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마르 폰 데어 골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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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콜마르 폰 데어 골츠는 독일 제국군의 군인이자, 오스만 제국군의 군인이기도 하다. 최종계급은 원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벨기에 총독으로 벨기에 학살에 한 몫 하였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콜마르 폰 데어 골츠는 1843년, 동프로이센에서 명문가 골츠 가문[3] 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61년 프로이센 왕국군에 입대하였다. 골츠는 소위로 임관되어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 참전하였다. 골츠는 그곳에서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을 만났고, 토른[4] 근방에서 복무하였다. 이후 베를린 전쟁 대학에 입학하였고, 보오전쟁에 참전하였다. 트라우타우 전투에 참여하여 부상을 입었으며, 지형 세션으로 장군참모 과정을 밟았다. 보불전쟁에서 골츠는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휘하의 2군단에 배치되었다. 마르스 라 루트, 그라블로트 전투와 메스로의 행진에 참여하였다.
이후 골츠는 대위로 승진과 함께 포츠담에 있는 전쟁학교의 역사 섹션의 교수직에 역임하였다. 그가 겪었던 전쟁들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군관련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이후에도 작가로서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2.2. 오스만 제국에서[편집]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 제국에게 대패하였을 때, 골츠는 오스만 제국군의 강화를 위해 오스만 제국에 파견되었다. 골츠는 오스만 제국군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파악하고 그들을 혁신했다. 이 공로로 골츠는 파샤 칭호를 받았으며 1911년에는 원수로 진급하였다. 전역한 이후에도 푸르 르 메리트 민사훈장을 받는 등 큰 명예를 누렸다.
2.3.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골츠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그는 벨기에 침공으로 수립된 벨기에 총독부의 총독이 되어 벨기에 학살에 조력하였고, 이를 정당화했다. 골츠의 이러한 행적은 훗날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칭찬받았다.
골츠는 이후 벨기에 총독부 자리에서 물러나고, 오토 리만 폰 잔더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다시 배치되었다. 메흐메트 5세는 너무나도 무능한 칼리파였고, 실권자였던 이스마일 엔베르는 골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츠는 영국군으로부터 오스만 제국을 지켜냈다. 골츠는 이후 이스마일 엔베르의 명령을 따라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였다. 이후 골츠는 1916년, 발진으로 인해 죽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발진이다. 여담으로 골츠가 죽은 집에서 19개월 후 영국의 중장 프레드릭 스탠리 머드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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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데어골츠'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현 러시아 연방 칼리닌그라드 주 이바노프바[3] 뤼디거 폰 데어 골츠가 같은 가문 출신이다.[4] 현 폴란드 토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