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당시에는 4인조였으며 2008년 김성희의 탈퇴 이후 구하라, 강지영이 합류하여 5인조가 되었으나 2014년 1월과 4월에 니콜과 강지영이 탈퇴, 2014년 8월 허영지가 합류하여 다시 4인조가 되었다. 이후 2022년 15주년 기념 활동을 위해 니콜과 강지영이 재합류하여 6인조가 되었다.
|| 한국인 5명(박규리, 한승연, 구하라, 강지영, 허영지), 한국계 미국인 1명(니콜)으로 구성된 다국적 걸그룹이다. 원년 멤버 3명(박규리, 한승연, 니콜), 탈퇴 멤버 1명(김성희), 신규 멤버 3명(구하라, 강지영, 허영지)으로 DSP의 모든 아이돌 그룹 중 가장 많은 멤버 변화(카라 다음으로 멤버 변화가 많았던 아이돌 그룹은 A-JAX이다.)를 거쳤다.
원더걸스, 걸스데이와 더불어 성공적인 멤버 개편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그룹이기도 하다. 초창기 카라는 데뷔 동기 그룹들에 비하면 인지도도 적고 콘셉트도 명확하지 않았는데, 2008년 구하라와 강지영의 영입을 기점으로 작곡팀 Sweetune의 프로듀싱 아래 명확한 방향성을 잡고 성장가도를 달리게 된다.
2022년 12월 기준 활동하는 걸그룹 멤버들 중 최연장자다. 그밖에도 늦둥이 외동딸, 아역 배우 출신, 개인 활동은 연기 분야 중심인 등 서로 공통점이 많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카라에 계속 함께한 16년지기 죽마고우인만큼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쿵짝이 잘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로 박규리가 애교를 부리는 편. 2013년 10월 8일부터 2014년 5월 27일까지 함께 〈더 쇼〉의 5대 MC를 맡아 진행했다. 카밀리아가 환장하는 박규리 한승연 관계성
허영지가 베이비 카라 시절 테스트 촬영을 하는데 본인과 너무 비슷하게 생겼는데 본인보다 어리고, 하얗고, 큰 키 때문에 허영지의 영입을 반대했었다고 한다. 이후 허영지가 카라에 합류하고 《MOVE AGAIN》 이전까지 수년의 공백기에도 SNS 등을 통해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신입생 짤로도 유명하다.[13]
카라의 막내들. 1994년생 동갑 라인. 《MOVE AGAIN》 활동부터 생긴 새로운 조합이다. 2022년 6월 11일 데뷔 15주년 기념 단체 사진을 찍은 날이 두 사람이 두 번째로 만난 날(첫 번째로 만난 날은 구하라의 장례식)이라고 한다. 빠른 1994년생인 강지영이 막내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하여 1994년생인 허영지와 친구로 지낸다.[16]
한일 양국에서 큰 사랑을 받은 카라지만, 특히 전성기 시절 일본에서의 인기는 한국 여성 아티스트 최초의 단독 도쿄 돔 공연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다.[28]
한국 가수 중에서는 비, 동방신기, BIGBANG, 류시원, 장근석 등이 도쿄 돔 단독 공연을 개최했으나 카라 이전에는 여성 가수의 단독 공연이 없었다. 당시 카라의 도쿄 돔 공연은 일본 최대 명절인 쇼가쓰(お正月)가 주말까지 연결돼 황금 연휴로 꼽힌 시기로 그 때문에 당시 도쿄돔 공연 대관을 놓고 일본의 유명 가수들이 경합을 벌이다 카라가 어렵사리 성공했을 정도로 카라의 위상이 높았다.
카라는 친근함, 즉 높은 대중성을 기반으로 쌓은 엄청난 인지도를 통해 양국에서 메가 히트곡들을 만들어내며 신(新)한류 대표가수로 활약했다.
일본 인기 코미디언 게키단 히토리의 자발적인 열혈 홍보로 상상 이상의 효과를 누렸고, 이후 각종 예능 출연과 무대를 통해 카라는 한류 아이돌로 시작했지만 이를 초월한 대인기를 얻었다. 그들은 일본 내 해외 아티스트들의 일반적인 활동 이상으로 방송가를 누비며 맹활약했으며[29]
카라와 소녀시대의 일본 활동 노선이 달랐던 결정적인 부분으로 소녀시대는 해외 인기 아티스트의 내한과 비슷한 분위기였다면 카라는 각종 유명 방송에 출연하면서 대중에게 깊숙히 어필하며 현지 가수처럼 인기를 얻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카라 멤버들은 피나는 노력을 통해 괜찮은 일본어 구사력을 가졌고. 그 덕에 한창 전성기를 누릴 당시에도 예능 프로그램에 통역을 거의 대동하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출연해 친근한 이미지를 쌓았다. 특히 강지영은 이후에도 꾸준히 실력을 쌓으면서 일본 지상파 방송의 드라마 단독 주연을 맡을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좋다.
