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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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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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원수
Generalfieldmarschall
파일:DR_Generalfeldmarschall_1918.gif

육군
야전원수
프란츠 요제프 1세 | 콜마르 폰 데어 골츠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 |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 빌헬름 2세 |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2세 |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 카를 폰 뷜로 |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 | 메흐메트 5세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 뷔르템베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 루트비히 3세 | 페르디난트 1세 | 카를 1세 | 콘스탄티노스 1세 | 레무스 폰 보이르슈
해군
원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 헤닝 폰 홀첸도르프 | 빌헬름 2세 |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상급대장
Generaloberst

파일:KHeer_OF9_GenOberst_(Bayern)_1918.gif
육군
상급대장
펠릭스 그라프 폰 보트머 | 모리츠 폰 린커 |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 알렉산더 폰 클루크 | 루트비히 폰 팔켄하우젠 | 막스 폰 하우젠 | 알렉산더 폰 린징겐 | 구스타프 폰 케셀 | 요아힘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 요시아스 폰 헤링겐

명예원수 베른하르트 3세 | 명예원수 한스 폰 플레센 | 명예원수프리드리히 2세
병과대장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파일:General_(Wurttenburg).gif

육군
병과대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보병 | 에른스트 루트비히 카를 알브레히트 빌헬름보병 | 에리히 루덴도르프보병 | 로타르 폰 트로타보병 | 에른스트 폰 회프너기병 | 콘라트 크라프트 폰 델멘징엔포병 | 오스카 폰 후티어보병 | 오이겐 폰 팔켄하인기병 |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보병 |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기병 | 막시밀리안 폰 바덴기병 | 빌헬름 폰 우라흐기병 | 프리드리히 식스트 폰 아르민보병 | 카를 에두아르트보병 | 오토 폰 벨로보병 | 에두아르트 폰 리에베르트보병 |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르 아우구스트 에른스트보병 | 헤르만 폰 슈타인포병
해군
대장
후고 폰 폴 | 라인하르트 셰어 | 프란츠 폰 히퍼 | 루트비히 폰 로이터
중장
Generalleutnant / Vizeadmiral

육군
중장
콘스탄틴 폰 알트록 | 카를 폰 베닝거 | 헤르만 폰 쿨 | 빌헬름 그뢰너 | 프리드리히 폰 작센마이닝겐 | 게오르크 그라프 폰 발더제
해군
중장
막시밀리안 폰 슈페
소장
Generalmajor / Konteradmiral

육군
소장
한스 폰 젝트 | 막스 호프만 |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 | 카를 하우스호퍼 | 아이텔 프리드리히 폰 프로이센 | 게르하르트 타펜 | 뤼디거 폰 데어 골츠
해군
소장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제국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전사







독일 제국군 해군 원수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Alfred Peter Friedrich von Tirpitz


파일:P1976.857.809-1.jpg

이름
Alfred Peter Friedrich von Tirpitz
알프레트 페터 프리드리히 폰 티르피츠[1]
출생
1849년 3월 19일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퀴스트린
사망
1930년 3월 6일 (향년 80세)
바이마르 공화국 에벤하우젠
복무
독일 제국군 황립 해군
최종계급
해군 원수
(Großadmiral)
서훈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검은 독수리 훈장(Hoher Orden vom Schwarzen Adler)
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상(Großkreuz des Roten Adlerordens)
철십자 훈장 1급(Eisernes Kreuz I. Klassee)
주요 참전
보오전쟁
보불전쟁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군생활
2.3. 황립 해군




1. 개요[편집]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독일 제국의 3대 카이저빌헬름 2세가 해군원수(Großadmiral)로 임명했던 군인으로, 1897년부터 1916년까지 독일 제국 해군을 담당한 강력한 행정부서 독일 제국해군청(Reichsmarineamt)의 대신을 겸하기도 했었다.

대륙 국가가 해군력 건설을 통해 기존의 해양 강대국에 도전하는 사례를 만든 원조격 인물이다. 말하자면 구 소련의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중국의 류화칭의 선배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통치하고 있던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의 퀴스트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이름은 말비네 하르트만(Malwine Hartmann)이었고, 아버지인 루돌프 티르피츠(Friedrich Ludwig Rudolph Tirpitz)는 변호사였으며, 나중에는 판사가 되었다. 티르피츠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랐다.


2.2. 군생활[편집]


티르피츠의 해군 입대는 그의 친구 덕분에 이루어졌다. 티르피츠의 친구는 그가 해군에 입대한다고 했고, 티르피츠도 부모님의 동의를 받아 1865년, 16세의 나이에 해군 사관 후보생이 되었다. 1년 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일으켰고, 티르피츠는 영국 해협을 순찰하는 범선에 배치되었다. 보오전쟁의 종전 후에도 해군에 남았다.


