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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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뉘엘 프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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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Onze d'Or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지네딘 지단
파비앵 바르테즈
에마뉘엘 프티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이름
에마뉘엘 프티
Emmanuel Petit

본명
에마뉘엘 로랑 프티
Emmanuel Laurent Petit
출생
1970년 9월 22일 (53세)
프랑스 센마리팀 디에프
국적
[[프랑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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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85cm 79kg
포지션
미드필더[1]
소속
선수
AS 모나코 FC (1988~1997)
아스날 FC (1997~2000)

FC 바르셀로나 (2000~2001)
첼시 FC (2001~2004)
국가대표
63경기 6골 (프랑스 / 1990~2003)

1. 소개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수훈
6. 논란
7. 기타




1. 소개[편집]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전성기 레블뢰의 숨은 살림꾼이었다.


2. 클럽 경력[편집]



2.1. AS 모나코 FC[편집]


1988년 입단 후 1989년 아르센 벵거 감독의 눈에 들어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전으로 자리잡는다.

프티는 1996년 AS 모나코에게 리그 우승을 안겨주고 이적을 추진한다.


2.2. 아스날 FC[편집]


파일:external/footballersborntoday.files.wordpress.com/petit-arsenal.jpg

빅클럽으로 이적을 추진하던 프티는 은사인 아르센 벵거의 제안에 따라 아스날로 이적하며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와 함께 아스날에 입단한다.

비에라-프티의 황금 미들진은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중원조합을 자리잡았고 첫 시즌만에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이루면서 더블을 달성하였으며 EPL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중 하나로 꼽혔다.


2.3. 아스날 이후[편집]


2000년 프티는 입단동기였던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와 함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는데, 3백의 센터백으로 나서는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굴렀고, 로렌조 세라 페라 감독과 궁합도 맞지 않았으며, 잉글랜드를 그리워하게 되었기 때문에 프티는 1시즌만에 EPL로 컴백하게 되고 첼시로 이적하게 된다.

첼시에 이적하기 전 과정에서 프티는 아스날의 라이벌인 맨유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의 러브콜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첼시로 이적하였는데 퍼거슨은 프티가 첼시로 이적하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첼시는 에마뉘엘 프티를 영입함으로써 우승경쟁을 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알렉스 퍼거슨


프티는 램파드와 함께 중원을 단단히 하여 첼시의 성장에 밑바탕을 깔아주었으나 2003년 큰 부상을 당하고 다음 시즌에 클로드 마켈렐레가 첼시에 입단하자 자리를 잃게 되고 재계약에도 실패하게 되었으며 이후 볼턴리옹, 보르도가 프티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프티는 은퇴를 선언한다.

현재 프티는 축구중계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3.1. UEFA 유로 1992[편집]


첫 메이저 대회로 엔트리에는 포함되었으나 단 한경기도 뛰지 못했다.


3.2.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편집]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디디에 데샹과 함께 레블뢰의 중원을 구성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3차전 덴마크와의 경기에서는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골도 넣었다. 브라질과의 결승에서 쐐기골이었던 중거리슛은 사실 이때부터 진가가 발휘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사우디를 완파하고 덴마크에게도 승리하며 예선을 전승으로 깔끔히 마무리했고 16강전에서도 다크호스로 꼽히던 파라과이를 격파했다.

8강에서는 이탈리아의 미드필더 디노 바조와 프란체스코 모리에로를 막아내고 중원을 사수하여 팀을 4강에 올리는데 공헌한다.


4강을 거쳐 결승에 올라간 프랑스는 호나우두브라질을 맞이하였는데 프티는 이 경기에서 코너킥을 올려 지네딘 지단의 헤딩 선제결승골을 어시스트하고 마지막에는 쐐기골을 기록하여 팀의 3-0 완승을 이끌면서 조국의 월드컵 최초 우승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때 승승장구하던 브라질은 순식간에 결승에서 뜻밖에 충격패를 당해 자갈로 감독이 청문회에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으며 호나우두는 고질병 간질 때문에 이를 입증하느라 진단서 떼오고 난리가 났었다.


3.3. UEFA 유로 2000[편집]


프티는 유로 2000에서 디디에 데샹과 함께 주력으로 활약했던 1998년 월드컵과 달리 급성장한 파트리크 비에라와 경쟁을 하게 되었다.[2]

프티는 출전하는 경기마다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팀의 유로 2000 우승을 도왔다. 이 대회에서도 프랑스는 줄줄히 강팀들을 격파하면서 최강 포스를 보여줬으며 결승에서는 지난 월드컵 8강전 상대였던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또다시 만나 또다시 격파했다. 이탈리아는 이때까지 프랑스에 두번 연속 깨지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에서야 프랑스에 이겼다.