이러한 왕성한 활동으로 일본 5~60대 원로 가수들이 연말 가요제인 NHK 홍백가합전에서 〈미스터〉의 엉덩이춤을 추면서 카라를 소개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다. 게다가 카라가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재특회가 도쿄 시내 한가운데에서 혐한집회를 벌일 정도로 혐한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였다. 그런 험악한 환경을 뚫고 일본에서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카라의 일본 활동은 보아, 동방신기 같은 대표적 밑바닥 한류 성공 사례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
2020년대 이후도 카라는 일본 한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가수로 의미있는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한 예시로 2022년 15주년 컴백 당시 일본 〈뮤직 스테이션 슈퍼 라이브〉 총 출연진 66팀 중 엔딩 바로 직전 무대를 배정받고[31]
일반적인 걸그룹과는 달리 이들의 성장통은 각별했다. 데뷔작의 부진과 메인 보컬이었던 김성희의 탈퇴, 기약 없는 오랜 공백 등이 겹치며 슬슬 DSP의 헤게모니는 뒤이어 나올 레인보우에게 집중되는 듯 했다. 그러던 9회말 투아웃의 위기 상황에서 새로 투입된 구하라, 강지영의 만루홈런과 '믿을맨' 스윗튠즈의 완벽한 세이브는 여느 스포츠에서도 보기 힘든 역전 상황을 만들어 냈다. '실패 아이돌'이 '스타'의 직함을 달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역경극복드라마는 그 팬덤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일등 공신이었다. 아이러니일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이러한 실패와 아픔이 있었기에 그들의 열정이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고, 개개인의 실력은 분명 열세였음에도 그룹으로서의 그림을 강조하는 것이 허락되며 고스란히 장점으로 승화되었다.
리얼리티가 미디어를 점령한 시점에서 개개인의 스토리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실력 그 자체가 아닌, 이를 뒷받침할만한 사연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무수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확인해 왔다. 이러한 각도에서 본다면 카라는 아주 이야깃거리가 많은 그룹이다. 1집의 실패와 이어진 멤버의 탈퇴, 두 멤버와 작곡가 집단 스윗튠을 맞아들이며 기적적으로 일궈 낸 성공과 이를 누리기도 전에 불거진 분쟁. 이 연대기를 쫓으며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들의 파란만장한 성장과정이었다.
처음에는 마냥 부족해보이던 아이들이 점차 커가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응원을 하고, 팬으로서의 흐뭇함을 느끼게 되는 부분은 에이케이비48(AKB48)과 같은 일본식 아이돌의 노선과 상당부분 겹쳐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캐릭터의 팀이 국내에는 없다는 점과, 해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갈등 고조와 해결과정에서의 위기감이 상당했다는 점, 음악과 퍼포먼스 측면에서도 눈에 띄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는 점 등이 차별적인 요소로 작용했음을 그간의 행적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중략)
이처럼 카라는 음악만으로는 확실히 설명하기가 힘든 아이돌 그룹이다. 겪어온 일들의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그들의 음악을 듣게 되고, 그 상황에서의 마음을 짐작해보며 잘되었으면 좋겠고, 다음엔 분명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자신도 모르게 가지게 하는 마력이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우연도 겹쳐있긴 하지만, 이미 완성품에 가까운 상태로 데뷔하는 타 그룹들에 비해 부족한 부분들을 솔직히 드러내고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데뷔 당시에는 실패를 맛봤고, 팀의 본격적 성공을 이끌었던 작곡팀 스윗튠과의 파트너쉽, 일본에서의 K-POP 붐 속의 스타덤, 걸그룹 최초의 '노동쟁의'에 가까웠던 100일간의 계약분쟁, 두 번의 멤버 교체까지 파란만장한 시간들을 거치면서 그들은 대형 아이돌 팝 레이블의 '금수저'를 입에 물지 못한 중소 레이블이 그 한계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몸소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2세대 K-Pop 걸그룹들 가운데 카라만큼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서사를 보여준 팀은 그리 흔치 않았다. 일단 데뷔작의 실패와 1기 메인 보컬의 빠른 탈퇴는 방송가 예능에서의 멤버들의 생존 노력과 멤버 보강을 통한 이미지 전환으로 첫 고비를 넘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이후 중소기업형 K-Pop 아이돌의 홍보와 생존법의 표본을 제시한 셈이 되었다.) 그렇게 일단 카라는 국내에서 원더걸스, 소녀시대와 함께 2세대 K-Pop 걸그룹의 3대 선봉장 자리에 차근차근 올라갔다. 이후, 그리고 「미스터」(2009)라는 메가 히트 싱글로 대표되는 좋은 작곡팀(스윗튠)과 안무팀(야마앤핫칙스)와의 결합 시너지가 폭발하며 한국을 넘어 일본과 아시아에서 K-Pop 인기 전파의 주역이 되었다.
