 선수들과의 호흡에는 다소 문제를 보였다. 사실 호흡은 그럭저럭 맞았는데 문제는 베르캄프나 비에라 같은 선수들과 너무 잘맞아서 상대적으로 안 맞아보였다는 것이다.

원래 본인이 워낙 벤치에 앉아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크지 않은 부상을 입었을 때는 출전을 강행했고 국가대표팀에서의 혹사 또한 이어졌다. 선수 본인도 최근 몇 년간 많은 경기를 뛰었고, 또 스피드와 활동량을 주무기로 하기에 신체적인 노쇠화가 점점 진행 중인 상태였다. 게다가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결승전까지 올랐으니 시즌 초반의 부진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결국 2007년 3월 챔피언스리그에서 당한 3개월 짜리 부상을 당했고 시즌 아웃되어 전력에서 이탈했다. 리그 성적은 17경기 10골 4도움이었다.[22]

시즌이 끝나고 무한도전을 찍었다. 당시 개인 전용기로 밤에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는데 한국의 아스날 팬사이트인 ‘하이버리’에서 버스를 빌려 30명 정도가 앙리를 열렬히 환영하기도 했으며 당시만 해도 아스날 소속이었는데 얼마 후 앙리가 바르셀로나로 떠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구너들은 당연히 결사 반대를 외치는 중이다.

하지만 앙리는 챔스 우승권의 팀중에 호나우지뉴, 메시, 에투가 있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벵거도 앙리의 피지컬이 떨어지고 있었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대한 열망을 알고 있었기에 이름값에 비해 싼 가격인 2천 4백만 유로에 이적을 허락했다. 다음 시즌 구상하는 새로운 팀에 앙리가 적응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하며 그를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23] 프리미어리그, FA컵, 유럽선수권대회, 월드컵 등 거의 대부분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앙리에게 남은 것은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었다. 아스날은 그 전에 빅이어를 들어올릴 절호의 찬스를 놓쳤고 경기장 이전으로 인한 재정 긴축정책 때문에 당분간 팀전력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앙리의 아스날 생활이 마무리 되었다. 369경기 226골. 다만 이 기록은 몇 년 후에 임대 생활을 통해서 업데이트된다.

2006/07 시즌: 27경기(선발 24경기) 12골 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17
16
1
10
4
챔피언스 리그
7
5
2
1
1
FA컵
3
3
0
1
1
합계
27
24
3
12
6


5. FC 바르셀로나[편집]


2007년 6월 25일 이적료 2,400만 유로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바르셀로나 입단 이후 등번호는 기존의 14번을 그대로 달았다.

당시 메디컬 체크에서 바르셀로나 의료진에게 "이 몸으로 어떻게 축구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앙리의 몸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라는 이야기가 돌곤 하는데, 이런 식의 이야기는 선수 이적 시 선수 당사자의 사기진작(?), 언론 플레이 등의 이유로 나오는 이야기라 엄청나게 과장된 이야기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아르연 로번의 경우를 예를 들면 그가 첼시에서 레알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으로 옮길때마다 새 소속팀의 의료진은 전 소속팀 의료진의 선수 관리 수준을 폭풍 디스 하였다. 역시나 바르셀로나 이적 후 앙리는 그 엉망인 몸으로 상대편 수비진을 피지컬로 압도하는 플레이를 자주 선보여줬다. 위 서술대로 축구를 못 할 몸이었으면 전혀 불가능할 일. 물론 과장되긴 했어도 그동안 누적된 신체의 피로와 부상을 안고 뛰면서 몸에 부하가 심하게 걸렸던 건 맞다. 또한 아내와 이혼하고 양육권 싸움에서 패배한지라 멘탈적으로도 크게 흔들렸다. 아스날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날리다시피한 건 이 때문이다.


