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조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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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조청전쟁
기간
1864년 12월 경 ~ 1865년 3월 1일
장소
한반도 북부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400px-Left-facing_dragon_pattern_on_Wanli_Emperor's_imperial_robe.svg.png 청나라
지휘관
이형
허계
유창근[1]
홍우길[2]
서태후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괄갸 후쥔
훌리가이 지르갈랑
보오르추
병력
금위영 4,000여 명
북방군 50,000여 명
의용군 40,000여 명

총10만 명 [3]
총 16만 명[4]
피해
사상자 약 3천명

전사자 최소 2만 6천명 이상 포로 3만명 이상
결과
조선의 대승, 봉천 조약의 체결
영향
청나라의 지린성 할양으로 인한 조선의 만주 진출
만주황실 직속군 팔기군 전멸
태평천국의 난 재궐기

1. 개요
2. 배경
3. 진행 과정
3.1. 준비
3.2. 우세와 열세
3.3. 조선왕의 친정
3.4. 청군의 후퇴
4. 전후 처리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나오는 가공의 전쟁. 이 이야기 초반을 장식한 전쟁. 고종 즉위 원년인 서력 1864년에 벌어진 전쟁이며 고종의 첫 번째 친정이기도 하다. 이 승리로 인해 조선은 순조롭게 근대화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되었고, 청나라는 더욱 극적으로 추락하게 된다. 참고로 앞에 '제1차'가 붙어있는 이유는 훗날 벌어지는 제2차 조청전쟁도 있기 때문이다.


2. 배경[편집]


21세기에 살고 있던 작중 주인공인 이원철은 자신의 삶을 비탄하며 술에 취해 거리를 걷던 중 실수로 자신의 앞에 공사 중이라 하수구 뚜껑이 열려있던걸 발견하지 못해 그대로 추락하여 목이 꺾여 죽게되는데, 즉위 직전의 고종으로 빙의하게 된다. 모종의 이유로 고종에 빙의한 이원철은 왕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조선이 다시 힘없는 나라의 수모설움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로 여러 가지 고심을 한 끝에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닌 자주국임을 세계에 알려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시작하려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사실 반청감정을 내세워 배척의 대상을 청나라로 국한해 이후 개항하면서 필연적으로 들어오게 될 서양인들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려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5]

그렇게 고종은 즉위를 하기도 전에 "청나라는 더는 서역 오랑캐들로부터 천명을 지켜내지 못하였으니 청의 천하는 저물어간다. 이에 북적 오랑캐인 청나라를 몰아내고, 어버이인 주명의 원수를 갚자!"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았다.[6] 당대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와 양반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생부와 양어머니까지도 말이다.[7] 그리고 새 국왕의 포부를 보고 들은 젊은이들과 몰락한 양반(잔반)들, 그리고 지방향림들은 '지금은 난세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전하께서 뭔가 해주시려나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에 누군가가 이러한 상소를 올린다. 참고로 아래 상소는, 실제로 영조 때 김약행이란 인물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각색한 것이다. (영조 44년 6월 11일 정묘 1번째기사)

삼가 아뢰옵니다. 숭정 갑신년[8]

이래로 천하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고 세상에 오랑캐 천하가 된 지도 이백하고도 스무 년의 세월이 흘렀사옵니다. 하오나 저희 조선은 중화의 다스림을 보존하여 성현의 계통을 잇고 있으니, 이는 조선의 지복이요 천하를 밝힐 등불이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하여, 청컨대 교체(郊締)[9]

의 예를 행하고 태묘에는 구헌(九獻)[10]과 팔일(八佾)[11]의 의절을 행하소서. 그리고 영조 대왕 이하 오묘(五廟)에 휘호(徽號)[12]를 소급해 올리소서.


장황하게 올린 글이지만 간단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칭제건원을 해달라는 거다.

물론 제1번국의 제후가 즉위하자마자 저따위 기어오르는 소리나 하는 것을 듣게 된 청나라는 극대노하였다. 이에 청은 수렴청정을 맡던 조대비에게 "지금 국왕이 너무나도 오만방자하여 왕이 될 자격이 없으니깐 당장 새로 뽑아!"라고 했다. 하지만 2차례에 걸친 아편전쟁의 여파와 태평천국의 일까지 겹치면서 혼란스러운 내부 사정 때문에 청나라는 서태후가 다음과 같은 국서를 조선에 보내면서 순순히 고종을 조선의 왕으로 책봉해줬다. 다음은 서태후의 국서 내용이다.