카라는 처음부터 주목받으며 일찍이 정상에 선 그룹이 아닌 밑에서부터 점차 성장해 마침내 정상에 오른 대기만성형 그룹이다. 근성이 있고 성장한다는 이미지와 솔직하고 털털한 이미지에 매력을 느낀 팬들이 많다. 한승연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을 생계형 아이돌이 아닌 언제나 노력하며 성장하는 '근성형 아이돌'로 불러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카라 1st》 즈음의 카라의 이미지는 프로듀서가 완벽하게 완성해서 출시되는 걸그룹이 아닌 마치 동네 고등학교 축제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스쿨밴드스러운 풋풋함이었다.[38]
삼중고 탈피 후 대역전의 성공을 이끈 걸 그룹 카라의 차별화 전략
작곡진인 Sweetune은 발표되는 곡들에서 기타 루프 등 스쿨 록스러운 밑밥들을 깔고 있었고, 이는 완벽하게 정제된 기획형 그룹들 사이에서 카라만이 갖는 차별점이 되었다. 하지만 차츰 멤버들의 실력, 특히 한승연-니콜-강지영 세 멤버가 보컬에서 발전을 이루며 전반적인 밸런스가 잡히기 시작하면서 이미지 자체도 레벨업을 반복했다. 이는 소위 일본 아이돌 계에서 말하는 팬들과 함께 성장한다[39]
日 뉴스, "소녀시대는 스타성, 카라는 서민파" 비교
는 케이스에 해당하며, 단순히 무명이 길었다 수준이 아니라 대중과 팬들에게 회자될 만한 서사를 제공하는 소스이기도 했다.[40]
본래 이런 기획은 어찌보면 상당히 구시대적인 발상이었는데, 1990년대 걸그룹의 안티테제를 표방하고 나오는 걸그룹 사이에서 1990년대적 발상으로 오히려 역으로 블루 오션을 개척했다. 이 '성장' 개념은 소속사의 선배 가수인 핑클이 데뷔했을 당시 이효리와 이진이 방송 인터뷰 때 언급했으며 이후 후배 그룹인 APRIL도 이를 이어갔다.
2NE1과 포미닛 이래로 강렬한 사운드를 선보인 걸그룹은 많았지만, 카라를 이들과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 것은 소녀적인 성향이었다. Break It(2007)에서 Rock U(2008)와 Pretty Girl로 넘어오면서 카라의 음역은 사뭇 높게 조정되었는데, 이는 가창력을 담당하는 멤버가 빠져나간 그룹으로서는 얼핏 의아해 보이는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이들의 보컬 연출은 당시로서 꽤나 과격하여, 수시로 소리를 지르거나, 의미 없는 감탄사를 쏟아부었다. Rock U의 핵심 모티프는 날카로운 목소리의 외침(Rock your body I say)이었다. Pretty Girl은 노래하는 목소리로 대부분을 채웠지만, 고음이 두드러지는 백업 보컬이 곳곳에서 본 멜로디를 압도하며 찌르고 다니다, 후반 훅 직전에 캬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듬해의 미스터는 수시로 보컬과 보컬이 엇갈려 흐르는 가운데 틈이 날 때마다 헤이!를 수십 회 속삭이는 보컬 트랙의 서커스를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어떤 이들에게는 가창력의 약화로 받아들여졌지만, 카라의 보컬 트랙은 보다 적극적인 음악적 표현이었다. 음역 조정을 통해 가녀리고 시끌벅적한 소녀를 설정한 뒤, 노래에 해당하지 않는 목소리를 과감하게 활용해 이를 한층 더 강화한 것이다. 목소리에 음향으로서 접근하는 이런 과격한 연출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이후 애프터스쿨(Diva, Bang! 등), 달샤벳(Supa Dupa Diva 등), f(x) 등으로 이어졌다. 걸그룹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가벼워져 크레용팝을 비롯한 어린이 목소리에 도달하는데, 이는 아직 정통파 보컬과 오토튠 사이에 선택지가 없던 카라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경향이었다.