5.1. 2007-08 시즌[편집]


9월 19일에 펼쳐진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1라운드 리옹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면서 바르사에서의 첫 골을 넣었다. 이후 약 1주 뒤, 레반테와의 리그 경기에서 바르사에서의 첫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부상으로 자주 빠지는 사무엘 에투 때문에 공격진에 구멍이 생겼으나 리오넬 메시와 함께 그래도 어느 정도 메꿔냈다. 팀은 부진하나 그래도 본인은 어느 정도 본인의 이름 값을 해 주었다. 하지만 앙리는 아스날에서와는 달리 주로 윙어로 출전한지라 아스날에서 보여준 만큼의 득점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전성기에서 내려오기도 했다.

결국 리그 30경기 12골 10도움을 기록하고 챔스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활약을 보였으나 무관에 그쳤다. 전체적으로 팀이 침체했던 시즌이었으며 본인 또한 아스날 시절만큼의 압도적인 면모는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내 최다득점과 최다도움을 기록했다.

이 시즌에 앙리는 아스날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본인의 장점을 발휘하기 힘든 역할과 스타일을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망가져가던 팀에서 나름대로 클래스를 보여주었지만, 바르셀로나 현지팬과 언론은 그 유명한 'EPL의 왕'이 고작 이것밖에 안되냐며 앙리를 엄청 갈궈대며 실패한 이적이라고 낙인 찍었다. 지금의 파리가 그렇듯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도 팀 실패의 원인을 주로 '이방인 선수'들에게 독박 씌우고 마녀사냥을 하는 문화가 상당히 심했는데, 가뜩이나 이런 분위기를 가진 팀에서 하필 앙리는 가장 유명한 선수인지라 대표격으로 나서서 현지 팬과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한 것이다. 거기에 개인적으로는 부상의 후유증과 이혼-양육권 소송 패배까지 겹쳐 축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무척이나 힘겨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앙리로서는 본인 커리어의 마지막 퍼즐인 빅 이어를 위해 부푼 꿈을 안고 왔지만, 막상 와보니 팀 상태는 엉망이었고 본인에게 안맞은 역할을 부여 받았으며 본인의 역량이 전보다 떨어졌다지만 팀 실패의 이유를 독박쓰는 등 첫 시작은 너무나 힘들었다.

2007/08 시즌: 47경기(선발 40경기) 19골 12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30
27
3
12
10
챔피언스 리그
10
7
3
3
2
코파 델 레이
7
6
1
4
0
합계
47
40
7
19
12


5.2. 2008-09 시즌[편집]


2008/09 시즌에는 이전 시즌보다 나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에투 또한 지난 두 시즌과 달리 건강한 모습이었다. 메시는 각성하여 최고의 선수가 되었기에 최강의 공격진을 구축했다. 역대급 시즌을 보내고 있으며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와의 격차를 매우 크게 벌렸다.[24]

앙리의 움직임 자체는 예전 전성기만 못했지만 연계능력과 골 결정력은 살아 있어서 바르셀로나의 왼쪽 윙어로 출전하면서 티에리 앙리-사무엘 에투-리오넬 메시의 공포의 H-E-M 삼각편대를 구성하면서 셋 다 엄청난 스탯놀이를 했다. 다만 앙리 팬들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앙리에게 잘 맞지 않는 왼쪽 윙어로 뛰던 점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벤투스 때와는 달리 원숙한 베테랑이 된 앙리는 윙어로도 꽤나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는 점이다.[25][26]

앙리는 특히 엘클라시코 같은 큰 경기(6대2 승)에서 활약하며 과르디올라의 팀 구상에 꼭 들어가는 선수였다. 리그에서 29경기 19골을 기록하며 전 시즌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였고 챔스에서도 6골[27]을 기록한다. 리그와 국왕컵을 우승했으며 챔스 4강에서 첼시를 상대로 이니에스타의 동점골로 결승에 진출하게 되며 아스날 시절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승에서 맨유를 2-0으로 꺾고[28]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한풀이에 성공한다. 앙리는 이 시즌 26골을 기록하면서 바르셀로나의 트레블과 6관왕이란 대업에 기여하였다. 이 때의 앙리-에투-메시 공격진은 바르사 역사상 MSN 다음의 최고의 공격진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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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이후 꿈에 그리던 빅 이어를 만지며 기뻐하는 앙리의 모습.