짐이 그동안 격조하여 미처 동방에 마음을 쓰지 못하여 조선의 만백성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들었도다. 군주된 도리로 신하가 안심할 수 없도록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짐이 부덕한 탓이다. 하나, 짐이 맹세하던데 서역 오랑캐들은 두 번 다시 중원을 넘보지 못하리라.

오랑캐들은 감히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며, 변경을 사수하는 짐의 장수들은 용맹한 만인지적의 장사들이고 백만에 달하는 충용무쌍의 병졸들은 감히 오랑캐들의 비루하고 치졸한 도적 떼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되느니라. 이는 대청국을 오랜 세월 섬겨온 그대들 조선 또한 알고 있을 바, 이만 말을 줄이도록 하겠노라.

서역 오랑캐들을 가까이하지 말지어다. 저들은 재화에 눈이 먼 금수와도 같은 탐욕의 망자들이며 그 천성이 비루하고 비열하기 그지없는 도적 떼들과 같으니, 오랑캐들을 멀리하고 항상 그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지어다.


요약: "뭣모르고 헛소리 지껄인 건 그냥 웃으면서 눈감아 줄 테니까, 괜히 서역 오랑캐들과 어울려다니면서 대형사고칠 생각 말고 조용히 찌그러져서 지내기나 해."[13]

그리고 고종은 청나라가 반년도 되지 않아 자신의 국왕 책봉을 해준 것에 그들의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승정원을 장악하여 그들을 통해 여론을 장악하려 했다. 그런데 여기서 변수가 생겼다. 이제껏 전쟁에 반대했던 김좌근이 갑자기 태세를 바꿔서는 주전론을 내세운 것이다! 심지어 친 대원군 파들을 천거해주기까지 했는데, 사실 그 이유는 이상의 아이디어가 흥선대원군한테 나왔다고 착각해서 '"그럼 어디 등 밀어줄 테니까 네놈이 말한 대로 선전포고해봐라. 그럴 배짱 있나."'라는 심보였다. 그리고 이 추측대로 흥선대원군은 어디까지나 해당 아이디어를 안동 김씨 압박할 뻥카로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김좌근이 이리 나오니 당황하며 뒤로 빼는 반응을 보였고, 김좌근 측근들도 이에 옳다구나 하고 달라붙으면서 친정 이야기까지 꺼냈다.

그런데 이 순간 고종이 "친정이라... 그것 참 좋구려. 그 옛날 태조 대왕께서도 말을 타고 만주 벌판을 누비고 다니셨거늘, 과인 또한 못할 것이 뭐가 있겠소? 당장 말을 알아보시오. 오늘부터 당장 승마를 연습하리다."라며 맞받아치더니, 연판장을 가져와서 주전론자 명단 제일 위에다 김좌근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에 조대비는 혼절하고 말았다. 그렇게 고종에 의해 김좌근은 주전론자의 대표가 되었다.

이는 고종의 다분히 계산적인 판단이다. 설령 김좌근이 자신을 죽이거나 폐위시킨다고 한들, 청나라가 김좌근을 내버려둘 리가 없어서다. 저 때의 고종은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고, 실세는 김좌근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상식적으로 보면 실권을 차지한 권신과 10대 꼬꼬마 국왕 중에서 저런 미친 소리를 내뱉을 사람으로 유력한 인물은 당연히 전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전은 후자가 그 말을 했다는 거.


3. 진행 과정[편집]



3.1. 준비[편집]


전쟁을 결심한 고종은 서역 오랑캐들에게 힘없이 무너진 청나라보다도 훨씬 열악한 조선의 엉망이 된 상황 때문에 내부 개혁을 위해 서원 철폐와 금광 개발, 반역향 철폐와 공명첩 대거 발부 등을 진행시키는 것과 동시에 의병들을 긁어모으면서 서양 열강들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한다. 우선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를 통신사로 삼아 일본으로 보내 서역과의 접촉을 시도한다.[14] 그리고 김좌근은 안동 김씨 종친들을 불러모으면서까지 전근대적인 민족주의와 소중화 사상을 결합시킨 격문을 쓰며 반청 여론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는 청나라는 전쟁의 총책임자를 김좌근과 그의 안동 김씨로 여기기 때문에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

본래 여진족이라고 하는 족속들은 말갈족들을 조상으로 둔 족속들로, 옛 고구려발해에서는 삼한의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말 위에서 활 쏘는 법을 배우며 가르침을 청하던 덜 떨어진 족속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덜 떨어진 족속들이 발해가 망하고 만주에 군왕다운 군왕이 사라지니 제 잘난 줄 알고 힘만을 뽐내며 중원을 능멸하고 인조대왕 적의 두 차례의 호란으로 어버이와 같은 삼한의 백성들을 겁박하니, 이 어찌 가증스럽지 아니할 수 있을까?