3.4.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데샹의 대표팀 은퇴 이후 프티는 비에라와 같이 중원을 이뤘지만 당시 지네딘 지단이 부상을 당한 뒤 세네갈 쇼크를 먹으며 휘청거리던 프랑스의 조별 예선 탈락을 막지 못하였다. 이후로는 대표팀과 멀어져갔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체력을 앞세워 무시무시한 활동량을 자랑했고 경기의 흐름을 읽을줄 알았으며, 강력한 피지컬을 이용해 터프하게 플레이하는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양발로 모두 양질의 패스를 구사할 수 있었으나 특히 왼발을 주력으로 잘 썼다. 롱패스 능력이 뛰어났기에 공수의 연결고리 역할도 충실히 하였고 중원에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게다가 센터백 출신이다 보니 포백 보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한 레벨이었으며 궂은 일 하는 미드필더로서는 흔치 않은 부드러운 볼 컨트롤을 보유한, 그 시대 최고 중 하나로 뽑힐 만한 팔방미인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거기에 심지어 한번씩 비수처럼 날아드는 천둥같은 왼발 중거리 슛 능력까지 보유했으니, 오죽하면 그 비에이라가 자신과 같이 뛰어본 미드필더 파트너중 최고로 프티를 꼽을정도였고 객관적으로도 90년대 후반의 프티 - 비에이라 중원 조합은 EPL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파트너쉽 중 하나로 꼽힌다.

다만 모나코 - 아스날 시절의 프티는 위와 같았으나 이후에는 커리어가 미묘하게 꼬이며 위의 플레이 스타일을 온전하게 구현하기 힘들어진다. FC바르셀로나에서는 적응에 실패한 채 1년동안 로테이션 및 땜빵이나 하는 수모를 겪었고, 첼시로 컴백한 이후에는 이후 커리어 내내 프티를 괴롭힌 무릎 부상에 시달려 들쭉날쭉한 출장수를 기록하게 된다.

여담으로 현재 아스날에서 프티와 유사한 선수는 묀헨글라드바흐에서 온 그라니트 자카다. 참고로, 벵거가 자카를 공격적으로 사용한 이유를 보면, 프티가 가지고 있던 공격적 재능을 자카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 벵거의 생각일 수도 있었다. 허나, 냉정히 말하면 자카는 프티보다는 알론소에 더 가까운 선수인지라 프티처럼 기민한 움직임을 보여주기는 힘들다. 현재 자카가 아스날에서 부진하는 이유도 그 자신이 아쉬운 것이 1차 원인이지만, 벵거가 그를 알론소보다는 프티처럼 박스 가담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스타일로 활용을 하는게 크다. 실제로, 몇몇 경기를 보면 파트너인 램지나 윌셔가 더 후방에 있고 자카가 전방에 붙어 있는 장면이 종종 연출되어진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5.3. 수훈[편집]




6. 논란[편집]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개고기 문화에 반대한다며 마이클 오언, 에밀 헤스키, 제이미 레드냅이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한 반대와 압력을 넣는 서명에 참여했는데, 프티도 개고기에 반대하는 생각이었는지 개고기 문제에 관해 한국 비하로 한국인에게 악명이 높았던 브리지트 바르도의 재단이 주프랑스 한국 대사관에 보내는 항의문에 영화배우 소피 마르소, 장폴 벨몽도, 나탈리 베이와 함께 서명했다. 당시 기사[3] 웃긴 건 이들은 역시 월드컵 공동개최국이었던 일본고래사냥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래서 블라터도 피파 내 반대파로부터 왜 일본의 고래사냥은 놔두냐?며 역으로 비난을 당했고 결국 오래 안 가서 이런 고유의 식생활은 월드컵이랑 무관하다고 부랴부랴 입을 다물어야 했다.

사실 블라터도 개고기로 딴지걸다간 당시에도 월드컵 개최 좀 하라고 미래의 황금시장이라며 군침흘리는 중국의 눈치를 볼게 뻔했기에 오래 가진 못할 이야기였다.[4]

당연하지만 본국인 프랑스에서도 비난을 많이 듣었고 보다시피, 서명한 유명인 모두가 흑인인 헤스키 같은 극히 일부를 빼고는 다들 백인들이다.