2008/09 시즌: 42경기(선발 36경기) 26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29
24
5
19
7
챔피언스 리그
10
9
1
5
3
코파 델 레이
1
1
0
1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1
1
합계
42
36
6
26
11


5.3. 2009-10 시즌[편집]


하지만 2009/10 시즌에는 폼이 너무 하락한 데다[29] 페드로 로드리게스, 보얀 크르키치 등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신예들과 경쟁해야했고 결국 페드로에게 밀려났다.[30]

피지컬 하락에 따른 노쇠화의 진행과 신예들의 성장으로 자리를 잃은 앙리는 2009/10시즌 모든 대회 합쳐서 10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2010년 바르셀로나가 스페인 국가대표 공격수다비드 비야를 영입하면서 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앙리는 2010년 여름, FC 바르셀로나에서 미국 MLS의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한다.

2009/10 시즌: 32경기(선발 23경기) 4골 4도움[31]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라리가
21
15
6
4
3
챔피언스 리그
6
3
3
0
1
코파 델 레이
1
1
0
0
0
클럽 월드컵
1
1
0
0
0
UEFA 슈퍼컵
1
1
0
0
0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
2
0
0
0
합계
32
23
9
4
4


6. 뉴욕 레드불스[편집]


첫 시즌 활약은 만족스럽지 않았으나, 이후 18경기 동안 11골을 넣고 주장까지 하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증명했다. 미국에선 헨리라고 부른다.[32]


6.1. 아스날 FC 2기 (임대)[편집]


2012년 1월부터 아스날로 2개월간 단기 임대가 확정되었다. 이로서 5년 만에 자신의 최전성기를 누렸던 팀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1월 10일 FA컵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만나 자신의 '후계자' 시오 월콧과 나란히 교체 출전하였고 0:0으로 답답하던 상황에서 78분 경 결승골을 뽑아냈다. 스피드는 느려졌지만 오프사이드를 뚫는 순간적인 움직임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슈팅으로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왕의 귀환이다. 더불어 기록은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선수들과의 호흡 자체는 아직 완벽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앙리 본인 탓이라기보다도 팀 호흡 자체가 그리 잘 맞고 있지 않는 아스날이다. 블랙번을 7-1로 폭격한 앙리의 마지막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경기에서 팀의 7번째 골을 기록했는데[33]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은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직후 2월 12일에 열린 리그 25 라운드 선덜랜드 AFC 원정에서 인저리 타임에 극적인 역전골을 작렬하여 2:1 승리에 기여했다.[34] 이로써 자신의 프리미어리그 통산 득점 기록도 1골 더 올려놨다.[35][36] 아스날 통산 376경기 228골 92도움. 레드불스에서 은퇴하면서 이 기록이 아스날의 최종 기록이 되었다.

2011/12 시즌: 7경기(선발 0경기) 2골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4
0
4
1
0
챔피언스 리그
1
0
1
0
0
FA컵
2
0
2
1
0
합계
7
0
7
2
0


6.2. 임대 이후[편집]


아스널 임대기간 동안의 활약에 고무됐는지 2012시즌엔 2011년보다 한층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 편이다. 시즌 성적은 25경기 15골 12도움. 물론 아스널 리즈시절에 비하면 좀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후 2013시즌과 2014시즌 모두 리그 30경기 출전 10골을 기록했다. 한때 2012년 12월에 또 다시 아스날로 임대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앙리 본인도 승인했으나, 구단들의 마찰로 진행되진 못했다.