하여 우리 대조선국은 옛 대고려와 주명의 천명을 이어받은 해동성국이요, 동방의 소중화일지니. 마땅히 떨쳐 일어나 저 은혜도 모르는 가증스러운 북적들을 마땅히 훈계하고 이치로서 통치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게 박규수가 잠시 일본으로 떠나자 고종은 파리외방전교회 조선대목구장의 베르뇌 장 시메온[15] 주교를 불러들여 "가톨릭 박해를 금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할 테니, 곧 있을 청과의 전쟁에서 조선의 정당함을 인정받고 싶다"는 요청을 한다. 그렇게 얼마 후, 베르뇌 주교의 연락을 받고 강화도를 통해 입국한 프랑스 함대와 앙리 벨로네 주청 프랑스 공사와 접촉에 성공한다. 그리고 가톨릭 신앙의 자유, 3개 항구(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 그 대가로 프랑스 공사관 설치와 프랑스제 무기 판매 등을 조건으로 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그런데 이때, 조선이 프랑스를 끌어들이면서까지 전쟁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서태후는 격노하여 "조선의 국왕이 미혼이니 청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고 싶다"는 요청을 거부하고 냅다 전쟁을 개시해버린다. 청나라는 몽골의 친왕인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16만의 대군으로 압록강을 넘어 국경에서 조선과의 교전을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조정의 대신들은 하나 같이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강화도로 도망을 치자고만 하자는 소리들만 늘어놓는다.[16] 와중에 고종은 특단의 결정을 내린다. 그것은 바로 평양성으로 전진형 파천을 하겠다는 것.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고종이 강화도나 다른 곳으로 파천을 하여 이겨도 그것은 조선의 승리가 아닌 서구열강의 승리이며 이를 통해 서양이 조선을 침탈할 명분을 제공하는 꼴이 되니 그렇다. 2번째는 왕을 위해 10만이 넘는 의병이 모였는데 왕이 비겁하게 숨어만 다니면 과연 훗날 누가 왕과 나라를 위해 나설 것이며, 의병장들의 명성만 드높아져 왕권이 실추될 거란 우려에서였다.(대표적으로 선조와 인조) 3번째는 설령 일이 잘못되어 국왕인 고종이 죽거나 포로가 되더라도 누군가가 책임을 졌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야 조선이 그것을 통해 개혁을 진행시킬 수 있기 때문. 그렇게 고종은 4천의 기병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다.[17][18]

이로 인해 불란서(프랑스)는 청나라에게 엄청 열받아했는데, 개방적인 국왕 덕분에 통상조약의 도장을 찍기 일보직전에 갑자기 쳐들어 온 청나라에게 방해를 받은 것이니 말이다.[19]

3.2. 우세와 열세[편집]


16만의 청군은 대령강 하류로 밀어닥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허나 공격하는 입장인 청군은 숫자도 숫자였지만 그 유명한 팔기군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반면, 수비하는 입장인 조선군은 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정규군이 아닌 민병들이었다. 그런데 청군은 예상과 다르게 쉽게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군의 총통부대가 얼어붙은 강에 포격을 가하면서 강에 금이 가니 자칫 잘못하면 대병력이 강에 빠져 죽는 불상사가 터질 수 있기 때문.[20] 실제로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앞에 나선 오장들이 물에 빠져 죽거나 조선군 포수들에게 저격당해 죽는 경우가 발발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총사령관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 지르갈랑에게 3천의 기병을 주고는 상류에서부터 우회해서 측면에서 조선군을 치게 하였고, 셍게린첸 본인은 계속 이대로 조선군의 시선을 끄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끝나기 전에 전쟁을 끝내라는 서태후의 강한 명령 때문에 충분한 정찰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거기다가 서태후는 5~6만의 기병만 데려와도 충분하다는 그의 조언을 무시하고 숫자만 많으면 장땡이라고 생각했는지 16만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억지로 떠맡겼다. 이 때문에 원래 부족한 보급은 더욱 빨리 바닥을 드러냈고[21], 겨울이기에 쉽사리 원하는 대로 전쟁을 진행시킬 수도 없는 상황.