이 시기 발표된 <Rock U>는 카라의 발표곡 중 가장 보컬 퀄리티가 떨어졌다. 당시에는 팬들도 가창력을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후 Pretty Girl 활동으로 인기는 높아졌지만 취약한 보컬은 해결되지 못했는데, 한승연이 부단한 노력을 통해 곡 중심을 잡는 리드보컬 역할을 맡으며 박규리를 받쳐주면서 안정화된다. 그리고 박규리가 성대결절로 수술을 한 2012년 이후에는 한승연의 파트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카라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2000년대 후반에는 음악 방송이나 행사장 음향 환경이 좋지 못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이어 부족으로 명색이 5인조 그룹인데 활동 당시 방송에서 인이어는 많아야 2~3개 밖에 쓰질 못해서 끽해야 박규리와 한승연 정도가 인이어를 쓰거나 상황이 안 좋을 땐 한승연 혼자, 아니면 아예 인이어 없이 공연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45]
인이어가 없으면 공연장 소음과 음향구조 특성상 가수 본인이 반주를 제대로 들을 수가 없어 라이브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또 멤버들 구성이 고음역대에 쏠려 있다는 것도 문제로 꼽혔다. 사실 카라의 노래들은 대부분 후렴부에서 고음이 계속되기 때문에 꽤 부르기 어려우며 특유의 느낌을 내기도 어려워서 노래방에서 따라부르기 어려운 곡들이 굉장히 많다. 아이돌 그룹이라고 해도 안정적인 음악을 위해서는 저/중/고음역대를 소화할 사람이 골고루 필요한데, 카라는 저음역대를 맡아 줄 멤버가 없었다.[46]
이는 전성기에도 카라가 '메인보컬 없는 그룹, 인기에 비해 실력 없는 그룹'이라는 인식을 떨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한데, 박규리는 창법 특성상 폭발적으로 뽑아낸다기보다는 가늘고 간드러지게 이어가는 타입이라 한국의 디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는 좌우에서 박규리를 보좌하는 강지영/한승연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둘 다 음역대와 안정성은 좋지만 타고난 음색이 얇고 가볍기 때문인데, 선천적으로 부족한 이 점을 커버하려면 보컬 트레이닝 등을 통해 기본 발성이나 공명점 자체를 새로 갈고 닦아야 하는데 당시 카라는 이럴 여유가 없었다.
활동 후반기에 들어서며 멤버들의 실력이 많이 성장했는데도 카라가 '좋은 가창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단점은 니콜과 강지영의 탈퇴로 그룹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허영지를 영입하며 완전히 해결된다.[47]
카라를 비롯한 2세대 아이돌들은 소몰이창법 전성시대의 끝물에 등장했으므로 음악 방송에선 라이브가 당연한 시절이었고 대중들의 '가창력' 기준 역시 높았다. 당시엔 방송가에 보편화된 '라이브 AR' 같은 기술이 전무했으며 따라서 가수들의 실력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던 시기였다.
중 〈뮤직뱅크〉 473회 〈Rock U〉 무대를 살펴보면 인이어를 한승연과 박규리만 끼고 있다.[49]
그리고 당시 음악 방송 환경상 AR이 깔리는 부분은 곧바로 티가 나는 데다 코러스 부분까지 핸드마이크를 쥔 멤버들이 전부 부르는데 안무도 전부 소화했다. 즉, 이후 세대 아이돌 기준으로는 당시의 카라 역시 선입견과는 달리 괜찮은 가창력을 갖추고 있었다 여겨도 무방하다.