2014 시즌 이후 레드불스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고 팀을 떠날 것이라고 한다. 2014 MLS 시즌 종료 이후 앙리는 선수생활 연장 대신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사
[1] 클레르 퐁텐 출신에는 니콜라 아넬카, 윌리엄 갈라스, 루이 사하, 아부 디아비, 아템 벤 아르파 등이 있다.[2] 벵거는 1987년 여름부터 모나코의 감독이었다.[3] 1997년 PSG에서 단돈 50만 파운드에 사왔는데 2시즌 쓰고 2,250만 파운드에 레알로 팔았다. 이적료 차이가 40배가 넘는다.[4] 간혹 판니가 챔스 득점왕을 3번이나 했다는 점을 이유로 판니>앙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일단 판니의 챔스 골 56골 중에 토너먼트 골은 겨우 5골에 불과한데 이는 앙리가 득점한 기록의 절반도 안된다.(앙리는 50골 중 12골) 거기다 판니는 챔스 4강 이상을 가본 적이 없는 반면 앙리는 아스날 시절에 이미 준우승까지 달성한 상태였다. 챔스 골 기록면에서 판니가 우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판니의 기록은 실속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 큰 차이가 아니다.[5] 이적 직후 공격수로 뛰라는 벵거의 지시에 '네? 저는 윙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일 앙리가 은퇴할 즈음에 벵거는 앙리가 스스로 '봐요. 전 골을 못 넣잖아요.'라고 밝혔다면서 골도 못 넣는 공격수 치고는 꽤 잘했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6] 스트라이커 롤에 자신감이 없었던 앙리에게 아스날의 레전드 마틴 키언이 아스날 선수였던 어느 선수의 득점 영상을 보여주며 '너보다 발도 느리고 키도 작은 선수였지만 아스날에서 100골을 넣었다.'는 말을 해주었고 이것으로 앙리의 마인드가 바뀌었다는 얘기가 있다. 앙리보다 키도 작고 발도 느렸던 그 선수는 바로 이안 라이트였다.[7] 저 당시에는 맨유가 트레블을 한 이후인지라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또한, 사실상 92 유스들의 주축인 베컴 & 긱스, 네빌, 스콜스 등의 전성기였다.[8] 2000년 10월 1일 경기였는데, 오른발로 툭 띄운 뒤 곧바로 하프 발리 슈팅으로 연결했고 큰 포물선을 그린 볼은 그대로 빨려들어갔다. 앙리의 모든 장점을 잘 보여주는 골이니 꼭 한번 보길 바란다.[9] 앙리의 유일한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득점이다.[10] 로베르 피레스는 2001-02 시즌 도움왕과 PFA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를 휩쓸었다.[11] FA컵은 4경기 0골, 도움은 리그에서 1도움.[12] 이 골을 넣은 후 앙리는 토트넘 원정 팬들 앞으로 가서 그 유명한 무릎 셀레브레이션을 했고 이 세레머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13] 맨유와의 리그 2경기는 1무1패였는데 앙리는 홈에서 멀티 골을 넣었다.[14] 한때 문서에서는 PK골 없이 24골 20도움이라고 기록되었으나 사실 PK골 3개가 포함된 기록이다.[15] 만약 앙리가 이 시즌에도 득점왕을 차지했다면 01-02 시즌부터 05-06 시즌까지 5시즌 연속 득점왕이라는 진기록이 나올 뻔 했다.[16] 더불어 2004년 2월 11일 사우스햄튼 전에서 프리미어리그 통산 100호 골을 달성했다.[17] 당시 발롱도르는 PL 명칭 변경 이후 최초의 무패 우승과 PL 내 모든 개인상들을 휩쓴 앙리 혹은 FC 포르투의 리그와 챔스 더블, 포르투갈의 유로 2004 준우승에 크게 일조한 데쿠가 좀 더 나은 대상자라는 논란이 컸다.[18] FA컵 7경기 중 4라운드 울버햄튼전에서만 나와 1도움 기록[19] 재밌는 것은 이 시즌 최소 득점팀은 26득점을 기록한 선덜랜드 AFC였다. 즉, 득점수만 보면 앙리 > 선덜랜드였던 셈이었다.[20] 다만 은퇴 경기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개장 기념 경기였다. 2006년 7월 22일 베르캄프의 전 소속팀인 아약스와의 경기. 60세가 넘은 요한 크루이프도 베르캄프 기념경기에 와서 뛰었다.[21] 결국 융베리도 2007년을 끝으로 아스날을 떠난다.