거기다 만주 팔기군의 상태도 말이 아니다. 셍게린첸과 같이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춘 몽골인 병사들과는 다르게[22] 기강과 기량도 형편없는 이들이기에 개전 초기부터 6천에 달하는 병사가 사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었기에 셍게린첸은 4만의 기병들을 먼저 앞장서게 하고, 12만의 보병들은 이를 뒤따르게 했다. 그러나 개전 초기부터 계속 조선 민병들에게 시달린 기습은 끊이질 않았다. 그것도 오장과 초관들을 정확히 쏴 맞추고 사라지니 병졸들 사이에는 동요가 일렁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렇지 않아도 개판 중에 개판인 병사들이니 행군에 차질이 생기게 되어 셍게린첸은 부상병들을 두고 가는 판단을 내리면서까지 한양 진공을 향해 서둘렀다.

그런데 셍게린첸은 갑작스레 조선인들이 지난 전쟁에서도 민병을 꾸려 싸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극성은 아니였다는 생각에 왜 그렇게까지 사력을 다해 싸우는지 의심을 품었다. 이에 휘하 장수인 지르갈랑이 조선의 국왕이 친히 전장에 나왔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12살 밖에 안 되는 아이가 전장에 나설 리가 없다며 헛소문으로 치부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다.


3.3. 조선왕의 친정[편집]


이때 조선의 국왕은 16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오느라 더뎌질 수 밖에 없었던 청군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4천 명에 불과한 기병대만을 이끈 덕분에 청군보다 먼저 평양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사기가 높아진 조선군은 수성전을 준비한다.

팔기군의 장수들은 평양성을 향해 도발과 항복제안을 번갈아 하고 이형은 이를 맞도발하며 욕설로 화답한다. 나흘 뒤에 청군 보병대가 도착하면서 양군은 전투를 치루게 되고, 둘다 야습할 능력이 안돼서 익일 해가 밝자 공성전을 개시하고 대역물에서 유례없던 병림픽이 시작되었다. 양쪽의 대포는 관리불량으로 절반조차 발포되지 않았고, 조선군은 끓일 기름이 없어 물을 끓이려해도 금방 식어서 장작낭비에 불과하고, 심지어 나눠주는 주먹밥에는 돌까지 섞여있는 상황.[23]

청나라의 상황도 결코 만만치 않았는데 만주팔기의 활쏘기 실력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떨어져 화살을 쏴도 대부분이 성벽을 넘지도 못했고, 용케 성벽을 넘어간다해도 화살은 군납비리로 쇠촉이 아닌 나무촉이 끼워져있어 돌팔매보다 못했다. 또한 목수 경력도 없는 팔기군의 급조 사다리는 툭하면 무게에 못 이겨서 추락사에 압사하게 만들고 조선군은 팔기 열댓명에게 수십명이 겁을 먹고 진형붕괴 위기에 몰렸다가 금위영이 겨우 지켜내는 등 양군의 추태는 끝이 없었다. 이렇게 도찐개찐의 병림픽이 오고 가는 와중에 사기가 드높은 쪽은 조선이었는데 왕과 고향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다지면서 사기를 유지시킬 수 있는 반면, 청나라는 침략하는 입장이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서태후의 강압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조선으로 쳐들어 오게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열한 공방전을 가장한 병림픽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평양성의 외성이 무너지면서 외성 함락을 직감한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창근은 철퇴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고종이 갑자기 금위영의 기병 150명을 이끌고 적진 기습을 감행한다! 조선군과 청군 모두 아연실색한 것은 매한가지. 물론 고종은 일직선으로 빗자루 쓸듯이 적진을 붕괴시키며 평양성으로 돌아가려는 전략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고, 이를 눈치 챈 셍게린첸은 서둘러 병졸들에게 고종을 사로잡으라고 지시를 내린다. 하지만 일반보병들로는 빠른 속도로 돌진하는 기병을 막을 방법이 없었고 몽골팔기군 기병들이 고종을 사로잡기 위해 나선다.

