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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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1880년~1890년대 독일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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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Generalfieldmarschall
파일:DR_Generalfeldmarschall_1918.gif

육군
원수
헬무트 폰 몰트케 | 프리드리히 3세 |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 에트빈 폰 만토이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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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상급대장
빌헬름 1세명예 원수
병과대장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파일:General_(Wurttenburg).gif

육군
병과대장
한스 폰 뷜로명예보병대장
해군
대장
-
중장
Generalleutnant / Vizeadmiral

육군
중장
-
해군
중장
-
소장
Generalmajor / Konteradmiral

육군
소장
-
해군
소장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제국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전사





독일 제국군 육군 원수
프리드리히 카를 폰 프로이센
Friedrich Karl von Preußen


파일:Prinz_Friedrich_Carl.jpg

이름
Friedrich Karl Nikolaus
프리드리히 카를 니콜라우스
출생
1828년 3월 20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885년 6월 15일 (향년 57세)
독일 제국 포츠담
배우자
안할트데사우의 마리아 안나 (1854년 결혼)
자녀
마리, 엘리자베트, 안나 빅토리아, 루이제 마르가레테,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아버지
프로이센의 카를 왕자
어머니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마리
가문
호엔촐레른 가문
복무
프로이센군 (1845 ~ 1871년)
독일 제국군(1871년~1885년)
최종 계급
육군 원수 (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보오전쟁
보불전쟁
주요 서훈
검은 독수리 훈장
붉은 독수리 훈장 대 십자상
대십자 철십자장
백엽 푸르 르 메리트
푸르 르 메리트 대십자상

1. 개요
2. 생애
3. 서훈
4. 자녀



1. 개요[편집]


프리드리히 카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3남 카를의 장남이다. 동시에 프로이센군과 독일 제국군의 군인이었으며 최종계급은 원수였다.

빌헬름 1세의 조카이자 프리드리히 3세, 바덴의 대공비 루이제의 친사촌이다. 또한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부인 루이제 마르가레테의 아버지이자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의 장인으로 스웨덴의 마거릿 왕세자비의 외조부다.


2. 생애[편집]


프리드리히는 1828년 3월 20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1845년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군에 입대하여, 보병 중대에 배치되었다. 1846년 이후 원수가 되는 알브레히트 폰 론과 함께 본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1847년 프리드리히는 라인강에서 아이를 구하며 인명 구조 훈장을 받았다.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하자, 프리드리히는 참모장교로서 프리드리히 폰 브랑겔 백작 휘하에 있었다. 이후 1848년 기병으로 병과를 바꾸며 소령으로 진급하였고, 바덴 반군과 싸웠다. 그곳에서 개인적인 용기와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줬다. 프리드리히는 두 번 부상을 당했으며, 1852년까지 같은 근위대에 남았다. 1852년 대령으로 진급하였고,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의 훈련도가 왜 중요한지에 대한 매뉴얼을 썼다. 이후 고속 승진으로 2년 뒤 소장으로 제1 근위 보병 사단을 지휘했고, 1856년에는 중장이 되었다. 그는 프로이센군이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3군단의 사령관이 되면서 많은 개혁을 가져왔다.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발발하자, 프리드리히는 군에 복귀와 함께 기병대장이 되었다. 초기에는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뒤펠전투에서 승리를 가져왔다. 이후 유틀란트 반도에 주둔한 독일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2년 뒤 발발한 보오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프리드리히는 제1군을 지휘하였다. 참모총장은 콘스탄틴 베른하르트 폰 보이츠레츠가 배정되었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의 1군은 수적으로 우세했던 오스트리아군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갑작스럽게 포격을 받아 매우 당황하였는데, 그의 휘하의 에두아르트 폰 프란체키가 오스트리아군을 발견하여 반격을 했다. 사실 운도 따라주었는데, 루트비히 폰 베네덱이 수적으로 몰린 프로이센군에게 기병돌격을 하였다면, 그대로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무튼 운과 노련한 전투 지휘로 잘 지켜냈으며, 그리고 그의 조카 프리드리히 왕태자가 2군을 이끌고 왔을 때는 쉽게 쾨니히그레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2군을 지휘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마르스라투르 전투와 프랑스군의 서쪽으로 향한 탈출로를 막고, 이후 메스도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그는 1871년 12월 2일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리했고 1871년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르망 전투에서 승리했다. 프리드리히는 이 공로로 원수로 승진하였으며 대철십자 훈장도 수훈받았다. 전후 1872년 여러 장군들, 왕족들과 함께 러시아 제국군의 원수로 진급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1885년 바벨스베르크 궁에서 57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후 프린츠 아달베르트급 장갑순양함 2번함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3. 서훈[편집]


프로이센:


4. 자녀[편집]


부인 안할트데사우의 공녀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에서 1남 4녀를 낳았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작센알텐베르크의 공자비 마리
(Marie, Princess of Saxe-Altenburg)
1855년 9월 14일
1888년 6월 20일
작센알텐베르크의 공자 알베르트
슬하 2녀
2녀
올덴부르크의 대공세자비 엘리자베트
(Elisabeth, Hereditary Grand Duchess of Oldenburg)
1857년 2월 8일
1895년 8월 28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슬하 2녀
3녀
안나 빅토리아 공주
(Princess Anna Viktoria)
1858년 2월 20일
1858년 5월 6일

4녀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부인 루이즈 마르가레테 왕자비
(Princess Louise Margaret, Duchess of Connaught and Strathearn)
1860년 6월 25일
1917년 3월 14일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슬하 1남 2녀[1]
1남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왕자
(Prince Friedrich Leopold)
1865년 11월 14일
1931년 9월 13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제 조피
슬하 3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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