[22] 2006/07 시즌 초반 아스날은 월드컵까지 풀로 뛴 앙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앙리를 벤치에 앉혔지만 프랑스 국가대표팀 감독인 도메네크는 그런 거 없이 친선경기에도 앙리를 풀타임 소화시켰다.[23] 이때 아스날팬뿐만 아니라 많은 축구팬들이 앙리의 빈자리를 걱정했다. 대체자라고 영입한 건 크로아티아리그의 에두아르도 다 실바에 뜬금없이 오른쪽 풀백 바카리 사냐를 영입한게 전부. 그런데 막상 새 시즌이 시작되더니 아데바요르가 갓데발이 되면서 1위를 질주했다. 물론 시즌 후반 이후에 부상신의 강림으로 팀전력이 흔들리면서 DTD하여 우승엔 실패했지만 적어도 시즌 전체로 볼 때 앙리의 공백은 느껴지지 않았다.[24] 레알은 반대로 침몰하였고, 이를 계기로 다음시즌에 갈락티코 2기가 시작된다.[25] 바르셀로나에서 윙어로 좋은 활약을 했던 것과는 별개로 앙리 본인은 스트라이커가 아닌 윙어로 뛰기를 정말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감독이 거기에서 뛰라고 시켰기 때문에 팀을 위해 군말없이 뛰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얻어내는 결과들도 매우 좋았으니 딱히 불평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훗날 음바페가 본인의 출전 포지션에 관하여 불만이 있다는 얘기가 돌자 앙리는 이 시절 자기 얘기를 하며 음바페가 감독의 전술적 선택을 존중하고 본인보다는 팀을 위해서 뛸 필요가 있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다.[26] 스트라이커로서는 전성기인 에투가 하락세였던 앙리에 비해 우세했지만 윙어로서는 앙리가 좀 더 우위에 있었다. 그리고 사실 바르사 역사상 윙어 자리에서 앙리만큼 해준 선수는 그다지 없었다. 페드로가 메시-비야-페드로 라인의 일원으로 활약했지만 앙리보다 확연히 앞섰는가를 묻자면 섣불리 대답하기 어렵다. 산체스는 바르셀로나에서는 기복이 좀 심한 편이었고 비야 역시 부상과 기량 쇠퇴로 총체적인 활약상이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고, 결국 앙리 이후 한참 후에 네이마르만이 충공깽스러운 활약상을 선보이며 윙어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다.[27] 플레이오프 1골 포함[28] 특유의 리듬으로 리오 퍼디난드를 탈탈 털기도 했다.[29]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유일한 이유였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이뤄지면서 바르셀로나에서의 동기부여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고질적인 등부상이 악화되어 신체능력이 급감하였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냥 나이를 많이 먹었다. 애초에 앙리는 20대의 전성기 폼은 아스날에서 다 태웠고 바르샤엔 클라스가 남은 노장인 상태로 왔었다. 앙리는 30살 딱 되면 닥치고 노장이었던 시절의 올드 해축팬 세대의 선수다. [30] 앙리가 결정적으로 신예 페드로에게 밀려난 원인은 수비 가담 문제였다. 바르셀로나의 수비시 전방압박에서 메시와 앙리는 최전방을 압박하는 에투의 뒤를 받쳐 주면서 패스 루트를 측면으로 한정시키거나 직접적인 가로채기를 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본래 스트라이커인 앙리는 측면에 너무 많은 공간을 내 주는 경향이 있었다. 공격 스탯이야 나무랄데 없었지만 말이다.[31] 후반기 뉴욕 레드불스 출전 기록 제외[32] EPL 감독들의 인터뷰 영상을 자주 보는 사람들 혹은 피파온라인4 유저들은 대체로 해설진들이나 기자들이 원 발음에 기초해서 이름을 불러주는걸 알 수 있다. 물론 호날두는 곧 죽어도 로날도라고 부른다.[33] 이후에 자책골로 변경되었다.[34] 참고로 이 골은 티에리 앙리의 아스날 소속으로써의 마지막 볼터치이다.[35] 이 시즌 아스날은 승점 1점 차이로 토트넘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는데 만일 이 골이 터지지 못했으면 아스날이 챔스를 못갈 뻔 했다.[36] 이 시즌 첼시가 챔스를 우승하여 EPL의 챔스 출전권이 3위까지로 줄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트넘은 4위를 했지만 유로파리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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