몽골팔기군의 기병들은 왕을 지키기 위해 죽어라 공격하는 금위영과 평양수비군 사이에 끼어서 정신없이 얻어맞아 큰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혼잡한 상황에서 고종은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는 불상사를 겪게 되지만 끝내 청군을 엿먹이고 성으로 귀환하는 것을 성공했다.

참고로 청군은 고종을 반드시 산채로 잡아서 항복하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화포부대와 궁병, 총병은 공격하지 못했다.[24]


3.4. 청군의 후퇴[편집]


그렇게 고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자 가뜩이나 바닥을 기던 청군의 사기는 땅끝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셍게린첸은 오합지졸인 팔기군으로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라고 판단하고, 후퇴의 징을 울리라고 했지만 팔기군은 조선의 땅에서 완전히 후퇴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셍게린첸은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통제를 잃은 청나라군은 계속 도망칠 뿐이었고, 사기가 오른 조선군은 그대로 추격을 개시한다. 결국 그날 하루만 2만명의 청군이 사망, 3만에 달하는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으며 셍게린첸의 직속 몽골 팔기군 2만 8천명이 압록강을 넘어 달아났으며 나머지 청군들은 혼비백산 어디론가 도주해버렸고, 그렇게 조선은 대승을 거두게 된다.[25]


4. 전후 처리[편집]


조선이 승리를 하였지만 그들도 내부에 산재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좌근의 반역. 당시 조선과 청나라 모두 김좌근이 이번 전쟁을 꾸민 이유를 그가 정말로 역성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그런 거라 의심했고, 결국엔 김좌근이 정말로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김좌근은 이하응과 왕당파 세력들을 겁박하여 가두게 되지만[26] 그 반역이 성공할 수 없을 거라 예상한 김병학이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따로 만나서 4만의 병력을 끌고 평양성으로 향하면서 이 사실을 고종에게 알리게 된다. 이에 고종은 김포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을 이용할 생각도 했다가 전에 얘기했던 청나라 공주와의 혼사 문제, 그리고 조선왕의 심왕 겸직 등을 논의하기 위해 김병학을 사신으로 삼아 청나라로 보내고 유창근을 도원수로 삼아 봉천을 포위하라 명한다. 그리고 허계와 금위영 150명만을 이끌고 한양으로 향한다. 한양에 가기 직전, 고종은 군수물자를 가지고 온 프랑스의 벨로네 공사를 만나 청과의 전쟁 종전을 맡기고, 고종은 천주교도들을 통해 승전 소문을 내도록 지시를 내린 뒤 벨로네로부터 중고 미니에 소총 150정을 인계받아 반역을 진압하러 간다. 그것도 정문으로 당당하게.

한편, 김좌근은 모든 이의 반발을 묵살한 채, 오군영 병력을 동원하여 도성을 장악했다. 이하응을 잡아가둔 김좌근은 즉시 강화로 파천을 준비하게 하지만, 애당초 민초들의 신임을 얻기는 커녕 원망의 대상이였고, 고종이 나라를 위해 스스로 앞장서서 전쟁터에 나간 이유 때문에 왕권과 왕실의 권위가 하늘 높이 치솟은 상태였다. 즉, 반역이 실패하기에 딱 좋은 조건인 셈. 결국 숙정문에 도착한 고종을 본 오군영 병사들을 시작으로 도성 내의 의병들과 백성들 모두 고종에 합류하여 김좌근은 돈화문에 배치한 자신의 사병들로 저항을 시도해보지만 고종을 호위하던 30여명의 금위영 병사들이 3차례에 걸쳐 미니에 소총 사격으로 허무하게 끝이난다. 결국 김좌근의 반역은 부질없이 끝나게 되어 반역에 가담한 자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국문을 받으며 죽는다. 그러나 김좌근은 운좋게도 고문을 받기도 전에 이번 반역에 대한 실패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심장마비로 죽게 된다. 그리고 피난을 갔던 조대비가 돌아오면서 조선은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게 된다.