반전의 낌새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미스터〉 활동 즈음으로 반응이 좋아 급하게 후속곡으로 전환된 것이긴 하지만 카라의 활동곡 중 최초로 한승연이 스타트를 맡지 않은 곡이었다. 한승연이 균형을 맡고 박규리가 리드하는 체제에서 나머지 멤버들 비중이 늘어나고 특히 니콜이 무대 안무와 고음부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고군분투하던 두 멤버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이후 일본에서 먼저 활동을 시작하게 된 《점핑》에서 한차례 더 발전하는데, 니콜이 무대장악력과 래핑, 포인트를 주는 보컬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강지영의 보컬이 급성장하면서 파트가 급속하게 증가했다. 그리고 구하라 역시 라이브에서 생목으로 노래하는 경우가 없어지고 클라이맥스에서 가성 비슷하게 포인트를 주는 것으로 역할이 잡히면서 팀의 보컬 구성 자체가 한층 안정감 있게 변화했다. 일본 활동에 집중하던 시기에 발표된 싱글들은 한국 활동 시절보다 향상된 보컬 퀄리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정규 3집 《STEP》 활동 때는 강지영이 한 단계 더 성장하면서 박규리와 리드를 양분하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더불어 구하라가 저음부로 포지션을 변경하는 듯한 시도도 엿보였다.
2012년 2월에 개최한 단독 콘서트 〈KARASIA 2012 The 1st Concert〉에서는 멤버 전원이 확실히 예전보다 진보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토요일 공연에서 5인 체제가 된 이후 처음으로 정규 1집 《Blooming》 타이틀곡 〈Break It〉을 선보였는데 강지영이 박규리와 분담하긴 했지만, 과거 김성희 파트를 소화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카라의 역사와 성장을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었다. 2012년 12월에는 멤버별 솔로곡이 스페셜 앨범 《KARA Solo Collection》을 통해 공개되면서 솔로곡을 안정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특히 기존 이미지와 전혀 다르게 록발라드를 내세운 강지영이나 탱고를 선보인 박규리는 상당히 재평가받았고 2014년 11월 〈KARASIA 3RD JAPAN TOUR〉의 구하라 솔로 무대 영상이 팬 직캠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50]
메인댄서 포지션의 니콜이 걸그룹 멤버 중 대표적인 댄서로 꼽힌다. 배윤정이 자신의 제자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제자로 니콜과 티아라의 지연을 꼽았으며 니콜은 카라의 전성기 활동 당시에도 느낌있는 춤사위 뿐만 아니라 직접 랩 메이킹을 소화하고 보컬까지 가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인정받았다. 구하라 역시 니콜과 페어를 이루며 팀내 댄스 라인을 이끌었다.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안무가 카라 무대의 정체성으로, 특히 중독성 강한 〈미스터〉의 엉덩이춤, 〈STEP〉의 골반댄스, 〈맘마미아〉의 왁킹 등 카라 멤버들은 무대에서 격렬한 춤을 소화하면서 수준 높은 가창까지 함께 선보였다.
데뷔 초기 '생계형 아이돌'이라는 독특한 별명을 갖고 있었는데, 멤버들의 이야기나 당시 예능 프로그램에서 공개된 숙소캠 등에서 짠내나는 에피소드가 더러 있었다.
2007년 데뷔 때부터 같은 숙소를 쓰면서 숙소 공개할 때마다 그 변천사를 알 수 있다. 데뷔 무렵에는 TV가 없던 상태였으나 2008년에는 약 20인치로 보이는 브라운관 TV를 장만한 듯하다.
2008년 12월 25일에 방송된 〈소년소녀가요백서〉에서 니콜은 "우리 집 TV가 케이블이 안 나온다"고 밝혔다. 이 발언 때문에 팬들이 선물로 TV와 케이블을 선물하려고 했는데, 한승연은 스케줄로 바빠 숙소에서 TV는 거의 보지 않는다며 고사했다.
2009년에 방영된 MBC 추석 특집 프로그램인 〈달콤한걸〉에서 휴지 경품에 목숨걸며 "휴지가 없어서 미용실에서 볼일을 봤다.", "방송국 등에서 휴지를 가져오곤 했다."는 발언을 했다.
정규 2집 《Revolution》 준비 당시 거실에서 방석 들고 윗몸 일으키기 하면서 다이어트를 했다고 라디오에서 고백했다. 그리고 2010년에 방 네 개짜리 집으로 이사갔다.[53]
[피플Q|카라의 변신, 그 모든 것] 쉿! 우리 방 4칸짜리로 이사 가요
숙소가 〈하하몽쇼〉 2회와 3회를 통해서 공개되었다. 각각 독방을 쓰고 구하라와 강지영만 한 방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숙소는 이후 후배 보이그룹인 A-JAX가 썼다.