2.3. 황립 해군[편집]


1871년에 독일 제국이 건국되기 전까지 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계 국가들은 제대로 된 해군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보잘것 없는 해군을 담당하게 된 티르피츠는 황제의 후원, 국민적 지지를 통해서 1890년대 이후 독일의 해군력을 세계 최강으로 일컬어지던 영국의 왕립해군을 위협할 수 있는 세계적 수준의 강군으로 키워냈다. 그러나 해군 내부에선 양적 팽창에만 집중해 병력의 질적 수준에는 무심하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독일 제국이 건국되고 나서 티르피츠는 해군에 남아 계급을 올렸다. 이후 티르피츠는 독일의 어뢰 개발에 힘썼다. 이후 어뢰정 개발에도 힘을 썼다. 티르피츠는 어뢰정 개발이 자신의 최고의 11년이라고 평가하였다.

이후 개발된 어뢰정을 보여주기 위해 빌헬름 2세를 처음 만났다. 이후 어뢰정이 딱히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한 티르피츠는 순양함을 지휘하였다. 이후 카이저는 해군 장교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토론하였다. 티르피츠도 초대를 받았고, 티르피츠는 전함의 건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카이저의 동의를 얻은 티르피츠는 어뢰정 개발을 위해 잘 알던 장교들과 함께 건조 대기 중이던 전함들로 모의 실험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티르피츠의 전술은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프리드리히 폰 홀만과의 갈등을 빚었다. 티르피츠는 8척의 동일한 전함의 배치를 선호하였으나, 홀만은 혼합함대를 선호하였다. 하지만 티르피츠가 카이저의 지지를 얻었기에 홀만은 사임당했다. 이후 티르피츠는 독일 제국해군청(Reichsmarineamt)의 대신이 되기를 추천받았고, 1897년부터 1916년까지 대신으로 역임하였다.

그해 6월 15일, 티르피츠는 카이저에게 영국을 주적으로 하는 해군 작전을 보여주었다. 약 4억 8백만 마르크를 투자하여 더욱더 많은 전함을 건조시켰다. 이때부터 영국은 독일의 적이 되었다. 카이저는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해임되었던 독일 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독일 제국의 구성국들의 대표들에게 찾아갔다. 10월 19일, 해당 법안을 의회로 가져갔고, 의회에서의 연설은 빌헬름 2세의 팽창주의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모두가 이 법안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해군에 대한 소비는 낭비라고 생각하였고, 그럴 바엔 육군을 강화시키는 게 더 낫다고 주장하였다. 게다가 이 법안은 결국 영국을 적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의원들이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이 법안은 통과되었고, 티르피츠는 해군 장관이 되었다. 이후에도 비슷한 법안을 만들어 전함수를 19척에서 38척으로 늘렸다.

결국 티르피츠는 독일 황립 해군을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해군으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티르피츠는 황립 해군을 영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해군으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2.4. 제1차 세계 대전[편집]


티르피츠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황립 해군이 영국 해군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라고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을때 휴가를 갔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제국 해군은 영국 해군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했고, 유틀란트 해전에서의 무승부 이후 잠수함 작전으로 선회하지만 이 때 내린 무제한 공격 명령으로 인해 미국의 적개심을 사게 된다. 빌헬름 2세는 미국의 개입과 도덕적인 이유로 무제함 잠수함전을 꺼렸고, 루시타니아 호가 뇌격당해 침몰하는 등 사고가 연이어 벌어지자 수상 베트만홀베크의 주장을 받아들여 잠수함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티르피츠는 이에 반발하며 사표를 제출하면서 항의했지만, 빌헬름 2세는 대중에게 인기있는 군인인 티르피츠를 함부로 해임하기를 꺼렸다.[2] 그러나 결국 1916년에 3번째 사표가 수리되면서 물러나게 된다.

사임 후엔 독일조국당을 조직해 국회에서 전쟁 수행을 강력히 지지했고, 패전 이후에도 독일 국가인민당의 의원으로써 국회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3월 6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이름은 훗날 나치 독일크릭스마리네에 의해 비스마르크급 전함 티르피츠에게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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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티르피츠'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실제 발음은 티어피츠이나 폰티르피츠 처럼 외래어표기법에 의해 티르피츠가 되었다.[2] 파울 폰 힌덴부르크도 황제에게 항의할때 사표를 내는 방식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