그리고 청나라는 10만의 조선군의 봉천 포위[27], 러시아 정예 기병군단 1만의 흑룡강 남하, 홍수전의 태평천국 반군 60만의 북진, 몽골친왕 셍게린첸의 반기까지 이어지면서 총체적 난국에 빠진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프랑스의 벨로네 공사가 조선군과 함께 나타나면서 화친을 중재하겠다고 나서면서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프랑스도 이 일에 개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애초에 서태후는 이번 전쟁이 프랑스와 조선이 손을 잡는 것을 막고자 무리하게 일으킨 거지만 이 모든 것이 헛된 시도에 불과했다는 생각에 절망하게 된다. 이에 서태후는 사태를 조금이나마 타개하기 위해 조선에게 심양-봉천부, 그리고 심왕 작위를 주고, 공친왕 혁흔의 딸인 영수고륜공주를 고종에게 시집을 보낸다. 얼마 후, 공친왕은 본인이 자청하여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봉천으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봉천 조약이 이루어지게 된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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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안도 병마절도사.[2] 평안도 관찰사.[3] 다만 이들 중 정규군은 1만여명의 북방군과 금위영 4천명 뿐이고, 나머지는 급하게 징집한 의용군에 가깝다. 조선이 실제로 10만 대군을 운용한 것은 평양성의 전투로 승패가 명확히 갈린 이후 봉천을 향해 북진할 때였다.[4] 기병 4만 명, 보병 12만 명. 기병들은 약 3~4만 상당은 만주족, 한족이 아닌 몽골족이다.[5]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점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21세기 사람이었기에 미래를 볼 줄 알았고 생전에 사학도였기에 미래를 만들 능력도 있었다. 이 두가지가 결합되어 제1차 조청전쟁을 시작으로 엄청난 변수가 발생한다.[6] 물론 전쟁을 하게 되면 제일 고생하는 민초들은 떨떠름하게 이 사태를 지켜볼 뿐이었다. 민초들에게 있어서 중원이 명나라가 됐든, 청나라가 됐든 그저 되놈들일 뿐이니깐.[7] 당연한 소리지만 현실 역사에서도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치가들은 말만 반청을 (내부적으로) 부르짖었지 이들이 적어도 조선이 청나라를 정벌할만큼의 강대국이 아니라는건 병자호란 직후부터 이때에도 알고 있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윤휴만이 진짜로 북벌을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내놓긴 했는데, 현실성 없다는 이유로 거의 실현된 것은 없었다.[8] 명나라청나라에게 패망한 년도다.[9] 임금이 제사를 지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10] 천자가 잔치 때 아홉 번의 술을 받거나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아홉 번의 술을 올리는 의식이다.[11] 나라에서 큰 제사 때에 추는 춤.[12] 죽은 왕후에게 올리는 시호.[13] 사실 청나라도 이런 고종(이형)의 되도않는 헛소리를 진심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현실에서도 고종의 즉위 당시 나이는 12세이기 때문. 그러니 대충 누가 헛바람 집어넣어 헛소리를 했다는 것이 더 그럴듯 해 보였을 것이다. 거기다 김좌근이 주전론 얘기를 꺼내버려 그 헛바람 집어넣은 사람은 졸지에 김좌근이 되고 말았다. 결국 청나라는 겉으로는 고종에게 경고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뒤에서 헛바람 집어넣어준 자에게 경고하려던 셈이다. 그리고 그게 사실 상식적인 선에서 나올 소리고.[14] 이때 고종은 이하응에게 통신사를 보내는 이유를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조공이 끊어질 예정이니 일본과의 교역을 늘리려고 그런다고 말했다.[15]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4대 교구장. 실제로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 작중에서 이때는 아직 병인박해가 일어나지 않은 시점이다. 참고로 오페르트 도굴 사건에 가담한 페롱 신부나 병인양요를 촉발시킨 리델도 프랑스인 신부다.[16] 이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시기에도 행했거나 행하려고 한 일이다. 