정규 2집 《Revolution》 발매 이후에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숙소를 바꾼다'고 이야기하는 등 생계형 이미지를 점차 벗어나게 된다. 2009년에 방영한 〈SBS 아이돌 빅쇼〉에 나온 숙소는 그대로였지만, 한승연이 휴대용 DVD 플레이어를 사용하거나 한 명당 하나씩 노트북이 있는 모습을 보면 쪼들리는 정도는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파브 3D TV 광고도 찍는 등 그룹의 성장세가 계속되었고 2011년 《STEP》 활동부터는 각자 자택에서 생활하면서 숙소생활을 청산하였다.
생계형 아이돌 이미지는 한승연의 소위 '소녀가장' 이미지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만큼 정규 1집~미니 2집 사이에 한승연의 고군분투는 시대가 꽤 흐른 뒤에도 전설처럼 회자되는데, 정규 2집 《Revolution》이 큰 인기를 얻고 한승연 본인도 삼성그룹 기업광고를 찍으면서 '생계형 아이돌'의 이미지를 점차 탈피하게 되었다. 이후 카라라는 그룹 자체가 기획사를 먹여 살려야하는 상황에 처했는데, DSP의 다른 축이었던 SS501이 각 멤버들의 계약 만료로 다른 기획사로 이적하면서 활동을 중단했고 이호연의 뇌출혈 투병 이후 DSP의 사세 자체가 기울었기 때문이다.
DSP 하면 떠오르는 핑클의 직속 후배답게 데뷔 초부터 적절한 예능감으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했다. 카밀리아 사이에서 회자되는 엠넷의 〈카라 베이커리〉, 〈유쾌한 니콜의 수의학개론〉 등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KBS 〈스타 골든벨〉과 〈청춘불패〉 등에서는 고정 멤버로 활약했고 박규리의 무리수로 가끔 언급되는 SBS 〈도전 1000곡〉에도 굉장히 자주 출연했다. 또 당시 인기 방송인이라면 반드시 출연했던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나 〈강심장〉 등에도 자주 출연했다. 한참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에는 멤버들 각자의 고정 프로그램도 매우 많았다.[54]
대중의 반응을 얻지 못했던 데뷔 초반에는 케이블 채널을 전전하며 팀을 알리기 위해 애쓴 한승연이 소위 '소녀가장'으로 불리며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고,[55]
〈강심장〉 5회()에서 한승연이 해당 시기 이야기를 풀었다. 한창 때는 일주일에 고정 예능 프로그램이 7개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미스터〉로 성공가도를 달린 정규 2집 《Revolution》 활동부터 수많은 광고를 찍었다. 2010년 3월에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온라인 선거홍보대사로 선정되었고 4월 미니 3집 《루팡 (Lupin)》 활동 이후 첫 TV 광고로 빼빼로 광고를 찍었다. 구하라는 미샤의 인터넷 브랜드 어퓨의 모델로 발탁되었으며 2010년 월드컵 기간 이후 파브 3D TV 홍보를 맡기도 했다. 또한 한승연이 참여했던 두근두근 투모로우의 새로운 인터넷 캠페인을 2AM과 함께 하기도 했다. 기아 프라이드 광고로 꿈에 그리던 자동차 CF도 촬영했다.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2011년 일본에서 당대 톱스타만 촬영한다는 TBC CF를 촬영하기도 했다.[63]
에스테틱 시장점유율 일본 1위로 데이비드 베컴, 기무라 타쿠야, 나카타 히데토시, 장근석, AKB48의 인기 1, 2위인 마에다 아츠코, 오오시마 유코가 광고 모델로 나왔다.
한승연은 척추 부상 때문에 2010년 공연에 불참(카라 한승연, 척추 부상으로 한류드림콘서트 불참)했다.
한승연의 SNS에 '쬬뽕'이라는 정체불명 문구가 등장면서 팬들 사이에서 해석이 분분했다. 이후 2010년 11월 말 〈해피투게더 3기〉에서도 한승연이 '쪼뽕'을 사용하며 궁금증을 증폭시켰는데, 2010년 12월에 방송한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를 통해 이 호칭이 서로를 부르는 애칭인 것이 밝혀졌다. 각각의 특징에 ~뽕을 붙여서 부른다고 한다.[74]
주당 걸그룹으로 유명하다. 구하라를 제외한 멤버들 5명 전원이 전부 애주가이며 이 중에서 술이 제일 센 멤버는 박규리. 허영지도 술로는 어딜 가도 안 지는 편인데, 카라 멤버들 앞에서는 한 수 접었다고 한다. 멤버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면 애주가 그룹은 박규리, 니콜, 카페 그룹은 한승연, 강지영이며 허영지는 두 그룹 모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