게다가 브리지도 바르도부터가 아랍인도 싫고 흑인도 싫고 오로지 유럽계 백인만이 좋다라고 망언을 쏟아붓던 또라이라서 저 서명한 것들이 백인우월주의자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래서인지 헤스키는 이후 이 서명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개고기도, 개를 아예 자체를 싫어하는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 아랍 및 아프리카계 프랑스 축구선수들은 저 서명에 대해 무척 냉소나 비웃음, 비난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말이 필요없다.[5] 이런 자들 때문에 프랑스인들도 몇몇 또라이들을 제외하고는 더이상 개고기 운운하지 않는다. 심지어 프랑스와 사이가 안 좋은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타 유럽 국가 사람들에게는 프랑스 요리 푸아그라[6]나 말고기 등 별별 재료로 얼마든지 역반격을 당할 뿐이다.

그리고 과거 레전드들 중에 벵거 감독에게 비판을 많이 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그 중 하나가 과거 레전드들을 코치로 기용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 근데, 대부분 동조를 해주지 않는게 현 시점이라는 게 문제다. 팬들은 실력이 있는 사람이 코치를 해야지, 무슨 레전드라고 코치직을 줘야 하냐?가 대다수고 벵거 역시 융베리나 앙리에게 과거 말한 것처럼 코치나 감독을 하고 싶으면 소규모 클럽이라도 거기서 자신만의 스텝으로 일을 해보는게 훨씬 낫다고 하는 타입이다. 실제로 앙리 역시 자신과 벵거 간의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일축하기도 했었다.


7. 기타[편집]


1998 프랑스 월드컵 우승 직후 NHK에서도 방송한 프랑스 국대를 취재한 다큐멘터리[7]가 있었는데, 알몸으로 마사지 받는 모습이 찍혔다고 한다.

아스날을 떠나 바르사로 이적한 것을 후회했다고 은퇴 이후 밝히기도 했다. 리버풀을 떠나 바르사로 이적한 쿠티뉴를 보며 본인처럼 후회중일거라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두 선수의 공통점이라면 둘이 나가고 오히려 전 소속팀이 잘나갔다는 점이다.

전 축구선수 김진국이 한일 월드컵 직전 펴낸 만화 '김진국의 월드컵 퍼레이드 2'가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을 묘사하면서 세 번째 골을 넣은 프티를 흑인으로 소개하는 오류를 범했다. 아마 4강전에서 멀티골을 넣은 릴리앙 튀랑과 혼동한걸로 보인다.

지금에야 프티가 아스날 중원의 핵심이었던 레전드로 기억되지만 처음 프티가 모나코에서 아스날로 건너왔을 때는 스쿼드 부적응자로 찍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보수적이었던 당시 프리미어 리그는 외국인에게 특히 불친절하기도 해서 팬들과 언론에게 자주 시달려야 했고, 팀 내에서도 영국인 선수들이 텃세를 심하게 부려 '꽁지머리를 잘라버리겠다' 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고 (...)한다.

[1]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2] 데샹을 고정으로 하고 파트너로 대회 초반에는 프티가 주전으로 나왔으나 이후에는 비에이라가 주전으로 나오는 경기가 많았으며 같이 출전하는 경기도 있었다.[3] 참고로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골키퍼 겸 주장였던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는 이에 대해서 한국의 전통문화일 뿐이라며 개고기 문화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영국여우사냥을 왜 그만두지 않냐고 비꼬았다. 그리고 당시 FIFA 회장인 제프 블라터가 반대파인 정몽준을 깎아내리기 위해 개고기를 가지고 트집을 잡도록 유도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칠라베르트는 한국의 어느 동네 식당에 들려 갈비찜을 두 그릇이나 비우고 아욱국도 잘 먹고 갔다고 한다. 정작 한국 월드컵팀 감독 거스 히딩크가 한식이 입맛에 안 맞는다며 잘 입에 안 댄 것과 비교된다.[4] 알다시피 중국인들도 개고기를 먹는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원조에 가깝다. 사스 사태 이후 홍콩, 마카오, 대만 등에선 자취를 감췄지만 중국 본토에선 아직도 개고기를 잘만 먹는다.[5] 브리짓 바르도는 아랍인 및 흑인 무슬림들의 희생제 같은 이슬람 명절에 대해서도 무슬림 검둥이들이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다며 희생제 때 무슬림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소, 양의 목을 싹둑 자르는 할랄 도축을 하는 것을 극딜한 적이 있다. 당연히 무슬림들에겐 이슬람 혐오자로 낙인찍혀 넌씨눈 취급을 당했다.[6] 일부러 거위의 살을 찌워 만들며 그 과정이 꽤 잔혹하여 말이 많다.[7] 세계적인 축구 정보 프로그램인 Futbol Mundial의 일본 NHK BS-1 방영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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