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폰 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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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카를 폰 뷜로(Karl von Bülow)는 독일 제국군의 원수이다. 제 2군을 지휘하였다.
2. 생애[편집]
뷜로는 1846년 홀슈타인 일대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2] 아버지는 독일 연방 시기 연방 의회에 홀슈타인 대표로 참석할 만큼 명망있는 외교인이었지만 홀슈타인이 아닌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와 그의 동생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1866년 프로이센군에 입대하였으며,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 참전하였다. 베르하르트는 기병 소위로 임관되어 보오전쟁에서 싸웠지만, 베른하르트는 군대에 남지 않고 전역하였다. 하지만, 카를은 군대에 남았다. 보불전쟁에도 참전하였다.
군대에 남은 카를은 승진을 거듭하였다. 1902년 2월 8일, 뷜로는 병참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에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그를 대체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꽤나 논란이 있었다. 1914년, 뷜로는 하노버에 주둔한 제4분견대의 총사찰관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였을때는 슐리펜 계획에서 오른쪽 날개의 일부인 제2군의 총사령관이었다.[3] 그는 벨기에 침공에서 그의 군대를 이끌었다. 벨기에 침공 당시 초기에는 피죽피세로 잘 점령해 나갔다. 그런데 뷜로는 벨기에 학살에 협조한 장성이었다. 그는 앙덴에서 남자, 여자 할것없이 죽였으며 이는 앙덴에서 약 260명이나 죽게 만들었다. 이후, 뷜로는 프랑스의 제5군과의 전투를 예상하여 제 1군의 알렉산더 폰 클루크에게 잠깐 진격을 쉬자고 하였지만, 클루크는 이미 파리까지 점령할 기세였다. 결국 뷜로가 자신이 클루크보다 지휘권이 높다는 것을 이용하여 제 1군의 도움을 받았다.[4]
결국 이는 프랑스의 조제프 조프르에게 제 1군의 측면을 드러내는 실수가 되었고 결국 마른 전투로 이어졌다. 마른 전투에서 패배로 인해 대중은 뷜로가 파리 점령을 못한 것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1915년 1월 원수로 진급하였고, 1916년 전역하였다. 죽을 때까지 그는 베를린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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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뷜로'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함부르크이다.[3]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사찰관들은 모두 독일 제국군의 n군이 되었다.[4] 이는 슐리펜 계획의 불복종인데, 슐리펜 계획에서는 파리의 남쪽과 서쪽으로 진격해야 했으나, 카를과 클루크는 파리의 남쪽과 동쪽으로 진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