문제는 병자호란을 통해 강화도 농성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 아무리 청나라가 약해졌다고 해도 강화도 앞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질 정도면 조선 내륙에 깊이 들어온 채 조선군을 상당히 박살났다는 것인데 그 정도면 강화도도 못 박살낸다는 보장이 없다.[17] 이 와중에 고종은 "간밤의 꿈에 태조 대왕께서 과인 앞에 나타나시기를, 북적 오랑캐들이 절대 과인의 옥체를 손상시킬 수 없게 지켜준다고 말씀하셨소."라는 말로 신하들을 안심시킨다.[18] 물론 현실적으로 정확히 설명하자면, 안심시켰다보다는 찍어눌렀다에 가깝다. 태조는 조선을 세운 왕이라서 조선 초기부터 반쯤은 신격화 됐는데, 이런 태조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태조의 업적 = 조선 건국'을 부정한다는 소리로 바로 "너 역적!" 시전이 가능했기 때문에, 유죄추정의 원칙이 기본이던 당시 시대에는 이 말을 나오자마자 사대부는 바로 버로우를 탔을 것이다. 거기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모르겠는데 무려 태조 이성계의 후손이요 그로부터 대대로 왕위를 물려받은 집안에서 현재에 왕에 있는 주인공(고종)이니 더더욱 뭐라 하기 어렵다. 당장에 이런 말은 만능이 아니라서 예를 들어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출하며 '예전에 꿈에서 선왕과 선후(현종과 명성왕후)를 뵈었는데 희빈 장씨가 후손도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근데 맞긴 했다. 1대 뒤의 일이지만 근데 봐라, 지금 희빈 장씨가 애도 낳지 않았냐?' 이유를 내세웠다. 아무나 시전할 수 있는 스킬은 아닌 셈.[19] 프랑스는 현재도 가톨릭 국가이지만, 과거에는 교황이 나서서 직접 가톨릭의 수호국이라고 불러줄 정도의 천주교 국가다. 조선이라는 먼 극동에서 가톨릭 인정을 하면 이를 기점으로 가톨릭, 더 나아가 식민지 확장의 교두보가 생기는 것으로 아편전쟁으로 불리해진 극동 따먹기 싸움에서 유리함이 생기면서, 부동항을 찾던 러시아가 극동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는 것은 덤으로 무려 영국과 러시아를 한번에 엿 먹일 기회를 청나라가 전쟁 개시로 방해를 해버린 것. 그리고 이것 때문에 프랑스는 전후에 벌어진 봉천 조약에서 열강들 중에서 가장 가혹하게 청나라를 몰아붙였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협박하면서까지 말이다.[20] 도강은 현대전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보통 강을 끼고 전투가 일어날 경우 상대가 건너오기 전 다리부터 끊어버리거나 적이 도하하다 빠지기를 유도하는 것도 다리가 아닌 강물을 통해서 도강하는 쪽이 건너는 도중에 많은 병력을 상실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21] 작중 묘사로는 고작 1달에서 2달이면 보급품이 소멸될 예정이라고 한다.[22] 이들은 서양 열강들과 태평천국 반군과 맞서서 이긴 적도 있었다.[23] 고종이 병사들이 먹는 것을 먹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하는 수 없이 그 주먹밥을 줬는데 그게 걸려버렸다. 게다가 이걸 끝까지 다 먹었으니. 당연히 보급 담당자들은 끌려가서 비오는 날에 먼지나듯 얻어터졌고 그 덕분에 주먹밥을 비롯한 병사들의 식단 질이 조금이나마 올랐다고.[24] 정난의 변이나 아즈텍-스페인 전쟁 등등 이런 사례는 역사적으로 생각보다 많다. 만일 자신들의 왕이 죽는다면 오히려 복수심에 더 불타서 악다구니를 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장 작품 내에서 이후 벌어진 이 전쟁도 전투에 직접 참전한 군주의 사망으로 전쟁의 흐름이 뒤집혀 역사와는 다르게 흘러가게 됐다.[25] 이런 어이없는 패배는 대역물이기에 가능할 것 같지만 실제로 있다. 바로 오호십육국 시대를 연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비수대전. 비수대전은 전근대에 워낙 많은 병력을 들이밀어서 그런 거 아닐까 의문이 들겠지만, 사실 현대에조차 아군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생기는 병크는 종종 벌어진다. 당장 6.25전쟁 때 동부전선에서도 기껏 잘 싸우던 병력들이 상급제대와 교신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인접 아군부대의 교체를 후퇴로 착각하고 연쇄적으로 철수를 시도해 어이없이 강릉을 뺏긴 사례가 있고, 10여년 전 벌어진 조지아 전쟁에서도 조지아군은 손바닥만한 국토에서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들이 고리 등 주요 거점을 사수중인지 아닌지도 파악을 못해 혼란을 겪었다.[26] 참고로 이때 조대비는 궁녀들과 함께 궁궐 밖으로 대피했다.[27] 이때 청의 봉천 방어 병력은 겨우 6천명 뿐이다.